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양화나루 양화진 절두산 순교 외국인선교사묘원 헐버트 베델

달이선생 2025. 4. 17. 12:36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찾은 곳이다. 언덕진 경사를 바삐 올라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찾았다. 헐버트, 베델..

서세동점의 시대 우리를 지키기 어려운 이때, 우리를 위해 손을 내민 사람들이 있다. 외국인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신의 나라보다 우리로 산 푸른눈의 조선인, 한국인이 바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특히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한국명 헐벗, 흘법[訖法], 할보[轄甫] 1869~1949)

나는 웨스트민스턴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푸른눈의 이방인.. 그는 한국이 무엇이었기에 자신의 고향을 떠나 우리땅에 묻혔나

H. B. 헐버트 1906, 『대한제국멸망사』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1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3쪽.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던 양화(버들꽃)나루는 강변에 갯버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전근대 양화나루는 한강을 건너면 양천에서 김포, 통진, 강화로 이어지던 주요 간선도로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 주목되어 영조 30년(1754)에 한강수로의 경비를 통해 수도를 방어하려고 처음 군진이 설치되었다. 바로 양화진(楊花鎭)이다. 이후 수군의 훈련장이 되었고 특히 흉년에는 백성 진휼의 장소였다. 이러한 역사성을 토대로 현재 군진 옛터 일부를 장대석으로 구획하여 양화진 공원의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중요한 곳은 양화나루 옆에 솟은 20m 높이의 암벽이다. 이름은 잠두봉으로 현재는 절두산으로 알려져 있다. 절두산은 ‘순교자의 목이 베어진 산’이라는 것으로 이는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양화진이 방어기지가 되는 한편,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년 1966년 잠두봉 정상에 병인 순교자를 기리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 세워졌다. 특히 이곳에는 순교 성인 28위의 유골을 모신 순교사적지로 조성되었다.

잠두봉 아래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자리잡고 있다. 1890년 7월 28일 미국 출신 선교사 존 헤론이 최초로 무덤을 쓰게 되었다. 헤론은 고종의 주치의로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의 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렇게 외국인 묘원이 정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앞서 1883년 11월 조영수호통상조약으로 외아문(조선국외무부)에서 외국인묘역을 정식으로 조성하는 조처가 따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가슴 조리며 찾아 헤맨 사람은 헐버트와 베델이다.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이 망하고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사심 없이 나섰던 인물이고 고종이 깊이 신뢰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헐버트는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영어교사로 조선의 인재를 기르고자 본인이 직접 한글로 엮은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더욱이 미국에 건너가서는 조선의 자주적 독립을 염원하며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를 쓰고 이를 알리는데 혼신을 다하였다.

 

"한국인은 그 나라가 중간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성격이 조화됨에 따라서

한국인들은 합리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을 피상적으로 관찰한 탓으로 한국인의 낭비적인 습성이나 안일한 생활 양식이나 소심한 사고 방식만을 본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한 나의 판단이 한국인에게 아부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한국인의 성격을 깊이 깨달아 피상적인 관찰과는 다른 입장에서 한국인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는 합리주의적 기질과 감정이 가장 알맞게 조화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한국인의 이와 같은 조화는 앵글로 색슨족의 그것과 꼭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냉정과 정열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평온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을 수도 있으며 격노할 줄도 안다. 앵글로 색슨 민족이 그토록 강인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의 상이하면서도 모순되지 않는 기질이 융합된 까닭이다."

H. B. 헐버트 1906, 제1편 서설, 『대한제국멸망사』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1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54쪽.

 

책에서는 한국인을 합리적인 이상주의자이며, 냉정과 정열을 갖춘 서양인과 다름없지만 중국과 일본인과 달리 쉬이 친숙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쓰고 있다. 마치 한류를 예감한듯이 말이다.

 "이 책은, 한국이 심한 역경에 빠져 있을 때 종종 악의에 찬 외세에 의해 시달림만 받을 뿐 옳은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한 국가와 민족의 독자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쓰여진 사랑의 열매이다. 그들은 숫적인 면에서 중국에 눌려서 살고 있으며 재치의 면에서 일본에 눌려서 살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상술에 능하지도 못하며 일본인처럼 싸움을 잘하는 민족도 아니다. 기질의 면에서 보면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오히려 앵글로 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에 살고 있는 민족 중에서 가장 상냥하다. 그들의 약점은 어느 곳에나 무지가 연속되어 있다는 점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기회를 선용하면 그들의 생활 조건도 급격히 향상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에 위는 비단옷을 입은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감옥에서 족쇄를 찬 죄수에 이르기까지, 암자를 찾아 입산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들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각계 각층의 친절한 여러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H. B. H New York. 1906"

H. B. 헐버트 1906, 머리말, 『대한제국멸망사』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1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17쪽.

 

헌사

비방(誹謗)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正義)가 점차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거(精氣)가 어둠으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H. B. H

H. B. 헐버트 1906, 『대한제국멸망사』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1 대한제국멸망사』, 집문당, 5쪽.

 

또한 그는 우리 한글을 더 멋진 글로 탈바꿈하는데 기여하였다. 바로 한글학자 주시경과 함께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 점찍기를 도입한 것이다. 이로써 한문체제로 제대로 쓰이지 못한 한글이 크게 개선되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2014년 한글날 금관 문화 훈장이 서훈되었다.

구한말 무너져 가던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삶과 생각을 일제로부터 자유롭게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애쓴 푸른 눈의 청년이 있었다. 바로 베델(Ernest Thomas Bethell, 한국명 배설(裵說), 1872~1909)이다. 넷플릭스의 영향으로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역사드라마가 있는데, 그 작품이 바로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션샤인’이다. 구한말 양반 규수가 신미양요로 미국에 건너간 남자 아이가 어엿한 미군장교로 돌아오고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한다는 상상속 로멘스다. 이러한 드라마적 완성도가 있기까지 그 공은 바로 베델에게 있었다.

