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를 경유한 이탈리아 남부 여행은 폼페이와 소렌토였다. 패키지다. 테르미니역 옆 주차장에서 썩 좋은 버스는 아니나 전세 버스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지도나 안내가 잘 되어있지 않아 두리번 거리니 집시로 보이는 한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주자창을 찾는다고 하니 따라오라고 한다. 왠 친절인가 하다 쫓는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곳이 아니다. 조금 의아해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돈을 달란다. 뭐지 생각했으나 1유로를 꺼내 주니 10유로를 내야 한다고 한다. 안된다고 몇번의 실갱이를 하는데 주변으로 집시와 관련된 남녀노유가 몰려든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봉변을 당할 거 같은 느낌에 그냥 10유로를 주었다. 근처에 이탈리아 경찰이 있었지만 이런 일을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인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옛날 서울가면 눈 뜨고 코 베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탈리아가 그런 곳이다. 후에 들은 이야긴데 만약 더 실갱이 했다면 가방 빼앗기고 봉변 당했을 거라 한다.(2015.3.17~ )
이탈리아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로마에서 한참을 내려갔다. 바다가 보이고 언덕에 폼페이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순식간에 덥쳐 사라진 곳이다. 당대 로마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곳, 폼페이 그 첫번째는 수많은 열주와 회랑으로 연결된 곳, 언뜻보면 신전인가 생각도 드는 원형 극장이다. 무대서 가이드가 설명하니 객석에서도 잘 들린다. 극장은 과학이다. 원형극장
역시 로마는 길이다. 폼페이 원형극장 위로 잘 닦인 길을 걷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더니 큰 돌들을 가지런히 깔았다. 바닥에 일정하게 평행으로 홈이 파인 2개의 긴 줄을 볼 수 있다. 옛날 마차가 다닌 흔적이다. 길가 마차 소리가 상당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로마의 집은 길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정으로 된 사각의 가옥으로 번다한 길가와 달리 조용하고 아늑했다고 한다. 어느 집 입구 바닥에 모자이크로 사나운 개가 그려져 있다. '개조심'이다.
중심부에 제우스 신전을 주변으로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한켠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그 화산재로 숨져갔던 로마인과 반려견 등의 유해 모습을 본뜬 석상이 즐비하다. 뜨거운 화산재에 몸부림쳤던 고통이 생생하다.
폼페이의 대체적인 인상은 건축이며 다양한 시설들이 잘 보존되어 사람이 살아도 될 것처럼 쾌적한 시가지 모습이다. 2천년 전 고대의 생활 공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한 폼페이 그곳에 갔다.
바닷가 해안 절벽으로 무수히 많은 주택들이 보인다. 소렌토다. 레몬 산지답게 레몬과 관련된 특산품과 작은 기념품을 파는 곳이 넘쳐난다. 레몬술병이 이탈리아 국토 모양이다. 술맛은 좋지 않다고 하는데 기념으로 하나 샀다. 호객행위도 많고 길도 번잡하지만 기분나쁜 인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혹시나 다빈치공항에서 테르미니역에서 겪은 불쾌함이 계속 따라 다닌다. 그곳은 이탈리아 첫 인상을 망쳐 놓은 곳이다.
다음날 테르미니역에서 피렌체로 자유여행을 나섰다. 기차를 탔다. 버스보다 기차는 상당히 쾌적하고 안정적이다. 좌석에 않은 남성이 작은 잔의 에스프레소를 꺼내 한 모금 하고 초컬릿과 쿠키를 부스럭 되며 먹는다. 주위를 둘러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생소하다. 그렇게 달려 피렌체에 도착했다.
피렌체,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밀라노, 베네치아 등도 유명하지만 일정상 피렌체만 들렸다. 피렌체가 유명한 것은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문 때문이다. 대 은행가였던 코시모 메디치가 가문을 일구고 그의 손자 로렌초가 반석에 올린 집안이다. 덕분에 귀족은 아니었지만 시민들의 신망을 얻어 피렌체의 국부가 되었고 교황, 프랑스 왕비 등을 배출하는 등 메디치가의 영광이 있었다.
이러한 영광의 장소 메디치가의 저택을 찾았다. 시민에게 열린 곳이었지만 관광객에게는 열리지 않는 곳이다. 경내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다만 문밖 건물 벽으로 돌로된 받침대가 둘러져 있는데 알고 보니 시민들이 쉬어 가라고 만든 의자였다. 메디치가의 의자는 중요한 상징이다. 은행의 영문 BANK가 의자 벤치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메디치가가 은행업을 할 때 시장에서 긴 의자를 놓고 한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중세의 사람이었지만 코시모의 메디치가는 고대 로마인이었다. 공화정을 바탕으로한 시민민주주의와 실용성을 겸비한 사람들이지 않았을까
실제로도 코시모에 대해서 로렌초의 가신이었던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 밸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는 대단히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중후하고 예의바르고 덕망이 넘치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초년은 고통과 유배와 신변 위협 속에서 지냈으나 지칠 줄 모르는 관대한 성향 탓에 모든 정적을 누르고 백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거부이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은 검소하고 소탈했다. 당대에 그만큼 국정에 통달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그렇게 변화무쌍한 도시에서 그는 30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 정부 개혁 담론》(Discorso sopra il riformare lo stato di Firenze) 中
메디치가의 상징적인 작품이 있다. 베노초 고촐리의 작품 '동방박사의 행렬'이다. 시민공화정을 상징하면서 그 정통성을 메디치가 보좌하고 이끈다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따라서 그림에서 보면 메디치의 가장 겸손하고 숨은 실력자 코시모가 조용히 뒤를 따르고 피렌체를 영광으로 이끄는 것이 다름 아닌 로렌초이다. 백마를 탄 사람이다.
토스카나 대공을 역임하고 프랑스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를 배출한 메디치가 코시모의 적손이 끊기고 토스카나 후손도 끊기고 메디치가의 영화도 한순간이었다. 카트린느는 영화 '여왕 마고'로 유명한 사람이며, 프랑스 발루아왕가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이다.
냉철한 눈으로 상대방을 살피고 냉철한 귀로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냉 철한 감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관하고 냉철한 마음으로 이치를 생각해 야 한다.
(冷眼觀人 冷耳廳語 冷情當感 冷心思理)
홍자성, 김성중 옮김, 1999, 채근담, 홍익출판사.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이야기다. 채근담은 나물을 먹을 수 있으면 능히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로 채근담처럼 살았던 코시모의 성품이 이러했다. 또한
내가 남에게 베푼 공은 마음에 새겨서는 안 되지만, 내가 남에게 한 잘 못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이 내게 베풀어 준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되지만, 남이 내게 원한을 맺게 한 일은 잊어야 한다.
(我有功於人 不可念 而過則不可不念 人有恩於我 不可忘 而怨則不可不忘.)
위의 책
코시모의 삶과 이후 로렌초의 삶도 이러했다. 때문에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가로 발돋움 했고 이탈리아를 넘어 인류 역사에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는 큰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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