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문래창작촌 그리고 당산골 문화의 거리

달이선생 2022. 7. 22. 21:42

오늘 같은 나들이는 상당히 고민이 된다. 일적인 부분도 있고,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지만 역사적인 것이 현장에서 상징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어떻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 고민이다. 문래창작촌 그리고 당산골 문화의 거리가 그렇다.

유시민 작가는 베스트셀러가 된 '유럽 도시 기행'에서 모든 보여지는 텍스트를 읽기 위해(해석) 콘텍스트를 봐야한다고 했다. 지난 날 젊은이들의 거리의 상징이었던 홍대나 신촌처럼 문래창작촌과 당산골 문화의 거리도 '민지'로 불리는 젊은이들이 삶을 향유하는 공간이다. 특히 이들 젊은이들의 관심사는 사진 잘 나오는 곳, 맛있는 집, 분위기 좋거나 맛 좋은 커피가 있는 카페 등등 그들이 소비를 위한 공간을 선호하고 그 정보를 드러낸다. 그런데 콩테인 나는 그런 것은 관심사가 아니다. 아마도 나의 콘텍스트가 수많은 포스팅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도 이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괜찮다. 나의 글쓰기, 이 콘텍스트는 나의 삶, 나의 관광이다. 내가 본 빛을 남기는 아카이브이기 때문이다. 

문래와 당산에서 본 빛을 이야기한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과 당산동은 어떤 곳인가? 사람을 처음 만나면 성과 이름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듯 지역은 지명이 시작이다. 문래동과 당산동을 품고 있는 영등포는 바람신 영등할미를 모신 영등굿의 '영등'과 포구 '포'가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이다. 당산동은 이러한 영등굿을 하던 당집이 있었기에 붙여진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영등포는 한강 샛강변의 큰 포구로 고구려의 잉벌노현, 순 우리말로 뻗어가는 땅 '늠내'이고 한자로 시흥(始興)이다. 현재의 시흥시가 아닌 금천구이다. 금천구는 전근대시대 금주, 금천현으로 불린 지역으로 정조가 현륭원 천봉을 한 후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가는 길 대신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아 새롭게 수원에 가는 길을 여는데 이 길이 '시흥별로'이다. 지금의 1번 국도의 원형으로 한양에서 경기 서남부와 인천, 강화 등 서해안, 그리고 삼남에 이르기까지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 바로 영등포이다. 예전 이 맘 때면 샛강변에 하얀 도포에 갓 쓴 노인들이 강변에 줄지어 피서를 했던 바람 시원한 강변이다. 지금이야 서해안 밀물이 행주대교 수중보 등으로 올라 오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바닷물이 만나는 교차지역(기수역)으로 조운을 통한 해운이 발달한 한강변의 중요 포구였다. 

