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옛 백제 육포(六浦) 운평리성과 한각리성(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달이선생 2012. 6. 13. 17:47

  삼괴지역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지역이다. 삼괴라고 불리는 명칭이전에는 삼귀로 불렸고 그 보다 오래 쌍부(雙阜)로 불리었다. 쌍부는 한자 뜻 그대로 '두 봉우리'라는 말로 지역 중심에 위치한 우정읍 조암리시내 북쪽에 비교적 야트막한 산이지만 주변지세가 낮은 관계로 우뚝 솟은 두 봉우리를 쉽게 볼 수 있다. 쌍부산은 현재 쌍봉산으로 불리며 조선시대 때 잣나무가 많이 나서 백산이라고도 불렸다.

  우리 지역은 쌍부현 이전에는 육포(六浦)라고 불렸다. 이는 서해에 인접하여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내륙의 물산이 이곳을 통해 자유로이 왕래가 되었던 것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해상교통의 중요 거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지역에 대한 지리지의 건치연혁은 아래와 같다. 

 

  삼국시대 여섯개의 포구가 있어서 육포(六浦)라 불렸고 이후 신라 경덕왕 때 쌍부현(縣)이 설치 되어 인조 22년(1644) 남양부(南陽府)가 현(縣)으로 강등되면서 쌍부현도 패현(閉縣)이 되었다. (한정택, 1991 『국향』석천초등학교 교지편집위원회 pp. 72~77 참조.)

  雙阜西南六十里本百濟六浦景德王改雙阜爲唐城郡領縣貞松西南三十五里本百濟松山景德王改貞松爲唐城郡領縣 右四縣高麗顯宗九年來屬 -김정호, 1864『대동지지(大東地志)』권2, 「경기도사도-수원부(京畿道四都-水原府)」참조.

  쌍부현(雙阜縣) 부(府)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날 육포(六浦)이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9,「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참조.)

 

  이와 같은 역사적 연원에 따라 고대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곳 해안가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삼한시대 해상을 거점으로 하였을 상외국의 존재와 고대 국가 백제이래 해상교역과 물류수송의 거점이었다. 구한말에는 외세가 몰려들었던 곳이다. 이처럼 서해안 삼괴지역의 바닷가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며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관방유적인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이 존재한다.

   오늘 답사를 하는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이 처음 학계에 보고된 것은 운평리성이 위치한 곳에서 백제의 타날문호 2점이 신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면서 이들 '우정유적군'(한신대박물관이 화옹방조제 관련 문화재지표조사를 하면서 이들 문화유적에 붙여진 명칭이다.)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다. 이후 1999년 경기도박물관이 도서해안지역 학술조사에 따라 학계에 조사 보고 되었다. 이처럼 학계에 보고가 된 것은 늦음 감이 있었지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성의 실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특히 운평리성이 위치한 성신재 마을은 마을 이름 자체가 성의 존재를 말해주는 마을명이다.

  이렇게 보고된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은  우정유적군으로 불리며  화옹방조제 공사에 따른 토사채취장 공사에 따라 주변 문화재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조사를 맡은 한신대학교박물관이 지표조사를 통하여 운평리, 화산리, 한각리로 이어지는 넓은 범위의 백제토기 산포지 등이 확인되었고 운평리와 한각리 각 지점(지도 참조) 정상부에서 토성(토루)이 조사되었다.

  특히 화산리 지역에서는 삼한시대 것인 경질무문토기편이 채집되면서 이 유적군의 시기가 적어도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는 중요한 발견이었고 따라서 삼한시대 마한의 54개국 중 상외국이 위치하였다는 연유로 생각할 때 고대 삼한의 정치체와 깊은 관련,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발견이다. 따라서 상외국의 실존여부와 삼괴지역의 긴 역사성의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인근 대규모 발안리취락, 길성리, 과리, 당하리 유적에서도 중도식 무문토기가 출토되고  백제시기 뿐 아리라 삼한시대까지 올라가는 고고학적 상황을 볼 때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우정유적군에 대한 면밀한 발굴조사가 이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그 실현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이 현실이다.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아래와 같다.

