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달빛 고운 춘천에서..

달이선생 2012. 1. 7. 10:00

  달력이 2012년으로 바뀌고 처음으로 물어물어 찾아든 곳이 춘천이다.

  1월 7일은 음력보름이 다 찬 보름 전으로 옛사람의 시간 법으로 하면 신묘년 마지막 보름 전일에 해당한다.

춘천의 첫인상은 낯설지가 않았다. 마음이 그래서인가? 멋모르고 발을 옮긴 것은 같으나 이곳 춘천에는 오랜 지인이 있어 그를 만난다는 안도감에 편안한 인상의 나들이다.

  춘천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먹거리 닭갈비와 막국수.. 그리고 호수와 댐이 연상된다. 최근에는 한류의 바람으로 배용준이 겨울연가를 촬영한 남이섬 때문에 낯선 외국인들도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고 그덕에 춘천이 산골의 작은 도시에서 세계 사람이 찾는 유명 도시가 되었다.

  춘천을 가는데는 현재 경춘선에 열차를 없애고 전철을 놓아서 춘천행 급행전철과 일반을 운행하고 있고 ITX라는 신개념의 전철 또한 3월 즈음 선보일 예정이다. 예전 대학 때 엠티로 청량리에서 열차를 타고 강촌으로 갔던 기억이 마지막인 나는 추억을 가늠할 열차는 없어 낯도 설지만 세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에 아쉬움을 갖기 보다 새로움에 몸을 실어 옛생각을 해본다. 예전 향수가 너무도 그리운 사람들이라면 많이 아쉬움이 남겠다. 

  전철로 떠나는 춘천길이지만 일반도로인 경춘가도 말고도 고속도로를 뚫어 서울 춘천간 왕복시간 많이 단축되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인구가 많은 지역이 아닌 관계로 고속도로는 정체없이 쉬이 달릴 수 있다. 경춘가도만이 춘천을 가는 유일한 도로였을 때는 길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문명의 이기는 사람의 시간을 정말 한가로이 보낼 수 없도록 바삐돌아 가게 한다. 일분일초라도 허투로 보내지 못하도록 더 짜임새 있고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의 자화상이다. 

  교통이 편리해져서 춘천에 사는 사람들은 편해졌는데 누구나 쉬이 하루만에 갔다올 수 있는 거리가 되어 춘천의 상권은 말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이 머물러야 하는데 머물지 않아 오히려 공장없는 도시 춘천의 경제사정이 안 좋게 되니 빛과 그림자다.     

 

 

 

  춘천을 찾은 것은 오랜 인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 동해로 놀러 갔다가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닭갈비를 먹어보자고 잠깐 들린 일은 있었지만 그렇게 들렸던 춘천은 마치 한장의 사진처럼 기억은 단편적이다. 그래서 이번에 제대로 춘천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내쳐 춘천을 왔다.

  사전에 약속은 했지만 여러 번 번복하는 과정에서 일정이 틀어져 혼자 춘천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누구나 그럴테지만 그 지역의 명칭을 쓰는 곳이 대표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상식적일 것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여 춘천역으로 갔다. 춘천역에서 내려 밖을 보니 공터가 눈에 들어온다.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앞서 양철 팬스를 두르고 있는 모습.. 삭막했다. 말을 들으니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였고 개발 예정이라고 한다. 예전에 미군부대로 인해 상권이 형성되고 번화하였을 춘천역.. 시대가 지나고 미군부대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고 주변은 삭막해졌다. 어디 이곳뿐인가? 미군부대가 있는 지역은 사람들이 모두 꺼려하는 곳이 되었으니.. 

  먹고 살기 힘들 때 손내밀어 허기를 달래고 내일을 살았지만 결코 우리 마음에는 애써 간직할 추억거리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 미군부대 주변이 더욱 사람들이 꺼리게 되는 것일거다.

 

  어느 지역이나 그 곳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가서 보아야 할 곳이 바로, 박물관이다. 춘천에는 국립춘천박물관이 있다.  이번 일정은 특별한 계획 없이 이루어졌기에 따로 박물관 일정은 잡지 않았으나 시간상 여유가 있어서 박물관에 들르게 되었다. 

