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3.1절 특별기획]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현장을 가다

달이선생 2012. 4. 27. 10:35

 

 

 

서대문형무소에서..    

 

  4월3일, 폭민 약 천명이 장안 우정양면사무소를 파괴해 서류 전부를 소각, 폐기해 면장을 데리고 갔다. 한층 더 그 수가 증가해 약2천명이 되어 화수경찰관 주재소(내지인 순경 1명, 조선인 순경보 3명)(수원 서남쪽 8리)를 덮쳐, 가와바타 순경이 발포해 항거 했지만, 총알이 떨어져 마지막에는 참살되어 그 순경의 시체는 51개소의 흉터를 남겨, 이비(귀와 코)를 깎아 음구(陰具)를 절단 하는 등, 잔혹을 가해 게다가 주재소에 방화 병기를 탈취해 그 지역을 떠났다. 「경기도 수원 안성지방 특별검거반의 행동」『독립운동가자료 기타보고서』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참조.

 

  경기도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에 관한 일본 특별검거반의 보고이다. 1919년 당시 수원지역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루어졌던 현재의 수원과 오산, 화성 전지역과 평택, 의왕, 군포, 안산 일부지역을 아우르는 경기남부에서 큰 지역이다. 이곳에서 3.1만세운동이 평화로운 단순 시위를 넘어서 일제의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는 등 격렬한 항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지역은 삼괴지역으로 불리며 위와 같이 주민 2천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나와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일본당국을 놀라게 하였다. 따라서 삼괴지역에 대하여 2차례의 대대적 토벌과 검거작전을 펴는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참혹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르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사실 제암리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천도교와 기독교의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에 협력하지 않는 불량한 조선인)들이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 시위로 인생 발생한 사건으로 주로 이야기되었는데 최근에 일본측 자료가 많이 발굴되고 연구가 진척되면서 삼괴지역 우정, 장안면의 시위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옛 수원군 지역인 화성의 3.1운동이라고 하면 제일 많이 알려진 것이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이 사건이 널리 국내외에 알려진 것은 당시 우정, 장안지역의 항쟁이후 일제 검거반이 마을 곳곳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죽이거나 체포하며 피해가 속출하자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은 장안면 수촌리의 수촌교회를 찾아가던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제암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듣게 되면서 알려졌다. 스코필드 박사는 우정, 장안면지역의 피해상황을 조사하고자 왔다가 제암리의 만행을 목격한 것이다.

  이렇듯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평화적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어 시작된 우리 민족독립운동인 3.1운동이 수원지역에 확산되고 그 최고조에 올랐던 우정, 장안면의 주요항쟁지를 찾아본다.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의 성격은 먼저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대규모 항쟁이었다는 것과 수원지역 3.1운동을 대표하는 제암리 학살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지역 향촌사회의 지도자들이 수원읍과 발안지역의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오늘 찾는 항쟁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이 천도교인사들과 조직을 중심으로 수원읍내 시위와 3월 31일 발안장날 시위로 이어지는 연계상에 있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답사경로

출발 : => 장안면 수촌리 우정, 장안면 3.1운동 기념비, 수촌교회 => 팔탄면 가재리 이정근 생가 => 향남읍 장짐리 탄운 이정근의사창의탑 => 향남읍 평리 발안주재소 터, 일본인 거류지 및 장터 => 장안면 석포리 차씨마을 입향시조 차운혁 사당과 묘, 시위 주도자 차병혁 의사 집터 => 우정읍 화수리 주재소 터 및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기념비 => 우정읍 화산리(사기말) 우정면사무소 터 => 장안면 어은리 장안면사무소 터 => 어은리 기린골 전교실 터 => 우정읍 조암리 쌍봉산, 장안면 남산 => 향남읍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답사 당일이 아닌 별도 답사)

 

  주요 항쟁지를 둘러보기 앞서 우선 간략히 수원지역의 3.1만세운동 상황을 살펴본다. 처음 3월 1일 서울의 시위가 전해지고 수원읍내 용두각(화홍문)에서 시위가 시작된 이후 수원읍내 여기저기에서 3월 내내 시위가 일어나 일본 경찰과 소방대, 헌병대로 이루어진 진압군에 의해서 무차별 해산과 검거가 이루어지고 졌다. 특히 수원읍내 시위에서 특기할 것은 3월 26일부터 이루어진 상점들의 철시와 함께 3월 29일 수원기생조합의 기생들이 김향화(金香花)를 중심으로 수원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호면(오산시) 지역에서도 연일 일본인들과 대립하며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인근 동탄, 양감, 반월, 의왕면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3월 26일 시작되어 28일에 주민 400여명이 참여하여 수원경찰서에서 파견된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을 처단한 사강(송산면)시위는 수원지역의 3.1운동이 지역주민이 대거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일제에 대한 항쟁으로 번져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수원지역 인근인 안성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시위의 양상이 점차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일제가 느끼는 심각성은 대단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1, 2차에 걸쳐 대대적 토벌과 방화, 검거작전을 벌이는 한편 제암리 학살만행과 고주리의 천도교인 김흥렬 일가를 무참히 살해하여 알리는 본보기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우정, 장안면 3.1운동은 화수리 항쟁으로도 불리는 단순만세 시위가 아닌 적극적인 항쟁이었다.

  답사의 시작은 4월 3일 항쟁의 계획과 실행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수촌리를 먼저 찾았다. 이곳 수촌리 큰말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2리로 현재 마을에는 당시 항쟁이 촉발되었던 역사적 위상에 따라 82번 도로 수원, 발안(향남) 방향에서 조암방향으로 들어가는 언덕 비탈, 우측으로 마을이 있고 노인정으로 가는 샛길 우측으로 '3.1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수촌리 마을의 유래는 옛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청룡, 백호(靑龍, 白虎)의 지형을 갖추었고, 숲이 무성하고 물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숲말'.'수촌(水村)'이란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수촌리를 형성하는 자연마을은 감나무골, 시목동(枾木洞), 방축말(防築里), 용당골(龍堂谷), 큰 말, 항골(港谷)이 있다. 자연마을이란 행정적으로 수촌리가 있고 그 안에 자연지리적으로 분포된 각기 마을들을 말한다.

 

 

위 표지판의 기념비 내용 중 추모시 다음 누락 부분은 아래와 같다.

(중략) 이에 정부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사회장으로 안장하였다.(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국립묘지 안장이었다.-표지판 부기 내용)

"이제 우리 후진은 수촌마을 지사들과 호랑이 석호필의 고귀한 정신을 뒷날에 길이 전하고자 여기 기념비를 세우니 그 당시 옥고를 치른 지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차희식, 이영쇠, 장소진, 장제덕, 정서성, 차인범, 이순모, 차병한, 김흥식, 정순영, 김정규, 백순익, 인수만, 
김명우, 김교철, 김여근, 김응식, 김덕근, 차병혁, 김중학, 김정희, 김황운, 윤영선, 김덕산, 류수산
오리 전택부 글 짓고 원곡 김기승 글씨 쓰다."

 

  마을 뒷편에 위치한 개죽산은 3.1운동 당시 최초로 봉화를 올린 곳으로 3월말 4월 1일 전후하여 산상횃불시위가 이루어진 곳이다. 심문자료와 김선진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4월 1일 밤 7시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쌍봉산, 팔탄 천덕산, 향남 가재리 당재봉, 석포리 무봉산, 어은리 남산, 이화리 보금산, 장자터 봉화산(흥천산) 운평리 성신재, 매향리 망원대에서 시작되어 각각 봉화가 올라 4월 2일 밤 전지역으로 봉화횃불이 올랐다고 한다.

  3.1운동 당시 수촌리 큰말은 수원지역의 천도교의 주요인사이자 천도교 전교실 교사와 수촌리 구장(이장)을 맡고 있던 백낙렬을 중심으로 항쟁이 주도되었다.

  백낙렬은 1865년 수촌리에 출생하여 1884년경 동학에 들어갔다.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접주 고석주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후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고 1910년 천도교 남양교구 금융원을 맡아서 강습소와 전교실 등을 열어 포교 및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우정, 장안면 시위 이후 체포를 피해 3년간 계룡산 등지에서 숨어지내다가 돌아와 고주리 천덕산 천덕바위에서 신분을 숨기고 10여 년 간 숨어지내다. 1937년에 사망하였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 과정에서 백낙열은 이미 3월 1일 서울시위를 참여하였다. 함께한 동지는 제암리 참변으로 죽은 고주리 김흥렬과 제암리 안종후였다. 이들은 서울 소식을 지역 천도교 전교실을 다니며 알렸다.

  그리고 나서 발안장터 시위를 주도한 한학자 이정근과 김흥렬, 제암리 안종환, 안정옥, 안정후와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해서 논의하고 각자 자기 지역을 책임지기로 하고 백낙렬은 삼괴지역을 맡기로 하였다. 따라서 수촌리 주민들은 전교실로도 사용되고 있던 백낙렬 집에서 시위에 나눠줄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4월 1일 개죽산에 올라가 봉화횃불을 처음 피워 산상시위를 시작하였다. 또한 시위 당일 새벽 이봉구, 정순영, 홍수광 등과 만세시위가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하는 한편, 마을사환인 이원준과 정형영을 시켜 주민들이 시위에 적극 동참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제에 의해 구금되어 심문을 받던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일제에 의해 수촌리가 시위의 중심으로 밝혀진 결정적 증거는 당시 4월 3일 시위이후 사건진상 조사차 파견된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아쓰다(熱田)에 의해서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 깃발이 수습되면서이다.

  따라서 수촌리는 일제측 기록에 의하면 2차례에 걸쳐 대대적 보복과 검거가 이루어졌다. 당시 일제측의 출동한 보고서에는 1차에서 하세베(長谷部) 대위가 이끄는 검거반이 들이닥쳤고 2차는 쓰무라(津村) 헌병특무조장이 이끄는 수비대가 들어왔다. 1차에 이미 마을의 대다수 가옥이 불타고 2차에서 42채 가옥 중 38채가 마저 불탔고 주민 다수가 체포되는 끔찍한 보복이 이루어졌다.

  수촌리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참혹했다. 너무나 끔찍한 일을 당한 나머지 이러한 일을 저질른 사람을 동일시 하게 되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이다. 해방이후 당시 증언들을 조사하여 작성된 김선진의 책에는 주민들이 제암리 학살주모자인 아리타 중위가 들어와 끔찍한 보복을 자행하고 다녔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지역에서 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제암리 사건 주모자인 아리타는 그 악명이 높아 많은 사람들이 당시 검거반의 핵심지휘관으로 증언하는 부분은 많지만 당시 일본측 기록에는 4월 15일 출동 기록만이 보인다.

  일본은 당시 경찰 및 헌병대를 동원하여 검거반을 조직하고 그 활동 등을 보고 받았는데 이들 문건은 모두 극비로 처리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 활동에서의 잔학성이나 피해 등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검거반의 파견과 활동범위와 일자, 그리고 담당 지휘관에 대한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해방 이후 녹취된 증언들은 당시 검거반의 지휘관에 대해서 정확히 누군지에 대한 판단은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제암리 학살사건에서 보듯 무자비한 살인마 아리타가 나머지 지역들에서도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으로 동일시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이는 일제가 주민들에게 알리는 본보기였다. "일제에 반항하면 끔찍하게 죽을 것"이라는 경고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선전효과를 노리고 일으킨 제암리 사건과 고주리 학살사건으로 화성지역의 3.1운동은 잦아들었다.

  또한 이러한 사실관계 확인에서 사료의 현재성, 즉 당대성이 가장 중요한데 일제 측 기록은 그 당시에 작성된 것이고 김선진이 증언을 채록하고  기록한 1883,『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라는 책은 1945년 8.15해방 이후 한참 지나고 난뒤에 기억을 통해 기록된 것이라 정확성은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대를 살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구술사적 측면에서의 중요한 사료적 가치까지는 무시할 수는 없다. 

 

 

 

  노인정을 지나 깊숙히 들어가면 첨탑이 높이 솟은 수촌교회가 보이고 그 왼편으로 초가를 이은 옛 수촌교회가 나온다. 이 수촌교회는 구장 백낙렬과 함께 주민들을 이끌었던 중요한 인물인 당시 순회 전도사였던 김교철이 맡은 곳이다. 김교철은 제암리 교회에도 순회하였기 때문에 지역에서 감리교 기독교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백낙렬에 이어 김교철에서도 보듯 삼괴지역 인사와 제암리, 향남 등의 지도자들은 서로 자연스럽게 접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촌교회가 당시 담임 목사가 아닌 순회 전도가 이루어졌던 것은 한국인 목사가 턱없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한 교회에 머물지 않고 여러 인근 지역들을 묶어 전도가 이루어졌다. 이는 한국에 전파된 북미계 개신교들이 한국인 사역자를 육성하는데 부정적이어서 목회자를 많이 배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촌교회는(수촌리 674-1번지) 이곳 큰말에서 1905년 교인 김응태 주도로 정창하 집에서 7명이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어 1907년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처음 예배당을 마련한 것이 시초이다. 당시 만세시위 이후 일제의 보복조치로 1차로 들어온 하세베 대위의 검거반이 교회를 완전히 불태웠다. 교회만이 아니라 온마을을 쑥대밭이 되고 이 소식을 들은 선교사 들이 서둘러 이곳으로 왔는데 그중 스코필드 박사와 일행이 찾았다가 그 길에 제암리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앞서 이야기 한 부분이다.

  일제에 의해 보복으로 방화된 수촌교회는 1922년 4월 선교사 아펜젤러와 노블의 도움으로 불탄 자리와 다른 곳에 8칸의 초가로 예배당을 다시 지었다. 이후 1932년 본래 자리로 이전하여 사용하면서 해방이후 지붕에 기와를 얹어 사용하다가 지붕이 헐고 보수가 필요해지자 1987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초가로 복원하였다.(1986년 5월 20일 향토문화유적 제9호 지정)

  수촌교회는 우정, 장안면의 3.1만세운동 중 비석이나 표지가 아닌 실물 유적으로써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두꺼운 벽채에 두툼이 올린 예배당 건물은 단일 건물로 처음 찾은 이에게는 초라하게 보일 수 있으나 당시 농촌지역에서 사람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는 시설로는 제법 규모가 있는 것이며 특히 단일건물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생뚱맞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신식의 높은 교회 옆 쇼인도의 마네킹처럼 박제화된 채 서있는 수촌교회는 주변의 환경과도 안 어울리고 생동감이 없다. 

  예전 강화읍에 성공회 기와집 성당은 지금도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는 공간이라 그런지 이채롭고 친근감이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수촌교회의 전시물과 같은 쓰임새는 별다른 감흥을 받기 어렵다. 보호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쓰임과 손길에서 멀어진 것이 아쉽다. 문화재 공간에 대한 우리의 시각, 패러다임 조금 변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옥은 목재로 지어진 집이고 그 목재에 윤이나고 오래도록 보전하려면 늘 밟고 사람의 숨기가 닿아야 됩니다."라고 경회루에서 유홍준 교수가 말한 적이 있는데 과연 우리의 문화재.. 어떻게 하는 것이 보존이고 보호일까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멀리 바라만 봐야하는 툇마루.. 가만히 다가가 앉아 쉴 수도 있는 툇마루.. 당신은 어떤 선택을..      

 

 

 

  현재 수촌리는 화성시의 동탄신도시 개발에 따라 그곳에 있었던 많은 중소기업들이 수촌리로 이전하였다. 인근에 금의리 산업단지와 함께 공장들이 많이 입주하여 마을은 예전 자연경관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무분별한 공장 난입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암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하수 오염으로 추정) 비단 수촌리 뿐만 아니라 현재 화성시 전역이 마구잡이 개발이 심각하다. 특히 현지 주민들 대부분이 예전에 외지인들에게 산과 토지를 팔아 소유권이 넘어가다 보니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장주들에게 팔리어 더욱 난개발이 부채질 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현재 수촌리에서 당 시대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분위기와 숙연한, 또는 시골마을의 한가한 여유로움 등 아무 것도 기대하기 힘들다. 물질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이 파헤쳐 지고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수 많은 공장들에서 삭막함이 느껴진다.