 

한신대학교박물관, 2005 제20책 남양만의 역사와 문화
한신대학교박물관, 2003 제16책 길성리토성
경기도박물관, 1999 도서해안지역 종합 학술조사 1

 

  지역의 역사문화재의 존재를 확인하고 들뜬 마음에서 현장답사를 준비했다. 이러한 준비는 학부 때부터 생각은 했지만 그동안 실행을 못하고 있다. 최근 과거에 쓴 학부논문을 손보며 우리 지역에 대한 역사탐구를 새로이 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를 통해 소개하고자 기획하였다. 

  답사를 나설 준비물은 배낭 하나에 지도와 수첩, 필기구, 나침반, 트롤(고고학조사와 발굴에 사용하는 도구), 줄자, 생수를 챙겼다.

  답사의 시작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사기말에서부터 차례로

사기말 - 금성제1교 - 운평3리 성신재 '운평리성'(운평리1지점) - 멱우저수지 방향 농수로 변 농길로 이동 - 한각1리 '한각리성'(한각리1지점)

으로 마쳤다.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을 찾아보려면 지도에서 보듯 310번 지방도를 타고 운평리를 가다가 운평3리로 빠져 운평리성을 보고 북동쪽 멱우저수지까지 이어지는 수로 옆길을 이용하여 한각리성까지 직선으로 올라가면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다.  

 

 

 

  사기말에서 운평리를 넘어가는 중간지점에 금성제1교가 있다. 이곳에서 보니 운평리성(해발 30.1m)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운평리성을 멀리서 보면 마치 야특막한 야산으로 보이며 자세히 보면 상층부가 일정하게 평행으로 토담형식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경기도박물과 조사팀은 토성으로 추정하였고 이후 한신대박물관 조사팀이 살펴본 결과 흙을 다져 쌓은 판축과 같은 토축된 토성이 아니라 산의 경사면을 깎고 다듬어서 조성한 토루(土壘)로 판명됐다. 이는 한각리성도 마찬가지다.

  규모면에서 토성보다는 작은 타원형의 토루이지만 일정한 방어시설 및 생활유적이 밀집하기에는 손색없는 장소로 보인다.

 

 

 

  사기말 쪽에서 들어가다보면 그 동쪽 경사가 매우 급하고 수풀이 우거져 토루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주변을 둘러보던 중 서쪽 남측 경사면이 완만하게 구릉을 이루고 있어서 토루의 내부에 쉽게 접근 할 수 있었다.

  토루 내부는 이미 감자밭 등으로 경작되고 있어서 접근하는 길도 밭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그만큼 쉽게 접근을 할 수 있는 이점은 있었지만 토루의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시설과 문화유적은 많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루 내부에 들어서자 발 아래 굴러다니는 토기편과 자기편 등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서 가히 단순히 추정에만 그칠 유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살펴본 토기편은 이미 경기도박물관과 한신대박물관에서 수집되었던 토기편과 다를 게 없는 주종이 대다수였다.  회청색의 토기의 동체부(몸통)의 편들이고 황갈색의 토기편도 많이 보인다. 거기에 주로 나타난 문양은 평행선문과 횡침선이 교차하는 문양과 격자문, 세격자문 등 두드려 찍어 표현된 타날문 토기들이다.

  이와 같은 토기편들은 백제토기가 주종이고 평행선문에 횡침선이 들어간 통일신라 토기편, 거기에 옹기와 자기편(자기 저부편=바닥부분) 등이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볼 때 한 시기만 국한되어 생활된 것이 아니라 꾸준히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장소였다.

 

 

 

  현재 운평리성 내부에는 민가들은 전혀 없고 토루 주변아래로 집들이 들어서 있다. 내부에는 개간된 감자밭, 무덤(분묘) 등이 위치한다. 고유한 관방시설이 그 쓰임을 잃고 나니 한 순간에 바뀌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여기에 맞을 테다.

 

 

 

  운평리성 동편 토루는 경사가 급하고 수풀이 우거져서 사람이 접근하기 매우 힘들다. 따라서 동편에 조성된 토루는 상대적으로 지형의 조건이 좋아 쉽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수가 드나들면서 사면은 가파르고 굴곡이 많아져서 인위적으로 토루를 다듬지 않아도 천혜의 방벽 구실을 하였을 테니 말이다.