  춘천국립박물관의 특징은 전시실에 전시된 유물이 그 앞을 가로막는 보호창을 없애고 열린전시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박물관이 시민들과 함께 문화를 향유한다는 목적이 분명하도록 박물관 중앙 로비는 여느 공연장 못지 않게 계단식 원형 공연장을 이루고 있어 박물관이 활력이 있고 문화적 공간으로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물론 역사유물의 전시공간이 그만큼 줄어 연구자들의 볼멘 소리도 나오지만 대중과 멀어지고 박제화된 박물관은 소통이라는 가치를 생각할 때 너무나 딱딱하고 고루하다. 무엇인가 많이 다양하게 전시하고 보여줬던 19세기 박람회와 같은 박물관의 원형보다는 이제는 주제를 가지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할 수 있는 정보 문화의 열린 공간이 되는 것이 우리 박물관의 친숙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처음 고고학과 박물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학부 때이다. 아직 전공이 정해지지 않고 교양수업을 전전하며 국사 전공에 대한 열정을 키워가던 차에 한신대 국사학과 이남규 교수님의 소개로 박물관에서 공부도 하고 박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처음 박물관 전시실을 열고자 준비하며 교수님과 최철희 조교 선생님과 함께 국립부여박물관에 가서 전시장을 빌려 오는 출장을 가면서 선생님께 처음 박물관의 전시원칙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유물 전시는 관람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많은 유물을 내놓고 전시하는데만 급급해 한다. 유물 전시를 하려면 유물을 많이 많이 전시할 게만 아니라 시대순으로 차례차례 감상할 수 있도록 관람자 동선과 시선을 고려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박물관에 가서 유물을 보다가 차례로 차근차근 보려고 했지만 유물이 뒤에도 앞에도 어지럽게 널려있어 무엇하나 차례로 볼수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쳐 나온 것이 다반사였던 것이 늘 아쉬움이 있었다.

  그나마 미술관 등은 미술 전시물을 관람자 움직임에 맞춰 입구부터 차례로 감상할 수 있도록 동선을 잘 구성하고 있는데 특히나 역사유물은 시대적 상황과 특징을 염두하고 그 순서가 더욱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전시원칙이 전혀 고려되지 않아 누구나 박물관을 다녀오고나면 으레 드는 생각은 마치 수많은 유물사진을 마구 흩어놓은 것처럼 스스로 정리되지도 않을 거며 정리할 수도 없다. 만약 이것이 잘 정리되고 기억에 남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역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은 역사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만이 드나드는 특수한 곳이 아니다. 시대를 살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생각하는 곳, 이곳이 박물관이다.

 

  춘천박물관이든 어디든 처음 발걸음을 옮기도록 안내되는 곳은 처음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전시부터이다. 대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순으로 전시되고 안내되는데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춘천이 대표하는 강원도지역이 특색을 가지는 역사 동예였다. 동예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가 서서히 유입되는 초기 철기시대에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 형성되고 발전하던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동예에 이웃한 국가로는 북으로 옥저와 고구려, 부여, 남으로 진한, 서로 낙랑과 백제, 마한 등 점점이 나타나 발전하였다. 특히 동예는 옥저와 함께 고구려의 지배를 받는 아주 밀접한 군장국가였다.

  박물관에 소장된 오수전(五銖錢)과 토기들로 볼 때 옥저가 직접적이든 아니면 고구려와 낙랑을 통해서든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도 이웃한 나라들과 교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고대 한반도의 국가들은 문화적로 아주 빈번하고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수전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처음 쓰여 수(隨)대까지 사용된 동전으로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편년유물이다.   

 

 

 

  동예의 옛지역으로 춘천시 여러곳에 소재하는 지석묘(고인돌)를 춘천박물관 한켠에 이장 복원하고 있다. 본래의 원형을 간직하고는 있으나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 그 주변환경 등을 살펴 지석묘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사라진 박제화된 모습이다. 없는 것보다 낫다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유물이나 유적이 단지 그 형태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조형물이 아닌 이상 이러한 조처는 문화재를 불구로 만드는 불행한 일이다.

