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뿌리깊은 나무.. 세종의 영릉

달이선생 2011. 12. 26. 11:49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려 꽃도 좋고 열매도 맺노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2장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임금은 바로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이다. 요즘 한창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지랄~"이라는 말로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며 인기를 끌고 있는 왕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영향 때문으로 그의 아버지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이름인 도(祹)가 너무 친숙해졌다. 생전에 임금의 이름은 존귀한 나머지 함부로 불리지도 쓸 수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피휘避諱라고 하며 일상에 불편함을 줄 우려가 있어 잘 쓰지 않는 한자로 외자 이름을 했다. 일반인들도 당시에는 성리학적 예법에 따라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그래서 자字와 호號를 썼다.)

  세종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그의 치세에는 문화면 문화, 경제면 경제, 국방이면 국방, 외교면 외교할 정도로 다방면에 손을 안된 곳이 없고 또한 그 이후에도 그를 능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꼽으라면 단연 으뜸은 바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1443, 1446년 반포)가 아닐까

 

  가을이 깊어가는 11월의 어느 날, 세종이 영면하고 있는 경기도 여주의 영릉(英陵)을 찾았다. 영릉은 세종의 묘호이며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와의 합장릉이다. 고려 15대 숙종의 능(영릉,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도 소리와 쓰기가 같다. 한자는 다르나 소리는 같고 세종의 능이 위치한 동편산록에 영릉(寧陵)이 있다. 이 영릉은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과 비 인선왕후 장씨의 상하분(위쪽에 효종릉이 있고 그 아래 비의 능이 위치한다.) 이다.

 

영릉 내 세종전에 모신 세종의 어진

 

  세종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세종에 대한 됨됨이가 정말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많아졌다. 실제로 당시에 곁에서 세종과 함께하였다면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세종의 모습이 파격이니 평범하다느니 하며 다양하게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세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단초는 우리 세종실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흔히 효성 지긋한 왕하면 정조가 많이 알려졌다. 비운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복권 및 무덤을 옮겼고 화성의 아버지 무덤을 참배하고 갈 때 무덤이 보이지 않을까 걸음이 늦췄다는 지지대고개며 무덤 곁에 소나무에 송충이가 나무를 해하니 송충이를 입으로 씹었다는 이야기,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극진히 모신 일 등으로 효하면 정조가 으뜸이었다.

  하지만 사실 효성 지긋한 임금하면 세종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러한 세종의 효성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이 넘쳐난다.

 

  연사종, 변계량이 계하기를,

  “전하께서 〈태상의 병을〉 간호한 이래 지금까지 음식을 들지 아니하니 성체(聖體)가 상할까 걱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정부와 육조에서 청하고, 경들이 이제 또 청하니, 내가 오늘 저녁에 들겠노라.”

하였다. 석전(夕奠) 뒤에 정부와 육조가 모두 나와 울면서 계하기를,

“전하가 부왕의 병환이 위중할 때로부터 지금까지 음식을 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성인의 훈계에 이르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생을 상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애통한 마음을 절제하고 음식을 드시어, 큰 효도를 온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묽은 죽을 조금들었으나, 하루 한끼에 그쳤다.

                       -세종 16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5월 11일(정묘) 1번째기사

 

  태종이 승하하기 전, 병환에 있는 부왕 태종을 위해 밥을 거르며 간호하는 세종의 기록이다. 세종의 마음 씀은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의 병환중이나 상중에도 그러했다. 오죽하면 태종은 고기를 좋아하는 세종이 상중에 채소 등으로 끼니를 오랫동안 거르다가 몸이 상할까 걱정된다고 고기 좀 먹으라고 하였다.

고기 좋아하는 세종이 운동량은 적어 소갈병(당뇨)을 알았고 피부병이 심해 이천, 온양 등 온천에 자주 피양을 간 사실은 유명하다.

  이처럼 세종의 효행은 마음 뿐 아니라 그 실천에서도 좋아하는 고기를 끊을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아버지 태종이나 신하들이 염려할 정도였다. 이러한 세종의 극진한 효성을 실록에서는 아버지 태종이 세종을 “사랑한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이후 태종이 죽고 헌릉에 장사를 지내고 세종도 장지를 쓸 때 "아버지 곁에 묻힐 것이다."하고 헌릉 서쪽에 영릉을 조성하였다.(본래 영릉 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뒷산에 위치했다.) 이처럼 세종은 죽어서도 부모곁에서 무덤을 쓰고 부모를 모시길 바랐던 것을 볼 때 그의 효행은 대단하였다.