 

 

 

  반면에 서측과 남측 토루는 동쪽에 비해 경사가 완만하여 토루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힘을 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곳에서 보는 토루의 모습은 대체로 그 원형이 잘 드러나 보인다. 방어로는 상당히 취약한 곳이다.

  이렇게 동편과 서편의 지형이 판이하게 다른 모습은 과거 바닷물이 들고 나는 면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보인다. 동편토루 아래 앞쪽으로는 사기말까지 이어지는 너를 농경지(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이 과거에는 해수가 드나들던 갯벌(간사지)이었다.

 

 

 

  성신재 마을 회관에서 본 운평리성의 전경은 언뜻 보기에는 야산의 산봉우리를 평탄하게 밀어버리고 밭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그 토루 벽채를 보다보면 인위적인 단이 일정한 둘레로 유지되고 있는 성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토루의 위와 아래에서 휘 둘러보고 동편, 지금은 너른 들판이 된 옛날 갯고랑을 따라 북동쪽 멱우저수지 아래 위치한 한각리성을 찾아갔다. 

 

 

 

  동편 갯고랑을 사이로 화산리와 운평리로 나뉘는데 운평리성이 있는 성신재 마을 맞은편이 바로 화산리 사기말이고 그 맞은편으로 조선시대 봉수인 흥천산이 보인다. 흥천산을 서편에 놓고 동편에서 바라볼 때는 왜 이곳이 봉수대가 위치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런데 이곳 운평리성을 찾아서 동편에 펼쳐진 화산리와 흥천산을 보니 왜 봉수대가 그곳에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해수와 맞닿은 지형으로 그 인근일대 모두가 낮은 지형이지만 유독 흥천산 지역이 높게 두드러지는 지형을 한다. 뿐만 아니라 흥천산 봉수에 신호를 전하는 아래 평택지역의 괴태곶 봉수(서해2함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봉수대의 적임지라는 것을 딱 알 수 있다.

  반면에 지역에서 가장 높게 두드러지는 곳은 북동쪽의 쌍봉산인데 지형의 특성상 내지 깊숙히 위치하여 제일 높은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봉수대가 위치하지 못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그저 책으로 보고 '아~'하는 것과 실제 답사를 통해 현지를 둘러보고 얻는 경험의 차이는 상당하다. 이런 현장감이 나를 답사로 내몬다.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예전 갯고랑이던 농로를 따라 북쪽 멱우리 저수지 방향으로 10여분을 내달리니 서편으로 한각리성(해발 38.1m)이 보인다. 한각리성은 운평리성과 마찬가지로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위치하며 성이 위치한 마을은 한각1리 학부리 마을이다.

  학부리 마을에 위치한 한각리성은 현재 학부리 마을 입구 동편으로 운평리성과 마찬가지로 타원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고 그 규모도 아주 비슷하다.

 

 

 

  한각리성의 맞은편으로 백제토기편들이 많이 발견된 산포지가 발견되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한각리성과 대칭적으로 짝을 이뤘던 토루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본다. 물론 토루말고도 분묘라던가, 주거지 등도 있을 수도 있지만 지형적으로 해수가 유입되고 그 끝머리에 해당되는 골이라서 양쪽 귀퉁이에 방어시설이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재 그 자리는 한각리성과 다르게 토루는 고사하고 밭과 논 등으로 사면이 깍이고 평탄하게 개간이 되어 무엇하나 추정하여 단정지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한가한 시골마을에 고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중요한 유적을 형성했던 것을 상상하면 지금 그 흔적만을 추정해 볼 뿐 자세히 알 수도 알 방법이 없는 현실이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경쟁과 물질이 우선되는 지금, 오늘의 현실에서 과거의 유물과 유산이 마치 과거의 부유물로 가벼이 취급되는데 이곳을 돈을 들여 학술발굴(학술적 목적으로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는 것/구제발굴:개발지나 개발예정지에 대한 구제를 목적으로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어디 꿈이 꿀 수 있을 것인가?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이자 유적인 서신면 당성(당항성)만 하더라도 제대로 복원과 보존이 안되고 있는데 이 시골 토성, 아니 그보다도 못한 토루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쏱을 수 있을까? 문화유산이 적은 우리 화성시가 좀 더 지역향토유적과 유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존과 보전에 가치를 실현하길 고대한다. 진심으로.. 

