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상해 임시정부, 루쉰공원, 매원, 매헌, 예원, 상해시역사박물관

달이선생 2024. 6. 6. 17:30

2024년 5월 20일부터 30일까지

북간도 조선족연변자치주 연길시와 두만강 북중 접경지 도문(남양), 한인 개척지인 용정시,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우리 역사 고구려 도읍 국내성인 집안시(만포시) 그리고 비류수가 흐르는 통화,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고려와 조선 유민의 땅 심양까지 1천 km 오늘날 중국의 중심 북경으로 7백 km 상해까지 1천2백 km까지 일명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현장을 다녀왔다. 장장 3천 km의 '독립 로드'였다.

 

상해는 친숙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위치했던 곳이고, 백범 김구를 통해 매헌 윤봉길이 홍구공원(현재 루쉰공원)에서 상해사변(1932)에 승리한 일본이 전승 및 덴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를 열자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육군대장이 폭사하고 일제 패망(1945) 항복 조인으로 미주리호에 다리를 절며 올라서 서명했던 시게미츠 마모루(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에게 상해를 입혔던 대한 청년 의기가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인애국단(김구)의 활동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을 움직였고, 그로부터 우리나라 임시정부는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결국, 우리는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1940)'을 창설하였고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연합군에 참가하여 태평양전쟁에 oss 공작 등 참전하였다. 이 모두가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으로 한국의 독립, '카이로 선언(1943)'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쾌거였으며 이로부터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윤봉길 지사의 성공은 한 번이었으나 그 성공이 있기까지 이봉창 지사의 피가 있었고 이덕주, 유진만, 최흥식, 유상근 등 많은 애국지사의 피와 땀을 흘렸다.

그리고 일제의 폭력에 민족의 수난을 구경꾼으로 방관하던 중국인을 보고 이들의 각성을 생애 최고의 뜻을 삼고 붓과 펜을 들어 중국몽을 일깨우려 했던 대문호 노신이 잠든 곳으로 상해는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