  흔히 태종과 세종의 성향이 달라 그 정치적 상황을 대비하여 두 임금을 대립되게 연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정말 드라마의 허구적 요소이다. 만약 정말로 세종이 아버지에 거스르는 일들이 많았다면 세종은 등극할 수 없었다. 실제로 태자였던 양녕대군은 이 성정들이 문제가 되어 태자에서 폐위되었다.

  이러한 세종의 극진한 마음 씀과 실천은 그의 정치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와 조선 초기 늘 어려웠던 대명(對明)외교에서 친히 공물을 챙기고 예를 다했던 세종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러한 세종의 노력이 명의 과도한 조공을 낮추게 하여 조선의 부담을 덜었을 뿐만 아니라 16세 전후한 여자들을 뽑아 후궁과 궁녀로 바치던 공녀도 멈출 수 있었다.

  따라서 세종은 요즘 말로 전형적인 ‘엄친아’, ‘범생이’의 전형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세종이기에 장자가 아니면서도 태자가 되고 등극하여 조선의 만년지대계를 이룰 수 있었다.

 

 

  세종대의 과학적 업적은 지금도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이러한 과학적 업적은 당대 명나라를 거스르면서도 꾸준히 추진되었다. 바로 그 이유는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의 이야기인 항산(恒産)에 항심(恒心)을 충실히 따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등문공이 맹자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농한기에는 집안일을 마치고 농번기에는 농사에 열중 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를 다시 정리하여 알려 주었는데 일반 백성이 살아 가는데는 꾸준히 일 할수 있는 생업 즉 항산(항산)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항상 변치 않는 마음, 항심(항심)을 유지 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

- 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 정약용)

 

 

  전통시대 중요한 경제 활동은 농업이다. 이러한 농업은 과학적 탐구를 통한 자연원리를 알아야 무수히 많은 자연변화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변화를 관찰하려면 천문역법이 만들어져야 하고 직접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는 천문기구의 확충은 당연하다.

  따라서 세종은 농본정책을 실시하였다. 농법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 정초, 변효문 등이 1429 편찬)』을 펴내는 한편, 천자만이 천문역법을 한다는 명의 눈치만을 볼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에 적합한 역법을 고안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한다면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사를 좀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의 풍향을 관찰하는 풍기대를 만들고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수량을 측정하였다. 아울러 청계천의 다리에 수표를 설치하여 물수량도 점검하였으니 농업생산량 증대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민출신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을 등용하여 중히 쓴 것이다. 세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지켰던 지혜롭고 영특한 임금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즉 백성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사정이 나아져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높은 유교적 이상을 실천했던 유학자였다.

  이러한 실천하나 하나가 쌓여 조선의 과학적 토대를 이뤘다는 것은 세종실록 107권, 27년(1445)3월 30일(계묘) 4번째 기사에 잘 나와 있다.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이 이루어졌다. 모두 4권인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순지(李純之)가 발문(跋文)을 쓰기를,

  “제왕의 정치는 역법과 천문(天文)으로 때를 맞추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우리 나라 일관(日官)들이 그 방법에 소홀하게 된 지가 오래인지라, 선덕(宣德) 계축년(1433) 가을에 우리 전하께서 거룩하신 생각으로 모든 의상(儀象)과 구루(晷漏)의 기계며,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의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극히 정묘하고 치밀하시었다.

