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만주행기 하얼빈 731부대, 김좌진, 상경용천부

달이선생 2025. 3. 7. 13:45

만주행기

하얼빈, 731부대-동북호림원(백두산 호랑이 동물원)-성소피아성당-목단강 8녀투강비(동북항일유격대)-조선민족예술관(안중근기념관)-해림, 김좌진 장군 방앗간 유허지-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상경용천부발해기와

2009년 6월 1~3일.

오래전 이야기다. 조상의 숨결을 만나러 간다는 설레임에 밤잠을 설쳤고 비행기 창문 햇빛에 눈을 번뜩이며 차속에서도 졸음을 참고 차창 밖 풍경에 눈길을 주었었다. 반도에서 살며, 섬나라의 세계를 경험하는 우리가 대륙이었으며, 대륙을 넘나들며 조상들이 살아가 반도의 북방.. 만주를 갔다.

한반도 북방지역을 만주라고 부른다. 만주는 만주지역을 무대로 성장했던 여진족이 자신들의 민족이름을 만주로 칭하면서 지역도 만주로 하였다. 만주에 기원에 대해서 만주 황족인 애신각라에 따라 한민족, 특히 신라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밣혔다. 사실 만주 일대에서 일어난 많은 민족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나라와 민족에 의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나라를 이뤄 중국 중원까지 도모하기도 했다.

만주의 중심도시 중 흑룡강성의 하얼빈을 시작으로 발해진의 상경용천부까지 다녀왔었다. 하얼빈은 송화강이 흐르는 곳으로 오래 전 우리 고대 국가의 시원인 부여의 중심이었다. 부여가 사라지고 말갈(흑수), 여진(해서), 만주로 불린 이들이 옮겨 다니며 살았고 대항해시대 러시아모피원정대의 도착으로 청나라와 맞대어 러시아의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곳이다. 거리 곳곳의 건축물이 러시아풍이며, 대표적인 건축물이 성소피아성당이다.

이곳은 반도를 넘어 대륙의 야욕을 가진 일제 침략의 어두운 그늘이 존재한다. 만주 관동군 소속 731부대의 흔적이다. 평지에 조성된 곳이나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생체실험을 이유로 비명횡사를 했던지 곳곳에 낡고 무너진 건물과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가 딱이다. 기가 약한 사람들은 기가 누리고 무섭고 기분이 안 좋은 곳이 바로 731부대 터이다.

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인류의 참혹한 전쟁 범죄로 기억되지만 단죄 되지 못했다. 미소 냉전의 시기 미국의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세균전을 비롯한 막대한 실험자료가 미국을 넘겨졌고 전후 미국은 물론 일본이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파스, 연고, 약 등 이상하리만큼 잘 듣는다. 이상할 일이 아니다. 다 인체실험의 결과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선 이들이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긴 곳이 바로 하얼빈 일대이다. 송화가 지류 목단강에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항일유격대의 흔적인 8녀투강비, 보이기는 비보다는 석상이다. 주목되는 것은 한복을 입은 조선인 유격대원이다. 만주이자 동북으로 불린 이곳은 만주, 중국, 조선인 할 거 없이 일제에 맞선 피와 눈물이 흘렀던 곳이다.

이런 이곳에 가장 상징적인 사건과 기억이 있다면 바로 일본 제국주의의 수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이다. 하얼빈역에서 러시아제국군의 사열을 받던 침략자 이토 가슴에 총탄을 박아 넣은 애국자이자, 세계평화주의자인 안중근은 하얼빈 철도역사와 청초비 기념비,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조선민족예술관에서 안중근 기념관을 마련하여 알렸었다.

https://blog.naver.com/leelove97/223708458362

 

하얼빈 안중근

위국헌신군인본분 (安重根義士 遺墨 -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

blog.naver.com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정처없이 떠돌던 만주, 백두산 산간 청산리와 봉오동, 두만강을 넘나 들며 일제 군대와 맞서 싸운 독립군하면 김좌진 장군이 떠오른다. 잠시 논란이 되었으나 윤석렬 정권이 흔들리면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홍범도 장군도 중요하다. 하얼빈 아래 무단장시 해림(하이린)은 청산리를 떠난 장군이 말년을 방앗간을 하며 독립운동 하던 곳이다. 후손을 자처하는 김두한의 여식 김을동과 아들 송일국 배우의 노력에 의해 생가와 유허가 잘 보존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의 총에 절명한 장군의 한이 서린 곳이다.

지금도 지명에서 발해진으로 불리는 곳, 이곳이 상경용천부가 있던 곳이다. 상경은 발해의 수도였다. 대체적으로 이 북만주지역은 하얼빈이라는 도시를 벗어나면 이내 드넓은 초지가 이루어지는 평원이 펼쳐진다. 김제지역의 너른 평야, 가까이는 평택평야를 본 기억이 있다면 이곳의 지대는 끝도 보이지 않는 평지, 평원이다.

그 평원 한 곳에 해림이 있었고 오랜세월을 이겨낸 석축이 보이는데 반듯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바로 상경용천부의 흔적이다. 조금만 발아래 눈썰미가 있다면 발해의 토기편, 말갈의 토기편, 발해의 기와편을 쉽게 볼 수 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독자적인 문화도 발달하는데 그 중 발해 건축물에 광범위하게 쓰인 재료가 지붕에 올린 기와이고 이 기와의 특징이 압날문이라고 하여 손가락 무늬이다. 손가락을 기와 끝단에 누른 모양이다. 풀숲 여기저기 뒹구는 기와편을 보며 옛 조상의 숨결을 느낀다.

대씨의 발해는 해동성국이었고 통일신라와 남북을 이루며 우리 민족이 한반도와 만주를 아울렀던 마지막 민족 국가이다. 조선 후기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 선생이 분명하게 이야기하였다. 말갈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별종 국가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망각하는 것이 있다.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이다. 강단의 많은 학자들은 조선(이씨)이래 단일민족을 깨라고 하면서 고대사에 가면 민족 구성에 대해 조심스럽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조선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다민족 국가였다. 따라서 발해는 중국, 러시아, 일본의 주장처럼 한민족 국가가 아니라는 논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 그런 논리라면 중국은, 러시아는 또 일본은 누구인가?

발해는 우리 민족 국가가 맞다. 일본에 보낸 발해 국왕의 국서에서 고려(고구려의 5세기 이후 국명 지칭) 왕이었고 일본도 고려왕으로 대우하였다. 중국도 고려의 후신으로 보았다. 민족구성 면에서 말갈족이 많았다는데 말갈족이 누구인가? 고조선이래 북방지역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한 이들이다. 이러한 문화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북방지역 곳곳에 농경민족으로서 유산을 이어오는 것이 고구려의 독특한 창고 부경이다. 2층 형식의 원두막 같은 이 창고가 만주지역 만주족과 만주족의 농경을 잇는 중국 한족 마을에 즐비하다. 고구려인들, 발해인들은 없어졌지만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DNA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알려진 거와 같이 만주족은 단순 유목민족이 아니라 반농반목의 민족이다. 그 반농, 즉 농경은 우리 조상들의 유산을 지금껏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그들이다. 그들이 그곳의 주인일 수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