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처음 찾은 고창 동호해수욕장을 한여름에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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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7일 밤 두 아들을 데리고 내비도 안 켜고 이정표만 보며 동호해수욕장의 별바다펜션에 갔다.(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군산을 지나며 다왔나 싶더니 그 뒤로도 한 시간을 더 간다. 멀다. 팔형치사거리에서 우회전만 하면 동호해수욕장인ep 밤이라 이정표를 잘 못 보는 바람에 좁은 길로 20여 분을 헤맨 끝에 무사히 도착했다. 별바다펜션에 짐을 풀었다. 사실 한겨울에 고창을 등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 많아 다음 번에는 꼭 찾아봐야지..
어지러운 세상, 새로운 세상(개벽)을 열고자 민중사상이 싹튼 선운사(禪雲寺)며, 동학(東學)이 일어나고 갑오년(1894) 농민전쟁으로 산화한 손화중(孫華仲, 1861~1895),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장군의 자취.. 특별히 수원사람, 화성사람이면 꼭 한 번을 찾아봐야 할 부안 반계서당, 이곳은 정조(正祖)가 화산에 아버지를 모시고 수원읍치를 옮겨 화성(華城)을 쌓기전 여러 전적을 살피던 중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이 현재의 수원읍치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과 혜안을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남겼고, 이를 쓴 곳이 반계서당이었다. 국가시책인 화성 축성과 신읍치 이건은 정조에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반계의 혜안은 결국 큰 공이 되어 큰 은전을 받는다. 흔히 '필화(筆禍)'라고 하여 당대는 물론 후세에 남긴 기록으로 큰 화를 입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반계는 오히려 '반계수록'을 통해 큰 경사를 맞았다. 반계는 당대에는 과거도 못 오른 초야에 묻힌 시골 선비에 불과했지만 죽고 난 후 '반계수록'으로 인해 이름이 크게 이름이 높아진 것이다. 여기에는 노론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갈라섰던 소론의 산림 윤증(尹拯, 1629~ 1714)과 제자 양득중(梁得中, 1665~1742)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반계는 이미 정조 이전 영조(英祖)로 부터 '반계수록'이 간행되는 큰 은혜를 입었고 추증까지 되었다.(1753년 통정대부 집의 겸 세자시강원진선 추증, 1770년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 증직) 그리고 이제 정조에게 더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1793년 이조참판 성균관 좨주 가증)
이렇듯 고창을 찾아 역사여행을 하자! 마음에 들뜬 나들이길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깨는 것이 계획'이라고 하더니 시작부터 체험으로 모두 채워지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이 어려 체험활동이 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여 기회가 될 때마다 항상 해보자 생각은 하지만 시골 촌놈으로 자랐기 때문에 '체험=노동'이라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었다. 어린시절 생활은 지금의 체험활동들이 삶이자 놀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는 모두 노동이다. 시골에 살면 계절마다 해야하는 일이 많다. 요즘 같은 여름이면 감자캐고, 밭에 풀매기 등 할 일이 태산이다. 세월이 지나 이 모든 것은 체험이라는 활동으로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고창은 볼거리, 먹을거리가 참 많은 곳이다. 별바다펜션 주인장께서는 1층에서 이춘봉 인생치킨집(동호점)을 지난 겨울만해도 독박운영을 하였는데, 지금은 경기도에 사는 딸이 내려와 손을 거들고 있다. 마늘간장치킨이 맛있다는 말에 침을 삼켰는데 맛을 보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내려가면서 늦은 저녁은 무조건 치킨을 먹는다해서 덕분에 바베큐 치킨, 후라이드 양념 반반, 거기에 마늘간장모래집튀김까지 다 먹었다.