   

   우정읍과 장안면의 명칭과 역사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정․장안면지역은 지리적으로 한지역을 이루며 지역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은 삼귀(三歸) 또는 삼괴(三槐)라고 한다. 따라서 예전 타지역 사람들은 삼귀댁 혹은 삼귀할아버지라고 많이 불렸다. 현재는 삼귀보다 삼괴(三槐)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삼괴라는 명칭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때는 근 100여년 정도로 추정한다.(1900년 양안에 삼귀라고 쓰였고 1904년 실시한 양안에 처음 기록이 등장하였다. ) 

  이러한 지명의 변화를 삼한시대 마한 54개국 중 하나인 상외국(桑外國)이 있었다고 하여 상외국(桑外國)-상외(桑外)-삼귀-삼괴로 변천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한 판단을 내리긴 어렵다. 다만 삼귀나 삼괴는 모두가 한자식 명사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삼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중국 주나라(周朝)에서 “괴목(槐木) 세 그루를 외조(外祖)에 심어서 삼공(三公)이 이 나무를 향하여 앉은 일이 있어 삼괴(三槐)를 삼공(三公)의 위계에 뜻으로 쓴다.”고 기록이 보인다. 삼공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을 말한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곳이 연고가 되었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 좌의정, 이정구는  "수원의 쌍부(雙阜)는 부친 이정구가 휴가를 얻어 가끔 들르던 전장(농장)이 있던 곳이다." -이종묵, 2006 『조선의 문화공간3』「조선중기-나아감과 물러남」격물치지의 공간 이단상의 정관재 421p 참조. 와 가평 연안이씨 묘역 이명한(이정구의 아들)신도비에 '내간상(어머니상)을 당하여 수원 쌍부촌에 장례를 모시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그 연관성을 알려주고 있다. ),양파 정태화(陽坡 鄭太和, 1602∼1673, 영의정, 한각리), 하계 김상로(霞溪 金尙魯, 1702∼?, 영의정, 쌍봉산록 청풍김씨 묘역) 등, 세 명의 정승(政丞)이 관계가 되어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위 삼정승설은 최근의 연구에서 이들 세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삼괴의 일반적 뜻인 삼공의 뜻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지역과 연고를 맺었던 정태화의 할아버지 좌의정 정창연과 아버지 형조판서 정광성, 이조참판 작은아버지 광경, 좌의정 동생 정치화, 사촌 좌의정 지화(광경의 아들)와 영의정에 추증된 이기조, 청풍 김씨 김상로와 이조판서 김취로 등 정승판서를 역임한 많은 인물들이 쌍부에 인연을 맺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재상의 반열에 있다가 낙향하여 머물렀던 사적에 따라 삼괴 이전에 삼귀(三歸)라고 불렸는데 이는 '제나라 재상 관중이  늙어서 살았던 땅이 삼귀'였다는 안자춘추의 고사에 따라 위의 여러 정승판서의 고관들이 쌍부에 머물렀다는 역사성으로 삼귀로 불렸을 거로 추정된다. 이러한 삼귀가 근현대에 이르러 일제침략에 맞서 민족,민중운동과 교육운동이 활발한 가운데 지역의 애향애족의 정신을 살린 이야기로 삼정승설이 나오고 이때 삼귀라는 지명도 이들 삼공들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명사인 삼괴로 되었을 거로 추정된다. 

    위 인물중에서 현재 만나볼 수 있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영조 때 사도세자의 처벌에 관여하고 영의정까지 오른 김상로의 무덤이 우정읍 조암1리에 있다. 영조실록에는 1747년 영조23년에 이조판서 김상로가 쌍부현에 있던 쌍부창을 없애고 산을 장지로 삼았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쌍부창이 있던 산은 쌍부산(현재 쌍봉산)으로 지금의 무덤자리가 이미 이 때에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백년 된 느티나무(槐木)가 어은리, 금의리, 화산리에 있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화산리 사기말 3.1운동 당시 우정면사무소 터, 독정리, 덕다리 등 지역 마을 곳곳에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들이 있음)

  또한 지리지 등에 보이는 건치연혁에 따르면 삼국시대 여섯개의 포구가 있어서 육포(六浦)라 불렸고 이후 신라 경덕왕 때 쌍부현(雙阜縣)이 설치 되어 인조 22년(1644) 남양부(南陽府)가 현(縣)으로 강등되면서 쌍부현도 패현(閉縣)이 되었다. (한정택, 1991 『국향』석천초등학교 교지편집위원회 pp. 72~77 참조.)

 

  雙阜西南六十里本百濟六浦景德王改雙阜爲唐城郡領縣貞松西南三十五里本百濟松山景德王改貞松爲唐城郡領縣 右四縣高麗顯宗九年來屬 -김정호, 1864『大東地志』권2, 「京畿道四都-水原府」참조.
  쌍부현(雙阜縣) 부(府)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날 육포(六浦)이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권9,「水原都護府」참조.)
  사헌부에서 천거를 잘못한 예조 의랑 김저를 파직하자고 청하니 윤허하다. 사헌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쌍부 감무(雙阜監務) 백천우(白天祐)가 글자를 알지 못하여서 그 직무에 맞지 않으므로 안렴사(按廉使) 조박(趙璞)에게 내쫓겼습니다. 청하옵건대, 그를 천거한 사람 예조 의랑(禮曹議郞) 김저(金祗)를 파면시켜 뒷세상 사람을 경계하소서.” 이를 윤허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1월 11일(무자) 2번째기사
  경기좌도 처인현의 겸관인 쌍부현을 혁파하여 도로 수원부에 소속시키다. 좌도(左道) 처인(處仁)의 겸관(兼官)인 쌍부현(雙阜縣)을 혁파하여 도로 수원부(水原府)에 붙였다.-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1월 19일(경인) 12번째기사

 

  이 쌍부현의 글자 뜻에서 보듯 '두 언덕이 있는 현'이다. 우리지역 중심에 낙타의 등과 같이 생겼다던 지금의 쌍봉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 고적이나 기록을 살펴보면 삼귀나 삼괴보다도 훨씬 오래 널리 일반적으로 사용된 명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쌍봉산은 우정읍과 장안면 지역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앞산 정상에 오르면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렇듯 예부터 우리 지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따라서 쌍부는 삼귀,  삼괴 보다도 더 오랫동안 우리지역을 부르던 명칭이었다.

  신라 때 설치되었던 쌍부현은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된 치현이 아니었다. 따라서 주변 남양이나 수원의 큰 고을에 속해있는 속현이었다. 속현은 지방관리가 파견되지 않으므로 인근 큰 고을(주현=영현) 지방관리에게 지휘를 받아 향리들이 운영하므로 고을의 격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지방관이 파견되는 고을보다 조세수취의 피해가 컸고 향리들의 폐단이 적지 않아 백성들의 고충이 심하였다. 특히 고려 중기부터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이들 속현에 차츰 감무를 파견(1106, 예종 1년)하게 되었다. 감무는 말단 지방관리인 현령 아래의 임시직책이었으나 차츰 정비되어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군현제를 강화하며 태조는 속군현에 감무를 대거 파견해 지방통치를 강화하였다. 태종 때 이르러서는 감무가 현령 아래 현감(종6품)으로 개칭되었다.(1413, 태종 13년)   

  쌍봉산 서쪽 우정읍 조암리에 낡은아실이라는 마을 옛이름이 전한다. 이곳에 사는 마을 어른들은 낡은 관아 건물이 있었다고 하여 낡은아실이라고 부른다고 하니 예전 쌍부현의 관아가 이곳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 때 쌍부현에는 사정처가 있었다. 지금의 원안리와 화수리 일대인데 처는 왕실 등의 제반비용을 위한 농장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양인이지만 처간으로 불리며 차별을 받았고 요역과 공물을 납부하며 어렵게 지냈다. 이웃한 팔탄면 해창리에는 공이향이 있었다. 향 역시 차별을 받았던 지방의 현 아래의 하급행정단위로 주민들은 신분적으로 노비라서 처보다 더한 차별을 받았다. 한편 쌍부현은 이전에 육포 지역으로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수주(수원) 조운의 거점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쌍부현에 조운을 위한 창고로 쌍부창이 있었다. 공이향이 있던 팔탄면에 해창리에는 해창이 있었다. 그런 전통으로 지금 지명이 유래하였다.

  해상교통이 용이하다는 것은 해상위험도 그 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특히 고려말 왜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1351년(충정왕3) 쌍부현에 130척의 왜선단이 인주(인천) 자연도와 삼목도를 침탈하고 남하하여 남양부와 쌍부현을 불태웠다는 왜구침탈의 사실이 있다.(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도 쌍부현의 기사가 보이는데 태조실록 태조1년(1392) 기록에 쌍부감무로 백천우가 있었고 글을 읽지 못해 파직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쌍부현에는 일시적으로나마 감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종실록 정종1년(1399)에 처인현(현 용인시) 겸직을 혁파하고 수원부로 귀속시켰다는 기사로 볼 때 쌍부현에는 단독 감무가 파견되지 않고 겸직의 감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쌍부현은 독립되지 못한채 인근 부군현에 딸린 속현으로 오랫동안 남아있다가 조선중기 이후 폐현이 되면서 면으로 분리되는 행정체계의 변화에 따라 남양부나 수원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 조선면제 시행에 따라 수원군에 속하여 우정면과 장안면으로 분리 되었다.

  오랜지명인 쌍부와 삼귀, 그리고 1900년대 초부터 불리기 시작한 삼괴는 일제시기와 해방시기까지 혼용되다 현재는 쌍부와 삼귀는 잊혀지고 대신 삼괴가 주요 지명이 되고 쌍부의 변형인 쌍봉이 불리고 있다.

  우리 지역의 중심상권은 5일장(4, 9일)이 서는 우정읍 조암리이며 조선 후기 장안면 사곡리에 있던 '사슬곶장'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조암장이 개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산품으로는 바다에 접하여 바지락, 낙지, 맛조개, 숭어, 망둥이 등 어패류가 풍부하고 바다를 메워 간척된 일명 남양황라(옛 분양만 간척지 현 남양호 주변)에서 나오는 간척지 쌀이 특히 유명하다. 화성 간척지 쌀은 자연재해가 적고 따라서 병충해도 적어 농약사용이 적은 품질 좋은 쌀이다. 이밖에 알타리, 초록무 등이 많이 재배된다. 

 

 

 

  수촌리를 나와 찾은 곳은 가재3리 가재울이다. 이 마을은 3.1운동 당시 화성지역의 정신적, 사상적 지도자인 탄운 이정근 선생의 생가 터가 남아있는 곳이다. 43번 국도를 타고 수원에서 향남으로 가다보면 해병대사령부와 진우아파트를 지나 오른쪽에 덕우공단이 나오는데 그 옆에 있는 마을이다. 이정근 선생의 생가 자리의 주소는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 350번지이다.

  예부터 가재리는 전주이씨 조선 덕원군파로 덕원군의 넷째 숭선군을 입향조로 하여 동족촌을 형성하고 있는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이정근 선생 생가와 그 바로 위에 입향조 숭선군의 호인 마재를 딴 마재사당이 있다. 가재리는 삼태기를 닮은 지형이라서 가재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실제로도 마을 작은 구릉이 동편만 빼고 빙둘러 있었다. 수촌리와 다르게 포근하고 정겨운 지형과 마을 분위기다. 그렇지만 이 마을도 역시 화성의 고질적 문제 무분별한 공장난입과 난개발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현재 이정근 선생 생가 터는 이정근 선생 손자 이신재의 6촌 이광재가 살고 있으며 당시에는 초가집이었으나 현재는 양철지붕과 벽돌로 개량하였다. 그렇지만 집의 뼈대는 당시 옛집 그대로라고 한다.

  이 집이 바로 화성지역에 서당을 열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가를 손수 지어 가르쳤다고 하는 이정근 선생의 집이자 서당이다.(마을 유래와 생가를 이광재 선생이 안내)

 

  탄운 이정근(灘雲 李正根) 선생은 세조의 3자 덕원군의 14대 손이고 1856년 2월 10일 이인규의 둘째 아들로 팔탄면 가재울에서 태어났다. 19세에 결혼하여 농사를 짓고 한학 익혔으며 28세 인근 마을로 다니며 한학을 가르쳤다. 33세 궁내부 주사가 되어 처음 관직에 나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 버리고 백립을 쓰고 고향에 내려왔다.

 

국민의 자가, 자성, 자주없이는 이 시점에서 어느 한 사람이 나선다 해도 감히 마음뿐일 것이요 내가 졸연히 낙향한 것은 제공들의 힘을 입고져 온 것이요 제공들과 손을 잡고 근동사람들과 합치고 이 힘이 근역으로 뻗쳐서 자주자립정신을 깨우친다면 그것은 천군만마보다 더 큰 국력이 될 것이요 우리는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하고 새로운 문물을 하루바삐 받아 들여야 하오 민족갱생 나아가 구국의 길은 오직 민중을 가르치고 이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는 길밖에 없오
-출처 이호헌, '3.1운동의 횃불 탄운 이정근 의사', '화성문화' 창간호, 화성문화원(1986) 35~36쪽

  선생의 낙향소식을 듣고 모여든 제자들 앞에서 밝힌 소회이다. 이후 15년간 청년들을 가르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투쟁을 위한 비밀조직을 구축하였다. 당시 이정근 선생은 서당을 열어 교육하였는데 이는 개량서당으로 전통적 관념에 입각하기 보다는 근대적 민족주의, 만민 평등사상을 수용한 근대적 성격의 교육기관이었으며 이러한 개량서당은 1910년대 농민들에게 민족적 자각 및 의식의 큰 역할을 담당한 민족교육의 온상이었다. 수원지역의 3․1운동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농촌지식인들이 신문을 읽고 격문, 통문을 만들고 운동을 조직화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당교육을 통한 의식화였다. 이처럼 이정근은 개량서당의 훈장이며 전통적 개념의 유학자가 아닌 개화유림이었다. 이러한 민족사상을 바탕으로 이연규, 이우현, 권종대, 김영태 등 제자 30여명으로 하여금  팔탄면, 향남면, 봉담면, 정남면, 우정면, 장안면, 남양면 등에 서당을 세워 “왜왕 3년”(야만적인 침략자 일제는 천벌을 받아 삼년이 못 가서 망한다는 뜻)고 가르치고 손수 독립가를 지어 부르게 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민족교육운동이었다. 따라서 이정근 선생의 교육의 목적은 민족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1919년 고종 승하 소식에 들은 선생은 이는 일제에 의한 독살로 믿고 격분하여 제자들과 동지들을 규합 백립을 쓰고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서울을 향해 망곡제 드렸다. 아울러 서울 동지에게 전달 받은 독립선언문을 복사하여 수원지역 800여명 동지에게 전달하며 3.1만세운동을 전하였다. 선생이 주도하였던 3월 31일 발안장터 시위가 있기 전에 우정, 장안면의 만세운동 주도자이자 수촌리 구장이자 천도교 전교사 백낙렬과 향남면 제암리 안정옥, 팔탄면 고주리 전교사 김흥렬과 함께 만세운동 모의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서 이야기했다. 이렇듯 향남지역과 삼괴지역의 대표 항쟁인 발안장터 시위와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은 동일한 주도세력이 모의하고 진행되었던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만세운동이라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주요인사들은 선생과 자주 만나 친교를 나누는 한편, 3월 31일이 발안장터 시위에 인근 수촌, 제암리 고주리 주민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만세시위 전 남자들에게 백립이나 갓에 흰천을 두르게 하여 고종의 국상을 엄숙히 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시위에 앞서 '독립가'를 지어 제자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1 5 년을 참고참아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매
대한국은 다시왔네
어두었던 방방곡고
독립만세 진동하게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세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출처 이호헌, '3.1운동의 횃불 탄운 이정근 의사', '화성문화' 창간호, 화성문화원(1986) 36쪽

 

드디어 장날 장터에 나서서 연설을 하여 시위를 독려하였다. 시위대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면서 길가에 들어서 있던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이와 같이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긴급출동한 순사와 수비대가 발포하며 해산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죽기를 각오하고 제자들과 만세를 부르며 안상용, 안진순, 안봉순, 김덕용, 강태성 등1천여 군중을 앞장섰고 발안주재소에 이르러 앞을 막아서는 일제헌병들의 총검에 복부를 찔려 63세의 나이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되었고 1994년 대전 국립현충원 제2애국지사 묘역 제234호에 모셨다.

