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신라의 압독국 마량진촌 신상리고분군

달이선생 2011. 12. 30. 13:56

  신상리 고분군은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신상리에 파괴된 채 남아 있던 신라고분의 봉분을 그 자리에 원형으로 복원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2003년 경부고속도로 확장 때 영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어 그 성격이 조금이나마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된 고분들은 돌방무덤, 덧널무덤 등도 있었으나 대부분 기원 5세기와 6세기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집중 축조된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 봉토를 덮은 것이었다. 이곳 신상리 고분군은 현재까지 알려진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경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군집을 이루는 특징을 가져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이런 중요성을 인식하여 원래 휴게소의 확장부지(현재 경부고속도록 상행 경산휴게소)로 선정되었던 이곳에 파괴된 채 남아있던 봉토분들을 복원하여 고분을 보존하고자 2005년 고분공원을 조성하였다.

 

  

  신상리 고분군은 삼국시대 이전 경산일대에 있었던 신라의 지방소국인 압독국 혹은 량국, 압량소국을 구성하였던 세 개의 커다란 세력집단 가운데 하나인 마진량촌의 유력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신라 지증왕 6년(505)에 압독군 관내 치성화현, 마진량현, 노사화현 등 3영현 설치했다는 기사로 보건데 본래 압독국을 형성하였던 집단이 크게 세 집단이며 이들 집단을 행정적으로 현으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압량국은 신라 초기에 복속된 소국으로 ‘압량국(押梁國)’이라고도 불리며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있었다. ≪삼국사기≫ 권34 지리지 장산군조(獐山郡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7 경산현(慶山縣) 건치연혁조에 의하면 경산은 본래 압량소국으로 신라 지미왕(祗味王, 지마이사금)이 이를 멸망시켜 군을 설치하고 경덕왕대에 장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1 파사이사금 23년(102)조에는 이때에 압독국이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성이사금 13년(146)조에는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압독국이 언제 신라에 병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에 이웃하여 일찍부터 신라영토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압독국이 있었던 위치 일대에는 지금도 많은 고인돌과 대형고분이 존재한다.

  경북 경산시 임당동과 조영동 일대가 압량국의 중심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82년에 도굴꾼의해 알려진 이후, 노태우 정부가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 택지개발을 하여 이 일대에 대해서 지표와 구제발굴조사로(개발지역내 문화유적 발굴을 구제하기 위한 발굴) 고분군들이 대거 발견되었다.

  그 중에 주목되는 것은 1988년 영남대박물관이 발굴조사한 조영동 EⅢ-2호분으로 이 고분은 압독국의 최고지배층(간干 우두머리=군장=왕)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이유는 드넓은 압량벌과 금호강을 한눈에 조망하는 임당 지역 구릉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주변 무덤보다 규모가 크고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다.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 무덤 형식으로 시신을 안치하는 주곽(主槨)은 도굴되었으나 으뜸덧널과 딸린덧널(부곽副槨으로 껴묻거리를 묻는 곽)에서 금동관과 금동제 허리띠, 은제반지, 금동제 말갖춤을 비롯한 각종 유물을 800여 점과 함께 4명을 순장(殉葬)한 흔적까지 발견됐다.

  특히 금동제 허리띠는 그 제작시기가 5세기 초로 추정돼 신라 영역에서 출토된 같은 유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평가되며 이른 시기 경산지역이 신라에 편입되어 일정한 독립적 지위도 유지하며 자체세력으로 존재한 사실을 증명한다.(백제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토기나 금제머리장식, 또는 칠지도와 같은 것을 하사하여 지방세력을 포섭하고 지배했다.)

  압독국이 우리 역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648년(진덕여왕 2)에 처음 주가 설치되어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압독주도독(押督州都督)으로 부임하여 신라방어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 신라불교에 큰 인물 원효(元曉)가 압독출신이었다는 점 등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