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 집안

달이선생 2024. 6. 5. 12:15

 

2024년 5월 20일부터 30일까지

북간도 조선족연변자치주 연길시와 두만강 북중 접경지 도문(남양), 한인 개척지인 용정시,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우리 역사 고구려 도읍 국내성인 집안시(만포시) 그리고 비류수가 흐르는 통화,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고려와 조선 유민의 땅 심양까지 1천 km 오늘날 중국의 중심 북경으로 7백 km 상해까지 1천2백 km까지 일명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현장을 다녀왔다. 장장 3천 km의 '독립 로드'였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에 통화에 들어왔다. 거리는 온통 버드나무 일색이다. 버드나무는 만주족의 민족 시원 신화와 관련이 깊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 역시 관계가 있다. 이 지역은 만주족의 분포도가 높은 곳이다.

서간도 통화는 압록강 넘어 고구려의 고토이자 중심지인 국내성 지역이다. 통화를 가로지르는 압록강 지류 비류수는 주몽이 홀본(졸본)에서 나라를 세우고자 자라와 물고기의 도움으로 건넌 곳이고 고구려 7백 년의 터전으로 곳곳에 고구려의 영혼이 잠든 돌무지무덤이 끝이 없다. 게다가 우리의 성곽문화의 기본이 되는 고구려 성지인 국내성, 환도산성 등이 남아 고구려의 옛이야기를 전한다. 광개토대왕비 내부 촬영 불가는 10년이 지나 왔는데도 여전하다. 그러나 주변 유적은 환경이 잘 정비되고 광개토대왕도 나름 호태왕으로 존칭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중심으로 태왕릉(太王陵)과 장군총이 근거리에 위치하며 이들 고분은 왕릉급이고 여기에 묻힌 피장자가 누군인지는 중요하다. 이 문제는 현재도 미래에도 사실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소수림왕 혹은 고국원왕(광개토왕 조부)이나 고국양왕(광개토왕 부)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은 현재 중국의 안내판에는 광개토대왕릉으로 소개하고 있다. 곁으로 오회분 고분(중국은 우산귀족묘지라 함)으로 알려진 굴식돌방무덤(벽화무덤)이 지척이다. 여기서 1.5 km 떨어진 곳에 장군총(우산하 1호분)이 있고 장수왕릉으로 부르며 왕릉으로서 예우가 대단하다.

사실 광개토대왕릉비의 위치로 볼 때 장군총은 장수왕릉이 아닌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된다. 특히 현실(무덤방)의 방향이 대체로 남향이고 이에 따라 능원의 입구를 보통 남쪽으로 둔다고 가정할 때,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방향이 장군총의 입구로 적합하다. 그리고 현실 방향이 능의 전면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증거는 배총 1호분이 현실 방향과 정반대로 장군총 뒤에 위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배총을 두고 조선족 가이드는 후궁의 묘니, 순장의 흔적이니 하는데, 장군총의 위상으로 볼 때, 단순히 후궁의 묘로 판단하기는 무리가 있다. 순장 또한 이 단계의 돌무지무덤에서는 생각하기가 어렵기에 그냥 흘려도 무방하다.(장군총 배총은 총 5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왕릉 역시 상부에서 현실 방향을 보면 광개토대왕릉비와는 정반대 방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 전통 공간 구성에 있어서 주 공간에 대해서 비껴 입구와 통행로를 마련하는 것으로 볼 때, 그럴 수도 있으나 비를 등지고 있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측면에서 위치하면 모르겠지만 아울러 능의 주인을 알려주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릉이 너무 가깝다. 능의 거대한 규모를 생각할 때 능 앞에 제사시설의 위치 등 능원 공간 구성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보통의 시설들의 위치와 구성을 볼 때 입구와 본릉 사이가 매우 협소하므로 이 비가 태왕릉의 비라고 단정하여 보기 어렵다. 태왕릉보다 규모가 작은 조선왕조의 능원에서도 본릉과 정자각(제사), 재실과 입구가 상당히 떨어져 능의 위상과 위엄을 보이고 있는데 하물며 고대의 전제왕권을 생각할 때 이보다 더했으면 더하지 덜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조선왕릉은 일정 규격과 제도가 마련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완전하게 양자를 비교할 순 없지만 통일신라 경주의 왕릉들을 생각해 보아도 이는 타당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장군총 옆 중국에서 붙인 ‘장수왕릉 동반 1호 무덤’ 즉 장군총 배총 1호분의 경우 장군총의 축소본으로도 손색이 없다. 따라서 그 위치와 형식을 볼 때, 이는 아버지 위상에 맞먹는 장수왕릉보단 격이 그보다 아래인 장수왕(長壽王, 393~491) 제위기에 죽은 왕위 계승자인 아들 조다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장수왕에서 손자 문자명왕(文咨明王, ?~519)으로 왕위가 이어지면서 손자의 정통성을 생각할 때,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412)의 손자이자 장수왕의 아들, 그리고 문자명왕의 아버지인 왕태자 조다(助多, 70세 전후로 사망 추정)가 광개토대왕릉에 함께 묻힘으로써 아들의 왕위 정통성은 그 누가 뭐래도 차고 넘친다. 물론 배총이 5기나 더 있었다고 하니 완전히 단정할 순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수왕릉이 국내성이 있다고 가정하기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장수왕은 제위의 이른 시기인 427년 평양 천도를 단행한다. 그리고 그 말년에 해당하는 475년에는 한성 백제를 공략하는데 이는 평양 천도로 시작한 고구려 남진과 고구려 천하를 구축한 것을 늘그막에 이룬 숙원이란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자신이 시작하여 이룬 대업으로 볼 때, 장수왕이 평양을 버리고 그의 영적 세계를 국내성 시기의 대단한 군주인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같이 능원을 조성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리라고 본다. 장수왕 본인도 아버지 못지않은데 그 후광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후광에 장수왕 자신이 가려진다. 이렇듯 장수왕은 사나 죽으나 오로지 평양을 근거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장수왕 자신과 자신의 손자를 이어주는 아들 태자 조다의 무덤을 써서 아버지 광개토대왕릉을 지키고 국내성에 정통을 가지는 한편, 평양성을 중심으로 국내성을 아우르는 장수왕의 입지에서 가장 합리적인 능원 설치였을 것이다.