 

선생은 온유하고 겸손하시면서도 근엄하시고 매사에 결단성과 책임성이 강하셨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매로 다스리지 않고 잘못된 핵심을 낱낱이 지적하시면서 타이르심에 급기야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그 과오를 재차 범하지 않게 되었다. 도 힘든 일을 먼저 솔선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충자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정신을 가르치셨다. 수원군민이 의에 가였던 것도 선생에 감화된바 컸다.-제자 김영태 회고
(출처 이호헌, '3.1운동의 횃불 탄운 이정근 의사', '화성문화' 창간호, 화성문화원(1986) 36쪽)

 

  탄운 선생이 팔탄과 향남은 물론 우리 삼괴지역까지 그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힘써 꾸리고 가르쳤던 개량서당은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계몽운동의 구심점이었고 화성의 3.1정신의 요람이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그 정신을 받들고 계승하고자 한다면 이 이정근 선생의 생가이자 서당을 복원하고 여기를 통해 교육되었던 화성정신을 우리시대 다시 발현할 수 있도록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창하게 바람을 말했지만 우선은 적어도 표지판이나 표지석을 만들어 이정근 선생 생가와 서당을 알리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이정근 선생은 발안장날 시위와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에서 정신적 사상적 지도자이다. 이미 서당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자신의 충정과 함께할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고 사귀었으며 이를 토대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끌어 발안장날 시위와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으로 이어져 일제에 곤혹스럽게 하였다. 결국 이는 참혹한 보복과 함께 제암리 사건이라는 극단적 학살로 이루어지지만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에서 선생의 역할은 3.1화성정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민족독립정신의 스승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향남을 들어가는 43번국도 변 오른쪽(향남읍 장짐리 241-6번지)에 '탄운 이정근의사 창의탑'을 세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탄운 선생의 공을 기렸다. 이 탑은 1971년 3월 30일 한글학자 한갑수, 김석원, 최덕신, 시인 묘윤숙 등 33인이 발기하여 건립하였다. 손자인 고 이신재(전 경기도 광복회 고문)의 집이기도 하다. 

  고인이 된 손자 이신재는 할아버지 이정근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2003년 탄운 이정근의사장학회를 설립하여 장학사업을 펼치는 한편 2010년 1월에 탄운 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를 설립했다. 또한 그의 아들 이호헌은 현재 교사를 하며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남부지부장과 경기본부 부위원장을 맡아서 일하고 있어 후손들이 선생의 뜻을 받들어 사상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탄운 이정근 의사 창의탑에서 4번 절을 올려 절을 하였다. 답사를 다닐 때면 늘 무덤이나 사당, 절 등을 자주 만나는데 그럴 때면 드는 생각이 "절을 할 때 1번은 산 사람에게, 2번은 죽은 이에게, 3번은 부처님에게, 4번 임금에게 한다는데" 그러면 나라를 위해 자기 몸을 들어 살신성인을 한 위인들은 부처님이나 임금보다도 훌륭한 분들인데 그분들에게는 어떻게 절을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든 생각이 최고의 예로 임금처럼 4번의 절을 올리자고 했다. 지금은 주권재민에 따라 국민이 왕이니 그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왕중왕이 위인이니만큼 4번 절을 하는 것이 좋겠다싶어 지금은 4번씩 절을 한다.

  그리고 절에 가서는 3번, 그저 흘러다니다 만나게 되는 무덤에는 2번 절을 하며 예를 표한다. 물론 답사를 하며 절을 하는 것은 때론 큰 절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손을 모아 허리를 숙이는 반배만 한다.

 

  창의탑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안중방향으로 1.5km 쯤 가면 향남읍 평리사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한 100여m 내려가면 옛날 발안 구시가지가 나온다. 거기 서편에는 건달산(乾達山, 336m)에서 발원하여 발안저수지를 거쳐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휘돌아 발안을 감싸듯 남서쪽으로 흘러내려가는 발안천(發安川)이 흐른다. 여기서부터 발안천변은 남양황라(남양간척지)로 이어지는 데 이 곳은 예전 분향만(汾鄕灣)로 화성시 장안면과 우정읍이 평택시 청북면과 포승면을 마주보는 곳이다. 1976년 남양방조제 공사로 담수화가 되어 남양호를 이루고 있다.

  발안천을 중심으로 동쪽은 발안 평리, 서쪽은 우림아파트와 주공아파트 단지를 이루는 발안리이다.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발안1교이다. 따라서 발안1교 평리에는 3.1운동 당시 발안주재소와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 맞은편으로 발안장터가 있었다.

  현재 발안파출소 자리(향남읍 평리 107번지)가 3.1운동 당시 발안주재소 자리이다. 이곳은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1, 2차에 걸친 대대적인 검거반 활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제암리 사건을 일으킨 아리타가 이끄는 소대도 발안주재소에 머물면서 동향을 살폈다.  따라서 발안주재소는 근방에 중심되는 침략기구이자 화성주민를 탄압한 중심기구이다.

  발안주재소는 처음 1910년 8월 29일 수원군 발안리 일본군 분견소가 설치되고 발안주재소로 변경되어 1945년 해방까지 이어졌다. 지금의 파출소는 1955년 발안지서가 설치되고 줄곧 이어진 것이다.

  일제의 침략기구인 발안주재소가 있던 터에 민중의 지팡이라고 자칭하는 경찰, 그 경찰이 머무는 파출소가 있는 모습을 보니 우리나라 현대사와 맞닿아 있는 과거사의 찝찝함이 느껴진다. 일제 치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친일경찰들이 해방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이되어 반민족행위처벌법(1948. 8) 통과 이후 설치된 반민특위를 무단으로 공격해서 해체시켰던 친일세력..  오늘날까지도 과거사 청산을 못하는 큰 이유이다. 더욱이 해방이후 현대사 공간에서는 친일독재 및 군부정권의 권력의 그늘에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데 앞장 섰던 역사를 생각할 때 발안주재소 터에 있는 파출소의 모습이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태생적 한계라고 할까..

  물론 국가공권력을 무시하고 농락하자는 생각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경찰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곳에도 그날의 그 함성을 알려줄 표지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발안주재소 맞은편 평리106번지 현 보디가드 자리는 발안지역 거류민 단장이었던 사사카 리키치(佐坂)가 살았던 집터이다. 평리는 아직까지 개발이 심하게 되지 않아 그런대로 옛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거리이다. 좁은 길 사이로 다닥다닥 붙은 집과 상가들 예전 시가지 그대로다.

   요즘보기에는 좁고 구불구불하니 아주 불편한 길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처럼 넓고 잘 뚫린 길은 드물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길을 '신작로'라고 불렀다. 물론 예전에 도로가 없던 것은 아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각 지역과 지역을 사람이 걷는 도보로 거리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제시대 이전, 조선에도 도로는 있었다. 다만 지금과 같은 넓고 직선에 가까운 도로시설이 아니라 구불구불 비포장에 좁은 길이었다. 

  이 신작로 개발은 우리가 식민지가 되기 전부터 을사조약 이후 설치된 통감부의 내부(內部) 치도국에서 '도로개수계획'을 세우서 추진된 변화이다. 이는 1910년 강제합병이 되고는 총독부에 넘겨져서 1911년 4월 '도로규칙'을 시행하면서 계승된다. 이는 중요도로 1등도로와 그 1등도로에서 교차하거나 갈라지는 간선도로인 3등도로(達路)를 만드는 근대화된 도로교통 체계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발안은 수원도로에서 갈라져 나오는 43번국도와 남양지역으로 가는 317번 지방도로 및 39번국도, 그리고 오산으로 가는 88번 지방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중심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처럼 일제시대의 변화를 두고 뉴라이트계열의 경제학자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부른다. 일제가 식민지를 만들고 근대적 개발을 통해 우리가 경제문화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는 좋은 의미에서다. 하지만 이처럼 일제가 도로도 뚫고 기차도 놓고 항구도 만든 것은 단순히 문명화를 위한 근대화정책이 아니었다. 이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물자를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근대적 시설들을 구축한 것이다. 따라서 교통, 통신부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식민지수탈론'이라고 한다.

   예전 좁은 길에 일제 때 넓게 새로 뚫은 신작로 사이로 상점과 집들이 들어섰다. 당시는 우리가 전통사회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터라 이 정도의 길도 상당히 넓고 인상적인 변화였다. 지금은 구시내의 정리되지 않고 좁고 답답한 인상을 주지만 말이다.

  이곳에 살았던 사사카는 그의 동생과 함께 3.1운동 당시 이미 발안에 들어와 거주하며 정미소를 운영하고 인근 진위군 청북면 삼계리에 간척사업을 하고 있던 사업가이다. 그의 동생은 발안장터에서 정미소를 해방직후까지도 남아서 운영하였다고 한다.

  이 사사카 리키치가 바로 1919년 4월 15일 참혹했던 제암리 학살사건의 주요 가담자이자 제암리로 안내했던 길잡이었다. 당시 일제측 출동보고에 따르면 제79연대 아리타 중위는 4월 12일 발안으로 들어와 발안 주재소 순사보 조희창과 같은 친일파 및 일본인들과 접촉하며 정보수집을 하였고 그 결과 3월 31일 발안장터 시위 발발, 4월 3일 우정, 장안면 만세시위, 이어 또 다시 발안장터에서 대규모 시위가 또 날 것이라는 첩보로 긴장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면서 뭔가 확실한 보복이자 본보기가 필요했다. 이 때 발안리에 이웃한 안씨 집성촌인 제암리에 불령선인들이 많이 산다고 사사카의 중요 제보를 하였다. 이와 함께 제암리에 살던 순사보 조희창도 동조하므로 제암리가 표적이 되었다. 조희창은 3월 내내 제암리의 동향을 발안주재소의 이노우에 순사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또한 실제로 이곳에 살던 안종린, 안상용, 안진순, 안종후, 홍원식 등 다수의 주민들이 이정근과 마찬가지로 발안장날 시위의 주동자였다. 특히 홍원식(洪元植,1877-1919)은 한말 제대군인으로 1907년 일제가 군대해산을 하자 일제에 항거하며 정미의병에 일으켰고 이후 낙향하여 같은 동네 안종후, 고주리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하는 등 조직적으로 민족독립운동에 애썼던 사람이다.  따라서 일제는 제암리와 고주리의 천도교 및 개신교 사람들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결국 이들에 대한 대대적 보복을 자행하고 본보기로 보일 것을 결정하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사카였다.   

  이처럼 사사카가 적극적으로 보복에 나섰던 것은 바로 3월 31일 발안장터 만세시위 때문이었다. 당시 거친 시위대의 공격에 가옥과 소학교가 불타는 등 재산상 피해를 입고 안전 또한 보장되지 않는 극도록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결국 어린이와 부녀자 등 43명을 데리고 자신의 사업장(농막)이 있는 삼계리로 대피시켰다. 이때 한인에 대한 분노가 상당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분노가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사카는 1906년 9월 14일자 관보에 따르면 러일전쟁 서훈자 명단 보병1등 졸, 훈8등 백색동엽장 받은 군인출신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경제적 이득 좇아 정착한 곳이 조선이었고 발안이었다. 사사카는 제암리 사건 직후 가산을 정리해서 떠났다. 

 

   발안주재소와 사사카의 집이 있는 평리에서 바로 발안천 건너가 바로 1919년 당시 3월 31일 만세시위로 유명한 발안장터이다. 발안장은 조선후기 지리지인 읍지 등에 수원지역의 주요 장시로 소개되어 있는 데 1899년 편찬된 수원군읍지 장시(場市) 조에 보면 수원군 지역의 시장과 개시일은 남문시장이 4일과 9일, 오산장 3일과 8일, 안중장 1일과 6일, 발안장이 5일과 10일에 열리는 5일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당시의 전통에 따라 지금도 발안의 장날은 5, 10날이며 다만 1937년 전후로 음력과 양력으로 바뀐 차이가 있다.

  발안장은 서해와 가까워 많은 해산물이 거래된 장시였고 우정, 장안면은 물론 인근 양감, 팔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장시였다.「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이미 1770년에 장시가 개설되고 있었다. 우리 쌍부지역에는 지금의 장안리 사곡리에 '사슬곶장'이 생기고 조암장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 발안천변인 발안장터는 아주 오랜 옛날인 삼한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지금 들어서 있는 우림아파트와 주공아파트 자리에 백제시대에 걸친 마을유적(취락)이 발견되었는데 주거지가 55동, 도랑 44기, 굴립주건물 23동, 소형 수혈 111기가 조사되었다. 이 발안리유적에서는 삼한시대 대표적 토기인 중도식 경질무문토기가 다수 발견되어 이 마을이 형성된 시기가 삼한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중도식 경질무문토기는 붉은색을 띄는 토기로 춘천시 중도지역에서 처음 발견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중부지방에 널리 분포한다. 철기시대였던 삼한시대를 앞선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보다 개량된 것이며 붉은색을 띄는 것은 지붕과 벽채가 없이 트인구조의 가마에서 산소가 활발히 공급되며 낮은 온도로 구워졌기에 나타난 특징이다. 이밖에 한층 더 발달된 타날문토기가 출토되며 한성백제시기에 백제계통의 주민들이 이어져서 살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발안지역 최초의 입주민들인 것이다. 이러한 발안리유적은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택지개발을 주도했던 토지공사에서는 개발이전에 기전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문화재발굴을 하였다. 당시 학교 선배와 후배들이 있어 잠시 찾아가서 발굴도 하고 유적을 살펴봤었다. 그 때 수많은 유구(유물구덩이)들이 조사가 됐거나 조사중이었다. 유구마다 하얀 페인트로 그 가장자리를 칠하여 표시가 된 모습이 얽히고 섥혀 복잡하면서도 일정한 모습들이 매우 아름다웠다. 고고학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유적을 발굴하면서 출토되는 유물과 함께 많은 유구들이 분포된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이곳의 발굴을 마치고 당시 유적의 가옥과 수혈을 몇몇 복원하여 공개했다. 하지만 화성시의 관리부재와 시민들의 무관심, 일부 청소년들의 탈선 공간이 되어 기둥이 뽑히고 불에 그을리고 곳곳이 부서지며 깨져 거의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한숨만 나온다.. 

 

  발안장날 시위는 그간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장날 시위 일자대한 논란과 3월 말 시위 이후 4월 초 시위가 있었냐는 것이 핵심인데 그간의 연구가 진작되고 일제측 기록을 통해 알려진 사실은 발안장날 시위는 3월 31일 음력 2월 30일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간 발안장날이 5, 10일인데 3월 말 장날 시위라고 하면 3월 30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은 당시 음력으로 달력을 보던 생활습관을 감안하지 못하고 지금의 시각으로 파악한 결과였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력을 세었으니 1919년 3월말 장날은 음력 2월 30일 즉 양력 3월 31일이 시위 날짜가 되었다. 이러한 논란에 중심에는 일제측에 분명히 3월 31일 장날에 시위가 있었다고 명백하게 기록이 나오지만 해방이후 3.1운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증언과 녹취록을 중심으로 정리와 연구가 되면서 빚어졌던 문제였다. 또한 4월 초 혹은 4월 5일 시위설도 당시 흉흉했던 분위기에 떠돌았던 소문이었고 일제측 기록에도 첩보로 접하였다는 기록만이 보인다. 뿐만아니라 4월 5일은 4월 3일에 우정, 장안면에서 대규모 만세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경기도 안성 양성방면으로 출동하였던 하세베 대위의 검거반이 귀대 후 급히 발안으로 달려온 시점이다. 하세베가 이끄는 1차 검거반은 먼저 삼계리에 피신했던 일본인 43명을 다시 발안으로 데리고 와서 보호하고 4월 3일 시위 이후 대규모 시위를 억제하고자 출동한 차였기에 또 다시 발안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이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만약 이때 또 다시 발안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면 일제의 수비대의 병력 규모를 볼때 무차별적 진압이 이루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첩보와 달리 평온하여 4월 5일 하세베가 이끄는 검거반이 삼괴지역으로 들어가 수촌리 및 화수리 일대에 대대적 보복과 검거 작전을 펴는 한편 마을 곳곳의 집들에 방화를 하여 그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간 논란을 빚었던 3월말 발안장날 시위는 3월 31일 발안장날 이루어졌으며 4월 초나 4월 5일 발안시위가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1919년 3월 31일, 그날은 발안장날이었고 천여명이 넘는 인근마을사람들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고 '대한독립만세'라는 함성이 드높았다. 거리의 일본인 가옥들은 돌팔매를 당하고 일본인 소학교에는 불이 났다. 식민지 약소국으로 설움을 받던 군중이 폭발한 것이다.. 이들을 폭민이라고 부르며 해산 시키고자 총검을 휘두르던 일제경찰들과 뒤엉켜 참혹했던 그날, 그 함성이 아직도 귀에 멍먹하다. 그러나 오늘 찾은 발안장터는 이미 장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부 가옥과 골목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지만 그날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많이 변했다.