 

프레데릭 아서 메킨지(‘제천에서 원주로 넘어가면서 만난 의병들’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1907년 정미의병 양평 지평면 삼산리 전투 당시 지평 의병 인터뷰로 유명한 사진이다. 메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1931)가 묻는다.

 

나는 의병들의 조직을 물어 보았다. 그들은 어떤 조직을 가지고 있을까?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사실상 아무런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의병의 각 부대들은 서로간에 매우 허술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각지에 살고 있는 부호들은 돈을 마련하여 한두 의병대에게 은밀히 제공했으며, 이렇게 하여 자금이 마련되면 그들은 그 돈으로써 모병할 수가 있었다. 그는 자기들이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

무명의병

어느 한 중년의 한국인 신사가 나를 찾아오자 그는 자리를 떴다. 그 신사는 한 관리를 대동하고 왔는데 지위가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이 지평의 의평의 의병 대장임을 곧 알 수가 있었다. (중략)

그가 나에게 온 것은 한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의병들은 무기가 없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당신이 알다시피 그들의 총은 쓸모가 없으며 화약도 이제는 거의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살 수가 없습니다만, 당신은 원하는 곳이라면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우리의 요원으로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 주십시오. 돈은 필요한 대로 요구하십시오. 그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무기를 구할 수만 있다면 5천 달러든 1만 달러든 필요한 대로 드리겠습니다. 다만 무기만 구해 주십시오.

무명의병장

나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없노라고 대답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날, 그들은 밤이 새도록 수선을 떨었다. 전날 밤의 전투에서 도망해온 부상병들은 동료들의 간호를 받았다. 그 다음 날 새벽이 되자 몇 명의 군인이 내게 찾아와서 그들을 치료해 줄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그들을 살펴보았다. 어느 한 사람은 다섯 군데 이상의 총상을 입었지만 아직도 매우 유쾌한 듯이 보였다. 다른 두 사람은 단 한 발의 총알을 맞았지만 오히려 더 중태였다. 나는 외과 의사도 아닌 주제에 그 당시로서는 탄알을 끄집어내기 위해 내 사냥칼로 그들의 상처를 찔러댈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약 가방 속에서 승홍제(昇汞劑, 소독용으로 쓰이는 염화제이수은)를 찾아냈다. 나는 그것을 녹여서 상처가 곪지 않도록 닦아 주었다. 나는 가지고 있던 방부제로 그들의 누더기 옷을 빨았다. 나는 그 깨끗한 누더기로 상처를 매어 주었다.

F. A. 매켄지 1908,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E. P. Dutton & Co., New York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2 대한제국의 비극』, 집문당, 190~191쪽

F. A. 매켄지 1908,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E. P. Dutton & Co., New York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2 대한제국의 비극』, 집문당, 158쪽
F. A. 매켄지 1908,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E. P. Dutton & Co., New York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2 대한제국의 비극』, 집문당, 189쪽

메켄지는 이후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세계에 알린 기자로도 유명하다. 그가 베델과 함께 조선의 의병을 취재하였다. 이렇게 새롭게 조명되는 의병을 알린 사람으로 주일 사업가에서 조선 주재 외신기자로 러일 전쟁 종군기자로 조선인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한국 언론사의 사장이 베델, 한국이름 배설이었다.

F. A. 매켄지 1908,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E. P. Dutton & Co., New York : 역주자 신복룡, 1999, 『한말 외국인 기록 2 대한제국의 비극』, 집문당, 199쪽

 

여기 묘원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묻혀있다.

달젤 벙커(Bunker, Dalzell A, 1853~1932)는 뉴욕 출신 미국인으로 배재학당 3대 교장으로 배재학당생들이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자 이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특히 제자 이승만 대통령을 아꼈다. 이를 계기로 월남 이상재, 이원긍, 안국선 등 양반들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79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별세하였지만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아내 애니 엘러스에 의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원내 유일한 일본인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는 조슈번 출신으로 술취해 죽을 뻔했을 때 한국인으로부터 목숨을 건지고 평생 한국의 고아를 위해 헌신한 기독교인이다. YMCA일본어 교사로 있을 때 월남 이상재 선생으로 교인이 되었다. 신민회 사건으로 조선인 교인이 피체되자 동향 데라우치 총독을 찾아가 이들의 석방을 요청했고 3.1운동으로 월남 선생이 붙잡혀 재판되자 여기에 나서 일제를 강력히 비판한 것이 유명하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손에 성경을 들고 일제의 회개를 부르짖었고 말년에 한국으로 귀국을 희망할 때 한경직 목사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이곳에 잠들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일본인 최초로 문화 훈장을 수여했다.

이밖에도 유명한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렌턴 대부인, 아더 어네스트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성공회 주교 일명 차주교) 등 많은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다.

2011.10.7.

 

공훈전자사료관
달젤 벙커(Bunker, Dalzell A, 1853~1932)

달젤 벙커 부인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1886년 내한하여 1887년 벙커 선교사와 결혼하였고, 그해 정동여학당(현 정신여중고)을 설립하여 2년 동안 초대교장으로 헌신했다.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김에 따라 함께 미감리회로 소속을 옮겼으며, 한국YW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1932년 별세한 남편의 유골을 양화진에 손수 묻었고, 6년 뒤 애니 엘러스 역시 남편 무덤에 함께 묻혔다.

스크렌턴 대부인
묘비 '대한매일신보사장대영국인배설지묘' 옆 '배설묘비문' 장지연 씀
공훈전자사료관
아더 어네스트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성공회 주교 일명 차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