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3

고려대학교 둘, 박물관

구한말 민씨 척족에 붙어 승승장구하였으나 민족교육을 일군 이용익, 고려대학교의 출발이다. 이용익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1905년 세웠다. ‘보성(普成)’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널리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용익은 이후 국운이 기울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암살된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인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일군 것은 동학의 제3교조이저 천도교를 개창한 의암 손병희다. 3.1운동을 일으키는 중심에 있었고 민족대표 33인이다. 일제강점기는 학교 든, 기업이든 조선인이 소유한 것은 운영이 어려웠다.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보성전문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명망 있는 민족기업가 인촌 김성수가 주변의 강권으로 나선다. 인촌은 호남의 대지주로 일제의 미곡 정책에 따라 성장한 식민..

고려대학교 하나, 민족 고대

"순간이고 찰라이다"​구한말 민씨 척족에 붙어 승승장구하였으나 민족교육을 일군 이용익, 고려대학교의 출발이다. 이용익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1905년 세웠다. ‘보성(普成)’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널리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용익은 이후 국운이 기울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암살된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인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일군 것은 동학의 제3교조이저 천도교를 개창한 의암 손병희다. 3.1운동을 일으키는 중심에 있었고 민족대표 33인이다. 일제강점기는 학교 든, 기업이든 조선인이 소유한 것은 운영이 어려웠다.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보성전문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명망 있는 민족기업가 인촌 김성수가 주변의 강권으로 나선다. 인촌은 호남의 대지주로 일제의 미곡 정..

명안공주 이온희, 해창위 오태주 묘역

명안공주 이온희, 해창위 오태주 묘역 1687년 5월 16일 숙종은 하얗게 소복을 차려 있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였다. 동생 명안공주 이온희가 죽었기 때문이다. 현종이 딸 명안공주의 이름을 ‘온희’라 짓고 직접 쓴 뒤 수결(사인)한 ‘명안공주 작명단자’. 출처 :경향신문, 성종의 태항아리 유물 5점은 왜 90년간 흩어졌을까 2018.6.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262109015&code=960201 명안 공주(明安公主)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소복(素服)차림으로 거애(擧哀)하고, 이어 전교(傳敎)하기를, "몹시 슬프고 애통스러워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장(禮葬) 이외에 비단과 쌀·무명 등의 물건을 숙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