  발안리는 현재 택지개발의 일환으로 우림아파트와 주공아파트가 들어서고 화성시립보건소 및 인근 빌라촌이 형성되어 예전 그 장터의 모습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현재도 발안(향남)에는 장이 열린다. 그러나 장터는 아니고 평리 구시가지에서 양력으로 5일과 10일에 가판에 장이 선다. 현재 발안 인근지역에 많은 중소공장이 들어서면서 많은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평일 구시가지는 외국인들이 주로 시장을 보거나 유흥을 하는 거리로 바뀌었다.

  현지의 주민들은 대부분 새로이 개발된 향남택지 지역 아파트 밀집상가지역으로 옮겨간지 오래다. 늦은밤 평리 발안 구시가지에 버스를 타고자 걸어가다 보면 마치 외국에 나가 밤길을 걷는 착각이 일 정도로 외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좀처럼 주민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 다문화 등 많은 사회적 현안이 이야기 되고 있고 활동이 있는데 사람사는 길 어찌보면 한데 어울려 자유롭게 사는 것이 정답일텐데 다문화나 이주노동자라는 사회현안문제로 늘 접하다 보면 아직도 우리와 다른, 이질감과 꺼리게 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지역, 나아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내일을 위한 중요한 문제인 건 확실하다. 저들이 우리가 되는 내일.. 희망일까?  적어도 혼란은 아니겠지.. 

 

 

 

  82번 국도를 타고 조암방면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넓은 저수지와 그 뒤로 우뚝 솟은 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무봉산이고 그 앞에 있는 마을이 석포리 차씨마을(석포2리)이다.

  차씨마을은 연안을 본관으로 하는 차씨들의 집성촌이며 입향조는 세조 때 무신 차운혁이다. 조선조 말의 행정구역은 수원부 수(화)방면 지역으로서, '돌소지'또는 '석포' 라고 했는데, 고종 32년(1895) 남양군 장안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원(화성)군 장안면 석포리(石浦里)가 되었다. 옛부터 '돌이 많은 포구'라 하여 '석포리'로 불렸다.

  이곳 석포리는 3.1운동 당시 시위를 주도한 주요 인물로 구장 차병한과 8촌형제 차병혁이 살았다. 그래서 지금도 무봉산자락에는 차병한의 무덤(산9번지)이 있다.(묘표 '애국지사 연안차공병한지묘') 화성의 애국지사 대부분이 후에 후손들이 모두 대전 현충원의 묘역으로 옮겨 모셨는데 드물게 찾아볼 수 있는 애국지사 묘였지만 이날 시간상 이유로 찾지 못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밖에..

  사실 문화유산을 찾아 답사를 하다보면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유명 문화재 등은 그에 반해 찾기 쉽고 정보도 많지만 오늘 찾는 유적지는 모두가 오랜세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자리만 남아있는 곳에 대부분이다. 그 자리도 단순히 자리로 있는 것이 아닌 밭이 되었거나 혹은 운동장이나 공원 등이 되어 예전 모습을 조금도 유추할 수 없는 변화가 심한 곳이다. 이런 곳을 작은 단서를 쥐고 찾아나서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특히 무덤 등은 산자락에 올라 일일이 비문을 살펴야 하는 수고가 있다. 이것도 비석이 있는 경우라면 쉬운 편이며 비석도 없고 특징이 없는 묘는 사실상 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후손들이 종종 조상의 묘를 잃어버리기도 하여 예전부터 산송이 끊이지 않았기도 하다. 그래서 애초부터 애국지사 차병한 선생을 찾아보자 생각은 못했다. 오늘 일정을 생각하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어 답사를 못 마칠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여러 곳을 경유하는 것이 아닌 한 개 혹은 연관된 두 개 정도만 경유해도 상당한 시간이 되기 때문에 단독으로 답사를 한다. 여행적 의미보다는 조사차원으로 자료수집이 주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차병한 선생묘는 다음에 따로이 시간을 내어 찾을 것을 기약한다. 이처럼 무덤 뿐이 아니다. 문화재를.. 문화유적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우리가 왕들의 역사, 왕조사와 중앙사에 익숙하다. 최근에 옛사람의 삶과 역사를 생각하고 그 대상과 영역이 확대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왕들도보다 아래였던 사람들의 흔적은 남기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 하물며 그 흔적을 찾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게 아니다. 쉽지 않아서 공부할만하고 찾아다닐 만 한 것이 나의 역사나들이다.

  나의 답사는 이렇다. 걷고 걸으며 보고, 들으며 느끼고 생각하는 역사나들이.. 달이샘의 역사나들이..

 

   당시삼괴지역에서 4월 3일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조직적 항쟁이 가능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1919년 3월 27일 구장회의이다. 이때 차병한은 수촌리 백낙렬, 어은리 이시우(李時雨), 독정리 최건환(篤亭里 崔建煥), 장안리 김준식(金俊植), 덕다리 김대식(金大植), 사랑리 우시현(禹時鉉), 사곡리 김찬규(金贊圭), 금의리 이호덕(李浩悳), 노진리 김제윤(金濟允)의 아들 등 10명에게

   “수일 전 발안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체포된 사람을 아이다 게다(일본식 나막신)로 구타하는 것을 보고 분개를 견딜 수 없었다.”

라고 말하면서 만세시위를 하자고 주장했다.

  이처럼 석포리의 구장이었던 차병한은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4월 3일 아침에 차병한은 소사(사환) 엄성구를 시켜

   “차희식이 장안면사무소로 가니 우리 마을도 동참한다고 전하라”

고 하며 주곡리 차희식과 합세하고 주민들을 모았다. 또한 시위에서 차병혁과 우정면사무소로 앞서서

  “우정면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자”

고 하며 시위 동참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아울러 차병한은 차병혁과 함께 장안면장 김현묵의 시위 동참을 강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차병한이 나서서 석포리 주민들을 독려하며 적극적으로 항쟁나섰다는 것은 수촌리의 차인범의 심문조서에도 볼 수 있다.

  “차병한은 다수에게 명령하며 지휘하고 있었다.”

  장안면장 김현묵은

  “석포리 사람들이 머리에 띠를 하고 주도적으로 하고 있었다.”

고 밝히면서 석포리 주민들이 4월 3일 시위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포리와 달리 소수만이 참여한 주곡리는 차희식을 중심으로 장제덕, 장소진, 김흥식 등이 행동대가 되어 화수리 주재소를 공격하고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김흥삼과 김덕삼은 심문조서에서 차희식과 그 동지들이 주민을 선동하고 지휘했을 뿐 아니라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할 때 주도적으로 나서서 참여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차희식(車喜植,1870. 11. 10-1939. 11. 7음) 선생은 연안차씨로 석포리 차병한과 차병혁과는 종형제이다. 이들 보다 한 항렬이 높다. 공부를 하지 못해 글을 몰랐으며 성격은 쾌활하고 교재력이 있었고 장사였다. 당시 구슬리(주곡리)에 살았는데 처가가 전주이씨 양영대군파로 구슬리에 살았기 때문이다. 1915년 수원경찰서에서 도박죄로 태형 60대의 처분을 받았다가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3개월을 받아 형기를 마쳤다. 이러한 전력으로 1918년 부임한 가와바타(川端)순사는 도박 재발을 주의 시키고 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차희식 선생은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당시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바탕하여 거사한다."

고 주장하고 있어 무학문맹이었지만 그의 높은 역사적 인식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기개이다. 이러한 점은 아마도 석포리의 차씨들의 영원한 조상 차운혁의 영향이지 않을까 한다. 그 구체적 이야기는 아래서 이야기 하겠다.

   선생은 4월 3일 항쟁이후 체포되어 일제로부터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9년 2개월 만에 출소하였다. 오랜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는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10년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3월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본 블로그 '3월의 독립운동가 차희식 선생'http://blog.daum.net/ilovepk/39참조)

 

   무봉산 아래 차씨마을은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듯 마을 앞 잔잔한 버들저수지가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이다. 마을  중심에는 차운혁의 연안차씨 사당이 있고 그 아래 537번지 차병혁 집이 있다. 현재 집은 현대식 주택으로 새로 지었고 당시 행랑이 남아있다. 행랑은 9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당시는 기와지붕을 얹었는데 지금은 슬레이트로 지붕이 되어 있지만 그 형식과 규모를 보는데는 무리가 없다. 이 큰 행랑에서 보듯 당시 차병혁(車炳爀,1889-1967 항쟁이후 검거되어 3년형을 받고 수형,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은 상당히 부유했다. 그는 멱우리에 살던 지주 송만영의 마름을 하였고 아버지 차상문은 포목상을 동생 차병억은 배를 이용해서 물건을 실어나르며 사고 파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넉넉한 집안이다.

  이렇듯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차병혁이 3.1운동 당시 종형제 차병한과 함께 석포리 주민들과 주도적으로 항쟁을 하였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의 형편에 따라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지만 옳음과 그름을 생각하고 바름을 가려는 것은 결코 주저하면 안될 것이다. 내가 어떤 형편인가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을 볼 수도 있는 안목, 그것이 함께 사는 길, 함께 사는 사람의 도리지 않을까 아무튼 차병혁은 부유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제의 식민지배에 따라 경제적으로 힘겨운 생활을 했던 우정, 장안 주민들과는 달리 생활이 넉넉한 처지였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사람을 돌아보고 우리의 처지, 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며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기개는 어딘가 조상 차운혁의 충절과 맞닿아 있다. 차운혁 역시 제 한몸 편하자고 했으면 그렇게 죽을리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참고로 차병한과 차병혁은 모두 한학을 하였던 지식인이다. 한학은 지금의 한문공부를 말하며 이러한 유학적 지식과 배움은 결국 충과 의, 효로 대변되는 조선 유학의 전통이니 당연히 집안의 충절 차운혁의 정신이 고스란히 이들 차씨들에게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대개 한학은 집안 어른이나 혹은 주변에서 학식있는 학자를 모셔 가르쳤던 가학(家學)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석포리 차씨들도 차병혁처럼 부유한 집에서는 선생님을 모셔 동네 친척 아동들을 모아 가르쳤을 것이다. 그 속에서는 당연히 삼강행실도도 공부했을 것이고 차운혁의 이야기는 아동들의 눈을 반짝이게 했을 것이다.

   차병혁의 이 큰 행랑에는 당시 일본인 간척사무소를 설치하여 서울에서 일본인 간척업자 나가노(永野藤藏)와 이시쿠라(石倉憲一) 등이 와서 수로를 만들고 개간사업을 하고 있었다. 또한 사사카의 동생(佐坂才吉)도 장안면 장안리와 맞은편 평택시 포승면 홍원리에서 방죽공사를 하며 주변 마을에 횡포가 상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당시 화성지역은 일본인들이 진출하여 일제에 못지 않게 민간의 경제적 침탈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수원지역은 조선후기 정조 대 많은 둔전이나 궁장토가 개간되면서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진출하고 1910년 강제병합이후 근대적토지소유권 확립이라는 명분하에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일제는 손쉽게 많은 토지를 장악하여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때문에 수원지역의 많은 농민들이 영세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당시 일제가 설치한 농장들이 동척농장, 동산농장, 국무농장 등이며 이밖에도 일제의 농회사와 개인소유의 소작지가 증가하는 추세였다.

  특히 석포리 등 장안면지역의 간사지는 간척을 하기에 좋아서 대부분 일본인들이 이 사업에 뛰어 들었고 간척한 토지는 개인농장으로 삼아 그 곳에서 어업에 종사하며 어렵게 살던 사람들을 자연스레 소작농으로 편입시키거나 생활터전을 어렵게 만들어서 그 피해와 불만은 상당했다고 한다. 특히 장안면사무소에 들이닥쳐서 주민들은

  “이젠 간사지에 가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

  "면장을 간사지에 처넣고 밟아 죽어버리라"

라고 했다니 당시의 경제적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석포리 주민들이나 장안, 우정면의 주민들이 더욱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922년 당시 조사에서 수원지역의 경작지 중 답(畓, 논)의 71.8%, 전(田, 밭)의 60.8%가 소작지이고 특히 삼괴지역인 우정면과 장안면의 상황은 우정면이 논(畓)의 71.5%, 밭(田)의 63.6%, 장안면은 논(畓)의 66.8%, 밭(田)의 62.9%가 소작지였다. 이와 같이 자가영농이 아닌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때문에 삼괴지역의 주민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대한 반감이 컸다. 이러한 반감은 결국 대규모 항쟁이 촉발되는 배경이었다. 

 

 

 

  마을 중심에 굽어보듯 위치한 차운혁 묘와  연안차씨(廷安車氏) 사당은 후손 연안 차씨들의 자랑이자 정신적 지주였을 것이다. 특히 차운혁(車云革, 자는 弘器, 호는 雙淸堂, 1393. 태조2년-1467. 8. 6 세조13년)은 조선 세조 때의 무신(武臣)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포로로 잡혀 이시애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절개를 지키며 1467년(세조 13)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공로로  난이 진압된 후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올랐다. 특히 중종9년 1514년에 중종은 친히 어제시 2수를 지어 내리고 대제학 신용개 등에게 명하여 새로이 추가 편찬하는 속삼강행실도의 충신편에 기재하게 하여 가문의 영광은 더욱 높아졌다. 이어 1841년(헌종7) 강열(剛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차운혁은 회령사람이다. 성화 정해년에 이시애가 동생 시백과 더불어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운혁이 종성사람 정휴명, 부녕사람 조규, 경성사람 박성장과 더불어 적중에 들어가 시합과 시백을 잡아 묶어 관군에 보내고 또 휴명과 더불어 종성, 회녕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마운령을 막아내니, 시애가 이로써 장구의 동쪽을 얻디 못하였다. 후에 시애에게 잡히는 바가 되어 휴명, 규, 성장과 함께 모두 단천옥중에서 죽었다. 조정에서 운혁을 적개공신에 추록하고 아울러 당상관에 추증하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충실편 중

 

  이러한 연안차씨 집안의 충절의 역사는 지역의 주요 씨족이자 유학자집안으로서 충절의 덕목을 실천하여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정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구장 차병한, 부유함에 안주하지 않고 주변의 처지와 국가의 안위를 생각했던 차병혁, 열혈기개가 넘쳤던 장사 차희식이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특히 차희식 선생의 3.1운동에서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바탕하여 거사한다."라고 밝힌 포부는 집안의 역사와 전통이 한 인물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말했지만 차희식 선생은 무학문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높은 식견과 안목은 당시 석포리 차씨 집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대목이고 삼괴지역 주민들의 높은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예이다.

   차운혁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이곳 차씨마을의 구심점은 차운혁의 충절을 기리는 불조묘 연안차씨사당이다. 그 옆에는 차운혁의 부인 광산 김씨의 묘를 모셨다. 현재는 사당에 대한 관리는 소홀한 듯 하다. 아마도 특정제사 때만 사용하는 재실기능만 하기에 평소에는 쓰임이 없어 그럴 것이다. 역시 사람사는 데는 사람의 손길과 온정이 베어야 한다. 그래도 이 사당에는 운장각이 건립되어 중종의 어제시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실려 있는 차운혁의 행적을 새긴 판각이 걸려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그 옆 광산 김씨 묘는 무덤과 석물이 단장되어 있어 위엄을 갖게 한다. 언뜻 보기엔 차운혁의 무덤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무심코 비문 언저리만 확인했었는데 알고 보니 차운혁의 묘가 아닌 그의 부인을 모신 무덤이었다.  무덤은 둘레돌이며 망주석, 석등 등은 다 최근에 세운 것들이다. 그리고 무덤 앞에 사각의 기단 위에 네모난 방부, 하얀 대리석의 비신, 두툼한 옥계석을 올린 비석이 그나마  세월의 풍상과 고적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데 이 역시도 그리 오래진 않았다. 일제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비신의 묘표는 '세조충신강열차공운혁비정부인광산김씨지묘' 이다.