일제강점 후 전체적으로 영등포 일대는 서울과 인천 중간지대를 형성하며, 경인공업지역의 모태가 되었다. 그 결과 경성방직 등 대규모 직물공장이 들어서고 해방 이후 철강 및 철제 산업이 뒤를 이어 발전하다 20세기 후반 소공인 중심의 철공소로 바뀌어 쇠퇴되고 낙후되었다. 2000년대 들어 홍대 등을 떠난 예술인들이 저렴한 임대료 등으로 문래동에 정착하면서 젊은이들이 찾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현재는 문래창작촌 인근 당산동에도 당산골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는 등 변화의 중심에 있다. 또한 지역 도처의 철제산업은 서울시 공단 이전정책에 따라 화성시로의 이전이 점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문래동의 지명유래는 방적기술인 물레에서 왔다고 한다. 특히 요즘은 조선 전기 문익점의 목화 전래까지 이야기하며, 문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문래동은 일제강점기 대규모 직물공업단지인 경성방직과 방림방적의 전신 태창직물이 위치한 곳이다. 특히 문래창작촌 대부분은 방림방적의 부지 위에 위치하고 있다. 태창직물은 한국 최초의 재벌로 불린 백낙승이 세운 것이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아버지다. 백낙승은 육의전 거상으로 1924년 대창직물 창업주인 백윤수의 4남으로 대창직물에 지금의 이사인 취체역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백낙원의 태창직물을 인수 받아 일제가 본격적으로 만주 침략이후에는 적극 협조하여 만주 관동군사령부 헌병대의 비호아래 직물을 밀수출하여 일제의 전쟁특수를 톡톡히 봤다. 때문에 조선 최초 화신백화점의 박흥식과 결탁하여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대주주로 참여하여 '애국기'라는 비행기를 일제에 헌납, 동참하고 막대한 전쟁헌금도 내었다. 해방후에는 이승만과 자유당에 정치자금을 헌납하며 승승장구하여 한국 최초의 재벌까지 되었으나 결국 4.19혁명 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리면서 가산이 모두 적몰되었다. 이후 태창직물은 산업은행에 관리 중에 1963년 재일사업가 서갑호가 인수하여 1967년 방림방적으로 개명하였다. 현대사에서 방림방적은 경공업으로 노동집약적 산업의 특성으로 낮은 임금 등 노동문제에 있어서 중심에 있었다. 때문에 윤보선 대통령의 영부인 공덕귀(孔德貴, 1911~1997) 여사가 1977년 각계 지도자 100여 명으로 구성된 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섬유공업의 쇠퇴와 함께 방림방적은 2003년에 문래 부지를 완전히 매각하고 안산으로 이전하면서 문래동 시대는 끝을 맺는다.

일제강점기 영등포 일대 최고의 기업이자 현재까지도 지역에 건재한 '(주) 경방'의 전신인 경성직물은 1919년 인촌 김성수가 경성직뉴를 인수하여 1923년 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시의 지원으로 세워진 문래 예술가들을 위한 '술술센터(문래예술종합지원센터)' 일대가 경성직물부지이다. 경성직물은 특히 민족산업 육성이라는 기치로 '물산장려운동'의 중심에서 민족기업으로서의 사명도 다했으나 일제가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고 대륙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가운데 중일전쟁 이후 1939년 남만주방직회사를 설립하여 일제 첨병 역할을 하였다. 2003년 영등포 문래동 공장을 완전히 폐쇄하고 2009년 경방 타임스퀘어를 개장하였다. 현재 그 유산으로 공단 안에 사무동 건물이 보존되어 2004년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이렇듯 문래동의 유래는 직물산업의 중추였던 경성과 태창=방림이라는 거대 기업에 유래를 두고 있다. 수원시 평동은 수원군공항이 위치한 곳으로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비행장을 세우기 전에 대단위 목화밭이 조성되었고, 수원의 향토기업으로서 현재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받돋움한 sk의 전신 선경직물이 있었다. 문래동과 유사한 풍광과 산업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래동은 직물산업이 흥할 때나 쇠퇴할 때 철강 및 철제 산업이 보조를 이루며 발전하다 현재는 소공인 중심의 철공소(문래 머시닝밸리, 일명 '철공장')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예술가들과 협업으로 소상인들이 들어와 젊음과 문화의 거리를 이루는 반면, 수원시 평동은 수원군공항에 따른 제약으로 낙후지역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문래동과 당산동의 도시 읽기는 문래창작촌에 처음 입주하여 일구고 지금은 당산골 문화의 거리에서 카페 동양화점과 보노보C 등을 운영하는 이소주 대표가 맡았다. 현재는 문래에 이어 당산에서 10년 살기를 하고 있다. 요즘이야 문화유산 답사를 하면 지역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운용되어 지역과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도시나 특정 지역 역시 그곳을 중심으로 경제 뿐 아니라 문화와 함께 지역사업을 하는 단체와 사람들을 통해 동네여행 혹은 마을여행 등이 활성화 하고 있는데, 오늘 만난 이소주 대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보노보C에서 '철부지鐵阜地 문래 문화투어 올래? 문래!'를 운영한다. 

