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울진터미널에서 내려 동해안을 따라(7번 국도 동해대로) 강릉 경포대까지 가고 강릉터미널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4박 5일 일정의 자전거 여행이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라 2009년 7월 19일부터 일정을 시작했는지 당초 계획대로 20일부터 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계획과 실제가 달랐던 이유는 자전거 여행 특성상 자전거를 옮기는 방법이 지금은 어렵지만 고속버스로 이동이 가능해서 그 차편 예약이 고려될 요소였고, 더욱이 가장 큰 변수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대현샘이 망극 지한을 당하면서 함께 갈 수 없어 대현샘이 빠지고 병훈샘과 동철, 민협, 학범, 우성이 이렇게 가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함께하는 하는 거라 부담되었다. 경험도 없으니 많은 부분 차병훈 사감샘에게 의지하면서 떠나 여행길이었다. 울진에 내려 바삐 짐을 챙겨 무작정 지도를 펼쳐들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곁의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동해안자전거일주이다. 오래전 일이라 도무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푸른 바다와 동해안이 절경이었다는 것이 기억나고 그렇게 걱정을 했던 자전거 사고가 나서 민협이 다쳤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언덕 아래로 내달리다. 앞 자전거와 거리를 좁히다. 그만 넘어진 것으로 발목이 부러졌는지, 금이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금 다쳤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친구 녀석들이라 다친 민협이를 서로 도우며 일주를 잘 끝냈다. 사고도 마지막 날 있었다는 것이 돌아보니 다행이고 지금은 30대 아저씨들이 된 친구들이니 녀석이란 표현이 어색하다.
대현샘과 병훈샘이 준비하는 여행에 짐짝만 되지 않고 숟가락만 얹어 따라나설 길이었으나 항상 계획은 계획이다. 결국 병훈샘과 책임을 맡아 여행에 나섰으니 내 성격상 엄청난 부담감으로 매사 초조하고 전전긍긍하며 일정을 했다는 것을 꾸깃한 낡은 여행 일정표 등의 종잇장이 말해준다. 예산표를 보니 숙박과 식대가 상당히 저렴하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가격으로 식비를 5천 원 책정했는데 충분했던 기억이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예산이다.
경포대까지 이르는 길에 많은 곳을 들렀다. 석류굴, 죽변항, 정동진, 경포대, 허균생가. 오죽헌, 선교장 등 유명한 곳은 다 점을 찍듯 들려 갔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삼척 공양왕릉이다. 힘겹게 동해안 도로의 경사를 오르던 차에 가파른 구릉 위로 보인 거대한 고분, 표지판을 보니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1345년 출생, 재위 1389~1392)과 두 아들의 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전 정보 없이 갔으나 뜻하지 않게 중요한 유적을 만났다. 물론 절경이나 중요한 볼거리를 주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유적이라는 것에서 좋은 발견이었고, 역사에 중요한 변곡점에서 큰 족적을 남긴 위인의 자취라는 점에서 너무 뜻깊은 인연이었다.
정남진 등이 삼척(三陟)에 이르러 공양군(恭讓君)에게 전지하였다.
"신민(臣民)이 추대하여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이요. 군(君)을 관동(關東)에 가서 있게 하고, 그 나머지 동성(同姓)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生業)을 보안(保安)하게 하였는데, 지금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군(君)과 친속(親屬)의 명운(命運)을 장님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쳤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죄(伏罪)하였는데, 군(君)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러,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이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으되, 여러 날 동안 굳이 다투[固爭]고,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또 글을 올려 간(諫)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군(君)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
마침내 그를 교살(絞殺)하고 그 두 아들까지 교살하였다.(鄭南晋等至三陟, 傳旨於恭讓君曰:
臣民推戴, 以予爲君, 實惟天數。 令君就居關東, 其餘同姓, 各歸便處, 保安生業。 今東萊縣令金可行、鹽場官朴仲質等欲圖不軌, 以君及親屬之命, 卜於盲人李興茂, 事覺伏罪。 君雖不知, 事至如此, 臺諫法官, 連章上請, 至于十二次, 累日固爭, 大小臣僚又上書爭之, 予不獲已, 勉從其請, 君其知悉。
遂絞之, 及其二子。)
태조실록5권, 태조 3년 4월 17일 병술 3번째기사 1394년
1394년 3월 14일 강원도 간성으로 유배되었던 공왕왕과 두 아들이 삼척으로 이배되고 한 달 만에 죽임을 당했다. 조선이 개국하고 아직 지방까지 그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유배된 공양왕이 그 일대에서 '간성왕'으로 불리며 지역민들의 추앙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데, 결국 이런 사단이 일어났던 것이다.
보통 이렇게 강한 처분이 있으면, 이후 지역민의 위무 차원에서 민심을 다독이고자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를 하게 되는데, 태조가 물러나고 그 아들 태종에 의해서였다.
고려(高麗)의 끝 임금 공양군(恭讓君)을 봉하여 공양왕(恭讓王)으로 삼고, 사신을 보내어 능(陵) 아래에 치제(致祭)하였으니, 예조의 계문(啓聞)을 따른 것이었다.(甲子/封高麗末君恭讓君爲恭讓王, 遣使致祭于陵下, 從禮曹之啓也)
태종실록32권, 태종 16년 8월 5일 갑자 1번째기사 1416년
공양왕 왕요, 왕세자 정성군 왕정석, 무명 아들, 시녀 이렇게 총 4기의 무덤이 전해진다. 문제는 공양왕 삼부자가 이곳 삼척에서 교살을 당하고 묻힌 것은 맞으나 공양왕이 왕으로 추봉 되어 이장된 릉이 경기도 고양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 태종이 명한 치제와 이후 왕릉 수묘까지 이루어진 곳은 고양의 왕릉이었다. 다행히 이곳도 두 아들의 묘는 확실하고 공양왕이 실제 이장이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였지만 현종 대 삼척부사 허목 이래로 지방관들이 찾아 예우를 다하였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급한 경사로의 계단을 올라 참배한 후 둘러보니 릉의 축조는 축대로 기단을 쌓고 무덤을 둘레돌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 왕릉의 특징이 보인다. 둘레돌 말고 비석 등 특별한 왕릉 석물이 치장되지 않았지만 이 지역 고려 유민들이 정성을 다해 모신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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