  의상에 있어서는 이른바 대소 간의(大小簡儀)·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혼의(渾儀) 및 혼상(渾象)이요, 구루(晷漏)에 있어서는 이른바 천평일구(天平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대소 규표(大小圭表) 및 흠경각루(欽敬閣漏)·보루각루(報漏閣漏)와 행루(行漏)들인데,

  천문에는 칠정(七政)에 본받아 중외(中外)의 관아에 별의 자리를 배열하여, 들어가는 별의 북극에 대한 몇 도(度) 몇 분(分)을 다 측정하게 하고, 또 고금(古今)의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같고 다름을 참고하여서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게 하고, 그 28수(宿)의 돗수(度數)·분수(分數)와 12차서의 별의 돗수를 일체로 《수시력(授時曆)》에 따라 수정해 고쳐서 석본(石本)으로 간행하고,

  역법에는 《대명력(大明曆)》·《수시력(授時曆)》·《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통경(通徑)》 여러 책에 본받아 모두 비교하여 교정하고, 또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는데,

그래도 오히려 미진해서 또 신에게 명하시어, 천문·역법·의상·구루에 관한 글이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을 찾아내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을 취하여 부문을 나누어 한데 모아서 1질 되게 만들어서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며, 더욱이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힘쓰시는 정사가 극치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 1396-1478)의 서문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日用耳

- 세종실록 113권 4번째 기사, 28년(1446 병인 9월 29일)

 

  훈민정음의 창제에 있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세종 본인의 뛰어난 언어적 능력으로 발명한 글자라는 것에 다른 의견은 없을 것이다.

 

  "옛사람이 글을 지어 내고 그림을 그려서 음(音)으로 고르고 종류로 가르며 정절(正切)로 함과 회절(回切)로 함에 그 법이 심히 자상한데, 배우는 이가 그래도 입을 어물거리고 더듬더듬하여 음(音)을 고르고 운(韻)을 맞추기에 어두었더니,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제작됨으로부터 만고(萬古)의 한 소리로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음(音)을 전하는 중심줄[樞紐]인지라."

        - 동국정음 서문 중에서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동국정음을 편찬하고 그 서문 쓴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훈민정음은 어제라 밝혀 임금 세종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 훈민정음으로 토대로 집현전에서 학사들이 동국정음을 편찬했다고 세종실록에 나온다. 또한 동국정운 이라는 이름 역시 세종이 친히 지으신 것으로 훈민정음을 평하기를 "모든 소리를 다 담을 수 있는 글자"라고 하며 극찬하고 있다. 이렇듯 유학자이자 당대 석학이었던 신숙주도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단지 임금이 만들어서 극찬한 것이 아닌 훈민정음의 주요한 특징을 들어 그 쓰임이 정말 탁월하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이렇게 뛰어난 한글을 왜 만들었을까?

  그에 관해서는 당시 세종의 정치적 입장과 정황에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이 즉위하던 당시는 조선이 개국하고 얼마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아버지 태종(太宗,1367-1418, 재위 1400-1418)은 세종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종이 즉위할 당시 조선의 국내적 환경은 태종 이방원이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들을 죽이고 쫓아내 왕위를 차지하였던 정치적 혼란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태종은 왕권강화를 통한 신생국 조선을 반석위에 올리기 위한 개혁이 매우 중요하였다.  

  역성혁명(易性革命, 역맹자가 주창한 것으로 천명을 다한 군왕을 바꿀 수 있다라는 혁명론 여기서 역성이란 성이 바뀐다이다. 고령 왕씨 -> 조선 이씨)을 통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기에 여전히 고려 쇠망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도처에 쌓이고 쌓였다. 따라서 이를 해소하는 것이 신생국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는데 먼저 정치, 군사적으로 사병을 혁파하였다. 또한 왕권에 도전할 수도 있는 외척(처남이었던 민무구의 옥 1406)과 공신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대토지를 사유하고 고려 후기 경제적 중심으로 그 규모가 상당하던 대규모 사원들을 철폐하였다. 이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통해 고려후기 부터 이어오고 있던 불교의 병폐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정리된 사원의 토지는 신진사대부들이 차지하며 조선 전기 훈구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내정을 어느 정도 안정 시킨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긴 뒤 상왕으로 물러나와 군정을 담당하였다. 이는 고려 후기 내내 해안과 내륙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해결한 것으로 죽기 전 4년 동안 군사를 맡아서 강군을 육성하였다. 이 때 이종무(李從茂,1360-1425)를 시켜 왜구의 본거지 쓰시마(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대마도정벌은 왜구의 본거지를 조선이 직접 공격하므로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에게 경종을 울렸고 이 결과 왜구는 점차 줄어들고 노략질보다는 무역을 통한 관계형성의 단초를 이루어 조선 전기 정세를 안정시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러한 태종이 일련의 개혁은 조선의 백년지대계를 위한 큰 발걸음이었으며 그 길을 더욱 탄탄히 하는 것은 그 후계자인 세종의 몫이었다. 