 

 

 

 

 

  춘천박물관의 전시형태는 개방적이고 체험적인 전시공간이 특색이다. 이에 따라 전시장에 으레 우리의 앞을 막아서던 유리장도 없고 눈앞에서 손끝으로 코끝으로 모든 걸 체감할 수 있는 개방적 전시이다. 그러나 정말 손을 데면 안된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사람들의 손을 벗어날 수 없어 유물들의 수난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점차 원래대로 막힌구조의 전시방법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니.. 그동안 누렸던 자유로움이 커다란 호사로 느껴진다.   

 

 

 

  춘천박물관의 특색으로 눈여겨 봤던 좋은 전시형태는 이와 같은 시대적 변천과정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는 토기 진열이다. 하나하나 따로따로 놓고 설명하자면 솔직히 그 토기가 그 토기같고 그런데 이렇게 시대적 변화에 따라 바뀌는 토기의 모습을 보는 것은 교육적으로는 물론 교양적 지식과 예술품 감상에서 이해를 돕는 아주 중요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위 각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의 특성을 설명한 자료는 아래와 같다.

 

 

흙과 물과 불의 예술 고대토기

고대 토기의 양식과 만드는 기술은 시대적, 정치적 변천에 따라 변화를 같이해 왔다. 토기의 종류와 모양에 따라 그릇의 용도나 목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신적, 경제적인 면까지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 사회를 형성하였던 철기시대의 각 부족국가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및 통일신라에서는 토기의 양식과 만드는 기술이 서로 달라 한눈에 그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삼한토기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우리나라 중부이남 지역에는 중국으로부터 물레를 이용한 성형, 두드림기법 및 굴가마 소성 등의 새로운 토기제작 기술이 전해진다. 이시기의 토기는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서북지방 무덤유적에서는 화분모양토기와 회백색의 단지모양토기가 세트로 출토되며, 이후 낙랑토기로 이어진다. 동북 지방의 옥저 지역은 다양한 모양의 갈색간토기가 유행하였다.

  중부지방의 마한과 동예 지역은 경질민무늬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호남지방의 마한 지역에서는 조개더미와 집터에서 경질민무늬토기와 연질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영남 지방의 진, 변한 지역은 널무덤과 덧널무덤에서 출토되는 와질토기로 대표된다.

 

삼국토기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춘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각각 특징지적인 토기들이 만들어졌다. 고구려 토기는 정선된 바탕흙, 광택 나는 겉면, 흑회색 또는 황갈색의 색조, 납작바닥이 특징이다. 크게 벌어진 아가리에 넓적한 띠모양의 손잡이가 4개 달린 항아리와 배부른 단지, 깊은 바리, 시루, 뚜껑 있는 원통형 세발토기, 솥 등이 있다.

  백제 토기는 이전의 전통적인 기술에 낙랑과 고구려의 기술을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시대의 변화와 지역에 따라 종류와 모양이 다양하며, 바탕흙과 빛깔에 따라 적갈색연질토기, 검은색토기, 회청색토기로 나누고 있다. 적갈색토기는 한강 유역, 검은색토기는 한강 유역과 부여지방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회청색토기는 굽는 온도에 따라 경질과 연질로 나뉜다. 항아리,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세발토기, 그릇받침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 토기는 물레로 빚고, 1100~1200'C의 온도에서 구워진 회청색경질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를 말한다. 초기에는 고구려, 백제와는 다른 특색을 보이나, 가야와는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로 나누어져 각각 뚜렷한 지역적 특징을 갖게 된다. 종류로는 항아리와 굽다리접시, 잔, 그릇받침 외에 인물이나 동물, 특정한 물건을 본떠 만든 상형토기, 토우가 장식된 토기 등이 있다.

  가야 토기는 신라 토기와 비슷하지만 보다 세련되게 만들어졌다. 가야 지역 안에서도 부산, 김해 중심의 금관가야, 함안 중심의 아라가야, 고령 중심의 대가야, 진주 중심의 소가야 등 지역에 따라 모양과 무늬 등의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보인다. 종류로는 굽다리접시, 목항아리, 그릇받침 등 다양한 생활용 토기와 함께 여러 가지 모양을 본떠 만든 상형토기가 있다.