   연안차씨사당은 일제시대에 건립된 차운혁의 부조묘이다. 부조묘는 일반적으로 조상제사를 모실 때  4대가 지나면 혈족적으로 친진(親盡:친족으로서의 관계가 다함)이라고 하여 위패를 없애고 제사를 없앤다. 그래서 집안별로 증조, 고조, 조모, 부모까지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국가와 가문에 뚜렸한 공을 세우는 경우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라고 하여 위패와 제사를 영원히 모시게 되는데 그런 사당을 부조묘라고 말한다.

  화성지역 연안차씨 중 차운혁의 후손 마을은 여기 석포리의 후손이 대종손이 되며 마을 지명을 따서 버들차씨로도 불리기도 했다. 정남면 괘랑2리리에도 남산밑 차씨라고 불리는 차운혁 후손들이 살고 있다.(차응신 가계) 이들은 조선 정조 때 종2품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어진봉안각위장을 지낸 차도항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충신 차운혁의 공신후예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여 순조 21년(1821) 계하사목(충훈부등급)을 받아 공신후예로 인정받아 면역특권을 획득하고 1860년 철종 때 차운혁의 충신정문 내려졌다. 현재 마을 입구에 서있는 정려문은 1886년(고종23) 세워졌다. 이곳 석포리 집안보다는 정조의 화성건설과 더불어 번영하였다. 이때 가문의 번영의 결과 남산밑 차씨라는 이름이 불렀다. 남산 밑 차씨는 화성 이전 수원구읍(융건릉) 기준 남쪽에 있는 산 넘어 밑'이라고 불린 집안이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 세도가의 으뜸이었던 안동김씨(김상용 가계)들도 서울 한양에 자신들이 살았던 북악산 아랫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동김씨'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석포리에서 310번 도로를 타고 서쪽 방향으로 길을 잡아 화수리로 향했다. 가는 도중 주곡리를 지나면서 보이는 풍경은 온통 공사판이다. 삼괴반도(화수반도=조암반도) 북쪽과 남양반도 남쪽에는 남양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최근 이 남양만을 막고 화홍(화성)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담수화 및 농경지와 부대시설을 짓는 통에 정신이 없다. 뒤로는 석포리 무봉산이 우뚝 솟아있다. 장안면 석포리, 금의리 우정읍 주곡리, 화수리, 팔탄면 화당리, 서근리, 월문리 등 이 인근지역 모두가 야트막한 평야지대라서 무봉산은 이 일대에서 주변지역을 한눈에 아우를 수 있는 곳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때문에 조선시대 지리지에도 언급되는 등 중요했고 3.1운동 당시에는 이 인근 주민들이 산위에 올라가 봉화횃불을 밝혔다.

  석포리에서 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화수리는 예나 지금이나 삼괴지역 북부의 교통의 요지이다. 3.1운동 당시 화수리주재소가 위치했던 이유도 이러한 이유였다. 화수사거리는 발안, 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우정면사무소로 통하는 한각리 길, 삼괴지역 중앙에 해당하는 쌍봉산 및 조암리 길 등이 서로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일제가 주재소를 근처에 설치하였다.(현 화수초등학교 앞) 3.1운동으로 불탄 이후, 주재소가 재건되면서 이 사거리로 옮겨왔다.  

  네 방향으로 길이 난 화수 사거리에 서니 여느 한적한 면소재지 같은 느낌이 든다. 길가로 일제 때 지어진 듯한 네모반듯한 가옥과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낯선 나그네가 지날라 치면 한숨돌리고 가라고 냉수라도 건네 줄 듯 정감이 든다. 목이 좋아 이 자리에 대폿집이나 주막이 있음 딱이겠다 싶었는데.. 예전에도 이곳에 길손님을 많았던 이유로 선술집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1919년 당시 석포리 간사장에서 일하던 외지 일꾼들과 일본인 감독, 사업주들도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장안리 지역에도 사사카의 동생이 방죽공사를 하며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이 있었고 이곳을 드나들며 술을 먹고 주변에 행패가 심했다고 한다.

 

  당시 화수리 주재소는  수원경찰서 80리(1리는 400m) 발안으로 가는 등외도로 연변에 작은 소나무 숲속에 위치했다고 일제의 기록에 나온다.  현재 화수초등학교의 입구이다.(843-4번지) 이곳에는 당시 3.1운동을 기념하여 '3.1독립운동기념비'가 서있다. 매년 이를 기념하여 지역에서는 조촐한 기념식을 가진다. 또한 당시 주민들이 몰려갔던 이 길을 3.1만세로로 지정하고 마라톤 대회를 열어 기념하고 있다. 최근에는 화성시의 주요 기념행사로 지정되어 발안, 제암리와 함께 공동행사를 번갈아 치루고 있다. 2012년 올 해는 제암리에서 3.1만세운동 재현 등 여러 행사를 실시하였다.

  화수리 주재소는 일본식 기와집이며 건물약도 부지는 358평, 건물평 24평 3합이며 구조는 사무소, 변소2, 유치장, 통로, 숙직실, 옷장, 창고(物置), 온돌방, 취사장, 목욕탕(湯沸場), 다다미방 2칸, 우물 등이 꾸며진 짜임새있는 구조였다. 일제는 4월 3일 당시시위에서 파괴된 주재소의 손해액을 2,500원에 이른다고 보고 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주요 항쟁지가 된 화수리 주재소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1910, 경술국치)하여 식민지를 만들고 일제헌병경찰제를 실시하였던 일제 식민통치 말단의 기구이다. 우리는 이시기를 일제의 무단통치라고 한다.

  1910년 식민통치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하여 9월 10일 칙령 제343호 '조선주차헌병대조례'를 발표하였다. 이를 토대로 '조선통감부 경찰관서제'를 공포하여 통감부(1905년 을사늑약으로 설치된 일제 조선 통치기구, 총독부 전신이다. 초대 통감은 안중근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이다.)의 헌병경찰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헌병경찰은 1910년에 전국 1,135개의 헌병경찰기관에 총 7,713명이 배정되었고 경찰 5,694명, 헌병 2,019명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인 인구의 2천명 중 1명 꼴이다.

  이들 방대한 헌병경찰의 임무는 첩보의 수집, '의병 토벌’, 범죄의 즉결처분과 민사쟁송의 조정, 집달리업무, 세관업무, 산림감시, 민적업무, 우편호위, 검역․방역업무, 강우량 측정, 밀수입 등과 경제단속, 노동자 단속, 일본어 보급, 농사개량업무 등 통치행정 전반에 관한 사항을 직간접적으로 관장했다.

  오늘날 치안 및 경비와 경범죄를 담당하는 경찰영역에 비춰보면 사회전반과 생활전반을 다 시시콜콜 관여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또한 이들 일본인 헌병경찰 말고도 1910년의 경우 헌병 인원 2,019명 가운데 조선인이 1,012명으로 꼭 절반이 헌병 보조원(補助員)으로서 각 헌병관서에 배치되어 일본 헌병 앞잡이 노릇을 했고 같은 해의 경찰요원 5,881명 중 조선인 3,493명이 포함된 경무관, 경시, 경부 등 간부급 약 120명, 통역 58명, 순사 181명, 순사보 3,131명을 조선인으로 꾸려 하급요원 절반으로 하여금 ‘강제병합’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대운동과 의병항쟁을 탄압하고 식민지 통치체제를 세워나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7년 2월 8일자에 따르면 수원 경찰서관내에 매산리(현 수원시 매산동), 발안, 병점(현 화성시 태안읍), 요당, 남양, 화수, 사강(송산), 천천, 오산, 반월, 고천에 경찰관 주재소가 설치되었다.

  이곳 화수리 주재소에는 당시 일본인 순사 1명, 조선 순사보 3명이 있었다. 주임순사는 가와바타 토요타로(川端豊太郞)는 신분은 평민이며 본적은 가고시마현 사쓰마군(鹿兒島縣 薩摩郡 下甁村 手內)이고 나이는 25세였다. 순사보로는 조선인 오인영(吳麟永), 박재옥(朴在玉), 이용상(李龍相)이 함께 살고 있었으며 당시 헌병경찰제 아래서 일본인 순사 1명과 조선인 순사보 3명으로 꾸려진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위 통계에서도 보듯이 헌병경찰제에서의 하급요원으로서 조선인의 참여가 확대 적용되고 있었음을 화수리 주재소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다.

  1917년에 처음 우정면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자 부임한 가와바타 순사는 주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하였다. 특히 위생검사를 시행하여 모욕을 주었고 도박을 단속하며 주민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특히 항쟁의 주역인 차희식 선생의 경우 도박혐의로 옥고를 치른 상황으로 전과가 있어서 순사 가와바타가 훈계와 노골적인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처럼 굴욕적인 처우는 결국 차희식 선생이 화수리 주재소를 파괴하고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되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화성시에서는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기리는 의미로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이 걸었던 길의 주요 장소(15곳)에 기념표지판을 세우고 이를 연결하는 총 연장 31km의 '화성 3.1운동 만세길'을 개통하였다. 그리고 이 길을 많은 사람들이 찾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사업으로 스탬프 투어로 시설하고 그 출발지에 방문자센터를 세웠다. 방문자센터는 스탬프투어 중 당시 일제순사이자 척살당한 가와바타 토요타로의 처단장소이다. 방문자센터로 꾸며지기 전에는 우정읍 보건지소 자리로 여산송씨가에서 희사한 곳이다.

2019년 개소한 방문자센터
2019년 만세길 개통과 함께 스탬프투어를 위한 안내 표지판과 스탬프함

일명 화수리 항쟁으로 불리는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기리는 3.1독립운동기념비이다. 일제의 화수리 주재소 자리가 위치하였던 현재의 화수초등학교 정문에 자리한다.

  아래는 기념비 전문이다.

三槐(삼괴) 한 가운데 산자수려하게 자리 잡은 두 봉우리는 이 고장의 수호신으로 쌍봉산이라 한다. 예부터 이 산은 승지로 득명하여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산 기슭에 조선 초기부터 육십여 칸의 큰 쌀 창고를 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젖줄이 되었고 지금은 이 고장 문화의 총본산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의 도장이다. (측면)
고려 忠定王(충정왕) 삼년 단기 3684년 8월에도 왜구가 이 곳 쌍부를 대거 침입하여 민가에 함부로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무려 7년이란 장구한 세월 전국이 초토화되어 국운이 가물거릴 때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서해맹산의 기함을 토하시며 민족정기를 드높이시니 혼비백산하여 패주한 도적의 무리들은 삼백여년 동안 감히 이 땅을 넘보지 못하였다. 그 후 나라의 정세가 어지럽게 되자 일제는 침략의 마수를 뻗쳐 이 땅을 식민지화 하였다. 이에 격분한 민족지도자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구국정신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의 횃불을 올리었다. 만세의 물결은 마침내 (후면)
그 해 4월 3일 이 지역으로 파급되어 몇 사람의 천도교인들이 앞장서니 주민들은 너나없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각처에서 수촌리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행렬을 정비한 천여명의 시위군중은 어은리 은골의 장안면사무소와 화산리 사기말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차례로 불태우니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흥분한 만세행렬은 쌍봉산에 올라 백의의 인산을 이루어 목청 높이 조선 독립 만세를 합창하여 천지를 진동시켰다. 군중은 다시 화수리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몇 겹으로 포위하니 때는 오후 5시경이었고 군중은 이천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때 독립을 부르짖는 시위군중에게 주재소 소장 가와바다(川端豊太郞)가 무차별하게 쏘아대는 총탄에 맞아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하였다. 이 참상을 지켜본 군중들은 분에 넘쳐 투석과 각목으로 치열하게 대항하여 드디어 주재소에 불을 지르자 달아다는 가와바타를 붙잡아 민족의 이름으로 처형하였다. 군중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다시 자주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쳐 이 나라가 우리의 것임을 만방에 당당하게 천명하였다.
앙심을 품은 일제는 많은 병력을 출동시켜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11일 화수리에 몰려와 수일간 갖은 악랄한 만행을 자행하여 사망자 22명 부상자 17명 옥고를 치른 분이 314명 불에 탄 가옥이 100여호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 곳의 독립운동은 전국 어디에서도 거의 그 짝이 없을 만큼 격렬하였으며 그 여세는 바로 4월5 일 이웃 발안 장터로 이어졌고 다시 4월 15일 제암리에서 천추만대의 잊을 수 없는 참혹한 학살을 빚어놓고 말았다. 선열들의 만세운동은 뒷날 자주독립의 새싹이 되어 단기 4278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에 3.1운동 70주년을 맞이하여 뒤늦게나마 온 주민들의 정성을 함께 모아 지사들의 거룩한 호국정신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유서 깊고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을 정화하여 두 번 다시 이 땅에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굳게 다짐하는 엄숙한 징표로 이 비를 세운다
단기 4322년 8월 15일
李鍾學(이종학) 삼가 짓고
韓東仁(한동인) 삼가 쓰다 

 

  오전 11시가 넘어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운 주민들이 쌍봉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내려와 면장 김현묵과 면서기들을 앞세우고 사기말(화산리)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이 우정면장 최중환을 찾아 혈안이 되었지만 면장과 서기들은 이미 도망하고 보이지 않았다. 우정면사무소마저 때려부수고 불을 놓았다. 그리고나서 주민들이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쌍봉산 길로 화수리에 넘어가고 나머지는 곧장 한각리 솔밭으로 가서 잠시 숨고르기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들이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에 다다르니 4월 한낮에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오후 5시경, 이미 2,000여명이 넘어있었다.

  이때 차인범, 이영쇠, 백순익, 김덕근 등이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주민들도 만세를 외쳤다. 이때 석포리 구장 차병한은 주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김흥식, 장소진, 장제덕, 백순익, 김종학, 인수만, 김명우, 김응오, 김교철, 김여근, 김황운, 윤영선 등이 앞장서서 돌과 몽둥이로 주재소를 부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급박한 사태에 주재소에 근무하고 있던 순사보 오인영과 이용상, 박재옥은 주재소를 황급히 빠져나와 도망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순사 가와바타 토요타로(川端豊太郞)는 앞마당으로 달려나와 주재소에 들어온 사람들을 향해서 총을 쐈다. 연달아 3발에서 4발의 총성이 울렸고 주민 세명이 그자리에 쓰러졌다. 잠시 적막이 드리워지고 이틈을 타 가와바타는 쏜살같이 화수사거리 쪽으로 도망쳤다. 이 때 쓰러진 사곡리 이덕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화수리 기봉규는 다음날 죽었다. 같은 동네 김만우는 다행히 작은 부상만을 입었다.

  주재소를 뛰쳐나온 가와바타는 혼자서 한 300m쯤 떨어진 주재소 북쪽 언덕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순사 가와바타가 도망치는 것을 본 주민들이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았다. 도망치던 가와바타는 결국 주민들에게 둘러쌓였고 이때 주곡리 차희식이 그의 동지들 장제덕, 장소진 등과 앞장서서 가와바타를 몽둥이로 내리치고 내동댕이 쳤다. 순식간에 몰려든 주민들은 가와바타를 향해 돌을 던지고 발로 밟고 한참동안 분노를 쏟아 냈다. 그렇게 가와바타는 처단되었다.

  가와바타은 처음 검거반의 보고에서 귀와 코, 성기가 잘리는 등 주민들에게 심한 시신의 훼손이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나 실제 사인과 검안에서 마구잡이의 구타로 나타나는 전두부골이 파열과 두부, 면부, 경부, 흉부, 복부, 등 38개소에 창상, 그리고 뇌진탕과 두개골골절의 출혈이 확인되었다. 이는수원자혜의원(水原慈惠醫院) 의사 겸 수원경찰서 의무촉탁 기시다(岸田 徵)가 감정한 결과이다.

