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만리장성과 자금성, 중국국가박물관

달이선생 2024. 6. 5. 18:00

 

2024년 5월 20일부터 30일까지

북간도 조선족연변자치주 연길시와 두만강 북중 접경지 도문(남양), 한인 개척지인 용정시,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우리 역사 고구려 도읍 국내성인 집안시(만포시) 그리고 비류수가 흐르는 통화,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고려와 조선 유민의 땅 심양까지 1천 km 오늘날 중국의 중심 북경으로 7백 km 상해까지 1천2백 km까지 일명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현장을 다녀왔다. 장장 3천 km의 '독립 로드'였다.

 

'중국에서는 10리를 가면 풍경이 바뀌고 100리를 가면 말이 바뀐다."

드넓은 중국, 장성 너머는 중국이 아니다. 중국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지금도 장성을 확대하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동으로는 우리나라 평양성까지 확장할 기세다. 만리장성은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우리나라 고구려와 고려 때 천리장성이 있듯이 중국에는 그보다 훨씬 크고 긴 만리장성이 있다는 인식이나 만리장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대표적 조망대는 예부터 사신들이 본 북경 인근 팔달령 구간이다. 진시황제 때 각 제국이 쌓은 장성을 연결한 것이 시초로 지금의 모습은 명나라 때 완비된 모습이다. 이후에는 청왕조가 몽골과 국혼을 맺어 동맹 관계에 있었기에 방어적 관방 시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국 7중이었던 연나라의 수도 계 (薊) 라 연경이라고 불렸고 원나라는 그들의 수도로 대도라 불렀던 곳, 명나라의 홍무제(주원장)가 원을 피해 남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을 다시 아들 영락제(주체)가 천도하여 북경이라고 했고 청나라가 들어서며 다시 연경이 된 곳이 북경이다. 북경은 중국 정치의 중심지로 중국 1등지라는 자부심이 있는 곳이다. 바로 이를 상징하는 곳이 명청대의 자금성이고 천안문과 광장이다.

영락제는 경항대운하를 완공하여 물산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하자 남북으로 천, 동서로 팔백 미터, 성곽 높이 십, 너비 칠 점 오 미터, 해자 너비 오십이 미터, 축조 기간 약 십사 년 장인 약 십만, 연인원 백만 명을 무보수로 멀리 안남인도 동원하는 등 15년 만인 1421년 980개 전각, 9천여 방의 자금성을 완공한다.

웅장한 규모의 자금성은 크게 외조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으로 이어진 삼전이 공식적 내외치 공간이고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어화원으로 내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의 기초와 월대는 200톤이 넘는 큰 대리석을 50킬로가 넘는 곳에서 겨울에 바닥을 얼려 썰매로 옮겼고 바닥 등 주요 시설은 벽돌과 전돌로 지어졌다. 특히 바닥은 전돌을 촘촘히 이어붙이고 있어 화강암이나 대리석에 의한 빛반사와 피로도를 줄여주는 생각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들 지붕은 노란 유리와를 올려 황제의 상징과 권위를 드러낸다.

우리 궁궐에서는 이를 보완하고자 박석을 시공하였다.(현재 경복궁 근정전 앞 뜰) 자금성과 달리 북경 고저택이나 상해 등지에서 보이는 저택의 지붕은 용마루가 탈락되고 하나로 이어진 지붕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지붕을 두고 왕이 기거하게 되니 용이 둘이 될 수 없어 생겼다는 속설이 마치 사실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건축기법은 청나라 중흥기에 곳곳에 시도된 발전된 지붕 건축술로 19세기 말 새롭게 지어진 경복궁에 적용된 것이고 그밖에 궁궐에 사용된 것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면서 이루어진 조선 후기 궁궐 건축의 특징이다. 모두가 청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인 흔적이겠다.

중국 5천 년 역사를 다 담기에는 너무도 작고 하루에 둘러보기에는 너무도 넓은 곳, 이곳이 중국국가박물관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지배층의 가장 신성한 보물 옥, 자기는 중국에서 발명해서 전 세계로 그 기술을 꽃피웠으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 우리나라, 중국과 교류한 유목민족들의 다양한 변발, 성리학보다 인간 주체에 주목한 양명학을 주창한 왕수인 초상화 등 수많은 유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눈으로 담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