 

통일신라토기

  통일신라 토기는 6세기 이후 신라 토기의 전통에 고구려와 백제의 돌방무덤과 함께 외래요소가 결합되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짧은 다리에 네모 또는 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뚜껑사발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는 중국 수, 당 도자기의 퇴화무늬와 인화무늬에서 개발된 도장무늬토기가 유행하였다. 그리고 중국 당나라와의 본격적인 교류와 불교의 영향으로 뼈항아리와 병 등과 함께 연유를 사용한 토기가 만들어졌다. 통일신라 말이 되면 도장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고, 입큰병 등 청자와 비슷한 고려 토기로 바뀌게 된다.

  강원 지역에서는 춘천 봉의산, 정선 신원리, 홍천 내역리 등의 유적에서 통일신라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한국종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 상원사동종이다. 이와 함께 통일신라시기를 대표하는 동종으로 선림원지 종이 있다. 선림원지 종은 아쉽게도 한국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불에타 녹아내려 위 사진과 같이 되었고 그것을 아래 사진과 같이 복원하고 있다. 

  선림원지 종의 비극은  여기에 끝나지 않고 이 종을 토대로 조선 예종 때 만들어진 낙산사 동종(1469년)이 그만 2005년 동해, 삼척지구 산불에서 불타 녹았다. 참으로 기이하고 불운한 인연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명필중에 명필이었던 탄연 (坦然, 1070(문종 24)∼1159(의종13). 고려 중기의 승려. 성은 손씨(孫氏). 호는 묵암 (默庵). 경상남도 밀양 출신. 교위(校尉:관급의 하나) 숙(肅)의 아들.) 아쉽게도 그가 남긴 문집과 묵필은 없지만 그의 묵필로 만든 청평사 비문이 그나마 다행중에 다행으로 전한다. 그 탁본이 전시되어 있어 탄연의 수려한 필체를 감상할 수 있었다. 본문에 청평산(淸平山)이라는 문구로 쉽게 청평사 비문의 탁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고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주, 세조.. 세조가 수양대군시절 정말 가깝게 아끼고 교유하던 지기들을 왕위에 오르기 위해 무참히 죽였던 것으로 통한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특히 고질병이었던 등창이나 욕창 등 피부병은 그 정신적 스트레스로 더욱 심해져 말년을 힘들게 보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왕위에 오른 세조가 많은 공을 들이고 기댄 것이 불교였다. 사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전부터 불교와는 각별하였다. 수양대군시절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돌아가자 아버지 세종의 명으로 어머니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의 행적을 기록한 여러 책을 보고 한글로 번역한 『석보상절』을 지었을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는 해박하였다.    

  그랬던 그이기에 불교와 그 가르침은 말년 세조에게는 큰 위안이자 버팀목이었다. 따라서 한양 도성에 원각사를 세우고 멀리 강릉지역에 상원사 등을 찾아챙긴 것은 별로 이상할 게 없다. 다만 유교 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의 국왕이 불교를 후대하고 귀의했다는 것은 여러 논란의 소지가 있었으나 당시의 국왕권력은 막강하여 많은 조정의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실의 불교에 대한 사랑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론 태종이 불교에 대해서 농장을 혁파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는 등 억불책도 강경하게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불교존폐에 대한 정책이 아닌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정치적 문제해결에 따른 조처였다.

 

 

 

  조세걸(曺世傑, 1635~1705 이후,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패천浿川).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 잇는 곡운구곡(谷雲九曲)으로 들어가서  제1곡 방화계(傍花溪)로부터 제9곡 첩석대(疊石臺)까지 실제 경치를 실감나는 필치로 그린 화가이다. 특히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효시가 된 인물로 그가 남긴 곡운구곡도는 조선이 아직까지 중국의 화풍에 젖어 실제경치를 담지 않고 있을 때 우리나라의 수려한 명산의 경치를 담은 소중한 유산이다. 현재 보관중인 그림은 김수증(金壽增, 1624 ~ 1701)이 말년에 은거하였던  곳을 그에게 부탁하여 1692년(숙종18)에 그린 그림이다.