  주재소마저 다 때려부수고 불태우고 나니 주민들에게는 불안이 엄습했다. 저마다. 어찌해야 될지 서성거렸고 탄식하였다. 이때 수촌리 구장 백낙렬은“이제 수비대가 오면 총으로 우리를 사살할 것이니 남산에 가서 웅거하여 대항하자”고 강건하게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의연한 그의 이야기에 주민들은 해산한 후 저녁을 먹고 쌍봉산 맞은편 남산에 모여 수비대와 회진을 하자고 결정을 하였고 더는 설왕설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 둘 씩 자리를 뜬 주민들은 그날 밤 남산에 모인 사람은 없었다. 일제 수비대의 보복이 두려웠다.

  주재소를 뛰쳐나와 혼자 멱우리에 송만영의 집에 숨어있던 이용상은 겁에 질려있었다. 주민들이 순사보를 뒤쫓아 나서 집들을 찾아나서자 몰래 빠져나와 이웃한 송영석 집의 마루 밑에 숨었다. 그는 언제 어떻게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죽을 지 몰라 허둥지동 겁을 잔뜩 먹고 있었고 그날 밤 발안 주재소로 달려갔다. 당시 상황이 너무나 무서웠던 그는 멱우리에서 발안을 가는 사이 해창리에서 헛깨비를 보며 시간을 허비했다. 늦은 밤 11시 반에 발안주재소에 도착한 이용상은 순사부장 이노우에(井上龜雄)에게 삼괴지역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말하였다. 이노우에는 그런 극박한 상황을 왜 이제야 와서 이야기하냐고 다그치자 너무 무서워 숨어있다. 밤사이 도망왔는데 도중에 괴물을 만나 혼비백산하여 늦었다고 하였다.

  다음날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아쓰다(熱田 實)와 군인 5명이 화수리 주재소 사건 진상조사차 현지에 출장을 나왔다. 이때 가와바타의 주검도 수습하였다. 이들은 사건을 조사하고 담당 순사부장 아쓰다는 4월 4일 발안주재소에서 수원경찰서장 경부 후루야(古屋)에게 화수리 소요에 관련한 ‘폭도에 관한 상황 기타의 일 보고’를 작성하여 보고 하였다. -1919년 4워 3일 화수리주재소 시위 중..

 

 

  화수리(花樹里)는 한자에서 보듯 '꽃이 핀 가로수 마을'이다. 구한말 이후 마을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애향심이 강하여 인근 마을들에 모범이 되었고 마을 안과 인근 산에는 유실수를 많이 심어 꽃과 나무가 무성하여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화수리라고 불렀다. 화수리는 고려시대 때 원안리와 함께 농장인 사정처가 있었다.

  이처럼 아름답던 마을 화수리에 일제의 말단 통치기구인 주재소가 설치되어 날이면 날마다 주민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1919년 4월 3일 당시 호구로 2000호에 불과했던 삼괴지역 주민들이 무려 2천여명이 넘게 모여 주재소를 불태우고 순사를 처단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한집당 한명 꼴로 참여하였으니 그 항쟁의 여파는 대단하였고 일제는 그 심각성에 대단히 위험을 느꼈다.

  마침내 일제는 사태의 긴박함과 심각성을 고려해 즉각적인 대대적인 보복과 검거작전에 돌입하여 안성 등지로 검거활동을 나갔다 귀대하였던 하세베 대위의 검거반을 즉각 투입하였다. 이들은 발안주재소로 달려와 발안장터 첩보 수집과 일본거류민을 보호하고 바로 수촌리를 시작으로 마구잡이로 집들에 방화하고 주민들을 구타와 매질을 하며 검거에 돌입하였다. 이때 화수리에 들어온 검거반은 일본순사 가와바타 처단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 집들에 불을 질러 20여채를 불태웠다. 이 때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미 노인만 남기고 밤중으로 원안리 호곡리 바다쪽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신하고 없었다. 당시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가옥 19채 방화하고 3명 사망하였다고 한다.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구장 송찬호로 72군데를 난도질하여 죽였다고 한다. 이들은 주변에 있던 암자인 봉래암에도 찾아가 불을 지르고 그를 말리며 나온 주지를 두들겨 패고 실신시켰다.

  이처럼 당시의 처참한 상황은 국제적으로도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한국 이름 석호필일고 불렸던 한국의 사랑한 스코필드(F. Schofield, 장로교 선교사,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박사 및 선교사, 조선주재 외교관 및 특파원들이었다. 이 때 현장을 방문한 선교사 및 특파원들은 보면 먼저 외교관인 R. Curtice(영국부영사), A.W. Taylor(재팬 어드버타이저 특파원), H.D. Underwood(장로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Royds(영국 대리영사), W.A Noble(선교사, 수원지방 감리사), E.M.Cable(감리교 선교사, 협성신학교 교수), S.A. Beck(감리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B.W. Billings(감리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F. Heron Smith(감리교 선교사, 일본인교회 담당), 등이 이 지역을 직접 다녀가고 이후 주민들 구호에 힘쓰는 한편, 일제의 학살만행을 해외에 알리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공식적으로 그 책임을 물으며 국제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이 곳 사정을 알리는 글을 소개한다.

 

  정한경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20년 간행한 『한국의 사정』
  “이 마을은 울창한 숲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름진 논들이 뻗어 있었다. 마을 가운데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지주의 좋은 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은 이제 깨진 기와장과 벽돌더미로 변하고 말았다.(중략) 약 40채가 넘는 가구 중에서 18가구만이 남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중략) 완전무결하게 황폐한 모습이었다. 다음은 이 마을이 불길에 싸여진 당일의 상황이다. 4월 11일 새벽 마을 사람들은 집이 불타는 소리와 연기 냄새로 단잠을 깨자 마당으로 달려 나온 사람들은 경찰과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뛰어나오자 그들은 총격을 가하고 매질을 했다.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노소를 불문하고 산으로 도망쳤다. 부녀자들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남자들은 큰 아이를 끌고 걸음을 재촉해서 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난처를 구하기 전에 총에 맞아죽고 무기로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제암리사건 매티 노블 기록(1919)
  “화수리 마을에서는 시골 부자의 큰 집이 불탔다. 그 집은 37칸 크기로 17칸 규모의 2층집이 달려 있었다. 대문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23 채의 건물이 불타고 3명이 살해되었다. 마을에서 언덕 넘어 반마일(800m)떨어져 있는 절도 소실되었으며 불상을 모신 작은 건물 하나가 남았다.” -박환, 2004「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정신문화연구』제27권 제1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pp. 139~140 참조. 

 

   이렇게 국제여론이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위기가 크게 일자 조선총독 하세가와는 이들 피해지역의 구호자금을 집행하기로 하는 한편  검거토벌작전을 기획했던 경성헌병대장 겸 경기도 경무부장 시오자와(塩沢義夫)를 견책(譴責)하고 현장에서 총괄 지휘했던 경성헌병대 부관 겸 경기도 경무부 경시 하세베(長谷部 巖)를 중근신 15일, 수촌리 방화 책임자였던 경성헌병대장 쓰무라(津村 勇)을 중근신 5일(2차 검거반 활동), 제암리사건의 책임자 아리타(有田)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마무리 하였다. 특히 아리타는 이후 무죄판결을 받으므로써 일제의 이러한 조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이 분위기를 수그러 들게 하려고 했던 기만책에 불과했다는 것이 명백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군 헌병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내는 전문에 이와 같은 조치가 불과피하게 이루어졌고 정당하다고 밝히고 있어서 당시 검거토벌작전을 폈던 지휘관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날의 처참한 모습은 이제는 없다. 한적한 시골마을.. 낯선이의 방문에 개짖는 소리도 들리지만 평온한 지금의 화수리.. 역사적으로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의 절정에 다다랐던 역사적 장소였던 만큼 기념비석은 있지만 오늘 우리들이 느끼고 볼 수 있는 일제 화수리 경찰과주재소를 복원하여 건립하면 좋을 것 같다.

  다 아쉬움이다. 숱한 이야기는 떠돌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으니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간다. 이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고 한다. 오늘 우리가 그날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세대와 시대에 맞는 기념과 추모.. 역사적 의미부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념비를 둘러보고 가려는데 앞집 조그만 개가 짖으며 가로막는다. 두어번 으름장을 놓아 쫓아 버리며 화수리를 나왔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때때로 마주치는 놈들이 개들이다. 대체로 작은 개들은 사납게 짖어대지만 무섭진 않아 다소 귀찮지만 그러다 큰놈이라도 만나면 움찔한다. 그럴 때는 여간 가슴 졸이는 것이 아닌데 그래도 큰놈들은 대체로 무심하다. 정말 다행이다. 낯선 길을 몇시간이고 걷고 걷는 것이 답사인데 뜻하지 않게 개들을 만나 봉변을 당하면 어쩌나 걱정하는데 큰 놈들의 아량에 감사한다.

   화수리 남쪽 조암으로 향하였다. 중간에 쌍봉산을 지나 우정면사무소가 있었던 사기말(사금말), 화산리를 찾아갔다. 화산리 사기말은 마을 이름에서도 보이듯 사기=자기와 연관이 많다. 예전 자기그릇 파편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지금도 밭고랑이나 밭데기를 갈다보면 종종 파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과거 이곳을 지나던 무역선들이 조난하여 많은 자기들이 바다로 떠밀려 와서 사기마을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이곳은 무역이나 물건을 실어 나르던 포구였다고 한다. 고려 때 쌍부현이 설치되기 전에 육포라고 불렸던 지역이니 만큼 이 사기말도 중요한 포구가 인접했다.

  최근 고고학적 조사에 따라 이곳 사기말이 위치한 화산리와 이웃한 운평리, 한각리의 넓은 지역에 단일한 유적이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특히 한각리 토성 등과 고분, 백제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산포지 등이 나왔는데 이는 이 육포지역에서 해상교역 등 해상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일찍부터 형성된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금은 논들이 있는 이들 유적과 앞에는 예전에는 모두가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었다. 앞으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특히 마한 54개국 중 여기에 위치했던 상외국과 이후 한성백제 시대 육포, 그리고 쌍부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변천의 중요한 고리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사기말은 화산리의 자연촌 중 하나이며 화산리(花山里)라는 이름은 봄에 산과 들에 진달래가 만발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야특막한 야산이 둘러져 있고 아늑한 지형이다. 사기말 외에 배미, 일원동, 장자터, 한마을(閑촌) 등이 있다. 

  우정면은 고려시대에는 쌍부현(雙阜縣)이라고 했고, 조선말기에는 수원부에 속한 삼괴(三槐 7面)라고 하여 본면(本面), 마정(馬井), 팔라곶(八羅串), 압장(鴨長), 화방면(禾方面)으로 구분 설치되어 있었으나 우정면․압정면으로 통합되었다가 1910년 남양군에 편입되면서 조암 북쪽을 우정면, 조암 남쪽을 압정면으로 구획하였다. 이후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수원군에 편입하고 우정면과 압정면 일원을 병합하여 우정면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우정면을 관할하던 면사무소는 이곳 사기말 현 화산리 557-1번지에 위치하였다. 지금도 사기말에서 한각리로 이어지는 옛길이 있어 느낌이 사뭇 다르다. 아울러 삼괴지역의 상징인 느티나무 고목도 서있어 오래된 시골마을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현재 우정면사무소가 있던 자리는 밭으로 쓰이고 있었다. 

  사기말 언덕에서 남동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데  봉화산이다. 봉화산은 조선시대 중요한 봉수가 있었던 산이다. 원래는 흥천산이었는데 봉수가 설치되어 있어 주민들이 봉화가 있는 산이라고 불러 지금은 봉화산이라 불린다. 마을에 있는 교회 이름도 봉화교회다.  현재 완만한 봉화산을 오르면 그 중심부에 6기의 크고 작은 연대(망루 겸함)와 연조(불피워 신호하는 시설)가 남아있다.(본 블로그 '지역향토사 흥천산봉수' http://blog.daum.net/ilovepk/6 참고) 

 

   3.1운동 당시 우정면사무소는 조선식 초가로 14평, 이고 소사실, 숙직실, 사무실, 창고, 목욕탕, 면장실 등이 있었다.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운 주민들은 당시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면직원들을 앞장서게 한 뒤 정오에 쌍봉산에 올라가서 만세를 부르고 내려오니 주민들이 1천5백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이곳 우정면사무소로 몰려와서 우정면장 최중환과 면서기들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이미 줄행랑을 치고 없었다. 빈 우정면사무소를 때려 부수고 마저 불태웠다.

   우정면사무소는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의 두 번째 주요 항쟁지가 된다. 이때 피해액을 550원 상당의 재산상 손해를 입었다고 일제는 밝혔다.

  중요 항쟁지였으나 지금 그곳에는 아무런 표시석이나 표지판에 설명 등 아무런 표시가 없다. 따라서 이곳 우정면사무소도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면 좋겠고 우선 표지석이나 표지판을 세워서 중요 항쟁지임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정면사무소 터를 뒤로 하고 동쪽 발안방향으로 조암리 외곽도로를 타고 차로 10여분 떨어져 있는 어은리 장안면사무소 터(어은리 133번지)를 찾았다. 이곳 역시 예전에는 뒤에 솔밭이 있는 아담한 초가로 이루어진 면사무소가 있었지만 현재는 밭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 면사무소 터라 그런지 주변으로 오랜된 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장안면은 우정면과 함께 고려시대에 쌍부현이라고 했다. 이후 조선시대 남양부로 편입되었다가 숙종 13년(1687) 남양군 초장면과 장안면으로 분리 개칭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수원군에 편입되고 장안면으로 통합되었다.

  1919년 당시 장안면사무소는 조선식 초가로 면적 14평의 가옥이었고 소사실, 숙직실, 사무실, 창고, 목욕탕 딸린 구조였다. 당시 면장은 김현묵이다.

  어은리는 조선말기 초장면 어은동(草長面 魚隱洞)으로 바닷가 포구에 인접하여 이 마을 바다에 물고기가 몰려와서 숨던 곳이라 해서 '어은리 (漁隱里)'라 했다는 이야기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면 이곳에 피난하여 정박하던 곳이라는 이야기 등으로 '어은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연촌으로 3.1운동 당시 천도교 전교실이 있던 기린골(騏麟谷)과 독지골(獨之谷),돌뿌리, 바람고지, 은골(隱谷), 절골(寺谷), 점말(店村) 등이 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전국을 13도(道), 12부(府), 317군(郡)으로 나누어 지방의 행정을 관장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지방행정 정리조처를 시행하였으며 1917년에 이르러 이른바 조선 면제(面制)의 시행과 더불어 법제화에 들어갔다. 당시 이들 식민지 관료행정기구는 식민지 민중을 억압, 수탈하는 주요한 도구였다. 따라서  조선의 면은 통감부시기에 주재소와 함께 중요한 통치기구로 그 주된 업무는 말단 징세의 단위, 의병탄압의 보조수단의 역할을 담당하고 강점이후부터 조선인 유력자들을 포섭해 면의 운영자로 임명하여 면구역 개편, 면유재산 확보 등을 통해 행정 말단기구로서의 기능을 강화한다. 당시 면장들은 헌병경찰의 물리적 비호 하에 법령의 주지, 징수금의 납입고지, 징수독려, 민적의 이동보고, 제 청원서류의 전달, 면내 정황보고, 통계자료의 조사, 동자의 감독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농민들은 각종 조세 부담으로 지세, 호세, 지세부가세, 시장세, 도장세(屠場稅), 연초세, 주세, 면비(面費), 학교조합비, 기타 각종 조합비 등 갖가지 부세에 시달리며 식민지 통치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따라서 삼괴지역 만세운동 참여자가 2,000여명이 넘는 적극적인 항쟁이 촉발되는 원인이었다.

