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부터 30일까지
북간도 조선족연변자치주 연길시와 두만강 북중 접경지 도문(남양), 한인 개척지인 용정시,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우리 역사 고구려 도읍 국내성인 집안시(만포시) 그리고 비류수가 흐르는 통화,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고려와 조선 유민의 땅 심양까지 1천 km 오늘날 중국의 중심 북경으로 7백 km 상해까지 1천2백 km까지 일명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현장을 다녀왔다. 장장 3천 km의 '독립 로드'였다.
간도는 강 가운데 떠있는 하중도를 말하는 것으로 청의 봉금에 따라 비워졌던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땅을 우리 한민족이 정착하고 개척한 곳을 이르는 지명이다. 따라서 동쪽에 치우친 해삼위라 불린 연해주는 동간도, 압록강 너머는 서간도, 두만강 건너인 연길은 북간도라고 대체로 이해되었다.
오래전 콩이 심거졌고 옥저 사람들이 추운 날씨를 이기고자 온돌을 만들었다. 얼어붙은 두만강은 건너기 쉬워 여진족이 무리들이 교역을 위해 넘었고 약탈을 위해 넘은 곳이다. 이 길을 막아선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과 녹둔도의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전하는 곳이다. 숙신, 말갈, 여진, 만주족의 땅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살고 이주하여 조청 간 국경분쟁을 야기한 곳은 북간도이다. 이러한 북간도의 실효적 지배를 말해주는 것이 용정시에 위치한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이다. 이곳은 구한말 초대이자 마지막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끝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일제로 넘어가고 일제에 의해 간도 지역 관할 목적으로 새워진 한민족 탄압 기관은 물론 일제의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있어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말은 영사관이나 영사사무가 주된 것보다는 지하에 위치한 취조와 고문, 감옥으로 이뤄진 시설을 보듯 지역 첩보와 탄압 등 정보기관적 성격이 강한 곳이다. 지금은 ‘일본침략죄증관’이라는 이름으로 간도에서 알제가 자행한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우리가 북간도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한 대일항전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독립기념관 같은 곳이다. 느낌이나 분위기는 제암리 순국기념관이 떠오른다.
'역사를 거울삼아 경종을 울린다.(歷史爲鑑 警鐘長鳴)'
따라서 간도 최초 3.1만세운동인 3.13만세시위와 그 희생자를 기린 3.13의사릉을 소개하고 우리에게는 생소한 철혈광복단의 일제 15만 원 탈취 사건을 알리는 한편, 홍범도, 최진동 장군의 봉오동,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장군 등 청산리대첩과 같은 독립군 대전승 이후 한인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했던 간도 학살의 참혹함과 영사관 지하에서 끊임없이 자행된 일제 만행과 동조자 밀정들의 반민족적 행위들을 이해하기 쉽게 전시하고 있다.
일제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대륙정책을 통해 침략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조선과 청의 국경분쟁이 일단락되지 않은 상태(숙종 백두산정계비)에서 을사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간도관리사(1902, 초대 이범윤)가 파견되었던 간도로 일제는 1907년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다. 또한 1909년 청일간 ‘간도협약’을 체결한 이후 일제는 불평등한 ‘도문강중한계무조항’을 체결하고 11월 2일 용정에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과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일반적인 영사관은 재외국민에 대한 보호와 외교 행정을 보는 기관이지만 일제는 만주(동북 3성)에 대한 침략적 야욕을 실행하는 군정보 및 침략 기관으로 활용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일제의 ‘경신년대토벌’인 ‘간도참변(경신년대참안)’이 대표적이고 이러한 일제에 의한 피해가 1937년 12월 영사관이 철수할 때까지 무려 2만여 명이 넘는 피해자와 독립지사들의 투옥과 순국이 발생하였다. 특히 영사관 지하 고문실에서 살해당한 사람만도 4천이 넘고 이후 청진감옥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애국지사만도 1천이 넘었으며, 일제 밀정의 양산과 활약도 이곳을 통해 암암리 이루어져 이곳 영사관이야말로 일제 침략의 교두보로서 제국주의의 반인륜적 범죄에 온상이었다.
도문에 이르기까지 장춘, 훈춘 등 익히 들어본 한글지명(도로표지판)이 친숙하다. 산지가 우거진 이곳은 독립운동을 한 투쟁지이다. 항일의병, 항일 독립군, 항일 빨치산 등 곳곳은 우리네 청춘들이 흘린 땀과 피가 서린 민족독립투쟁의 산실이다.
두만강변 조그만 도시 도문은 민족분단이 낳은 관광지다. 중국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곳은 못되나 한국관광객으로 인해 관광화된 곳이다. 사실 도문은 광광지로 의미가 없다. 단지 우리가 우리의 반쪽을 제 3자의 공간에서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곳이다. 사람이 떠난 북녘이나 남녘인 남양은 푸르지만 빛바랜 푸름이 짙고 기무자 초상만 덩그러니 떠있는 공간(남양역), 그곳이 도문이다.
강폭이 좁아 닿을 듯 말 듯 한 북한 남양이 보이고 그리로 이어진 북중 다리는 건널 수 있는 곳이나 건너지 못하는 민족분단의 비극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우리에게 의미가 큰 곳이다. 한때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할 때 탈북민이 넘치고 꽃제비로 불린 북한 아동들이 강물이 얼면 쉽게 도강했을 정도로 주요 탈출로로 북중 경계로 무역이 번성한 도시로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 남양시는 선전 위장 주택과 역사만 남기고 주민 전원을 소개하여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 덕에 북한 산야가 경지로 땔감 처로 민둥산인 거에 반해 녹음이 우거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계획적인 산림사업이나 조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여전히 중국 쪽 산림이 우거진 풍경과 대비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blog.naver.com/leelove97/22347580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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