역시 치킨의 1순위는 단순 맛이 아니다. 신선도가 첫째요 둘째가 하루가 지나도 변함 없는 바싹한 튀김옷이다. 어린시절 육식에 길들여지지 않아 고기 냄새로 비위가 많이 상해 육식을 기피하였었다. 치킨이야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치킨도 배가 부르면 닭고기 특유의 맛과 향이 나는데 특히 뼈부위의 살은 관리를 잘 안하면 맛과 냄새가 정말 역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났다. 그런데 주인장께서 신경을 쓰시는지 바로 내왔을 때는 물론, 다음 날 식은 치킨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주인장께서 힘이 드셔 업종변경을 고민 하신단다. 냄새 안나고 바싹한 치킨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주인장 따님이 아내와 지인이어서 주인장께서 손수 아침이며 끼니를 내어 주신다. 덕분에 잘 먹었다. 문제는 주인장의 인심으로 주변에 유명한 고창 별미인 풍천장어 등이 눈에 안 들어왔는데 너무 폐가 되니 일행과 외식을 했다. 수도권 지역에서 맛보는 크고 통통하고 푸석한 장어가 아닌 육질이 단단하고 단백한 장어맛이다. 주변에 '황토바다'나 '바다마을 장어구이' 집이 맛집이란다. 한적한 시골이고 평일이지만 사람이 많다. 맛있나 보다. 백합의 산지이니 백합요리,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물회 등도 좋단다.
운전을 오래해서 피곤하지만 일찍 눈을 떳다. 체험이 노동이고 노동이 체험인데 이번 나들이길은 체험이다. 이른 아침부터 집사람이 서둘러 펜션 3층으로 오란다. 3층에 들어서니 내장공사가 한창이다. 석고벽면을 붙이고 그 이음새와 타카로 마감한 자리까지 뒤에 있을 도색을 위해서 퍼티작업이 한창이다. 간단한 미장을 아버지를 도와 했던터라 의욕차게 공구를 들었다. 나도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내가 오길 기다렸단다 천장에 손이 안 가서.. 목수들이 짠 받침대 위를 올라서니 휘청한다. 받침대의 지지가 내 무게를 못 이긴다. 어쩔 수 없이 현장의 기대와 달리 튼튼한 받침을 찾아 낮은 받침대에 올라 천장 마감을 시작하였다. 제일 높은 곳은 나보다 훨씬 가벼운 주인장 따님 몫이다.
생소한 퍼티작업을 하는 곳은 고창에 내려온 펜션 주인장 따님이 고민하고 있는 책방 예정장소이다. 이름하야 '고살이 책방'이다. 청년사업자로 이름을 내어 문화판을 전전하던 내공을 살려 이웃한 '해리'가 책방으로 유명하다니 본인도 숟가락을 얹겠다는 생각임이 틀림없다. 여러 날 공사를 해선지 겨울에 봤던 모습보다 살이 많이 빠졌다. 나야말로 참노동으로 기름 좀 빠져야는데 하니 누구는 요양보호사 한다고 한다며 핀잔이다. 나이를 먹어가니 땀 흘리는 노동이 더 간절하다.
고창을 내려 오기전 답사계획을 무참히 깬 것은 주인장 따님이 연결한 갯벌체험 때문이었다. 동호해수욕장의 이웃한 곰소만 혹은 줄포만 갯벌은 람사르습지에도 등재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곳 만돌마을은 1850년대 광산김씨들이 들어와 제방을 쌓아 만든 개척마을로 현재 어촌체험마을을 운영하는데 그 대표적인 관광체험상품이 바로 만돌갯벌체험장이다. 여느 갯벌체험과 비슷할 수 있으나 여기만의 장점은 갯벌이 정말 넓었다. 너무 넓어 트렉터에 포장을 한 객차를 연결하여 타고 한참을 간다. 이미 갯벌 끝에는 생업으로 조개잡이가 한창이다. 예전 우리 관광청에서 만든 영상이 떠 오른다. 무수히 많은 경운기가 갯벌을 달리는 것이었는데 갯벌 저편에 경운기가 즐비하다.
여기 갯벌은 모래갯벌이다. 백합과 동죽이 정말 많이 난다. 조개 한 두개 캐서 갈거니 하고 갔지만, 왠걸 뻘밭에 서걱서걱 조개 밟힘과 갈퀴로 판다보다는 긁어 주어 담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정말 조개를 많이 주어 담았다. 그렇다보니 우리 어린 아들들도 갈퀴를 들고 쉬이 조개를 캔다.