  따라서 세종에게는 아주 무거운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신생국 조선에서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세우는 것과 통치의 안정화를 이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칼보다 붓이 세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칼조차도 쉽지 만은 않은 것이 통치인데 세종에게는 붓이 세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다방면에 능하고 많은 일을 해야하는 것은 그가 왕위를 올라 받아들여야 했던 숙명이었다.

  세종은 장자가 아니다. 세종 위로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과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두 형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자에 오르자 마자 왕위에 오르다시피 했다. 이전에 이미 오랜시간 세자위에 있던 양녕대군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버지 태종이 바라는 목적은 위에서도 말했듯 왕조의 정당성과 통치의 안정화였다. 이를 충실히 해줄 적임자가 아니라면 장자라고 해도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양녕대군은 폐세자되었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바로 세종이다.

  세종이 이렇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성과 아울러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늘 공부에 전념하는 성품이 주요했다. 태종에게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당시 세자였던 양녕과는 대비되는 것이었고 둘 째 효령에게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즉위한 세종에게는 왕조의 정당성과 통치의 안정화를 이루어야 하는 숙명이 주어졌다. 따라서 세종은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철저한 성리학 국가로 탈바꿈 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임금은 물론 신하들도 늘 유교 경전을 가까이하며 공부하도록 경연을 제도화 하고 학문의 전당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 연구 뿐 아니라 정책까지도 만들어 내는 핵심기구로 부상시켰다.

  이렇게 성리학을 국시로 성리학 국가 조선을 만들던 세종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재위 10년 째이 되는 1428년, 진주에서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이로인해 세종은

   "계집이 남편을 죽이고, 종이 주인을 죽이는 것은 혹 있는 일이지만, 이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있으니 이는 반드시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이 때 판부사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고려 때 『효행록』과 같은 책을 편찬하여 외우게 하자고 주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충신, 효자, 열녀 등 110명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는 『삼강행실도』를 1432년 편찬하였다. 이는 일반백성에게는 사대부나 일부 관헌들이 사용했던 한자보다는 더 쉽게 이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백성을 교화하는데는 이 역시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종은 백성을 효과적으로 교화할 수 있는 방법에 고심을 하였고 그 결과 말을 담는 글자에 필요성에 주목,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며 한글 창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훈민정음, 즉 한글이다. 한글 창제는 큰 사건이었다. 한자를 중심으로 하는 양반 사대부는 중화의 도를 담은 한자를 쓰지 않고 글자를 만든 것은 이미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었던 거란, 여진, 몽골의 전처를 밟는 오랑캐의 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학사들의 반대상소가 이어졌다. 세종은 그 누구보다도 신임했고 믿었던 집현전 학사의 비판에 크게 노하여 그날로 모두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왕도정치를 위해 언로를 열었던 세종이 한글에 반대하는 집현전학사들을 의금부에 하옥한 사건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만큼 세종의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준 일이기도 했다.(의금부에 하옥됐던 학사들은 다음날 모두 방면된다.)이렇듯 완강한 반항에 직면하였지만 쉽게 배우고 쓰고 읽을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에 확신을 가졌던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는 백성교화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유교적 질서에 따른 통치체제의 구축을 위해 통치의 안정화를 꽤하고자 조금도 양보 없이 한글 보급에 임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억불은 하지만 백성에겐 친근한 부처의 이야기를 한글로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1447)하였다.(소헌왕후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편찬한 부처의 일대기이다.) 또한 조선왕실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짓고 한글로 썼다.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 116권, 29년(1447, 4월 20일(신해) 1번째기사에 따르면

 

"함길도 자제의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다.

이제부터는 함길도 자제로서 관리 시험에 응시하는 자는 다른 도의 예에 따라 6재(六才)를 시험하되 점수를 갑절로 주도록 하고, 다음 식년(式年)부터 시작하되, 먼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시험하여 입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할 것이며, 각 관아의 관리 시험에도 모두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하라.”