 

  한각리성은 사진에서 보듯 동남서쪽 토루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토루 정면 아래 위치한 과수원의 위 경계울타리를 두르고 있어서 마치 과수원이 입지하기 위해 그 뒷벽을 단장한 거와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인 토루는 과수원이 들어서기 위해 조성한 방벽이 아닌 예전 관방시설로 지어진 토루가 남아 자연스레 과수원의 방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남서편으로 돌아 나가는 토루는 현재 밭과 주차장 등으로 이용되기 위해 절개되었는데 동편 토루와 비교해서 보면 쉽게 토루와 단순 절개지와 차이를 알 수 있다.  

 

 

 

  남서쪽 토루가 밭과 주차장 등으로 쓰이기 위해 절개되고 평탄된 자리에서 백제계 회청색 타날문 토기편과 황갈색 토기편 등을 어려움 없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토기편들이 개간된 밭에서 드러나는 것은 원래 토루를 형성하고 있던 토루벽이 깍이고 훼손되면서 토루 자체와 토루 상층에 있던 유구가 파괴되면서 혼입되어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동편의 토루와 달리 북쪽의 토루는 그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없는데 이는 밭과 분묘 등이 들어와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사진에서 보듯 운평리성과 달리 개간이 되지 않아 많은 관목과 수풀이 우거져 사람이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간단한 지휘봉 등으로 수풀을 헤치고 성내로 들어갔지만 그 내부 시야가 틔이지 않아 전체적 조망이 어려웠고 또한 바닥의 유물이나 유적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자 했지만 쌓인 낙엽이 워낙 많아 할 수 없었다. 다만 강풍이나 비로 쓰러진 나무 밑둥의 성내 땅이 노출된 몇몇 곳을 다 조사했지만 이렇다할 유물이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겨울이나 이른 봄에 관목과 수풀이 자라기전 다시 찾아와서 성내 상황을 확인해야 겠다. 이처럼 원시림이 우거진 이상 오랫동안 사람들의 접근이 어렸웠다는 것으로 운평리성 보다는 비교적 성내 주거 및 여타 시설 등이 잘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앞으로 운평리성을 포함한 우정유적군의 문화유적에 대한 학술조사 예정지로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복원과 보존이 어려우면 이렇게라도 자연상태로 유지되면서 사람의 접근이 안되는 것도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가 될 수 있다. 결국 환경이든 무엇이든 사람이 화근이 아닌가..

 

  따뜻한 봄볕이 이어진 5월 하루종일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을 둘러보았다. 삼한시대 상외국의 흔적으로 시작했을지 모를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토성(토루)을 찾았다. 여말선초기 왜구가 진출하면서 강화를 거쳐 개경으로 가는 통로이자 수원 및 경기내륙 진출의 관문 구실을 하였기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실제로 고려사에 따르면 1351년(충정왕3) 쌍부현에 130척의 왜선단이 인주(인천) 자연도와 삼목도를 침탈하고 남하하여 남양부와 쌍부현을 불태웠다는 왜구침탈의 사실이 있다. 그 때 방호소를 설치했을 것이며 이곳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은 왜구를 피해 최소한의 안전을 구한 곳이었을 것이다.(당시 고려와 조선정부는 산성과 읍성을 구축하는 한편 백성들을 그곳에 들어서 사는 입보入保를 취하였다.) 그리고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살아온 터전임을 확인하였다.  

  한나라의 역사와 유지도 그 시간이 오래되고 관심에서 멀어지면 그 흔적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더더군다나 지방의 작은 역사의 흔적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유적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뿌리 찾고 현재의 우리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따라서 상외국-육포-쌍부현-삼귀, 삼괴로 이어진 지역의 역사성을 찾는 것은 바로 운평리성과 한각리성으로 대변되는 지역향토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 발굴 조사와 보존,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연구가 뒷따라라야 하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잊혀지기 쉽고 하찮게 보이는 유적이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가 보전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오늘 확인하였고 전승한다. 이 곳 達理선생.. 달이샘의 역사나들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