조개를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잡고나니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물 들어오기 전에 빨리 나가야지.. 그런데 어장 체험을 해야 한다고 한다. 고창 동호 에비타 때문에..
어장은 한자로는 어전(漁箭)으로 쓰고 어살로 읽는다. 한자로 봐도 고기잡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어살은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서 이루어졌던 우리나라 고래의 전통 어법으로 얕은 바다에 대나무 살을 세워 썰물에 바닷물이 빠져나가며 고기가 걸리게 하는 것으로 한 쪽으로 모아지게 하여 고기를 잡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가볍고 질긴 대나무살을 써서 죽렴, 죽방렴이라고 불린다.(제주도는 돌이 많아 현무암으로 만든다. '원담'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나무가 아닌 그물로 대체되었다. 갯벌 끝에 나무 기둥이 즐비하여 김 양식장인줄 알았더니 바로 어살이었다. 어살에 대한 오랜 기록으로는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어부들은 썰물이 질 때마다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는다. 그러나 그물을 잘 만들지 못하여 거친천으로 고기를 걸러낼 뿐이어서 힘을 많이 쓰나 잡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주워 모으는데 힘껏 거두어들여도 없어지지 않는다. (海人, 每至潮落, 矴舟島嶼而捕魚. 然不善結網, 但以疏布漉之, 用力多而見功寡. 唯蠣蛤之屬, 潮落不能去, 人掇拾盡力取之不竭也.)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3 풍속2 고기잡이
언뜻 보면 옛사람들의 어로가 상당히 뒤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역사기록을 접할 때는 그게 사실만 같다. 그러다 시흥시 오이도와 월곶, 지금은 육지가 된 큰 포구 였던 포리 지금의 시흥시 포동에서 구술조사를 했다. 예전 기억을 말씀을 듣다보니 서해안 일대에는 큰 배가 없어도 물가 연안에서 민어며 조기 등이 너무 많아서 그물이 없이도 손으로 주어 담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고려 이후 조선에서 해금정책을 펴며 큰 배를 만들지 않아 어로가 발달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기잡이가 어려울 정도로 어구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거친 그물을 쓸 정도로 우리나라 바다는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별다른 어구 없이도 물고기잡이를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조상들은 일찍부터 어살로 물고기를 잡았던 것이다. 큰 배들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그물을 치고 힘들게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바다는 풍유로웠다. 동해안과 같이 깊은 바다는 어살을 설치 하기가 어려웠다. 작은 배를 띄워 그물을 육지부터 가지고 나가 둘러싸고 육지에서 그물을 잡아당기는 방식의 어로를 하였다. 큰 배를 타고 나가 먼 바다에서 고기 잡이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해도 서해처럼 물고기반 고기반이라고 할 정도로 풍족했다. 지금은 보기 힘든 명태가 지금으로부터 3~40년전만 해도 길에 널린게 명태고 밟히는 게 오징어였다.
고창 만돌마을 어장에 걸리는 것은 주로 물고기로 서대와 복어, 망둥이 등 작은 치어가 많았고, 숭어도 큰 놈들이 걸린다. 그리고 각종 게와 새우도 많이 잡힌다. 잡은 물고기는 그 자리에서 갯벌에 쏟아서 큰 것만 따로 담고 나머지는 그냥 버린다. 바로 이때가 최고의 경험이다.
월미도나 궁평항에서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줘본 사람이라면 어살로 잡은 고기를 갈매기에게 던져 주는 것은 새우깡 저리가라다. 어장에 물고기를 먹겠다고 달려드는 갈매기 떼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한여름의 고창 나들이.. 답사가 아닌 체험으로 끝났지만 사실 체험은 핑계일 뿐, 날씨 때문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부터 무더운 여름이더니 한낮에 내리쬐는 햇볕과 열기에는 좋아하는 답사를 하기 어렵다. 눈팅만 하는 페북의 친구가 섬으로 놀러 갔다가 풍광이 너무 좋아 아이들과 아내를 앞세워 정상 전망대까지 갔다가 온갖 핀잔을 다 들어 낭패였다더니 숙소인 별바다펜션과 가까운 선운사 조차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답사는 겨울이나 이른 봄, 가을에나 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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