 

  라고 하며 한글 반포 1년 만에 제도적으로 국가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고 아울러 취재와 과거에서 훈민정음을 기본과목으로 시험을 보게 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렇게 세종에게 한글의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세종의 한글보급에 대한 치밀하고도 끈질긴 노력이 바로 자신이 통치하는 조선, 그 뿌리인 백성을 교화하여 통치의 안정화를 기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글에 대한 우수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최첨단의 문화유산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이후 훈민정음은 언문, 언서, 반절, 암클, 아햇글, 가갸글, 국서, 국문, 조선글 등으로 불렸고 세종 이후 일반적으로 언문으로 불렸다. 근대에 이르러 잠시 국문으로 불리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에 의해서 처음 한글이라고 불렸다. 이후 조선어학회가 만들어져 훈민정음 창제 8주갑(480년 후)에 맞춰1926년 음력 9월 29일을 한글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인 '가갸날'일 제정되어 이를 기념하였다. 이후 1928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한글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먼저 쉽게 익힐 수 있는 장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할 수 있고 만 이천 가지의 소리를 표현이 가능한 글자이다. 그리고 한글에는 하늘, 땅, 사람을 표현한 천지인 삼재(·,ㅡ,l )를 담고 사람의 입과 혀, 목구멍 등 음성기관을 연구해서 만든 철학, 과학적 형태의 독창적인 특징이 있다. 아울러 세계에서 유일하게 글자를 만든 사람과 그 목적, 그 때가 분명한 문자로서 민족을 넘어 우리 인류가 만든 발명품 중에 걸작 중에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유수의 학자들은 한글의 그 우수성에 감탄한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실시한 문자 평가에서는 1위를 하였고 영국의 존맨(『알파베타』, 남경태 번역)은 저서에서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한글을 추켜 세웠다. 또한 일찍이 『대지』의 저자 펄벅은 "세종대왕은 아시아의 다빈치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지이다." 라고 말한바 있다.

  그밖에도 시카고 대학의 메콜리(J. D. McCawley) 교수는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하여 한국음식 먹으며 기념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고 영국리스대학 제푸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이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ㄱ-ㅋ-ㄲ’)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

  이렇듯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89년 유네스코에서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을 제정하여 세계 문맹률 낮추는데 공헌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한글창제의 주역과 함께 한글자체도 『훈민정음』이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최근 한글은 소수민족 언어 사멸 방지를 위한 역할이 다각도로 모색되고 있다.(소리를 적기 쉬운 특징에 따라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기들의 언어를 적는 문자로 도입했다.)

  또한 2011년 켐브리지대 출판부는 '한국어의 역사(History of Korean Language)'를 내고 한글을 언어학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했다. 또한 일본 언어학자인 노마 히데키는 최근 출간한 '한글의 탄생: 문자라는 기적'에서 한글이 '앎의 혁명을 낳은 문자'라 극찬했으며 "'훈민정음'이 민족주의적인 맥락에서 칭송받는 일은 적지 않으나, 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맥락 안에서 '지(知)' 성립의 근원을 비추고 있다"고 썼다.(이 책은 2010년 마이니치신문-아시아조사회가 주는 저술상인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수상)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이면서 언어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저술가 제레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는 저서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문자 체계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고 썼다.

  한편 우리 한글은 우리의 비약적인 경제개발을 가능하도록 역할을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세계 유일의 낮은 문맹률을 이루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교육열을 높이는 획기적인 기능을 인재육성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또한 역사학자 윤경로(전 한성대총장)는 문화적으로 한글은 지금의 한류의 근본이자 동력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지향하는 문화강국의 기틀은 한글에서 시작한다라고 단언했다.(민주화기념사업회 2011년 민주시민아카데미 12월 마침 강연중에서)