  우정․장안면의 경우 농민들이 “이제부터는 묘포(苗圃, 어린나무 기르는 밭)일도 할 것 없고, 송충이도 잡을 필요 없으며, 해안의 간석공사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어 당시 주민들이 이러한 일들을 주도하는 면사무소의 횡포에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당했는가 짐작할 수 있다.  화수리 주재소 순사보 오인영은 심문조서에서 면사무소가 세금을 많이 징수하고 주민들을 괴롭혔다고 하고 있다. 장안면장이자 친일파 김현묵도 “나는 그 이전에 석포리 사람에게 나무를 심는 일에 대하여, 사랑리 사람에게 공동묘지에 대하여 감독순사와 상의하고 수원으로 보내어 고생하게 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그로인해 사사로운 원망을 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제식민통치 말단 하부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의 면장이 헌병경찰의 비호 아래 자신의 직권으로 사사로이 주민을 동원하고 압제(壓制)하는 모습이 당시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촉발시켰던 원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는 다른 여타 면(面)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으로 볼 때 당시 주민들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따른 식민지정책의 모순과 그 불법성으로 얼마나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정, 장안면 3.1운동은 처음부터 단순한 만세시위가 아닌 그 준비와 거사부터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공격해서 파괴하는 것이 주 목표였다. 3월 27일 구장회의에서 각자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참여하라고 회의를 하였고 한집에 한 명씩은 꼭 참여하라고 당부했다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평화로운 3.1만세운동의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 이와 같은 3.1운동 변화 양상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대되며 단순한 시위를 넘어 일제의 통치에 맞서고 저항하는 투쟁적 성격으로 많이 변화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이다.

 

   수촌리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독정리를 거쳐 200여명으로 불어나고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오전 10시가 넘어 차희식 등 200여 군중이 몽둥이를 들고 장안면사무소를 에워쌌다. 차병한과 차병혁이 안에 들어가 장안면장 김현묵을 끌고나왔다. 차병한 등의 요구로 시위에 가담한 김현묵은 만세를 불렀고 주민들이 환호하였다. 

   시위대는 김현묵과 면직원들을 앞세워 서쪽으로 우뚝 솟은 조암리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이어 주민들이 돌과 몽둥이로 일제히 장안면사무소를 때려 부수고 불을 놓았다. 이 때 불탄 장안면사무소의 피해액은 630원 이른 다고 한다.

  불타는 장안면사무소를 뒤로 하고 나아가는 주민들은 쌍봉산에 앞산인 주봉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 항쟁지인 우정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소식을 듣고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이미 천오백여명이 훨씬 넘어있었다. 이때 김문명이 면장과 면서기들을 향하여 

  "간척지 매립 때문에 너희들은 일제통치 기구편에 선 조선인이요 친일 조선인으로 벌써 맞아 죽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도망치면 때려죽인다."

고 엄포를 하였다.

  이날 면장 김현묵은 하루종일 주민들과 함께하다 저녁무렵 사람들 몰래 빠져나가 다음날 새벽 1시경에 수원군청으로 가서 이사실을 보고하였다.-1919년 4워 3일 장안면사무소 시위 중..

 

 

 

  어은리의 자연촌 기린골(騏麟谷)은 장안면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독정리 쪽으로 언덕 하나만 넘으면 있는 이웃한 마을이다.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당시 이곳에는 천도교 전교실이 운영되고 있었다.(어은리 3리 459번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당시 3.1운동에서 천도교 조직과 사람들의 주도적 참여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기린골 전교실과 같은 전교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19년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이후 일제의 검거반이 들이닥쳐서 수촌교회를 불태웠던 것처럼 여기도 함께 불태워지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수촌교회는 복원이 되어 역사의 산현장으로 기념되고 있는데 기린골 천도교 전교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지역의 3.1운동을 이해하는데 많이들 오인하는 것이 마치 3.1운동을 주도하고 피해당한 사람들이 모두 개신교인들처럼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개신교인도 참여를 했지만 그 보다는 항쟁의 준비와 계획, 그리고 교세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천도교가 강조되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정, 장안면의 만세운동은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들과 조직 중심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서 살펴 보았듯 개화유림 이정근 선생이 있었고 향촌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구장들의 역할과 충절의 전통을 계승하고 실천했던 버들 차씨(차병한, 차병혁, 차희식 등) 들의 참여 등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민중들의 항쟁이라는 것이 최근의 연구성과이다. 

   따라서 당시 우리지역 3.1운동을 이해하는데 그 역사적 시각의 균형이 필요하며 천도교인들이 중심되었던 공간인 전교실도 하루 속히 복원되어 균형적 역사성을 가질 수 있도록 제대로된 역사상의 정립이 필요하다.

 

  일제의 기록에는 당시 3.1운동 출동보고에서 기린골 전교실과 마을가옥 13채 불태웠다고 한다. 이는 수촌리와 화수리 못지 않게 큰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실인데 이처럼 기린골 전교실의 중요성은 화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자 전교실로 건축되었다는 측면 일 것이다. 당시 수촌리 구장이던 백낙렬이 천도교 전교사였지만 자신의 집을 전교실로 함께 사용하고 있었던 점이나 고주리의 김흥렬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때 특기할만한 것이며 이는 화성의 다른 여느 곳도 비슷한 사정에서 유독 장안면 어은리 기린골에 단독 전교실이 운영되었던 것은 그만큼 천도교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교세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천도교회월보 53호에 따르면 1914년 12월 지방소식 중 '이성필성'이란 제목으로 기림골(기사 오타) 교인 10여집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전교사 김현조의 발의로 어려운 가운데 전교실을 1914년 음력 10월 8일 낙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라서 기린골 전교실의 건립기록이 확인되는 동시에 독자적 공간을 만들어 천도교 교세를 펼치는 한편, 팔탄 이정근의 개량서당 못지 않게 지역의 민족교육을 담당 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한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기린골에는 천도교 남양교구장 김현조와 전교사 김익배 등이 살며 천도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삼괴지역은 당시 천도교 교세와 운영 등에서 여느 지방 못지 않게 중요하고 열성적으로 운영되었던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당시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가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2대 교조 해월 최시형과 함께 동학을 이끌던 의암 손병희(해월의 제자, 3.1운동 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 33인)가 3대 교조가 되면서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천도교는 애초부터 동학의 중심적 성격인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정신과 함께 자주독립이라는 기치를 가지고 신앙 못지 않게 사회참여적 종교로서 대중을 교화하여 민족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천도교의 대규모 성미 모금이나 성전 건축 등의 사업 들은 단순히 천도교의 교세 확장에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아닌 그 밑바탕에는 민족독립운동을 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실제로도 1919년 3.1운동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주도한 세력이 천도교였으며 전국적 조직망과 준비, 거사에 소요되는 모든 재원을 천도교가 충당하였다. 그 명목은 현재 종로구에 위치한 중앙 대교당 건축비를 모으라는 1918년 손병희의 종령 선포였고 아울러 천도교는 개창부터 중앙총부, 지방교구 운영 등에 쓰고자 걷었던 성미가 그 밑바탕을 이뤘다.   

  우리 삼괴지역은 수원대교구 남양교구 중 교인이 가장 많았으며 이러한 성미모금에 특히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1909년 8월과 1911년에 전국 천도교 교구 중 성미실적이 제일 우수하다고 중앙총부로부터 1등이 표창되고(천도교회월보 8호) 1912년에도 이어 표창되었다. 특히 3.1운동 직접재원이 조달되었던 대교당 건축비에는 수촌리 백낙렬과 지역 교인들이 특별성미의 명목으로 자신들의 재산인 전답을 팔아 헌납하였다.-이동근, 2003 「수원지역 3․1운동에서 천도교의 역할」한신대학교 대학원 참조

  이렇듯 삼괴지역 천도교인들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헌신과 함께 실제적으로 3.1운동 당시 주민을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던 역사의 산실로써 의미를 더해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이들의 역사적인 상징적 공간이 되는 기림골 천도교 전교실을 하루 빨리 복원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기린골을 나와 마지막 답사지로 향한다. 바로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의 항쟁지 중심이 되는 쌍봉산이다.

  삼괴지역의 주산인 쌍봉산[雙峯山, 이전에는 쌍부산(雙阜山), 제일 높은 남쪽 봉우리 해발 117.4m)은 마치 낙타등과 같다고 붙여진 지역 고유명칭이다. 삼괴라는 명칭이 근 100여년 사이에 지역의 명칭으로 사용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쌍부현, 쌍부촌 등 우리지역을 부르는 중요한 명칭이었다. 실제로 주요 지리지나 문헌에는 쌍부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고려 현종 9년(1018) 수원군에 속했을 때는 쌍부산(雙阜山)이라고 했으며, 조선 중기 산에 잣나무가 많이 나서 백산(栢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조선 중기 월사 이정구의 아들 이명한의 신도비에도 쌍부촌 쌍고백산이라 나온다.) 근대에는 두 봉우리 가운데가 쑥 들어가 말안장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안산(馬鞍山)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자연지형으로서 쌍봉산은 우리 지역의 상징이 되었고 평탄한 지역에 높이 솟은 쌍봉산은 지역의 주산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지금도 쌍봉산 정상에 오르면 우리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충청남도 당진군과 경기도 평택시의 평택항, 남양지역, 수원시 등이 한눈에 조망된다.
쌍봉산은 우정읍 조암리, 멱우리, 운평리, 한각리 등에 걸쳐져 있다.

  쌍봉산은 쌍부현의 유래와 함께 상귀와 삼괴라는 지역명칭이 나타난 중요한 역사적 유래로 청풍김씨 묘역의 조선 영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김약로 형제인 김취로, 김상로 무덤이 이 쌍봉산 북사면 아래 위치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영의정을 역임한 김상로의 무덤이 있음으로 해서 삼정승 설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는데 그 무덤의 소재를 밝혀주는 중요한 사료가 김상로 무덤의 남서쪽 사면에 위치한 김취로 묘이다. 김취로 묘의 상석에는 '조선숭록대부이조판서김공취려묘 원비한산이씨부좌 중비청주정씨부전좌'라고 각자되어 있어 그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김취로 묘 인근에 김상로의 무덤이 있다고 청풍김씨세보에 나타나 있어 하계 김상로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현지 주민도 김상로의 묘라고 한다고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일찍이 김상로의 무덤이 이 쌍부산으로 오는 기록으로 영조실록 66권 영조23년(1747년) 기사에 지평(持平) 임명주(任命周)가 영조께 아뢰길

  "수원(水原)의 쌍부창(雙阜倉)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승지(勝地)로 이름났기 때문에 종전에 권귀(權貴)의 집에서 군침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으나, 국초부터 창고를 설치한 땅을 감히 옮기지 못한 것은 진실로 국법을 두려워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이조 참판 김상로(金尙魯)가 스스로 권세를 믿고 감히 점유할 계책을 내어 은밀하게 지방 수령에게 부탁하고 이익으로 시골 백성을 꼬드겨서 민원(民願)을 가탁(假托)하여 억지로 하소연하도록 하였습니다. 60여 칸의 창해(倉廨)를 하루 아침에 허물어 버리고 이어서 입장(入葬)하니, 무릇 몇백 년 동안 설치된 창사(倉舍)가 지금까지 폐해가 없이 거듭 새롭게 하였다고 귀로 들어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김상로가 산을 점유할 즈음에야 민폐가 된단 말입니까?"

하고 김상로와 당시 이를 처리한 지방관 정휘량을 붙잡아 물어 엄하게 처분하길 주청하는 기사가 나온다. 이로 보아 이조참판 김상로가 쌍부현에 있던 쌍부창을 없애고 산을 장지로 삼았는데 그 산이 바로 김상로의 묘가 있는 쌍봉산일 것이다. 따라서 이 때 이미 무덤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계 김상로는 1721년 진사가 되고 이어1734년 정시문과 병 으로 급제하여 처음 검열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정2품 당상관인 공조판서가 되었다.(1748년) 1749년에는 영조의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탕평파 대신이 되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정승반열에 오르는데 1752년 우의정, 1754년 좌의정을 거쳐 1759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에 큰 오점을 만든다. 바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처벌이다. 1762년 김상로는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나섰고 영조의 자결명령에 따라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굶어 죽는다. 영조는 아들이 죽자 일시 후회하여 김상로를 청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바로 특명에 따라 풀려났고 당상관 이상을 역임한 노대신의 명예직에 해당되는 봉조하로 삼았다.

  정조가 즉위 하기 전에 이미 김상로는 죽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수라고 밝힌 영조의 금등에 따라 삭탈관작이 되었다. 이때 아들 김치형과 치양이 모두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고종 때 신원이 되었으나 오늘날까지도 그는 역적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이름도 없고 석물도 없이 호석만 두른 초라한 무덤만이 그의 자취를 알려주고 있다. 

  반면에 이조판서를 역임한 김취로의 무덤은 18세기 후반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좌우 양석과 망주석 1쌍, 봉분을 두른 호석 등이 갖춰있다. 이 역시도 당대 판서를 역임한 인물치고는 간소한데 정조즉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래도 동생 김상로는 비석은 물론, 석물 하나 없는 것을 볼 때 좀 낫다고 해야하나..

  쌍봉산록에 눈여겨 볼 중요한 사적이다. 이처럼 김상로 무덤이 초라한 데는 정조가 무덤과 시신을 훼손할 것을 우려하여 석물 등 장식을 하지 않았다는 설과 정조가 즉위하자 모두 철거 했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도 처음 장지를 꾸밀 때는 석물 등으로 장식되었을 테지만 정조가 즉위하고 삭탈관작 되자 모두 폐기되고 석물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당대 역적으로 몰린 처지이니 만큼 무덤이 훼손될 우려가 컸다. 그래서 무덤의 존재를 알려주는 표시를 대놓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니 후손들은 비석 조차도 표시 조차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정조가 나서서 훼손하지 않더라도 충성이 과한 자들이 알아서 김상로의 무덤을 훼손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현재 무덤이 위치한 우정읍 조암 1리에는 무덤이 쓰여진 이후 후손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석물 등 장식이 하나 없는 오래된 무덤이지만 묘가 위치한 지형지세가 풍수적으로 양지바른 터에 상서롭다. 영조실록에도 언급되었듯 경치가 좋기로 이름 난곳인 쌍봉산 자락이니만큼 역사에서 역적으로 몰린 그가 딱하긴 하나 죽은 뒤 영면하는 곳으로는 참 좋은 곳이다. 

 

  쌍봉산은 만세운동 당시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한 주민들이 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올랐던 곳이다. 따라서 주민들이 올랐던 길을 만세운동로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옛길은 이곳이 택지와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고등학교 시절 쌍봉산 아래 삼괴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옛길이 그대로 있었다. 

  개발과 보존, 보존과 개발.. 늘 답사를 하면서 따라다니는 고민이다. 아니 역사를 하면서 늘 생각하는 문제이다. "새술은 새부대로"라는 말이 있지만 정말 기존의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만을 만드는 것이 창조가 되고 창의가 발현되는 것인가? 역사와 전통을 생각하면서 늘 이 문제가 걱정거리이다. 쌍봉산에 이르는 옛길만 보더라도 "시민생활편의를 위해 공원과 체육시설을 조성하면서 불가피하게 없어졌다. 그러나 길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쌍봉산에 이르는 길은 단장이 되어있으니" 라고 변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는 고려된 상황이 아닐 것이다. 필요가 없었겠지.. 우리 사회 전반이 그렇다. 전통을 복원하고 그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움을 창조할 순 없을까? 단순 생활편의가 아닌 역사와 전통을 결합하여 전통의 옛길을 보전하고 편의시설을 조성하는 전통과 편의의 조화는 어려웠을까?

  지금 쌍봉산을 찾는 이들은 그저 마냥 좋아졌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쌍봉산이 가지는 역사성과 그 역사를 바탕으로 전통을 지키고 계승발전해야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쌍봉산은 성형을 넘어 사고를 당해 장애를 입은 일그러진 얼굴이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못한다면 어릴적 늘 듣던 "촌놈", "똥통학교"라는 인식은 벗어날 수 없다. 액자화된 자부심과 자랑을 만들려 하지 말고 스스로 우러나는 자부심이 필요하다. 그 시작은 우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출발할 것이다..

 

  화수리 등 삼괴지역 곳곳을 가는데 그 중심이 되는 쌍봉산은 예전부터 크고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조암리(朝岩里)다. 조암의 유래는 옛날에 마을 안에 차돌바위가 있었는데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햇빛이 반사되어 그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아름답게 보이므로 아침돌이라 불리다 한자음을 따서 조암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연촌으로 옛날 쌍부현 관아가 있었다는 낡은아실, 마산동(馬山洞), 수정동(壽亭洞), 조암동(朝岩洞), 조원동(朝元洞) 등이 있다.