문래창작촌 나들이의 시작은 스멜팅커피에서 시작하였다. 크림솔트커피맛이 인상적인데 앞의 벤치도 문래의 상징으로 실용예술로 좋은 본보기다. '망치의 안식'은 단순 조형물이 아닌 지역과 구성원의 정체성(철공소, 소공인)을 드러내면서도 실제로 주민편의가 될 수 있는 조형물로 장도리를 겹친 모양의 거리 의자(웨이브스 운영 작가)이다. 카페 손님은 물론 지나는 길손들도 쉬어 가고 사진 찍기 좋은 장소이다. 실질적인 나들이의 시작은 당산로2길 입구로 조형물 '기린'에서 시작하였다. 아프리카 기린인 줄 알았더니 전설의 동물 기린이다. 이소주 대표는 이 기린이야말로 지역과 구성원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가장 의미 깊은 작품이라고 한다. 한국산업 역군으로 자부심이 높은 문래동 소공인들이나 3D업종이라는 애로사항으로 천시되었던 현실에서 작가는 이들을 기린아로 표현하며 자부심을 드러낸 상징이 기린이다. 다만 이 기린이 소공인에 의해 다리가 잘리는 아픔도 겪었는데, 이는 못쓰는 폐자재와 공구로 만든 조형물을 보고는 이것들이 우리를 무시하네하며 오해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작품의 취지 등을 잘 설득하여 무사히 거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정크아트 등 예술적 특성을 지역에서 조화되기 전의 헤프닝이었다. 이어 차례로 철공소 소공인을 상징하는 조형물인 일명 '바가지'로 불리는 용접면, '못 뽑는 망치' 등을 지나쳤다. 하나의 조형물을 만들더라도 지역과 구성원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쇠를 자르고 두들기는 소리, 각종 철강과 공구들이 나뒹구는 철공소 사이 사이 카페와 갤러리가 위치한 이질적인 문래창착촌이다. 그 골목골목으로 젊은 여성들이 아무 꺼리낌없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이상하다. 여느 지역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자연스럽다. 그리고 골목골목에는 우리와 같은 창작촌 구석구석을 설명 들으며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긴 누군가는 그래피티 아트(벽이나 그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로 유명한 얼굴 없는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쇼디치와 같은 곳이 문래동이라고 하니 이상할 것도 없다. 

평일이라서 철공소 등 많은 곳이 문을 열고 있어서 문래동의 볼거리인 그래피티는 잘 볼 수 없었다. 낮과 달리 철공소들이 문을 닫는 밤이나 휴일에는 철공소 셧다문 등에 그려진 그래피티 등이 즐비하여 여느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풍광이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다고 한다. 철공소들만이 위치하여 쇠락한 문래동이 2003년 임대료 등이 싸서 찾아온 입주 작가들로 인해 차츰 카페가 드러서며 무려 13개까지 늘어났다가 카페가 줄고 식당이나 술집이 들어서다 현재는 대형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점점 임대료가 상승하고 기존의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까지는 아니나 앞으로 홍대나 가로수길처럼 무색무취한 프렌차이즈가 난무하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문래동은 활력을 잃은 도심에 예술가와 소상인이 찾아와 창작촌을 이루고 젊은이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다시 활기를 찾은 거리가 되었다. 소공인과 예술가(소상인)가 공존하지만 공생까지 하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골목 골목을 다니면서 공간으로서 소공인의 참여는 보였으나 이들이 창작촌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공생까지 되느냐는 별개로 보였다. 환경과 입지는 소공인들에게 일정부분 영향이 미쳤지만 문래창작촌이라는 기반을 통한 경제적 이익까지는 이어질 수 없는 한계가 보인다. 워낙 접점이 불가능한 업종, 업태라는 것과 사실 이곳이 활성화되면서 임대료가 비싸지면 자연히 철공소 등은 이전을 할 수밖에 없다. 건물주, 지주 입장에서 내 공간이 화려하고 돈 잘 벌리는 카페나 갤러리로 쓰이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현재 문래동은 무한경쟁 속에서 소상인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행중이다. 따라서 소상인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그러나 철공소 등을 운영하는 소공인은 현상유지를 바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 젠트리피케이션까지는 가지 않았다지만 이러한 변화에서 그래도 희망을 가져 볼 수 있는 노력은 문래에 터를 잡은 애향심을 가진 1세대 지주, 건물주가 오래도록 이곳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재산상속 등 2세들에게는 이곳은 지켜야할 고향이 아닌 경제적 가치 고려대상이다.) 기본적으로 지역이 안정되야 사회적 자본(협동조합 등)을 통한 공생으로 소공인과 협업(철제 굿즈 개발) 등 여러 가지 함께 가는 길을 모색 할 수있는 기회도 있을 수 있다.(이소주) 어려운 이야기다.

