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그늘 군산
개항된 군산은 일제 수탈의 교두보로서 호남평야의 막대한 쌀이 일본으로 공출된 중심지였다.
일본식 근대가옥이 즐비하고 군산항이 일찍부터 정비되어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군산항 주변의 적산가옥(일본식 주택)
많은 일본인 사업가와 지주가 진출하는 가운데 군산은 일제의 역동적인 근대도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선의 많은 사람들은 토막집이라고 불리는 짚으로 엮은 허름한 집에 살며 일제 수탈에
동원되어 하루하루 고통으로 살았다.
우리나라에서 드넓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의 장소가 호남평야이다. 그 중 김제는 호남평야의 중심이다. 곡창지대로 병참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순신 장군이 그 수호를 천명했던 곳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곳 김제는 조선과 조선 민중을 위한 땅이 아니게 되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외치면 1894년 전봉분, 김개남, 손화중이 기포하여 나약하고 부패한 민씨척족의 조선 봉건정부를 타도하고 나아가 일본제국주의를 쳐부수고자 하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이 땅은 일본 근대화의 식량창고 일본제국주의의 병참이 되었다.
김제에는 지금도 일본인 지주의 저택이 남아있다. 당시 이 하시모토와 같은 일본인 지주는 전체 0.2%에 불과하였지만 조선 농토 54%를 소유하고 조선인을 소작인으로 부렸다. 이른바 식민지 지주소작제이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토지경제는 절대적으로 수탈경제였다.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조선에서 생산된 양질의 쌀은 1899년 개항한 군산항에서 모두 실려 나갔다.
이렇게 반출된 쌀은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되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배를 대기 어려운 것을 일제는 부잔교라는 기술을 통해 배의 정박과 수탈품을 싣는데 요기를 부렸다. 이러한 부잔교는 역시나 비슷한 조건이었던 제물포, 즉 인천항에도 설치된 것이다. 따라서 군산, 인천, 목포 등 일제가 개항하여 수탈장으로 만든 곳은 대개가 비슷한 모습이다. 이러한 개항장의 모습은 바다 건너 일본 큐슈의 모지항도 비슷하다. 원산은 가보지 못해 잘 모르겠으나 일본 큐슈의 모지항에서 받은 인상은 '일제의 조선지배는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항구 조성과 항구를 둘러싼 세관, 운영사, 은행 등 각종 시설들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과 차이가 없었다.
서양식 건물이 즐비하고 살펴보면 일제의 수탈기관이 대부분이다. 한쪽에 중식집 빈해원은 당시 풍광을 잘 보여주는 이색적인 공간이다. 전형적인 중국풍의 식당 내부 모습으로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이밖에도 일본인 적산가옥들이 인천보다는 잘 보존되었다. 개발이 더딘 결과이나 이는 아주 좋은 근대 유산으로 군산의 자원이 되고 있다.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 가옥으로 유명한 히로쓰 가옥은 규모면에서 일본인 지주들이 조선에 누린 호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쓰라린 현장이다.
군산세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테마기획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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