  화접도는 말 그대로 꽃과 나비를 그린 초충도이다. 사임당 신씨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강원도를 대표하는 그의 위상을 느낄 수 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어 억울하게 단명한 비운의 왕, 단종. 단종이라 흔히 부르지만 실제로 그가 죽었을 때는 왕위에서 밀려나면서 격하된 노산군의 지위로 노산군이라고 불렸다.  이후 폐왕으로 있던 그에게 200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라는 묘호와 함께 「純正安莊 景順敦孝」이란 존호를 내리면서 옥으로 만든 어책(御冊)과 어보(御寶)를 함께 만들어 종묘에 모시면서 어엿한 조선의 군왕으로 다시금 올라섰고 그 묘호가 단종이다.

 

 

 

  한국지성사에서 시문그림에 뛰어난 천재로 불리는 추사 김정희, 그가 남긴 그림의 최고봉은 세한도와 이 불이선란도이다. 그림을 모르는 사람인 나도 한눈에 좋다고 느낄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정갈하고 단아한, 그리고 기풍이 느껴지는 난 그림이다.

  추사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의 수려한 필체인 추사체이나 그가 남긴 불이선란도와 같은 그림도 뛰어났다. 특히 그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남긴 세한도는 추사체와 아울러 칭송되는 뛰어난 유작이다. 보통 우리 산수화의 구성은 표구(화자), 그림, 발문(그림설명)으로 구성되는데 세한도는 청나라 석학들의 제영(감상문)이 붙어 그림을 제쳐두고도 긴 그림이다. 이처럼 그가 청석학들과 교유하게된 것은 아버지 병조판서 김노경이 1809년 순조9년 동지사로 갈 때 부친을 호위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행을 하면서이다. 또한 이 때 평생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 대학자 완원 선생과 만남이었다. 완원은 당대 유교경전의 대가였으며 1810년 김정희와 만남에서 "젊은 사람이 매우 영리하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김정희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봤고 김정희도 이 완원 선생의 이름을 따서 완당이라는 호를 썼을 정도로 각별하였다. 이렇게 맺어진 청 석학들과의 만남은 추사 평생의 벗이자 삶의 지표였다. 

  그리고 추사박물관에서 소장 '추사필담첩'(2020)에 따르면 그간 '추사'를 호(號)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김정희 본인이 '추사'를 이름의 별칭으로 16세에 관례를 치르고 받는 자(字)라고 밝힌다. 바로 이 시기에 청나라 문인과 주고 받은 필담에서이다.  재밌는 것은 김정희 인생의 전기를 맞았던 청 북경행에서 김정희의 자인 추사가 그들의 풍속에 따라 널리 불려지고 조선에 와서도 이러한 유명세로 자가 호처럼 쓰였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당시 호는 보담재이다. 

출처 : '청나라에 간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 "'추사'는 나의..." KBS뉴스 2022.11.29.(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12323&ref=D)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12323&ref=D

 

청나라에 간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 “‘추사’는 나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우리는 주로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기억하지만, 그 시대가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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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의 걸작인 세한도는 1842년 11월 13일 부인 예안 이씨가 죽고 자신도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위리안치되면서 느꼈던 처참한 심정에서 그린 그림이다. 부인이 죽은 지도 모르고 다음날 안부를 물었던 추사의 괴로움, 그런 그에 큰 사랑은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말자)이라는 낙관을 새겨 기렸던 애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준 그림이다. 스승 추사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며 섬겼던 이상적은 역관으로서 중국을 12번이나 다녀왔고(무덤은 포천시 위치) 이때 청문인과도 교우하였다. 그들은 그의 시를 모아서 은송당집으로 엮어 선물로 줄 정도로 친분을 나눴는데 그런 그가 스승 추사와 지속적 연결해주었고 세한도에 남겨진 제영은 이때 이들이 북경에서 받아보고 남긴 기록이다.

  제자 이상적은 스승 김정희를 위해 완원선생이 주도로 집대성한 유교경전들인 황청경해를 구해보고자 부탁하는데 그 양이 한수레 분량이었지만 그 책들을 모두 구해서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이상적이다. 또한 차선인 벗, 초의선사와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도 그의 헌신적인 제자로 유명하다.

  이렇듯 말년의 불이선란도의 고결한 자태는 그의 모습으로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탓은 모두 이상적과 같은 제자와 친구들 덕이었을 것이다.