문래에서 10년을 살고 당산1동에서 10년 살기를 시작한 이소주 대표의 안내로 '당산골 문화의 거리'로 갔다. 곳곳이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주변에 좁은 면적(지가가 높아)에 높은 건물을 짓는 거와 달리 비교적 넓은 면적에 높게 건물을 짓는 대규모 건설현장이 눈에 들어 온다. 바로 청년주택(포레나)이란다. 청년주택이 완공되면 8만명의 유동인구가 발생, 역동적인 변화가 상당하겠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이 기피하던 방석집과 같은 퇴폐 업소를 공유자산화하여 주민 편의시설(빛글 공감 마을도서관 등)로 탈바꿈시키는 한편, 서울시 생활상권 육성사업지역으로 선정되어 상점에 특성에 맞는 한지로 꾸민 간판을 내달거나 가상공간인 메타버스를 통해 당산골 문화의 거리를 소개하는 등 변화의 중심에 있다. 개인주의를 우선하는 젊은세대의 취향을 공략한 공유주방도 활성화되고 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기대되는 당산골 문화의 거리이다.

'안식의 망치' 지역과 구성원의 특성을 보여주는 실용예술작품 벤치로 이용하고 있다.
지역, 구성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들의 자부심을 상징화한 작품 기린, 아프리카 기린으로 오인하다
용접면 일명 '바가지'를 작품화
'못 뽑는 망치'. 어디 어디서든 문제, 갈등은 있다. 무조건 뽑아 없애는 것이 능사일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문래의 철공소는 문제이자 갈등이었으나 문래라는 지역 특성을 차별화하는 환경이 되었다. 철공소가 없어진 문래는 팥소 없는 찜빵이지 않을까
지역정체성을 드러낸 작품화한 간판이다.
놀면 뭐하니? 에서 유재석이 정준화 등을 면접 보던 곳이다
문래 술술센터 경성방직 부지이다. 문래에 정착한 예술가들에게 박원순 서울시장이 물었다. 무엇이 필요한가? 서울시의 응답이다.
정돈된 간판들
무질서한 간판들.. 무질서함의 질서, 나는 옛것을 고집한다면 이래야 한다고 본다. 두부 찍어내듯 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공정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세련된 것일까? 뉴스공장은 반어이다. 설마 이도 반어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인식하는 것이 도구에 불가한 것인가 억측이길
문래의 새로운 상징이 되고 있는 달이다. 영어로 달이 moon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도심에서 갑작기 나타난 쉼터

 

 

 

당산골 문화의 거리

8만의 젊은이들이 거주할 곳이다. 앞으로
주민들이 꺼리던 퇴폐시설 방석집이 주민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몇몇이 변화에 동참하는 상점들은 저마다 간판에 한지로 만든 상징적인 간판을 달고 있다. 닭집이라 닭다리. 그럼 떡집은?
당산골 문화의거리를 메타버스로 구현하다
문래에서 10년 그리고 당산골에서 10년 살기를 하고 있는 이소주 대표가 운영하는 카페이다. 이곳 외 무려 8개의 공간을 운영중이라고 한다.
오래된 구둣방이 카페가 되어 김종수 어르신의 손 때가 묻고 구슬땀 흘렸던 공구들이 액자화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