  당시 일제 검거반이 들이닥쳐 큰집만을 골라 10여채를 방화하였고 1명이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쌍봉산에서 남동쪽으로 바라보면 야특막한 산이 보이는데 이곳은 장안면 사랑리, 독정리와 어은리에 걸쳐있는 남산이다. 남산은 바로 쌍봉산과 마주보고 있어 떼레야 뗄수 없는 산이고 이 두 산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남쪽지방 어느 산골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일삼고 있는 마귀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소굴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살고 있던 마고할멈 하나가 마귀소굴에서는 수 많은 마귀들끼리도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어 먹고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 곳을 뛰쳐 나왔다. 뛰쳐나온 마고할멈은 인심 좋고 살기 좋으며 먹을 것이 많다고 소문남 한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떠났다. 그런데 이 마고할멈은 가는 곳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마고할멈은 부잣집 아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공연히 심술이 나서 슬쩍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곤 병을 주었다. 아이가 이 때부터 갑자기 인사불성으로 눕게 되자 부모는 웬일인가 하고 야단이 났다. 그래서 무꾸리(무당 따위에게 길흉을 점치는 일)를 했더니 뜬 것이 들렸다고 하여 음식과 떡을 잔뜩 차려 놓고 죽을 쑤어 풀어 주었으나, 마고할멈은 죽만 실컷 얻어먹고 아이는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둔 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자 하늘에서는 가끔 엄포를 내렸다. 그러나 인간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라고 해도 마고는 들은 체도 안하고 종횡무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실컷 배불리 먹으면서 한양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한양에는 잘사는 사람도 많고 좋은 구경에 살기 좋은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아주 한양 땅에 자리잡고 호의호식하면서 영원히 그 곳에서 살 작정으로 올라 가다가 인심 좋다고 소문난 삼귀 땅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고는 무거운 쌀자루를 짊어지고 다니다 삼귀 즉 조암(朝岩)이란 곳에 이르러 지친 나머지 잠시 이곳에 주저앉았다. 쌀자루를 내려놓고 쉬고 있을 때 하늘은 착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곳에서 마고가 또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어 마고할멈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했다.
  "너는 네 집을 뛰쳐나와 방방곡곡 다니면서 인간들에게 극악한 짓만 하고 다니니 용서할 수 없다.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바닷가 '참남기'란 곳에 배가 있을 터이니 그 배를 타고 배가는 대로 내려가면 섬이 하나 있을 것인즉 그 곳에서 마음을 고치도록 하라"
  하고 하늘에서 호령을 했다.
  마고할멈은 자기가 지금까지 저질러온 일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내가 무슨 잘못으로 외로운 섬으로 쫓겨가야 합니까? 한양길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그곳에 가서 나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하늘에선 호통이 대단했다.
  "네가 정 그렇게 내 말을 안 듣고 거역한다면 할 수 없다. 지난 번에도 몇 번이나 용서를 해준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끝장을 보자"
  하더니 하늘에는 삽시간에 먹장구름이 모여들고 비바람이 불면서 뇌성번개와 벼락이 치더니 마고할멈을 하늘로 끌어올려서 처치하고 말았다. 이때 마고할멈이 쉬고 있을 때 내려 놓았던 두 개의 쌀자루는 산으로 변해서 쌍봉산이 되었으며, 양쪽 봉우리가 불쑥 튀어나온 가운데 골짜기는 마귀할멈이 쌀자루를 짊어졌던 '멜빵자리'라고 일러오고 있다.
  그 후에 이 산에서는 장사(壯士)가 나서 마주 보이는 남산의 장사하고 싸움을 할 때 장사들은 서로 돌을 던지면서 싸움을 벌였는데, 쌍봉산 장사가 어찌나 기운이 세었는지 돌이란 돌은 전부 남산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도 남산에는 돌이 많지만, 쌍봉산에 돌이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화성문화원 홈페이지 '화성의 설화' 참조 http://hscc.or.kr/board/read.asp?id=5&menu_cat=1&no=8

 

   마고할미 설화와 같이 지금도 남산은 산이라 불리긴 낮은 구릉에 불과한 곳이지만 산등성이나 산사면에는 많은 바위가 나타난다.(암체) 3.1운동 당시 수촌리 백낙렬이 남산에 가서 결사항전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평탄하면서도 돌도 많아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도 있고 투석전을 하기에는 주변에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이점 등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흔히 막연히 생각하면 그나마 높고 산세가 험한 쌍봉산이 마지막 결사항전의 장소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전략전술을 고려할 때 쌍봉산은 죽을 자리이다. 정상 부근의 지형은 협소하여 많은 사람이 숙영하기 어려우며 물도 구할 수 없다. 또한 좁은 지형을 마음만 먹으면 쉽게 포위해서 퇴로가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올라가 싸운다는 것은 죽으러 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략상 쌍봉산은 전력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당시 쌍봉산은 고려되지 않았고 그 보다는 지형이 넓어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고 산능선이 넓어 왠만한 병력으로는 포위도 할 수도 없는 장점을 가지기에 남산에 올라 결사항전을 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거야 어쨌든 남산에는 최후 결사항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주민들의 우려대로 삼괴지역은 일제 검거반의 들어와 무자비한 살육과 방화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의 엄청난 호응으로 시작된 3.1운동이었지만 더이상 만세시위는 이어질 수 없었다.   

  현재 남산의 서남쪽 사랑리에는 화성시 장안면 주민자치센터가 들어서 있다.

 

 

위 제암리는 본 답사와 별개로 방문하였다.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은 서울 탑골공원 시위가 수원으로 전해지고 팔탄면, 이정근, 김흥렬, 삼괴지역 백낙렬과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 많은 인물들이 처음부터 조직 계획된 만세항쟁이다. 봉화횃불과 같은 간접적 시위를 시작으로 대규모 직접시위인 만세항쟁인 3월 31일 발안장터 시위와 4월 3일 우정, 장안면 항쟁으로 이어졌고 그와 같은 사태의 심각성은 일제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결국 수원, 즉 화성의 시위를 억제하는 극단의 방법으로 일제는 제암리, 고주리 학살만행 사건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일제측이 극비리로 남긴 비밀문서들이 1990년 들어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우리 연구기관들이 일제 때 기록문서를 번역하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면서 밝혀졌다.

  관련 기록이다.

 

  수원(水原)군 雨汀.장안(長安)면 등지의 2천여 `폭민'들이 화수(花樹)리 순사(巡査) 주재소(駐在所)를 습격,순사부장 川端豊太郞을 살해한 것을 발단으로 일본군 안성(安城)수비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提岩리로 가서 주민 20여명을 살상하고 촌락 대부분을 불질렀다.- 일본육군성, 대정(大正) 8년(1919년 9월) 조선(朝鮮)騷擾 경과(經過) 개요(槪要)
  수원(水原),안성(安城) 등지의 주민들이 주재소(駐在所) 순사(巡査)를 처단하는 등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狂暴.영악(獰惡)(영악)했기 때문에 보복심이 발동한 검거반 군인들이 주민들을 살상했다. -조선(朝鮮)주둔 헌병사령관이 일본 대신(大臣)(육군대신(大臣)으로 추정)에게 보낸 전보문(電報文)
  주요 외신들이 무참한 폭거로 보도한 `提岩리 사건'은 이곳 주민들이 주재소(駐在所)를 불태우고 순사(巡査)를 무참히 살해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본東洋學會 `東洋時報'
 -- 위 사료발굴 서지(書誌)학자 이종학(李鍾學)  (華城=연합(聯合))  기사 1995년 2월 28일 연합뉴스 이봉준 
  

  제암리 사건은 잘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고 큰 아픔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이웃한 고주리 학살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학살을 일으킨 수비대 중 6명은 발안주재소 순사보 조희창(제암리 거주)을 앞세워 고주리로 향하였다. 이 마을은 경주김씨의 집성촌으로 천도교 지도자이자 3.1운동 주요 인사로 거론되던 김흥렬과 그 일가가 사는 마을이다. 따라서 일제는 제암리에서 홍원식, 안종후 등 많은 천도교,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이들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이미 제암리의 소식을 들은 고주리 마을 사람들은 수비대를 피해서 산으로 피해 숨고 달아나는 형편이었지만 김흥렬만은 "그 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 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 하는 생각에 피신하지 않았다. 결국 일제 수비대는 고주리를 포위하고 김흥렬 집을 급습, 김흥렬, 김성렬,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을 포박하여 집 뒤 언덕으로 끌고 가서 목을 치고 난도질 하여 죽였다. 
  수비대는 시체를 모아 짚가리의 짚을 날라다 위에 쌓고 불을 질러 태우고는 현장을 일체 손도 데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3일간 찾아와 확인하며 현장을 보존하였다. 3일이 지나고  시체를 묻으라고 하여 같은 마을 김시열이 고문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면서 주민들과 시신을 수습하여 팔탄면 덕우리 공동묘지에 묻었다.-화성시사 제2절 향남. 팔탄면에서의 3.1운동 이정은 참조  

 

  고주리 사건에서 보듯 일제는 일부러 잔혹하게 죽인 사람들을 현장 보존하면서 마치 대역죄인을 목을 베고 그 머리를 효수하는 것처럼 취급하며 선전을 통해서 공포를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제암리와 고주리의 참사가 일어난 이유는 명백하다. 바로 4월 3일까지 이어진 우정, 장안면의 대규모 항쟁이 일제에게 얼마나 큰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우려를 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이런 끔찍한 만행이 성공했는지 3월 초순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만세시위는 이날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이미 우정, 장안지역에 만세운동 동참자 주민 수백이 붙잡혀갔다. 당시 검거반이 들이닥쳐서 잡아들인 주민들은 검거 당시 무자비하게 구타되고 머리의 상투와 상투를 묶어 한줄로 끌고 갔다고 하니 그 가혹함고 참담한 처지를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직했다. 사정이 이러니 3.1운동이 잦아드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발안과 우정, 장안면의 항쟁이 주도되면서 주요 주도인물들이 관계를 하며 연속성을 가지고 진행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항쟁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3.1절 특별기획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현장을 가다'의 답사의 결과는 단순한 기행문과 답사 이야기가 아닌 앞으로 우리 화성지역의 화성정신과 그 문화유산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그리고 문화유산의 전승과 보존 등을 생각하는 가벼운 출발이었지만 무겁게 정리하는 마무리를 한다. 

 

 이번 답사의 결과와 성과를 밝힌다.

  먼저 이번 답사를 준비하는 기초적 준비자료는 주요 항쟁지인 주소지를 파악하는 기초 근거로 박환, 조규태, 2003 『화성지역 3․1운동유적지실태조사보고서』수원대학교 박물관  보고서를  토대로 사적지와 항쟁지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이밖에 주요 주제와 관련이 깊은 사료와 논문을 찾아보고 그 중요성에 따라 자료는 주를 달거나 글 끝에 참고문헌으로 정리하였다.

 

  이번 답사 의의

  이번 답사의 의의는 잊혀지고 사라진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사적지를 직접 답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본 3.1운동 연구에서 사상적 배경으로 개화유림인 팔탄면 탄운 이정근 선생이 개량서당을 운영하고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그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이정근과 함께 천도교 백낙렬, 김흥렬과 삼괴지역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의 주요 인사들이 관계를 맺고 조직적으로 참가하여 화성지역 3.1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직접 답사를 통해서 삼괴지역 일대를 1910년대 일제가 통치를 하면서 무력통치 기관으로 교통의 요지에 화수리 주재소를 설치하였고 아울러 각 우정면과 장안면의 지리적 중심에 행정기관이자 수탈기관이었던 면사무소를 각각 설치하여 3각 통치구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주재소가 중심에 있어서 양면사무소를 지원하고 각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조하면서 삼괴지역의 경제적 수탈 및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가장 시급한 것은 애국충혼의 화성정신을 기리고 현재에 전통을 지키는 것과, 이 3.1운동을 화성시의 중요한 사적으로 인식한다면 당시 제암리와 고주리의 만행을 불러일으켰던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항쟁지의 역사적 평가를 높이고 아울러 사적지 복원과 보존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제암리의 3.1운동순국기념관이 있어서 이들 항쟁지의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한 사건에 국한된 기념관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역사성에 따른 현장성을 고려할 때 이정근 선생 생가이자 서당터, 우정, 장안면사무소 터, 차병혁 의사 집, 어은리 기린골 천도교전교실, 쌍봉산 등에 사적표시를 우선적으로 설치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촌교회와 마찬가지로 이정근 선생의 서당(생가), 화수리 주재소, 우정, 장안면사무소, 어은리 기린골 천도교 전교실을 복원한다면 역사현장의 보존이 되며 아울러 후세들의 화성정신을 고양하고 계승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 사적지를 보전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리고 화성지역의 3.1운동이 연구적 성과에 따라 당시 정치적 문제 뿐, 아니라 경제 사회적으로 일본인의 경제적 침탈에 따른 지역적 피해가 상당히 컸다는 것이 밝혀진만큼 당시 발안지역과 삼괴지역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흔적을 사적지나 표지석 등을 설치해서 알려주면 좋겠다. 특히 석포리 차병혁 행랑은 서울에서 내려온 일본인 나가노와 이시쿠라가 간사지매립과 물막음을 하며 간척사업을 했던 사무소로 쓰였던 현장이고 그 행랑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니 중요 사적으로 보호, 보존이 된다면 중요한 현장 유적이 될 수 있다. 

  아울러 발안 평리 향남파출소 자리에 일제 주재소 표지석을 세우거나 현 파출소를 이전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의 파출소가 일제의 파출소 자리에서 그와 관련한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 측면에서 매우 불행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919년 당시 3.1운동의 본고장이라는 자랑스런 역사를 가졌음에도 당시 유적지들에 대해서 표지석은 물론 사적들이 복원이 안되어 우리의 역사성 살릴 아무런 장치가 없는 문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와 함께 가장 시급한 것은 1990년대 이후 많은 자료발굴과 연구가 진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성지역의 3.1운동의 과정과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각 연구자들이나 기관이 연구사 정리를 하면서 사건, 지명, 인물 등이 제각각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바로 지역이해가 없이 주제별로 각 연구가 빚은 문제이다. 그래서 제암리순국기념관, 화성문화원, 화성시사 등 우리 지역의 3.1운동을 알리는 주요 기관들의 정보가 뒤죽박죽이라 혼란을 주고 있다. 따라서 화성시사편찬과정에서 이러한 연구적 성과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주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개정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를 바탕으로 각 기관에 우리 3.1운동을 정확히 소개해야 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다.

  그래서 본 답사보고는 그런대로 이러한 연구적 성과를 충실히 따라 고향사적 바로 알고 알리기 차원에서 고증하는데 중점을 두고 정리하였다.

  끝으로 가벼울 수도.. 쉽게 볼 수도 있는 답사 글을 쓸 수도 있었지만 욕심이 생겼다. 나의 고향 우리 우정읍과 장안면 지역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고 알려진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에서 많은 사료와 문헌, 그리고 현장답사를 통해서 얻은 정보를 모두 수록하였다. 마치 백과사전처럼 글을 남겼다.

  처음 이 답사를 기획한 것은 3.1운동을 기념하며 준비하였는데 각종 자료를 보고 정리하다보니 3.1절을 넘기고 그래서 우리 지역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기일인 4월 3일을 기념하며 올리자고 했지만 이마저도 넘기고 최종 제암리 사건일인 4월 15일을 예정했지만 결국 오늘에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욕심 많이 부렸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고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의 환경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남긴 이 졸고가 우리 고장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을 보다 자세히 알고 더 깊이 있게 알아갈 수 있는 시작이 되길 바란다. 답사에서 소중한 말씀을 주신 이정근 선생님의 친족 이광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참고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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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사편찬위원회, 2005 『화성시사 충효예의고장 乾, 坤』

화성문화원 도록 2004 『화성 사람들, 정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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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學資料院, 1999『三․一運動編(現代史資料-2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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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권2

『조선왕조실록』,「정종실록」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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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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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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