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풍패지향 전주2

달이선생 2014. 7. 31. 14:48

풍패지향 전주(全州) 

2014년 7월 31일

풍패는 한 고조의 고향으로 조선 왕조의 본향인 전주를 왕실의 고향이라 이르는 의미이다.

풍패는 한나라 고조의 고향을 이른다. 조선에서 풍패라고 불리는 곳이 두 곳인데 첫째가 전주요 둘째가 함흥이다. 실제로는 함흥이 조선 국성인 전주이씨 즉, 선원보략에 따른 완산이씨의 고향은 쌍성총관부가 위치한 함흥이어야 하지만 그들은 본향인 전주를 풍패라고 한다. 사실 고려 말보다는 이후 성리학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조선 왕실은 이러한 출자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선 사회에서 혹여 여진족이나 다름 없었던 이성계와 그 선조의 역사를 볼 때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왕실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들의 원 뿌리에 대한 숭조다. 전주 이씨 시조 이한(조경묘) 추숭하고 그 전주를 풍패로 높인 것이다. 이러한 일에 더욱 열의를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영조다. 영조는 즉위부터 늘 정통성 시비로 괴로웠던 인물이다. 지금은 덜하나 2000년 이전 소위 벼락출세 내지는 벼락부자가 된 졸부들이 서울중앙도서관을 찾아 족보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분세탁이다.

그래서 전주의 대문 남문의 현판은 '풍남문'이고 전주의 객사는 '풍패지관'이다. 오늘날 전주는 문화의 거리, 젊음의 거리이다. 이성계의 고사가 전하는 오목대에 오르면 전주 한옥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보고 숙종 태실과 그 터는 전주사고 자리이다. 사고가 가지는 위상은 조선의 기록문화유산에 나라라는 명성이다. 전주사고가 임진왜란 때 보존 될 수 있어서 조선왕조실록이 전승될 수 있었다. 이때 큰 공을 세운 이들이 바로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다. 당연히 이들은 조정에서 큰 보답을 한다.

그리고 풍패라는 위상에 걸맞게 전주의 향교는 서울의 문묘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다. 공자를 따로 기리는 사당 계성사를 두고 있으며 지방의 격이 전주부윤에 대성전의 규모가 한양 문묘와 대도호부의 이상으로 큰 규모로 지어졌다.군현의 격은 모시는 성현의 위패에 따라 대, 중, 소설위로 구분하는데, 대설위 규모였다. 물론 향교 수학 유생 수도 대도호부 이상의 격을 갖춘 것이다.(최고 90명이 수학)

 

 

 한옥마을

 

오목대

 

 

전주향교

 

 

 

 

 

 

 

 

 

 

 

(출처 : 전주향교 안내도 http://www.jjhyanggy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