이는 국내성 일대에 발견되는 돌무지무덤의 발전 단계로 보아도 단순한 돌무지에서 계단식으로 정형화되면서 가장 웅장한 모습이 이 장군총이듯, 그리고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것을 볼 때, 장군총은 장수왕이 아니라 광개토대왕릉이다. 그리고 고구려 발전 단계에서 보아도 국내성에서 최고로 존숭되어져야 할 사람은 광개토대왕이듯 장수왕은 일생의 최대 업적인 평양 천도의 주인공으로 그가 있을 곳은 아버지의 후광이 넘치는 국내성이 아니라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의 천하를 만들고 이를 실현한 평양성에 있어야 한다. 평양은 장수왕 자체이다.

장군총을 나와 버스를 타고 환도산성으로 향한다. 산성 아래로 이어진 길 곳곳에는 무수히 많은 돌무지무덤이 산재한다. 보여지는 무덤만으로도 경주에서 보는 그것보다도 더 많다. 고구려의 지난 역사를 생각할 때, 당연한 모습인 것이다. 별처럼 흩어져 촘촘히 박힌 듯한 돌무지무덤, 집안을 가면 산성하고분군 등 이 모습이 장관이고 선하다.

고구려 산성 건축을 잘 보여주는 포곡식의 환도산성이 잘 정비되어 있다. 환도산성 내 경작지에는 기와와 토기 편이 즐비하다. 그리고 우리 성곽의 특징인 치(성벽에 돌출되어 방어와 공격에 용이하도록 만든 구조)가 잘 복원되었다. 중원뿐 아닌 여느 민족과도 구분되는 우리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고구려는 우리이다.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은 왜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유산이다. 예전 성곽에 쓰인 돌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정신없던 것이 지금은 나름 잘 정리하여 국내성 성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환도산성과 달리 원형에 가까운 복원보다는 돌들을 정형하게만 쌓고 단정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 건축 부재로 쓰이는 등 국내성 성곽은 이미 엄청난 파괴가 이루어진 성곽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고구려 성곽의 특징이 있건 없건 간에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들에게 사실은

이곳 삼원보에서는 나라를 잃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6형제와 독립기지를 일군 이회영 선생의 혼이 서린 곳이다.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지고 무관학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희망 없는 싸움에 풍찬노숙으로 지쳐갈 때도 우리의 독립지사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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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9일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에 갔다. 현재의 집안(지안)시이다. 중국 압록강변의 도시 집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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