 

 

 

  독특한 불상들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유일의 불상이다. 순백의 불상이 주는 인상은 깨끗하면서도 화려한 이미지를 준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춘천박물관이 유리벽이 없이 개방전시를 하면서 최대 피해자가 된 문화재는 바로 이 보살좌상이다. 사람들이 하도 손으로 만져 순백의 보살상이 때가 많이 타있어 얼룩이 심하게졌다. 

  그리고 철조약사여래좌상은 건장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주는데 철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고려 초기 강건하면서도 강인한 지방색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고려 초기 호족들은 선종불교 후원하며 지방에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그들 모습을 불상에 투영하였다. 그래서 이 철불에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불상들과는 달리 조형미보다는 머리가 크고 얼굴의 이목구비가 강조된 동상과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풍수지리가 유행하고 그 풍수에 많은 의미를 생각했던 조선은 왕실에서는 길지에 장례하는 것을 넘어서 명산 산봉우리에 태까지도 안치하였는데 그 태합, 태항아리, 내력을 적은 지석 등이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산세가 좋은 명산이 많은 강원도의 특성에 따라 예전 왕실에서 많은 태를 묻었던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더욱이 장지말고도 태마저도 좋은 길지에 묻어 피장자의 구복과 길함을 생각하였던 왕실의 치밀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래는 전시설명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태를 항아리에 넣어 산봉우리에 안치하던 풍습이 유행하였다. 태를 담는 항아리에는 내호와 외호가 있으며, 이 항아리는 지석誌石과 함께 석함 안에 안치되어 땅속에 묻힌다. 지상에는 태비를 곁에 세웠다. 왕녀복란태실은 원주시 태장동에 있는 왕녀 복란의 것이다.

 

 

 

  수려한 자연경관에 명산이 많은 강원도에는 유명하고 큰 사찰들도 많았는데 특히 이 나한(羅漢)이 발견된 창령사지는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오는 유서깊은 사찰이었다. 2001년 땅주인이 발고르기를 하다 무더기로 발견된 나한상들은 모두 돌로 조각한 투박하고 순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머리에 두건과 이불을 뒤집어쓴 피모(被帽)나한상은 언뜻 보기에 영화 '스타워즈' 속에 나오는 마스터 요다를 연상시키거나 스필버그 감독의 수작 '이티'의 자전거 씬이 연상된다. 이들 석조나한상들의 존재로 창령사에 나한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물관 유물중 가장 눈이 가고 정겨운 유물인 나한상, 한점한점 제각각 얼굴과 표정을 가지고 있고 한결같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한상을 보니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표정에 웃음도 나고 마음이 평안하였다. 이들 나한상을 보니 예전 창령사는 일반적인 사찰의 엄숙한 보다는 일반 사람들과 편안히 어울렸던 기풍이 있던 절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된다. 지금은 그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 남는다.

  나한은  불교의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산스크리트어인 arahant  즉 '고귀한 사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로 부처의 제자들을 일컬는다. 한국, 중국, 티벳, 일본 등은 일반적으로 16명의 나한을 사찰 벽에 그렸는데 시대를 지나면서 나한이 500으로 불어나기도 했다. 

 

 

 

 

 

  춘천박물관을 둘러보고 춘천이 호반의 도시로 불리게 된 소양강댐을 찾았다. 눈이 쌓인 호수는 저녁무렵 보름달이 동쪽 하늘에 걸리며 때마침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의 말이 생각나서 달을 품은 호수가 연상되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찾은 춘천여행은 친숙하고 정겨운 분위기의 편안한 일정이었다. 아무래도 춘천에 사는 후배와 함께여서 그랬는지 낯설지 않고 편안했다. 노동운동을 하는 후배 서명오(전국공무원노동조합 강원지역본부 춘천시지부)는 학부시절 경기문화재연구소에서 오산 가수동 유적을 발굴하면서 알게된 친구이다. 생각이 깊고 행동이 조신한 그가 노동조합에서 일한다고 할 때 조금 놀랍기도 했는데 이 녀석 자기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살자'라고 우스겟소리로 떠들 던 것이 엇그제 같은데 이 친구가 정말 불꽃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