  최근에는 드라마, 영화 거기에 가요가 KPOP으로 불리며 한류가 주목 받으면서 그 핵심이 되는 한글에 대한 관심과 평가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영국 루트리지(Routledge)는 작년 7월 '언어와 언어학의 50대 주요 사상가(Fifty Key Thinkers on Language and Linguistics)' 편을 내면서 '세종대왕'을  "지적(知的)으로 재능 있는 실천적인 왕이었다. 문화, 과학, 기술적인 발전을 장려했다. 최고 업적은 한국의 알파벳 창제였다. 한글(Hangeul)은 세계 표기 체계 중에서도 경이(marvel)다. 공인된 우아함과 수학적인 일관성을 가진 표기법, 절묘한 언어 디자인(…) 그전까지 언어학계가 고수했던 표기 체계의 유럽 중심적 전제까지 전복했다. 그럼으로써 언어 연구에 공헌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집필을 맡았던 북미 언어학사학회장을 지낸 마거릿 토머스(보스턴칼리지) 교수는 "일본이 한자를 응용해 48자로 된 독자 음절문자 체계를 개발했음에도 여전히 자국에 맞지 않는 중국 모델에 묶여 있었던 반면, 세종은 다른 길을 택했다. 한글은 중국어·일본어의 표기 전통보다 언어심리학적 현실을 훨씬 더 풍부하게 나타낸다"고 평가했다.
  이 세계 언어학계 온라인 커뮤니티인 '링귀스트 리스트(Linguist List)'에 서평이 소개되면서 서평을 올린 콜로라도메사대학의 줄리 브러치 교수는 "세종의 사상과 업적은 그 자체로 매혹적일 뿐 아니라, 세계 언어 사상 발달사(史)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세종의 한글보급 노력에 결과 한글은 언문으로 불리며 급속도로 보급된 거 같다. 그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로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에 이윤탁묘의 비에 "신령한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경계를 위해 새긴 한글영비(금석문)가 남아있다. 한글영비에서 일반사람들에게 그 경계를 한글로 써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글이 일반백성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는 반증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한글창제 그리고 반포, 끊임없이 한글보급을 위해 노력한 세종의 열망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궁궐내 내명부(궐내 비 및 이하 여자 궁인들을 일컬음)에서는 교지를 언문을 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임진왜란 때 전국에 의병을 독려 하기 위해 왕으로는 최초로 언문교지를 내렸다. 이렇듯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에서 백성과의 소통이 절실했을 것이다. 이밖에 한문을 배우는 데 있어 그 음과 뜻을 한글로 적어 익혔다. 

  최근에 발견된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가 벽파의 영수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곳곳에 거친표현을 한글로 적어서 말하고 있어 당시 왕은 물론 고위관리들도 한글을 익혀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아래 일반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소통의 한 방편으로 기본적 소양이었을 것이다.

  조선 전기부터 꾸준히 쓰여온 한글이 무엇보다 명실상부 백성의 글자가 된 것은 조선 후기에 서민경제가 발달하고 서민들의 문화적 향유가 늘어나면서 한글사용이 활발해졌다. 이때 대표적인 한글작품들이 홍길동전, 구운몽, 춘향전 등이 있다. 이밖에도 각종문서, 편지, 벽서 등 실생활에서 한글이 편하게 두루 사용되었다. 조선후기 문서들을 찾아보면 한글로 작성된 문서들이 넘쳐나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화성향토박물관 기록전시관에는 한글로 작성된 조선후기 편지와 각종 문서들이 전시되고 있다.)

 

 

 

  한글영비는 현재 그 보존가치가 커서 무덤 앞 비각을 세워 따로 보호하고 있으며 그 앞에는 복원된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아울러 노원구에서는 비가 위치한 서라벌고등학교 근처에 한글비근린공원을 만들어서 비석 복원품 및 한글 자음들을 이용해서 공원을 꾸며놓고 있다. 노원구가 한글영비를 기념하여 지역민들과 기념하려는 마음 씀이 아름답다. 한글영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를 참조 하면된다.(http://blog.daum.net/ilovepk/80

 

 

  영릉을 찾으면 영릉 입구에서부터 이곳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고 있는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 국민이 세종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영릉을 찾은 이날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릉의 입구는 여느 조선왕릉과 달리 너를 주차장과 그 입구에 문과 시설들이 규모가 상당하다. 우리 민족의 대단한 위인이기도 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임금이니 그 세심한 꾸밈은 특별하다. 그렇다고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런 느낌은 아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신도와 어도를 구분하지 않은 참도가 일직선으로 한 100m 정도 나있고 그 끝은 영릉으로 오르는 문인 훈민문이 있다. 참도 오른편으로는 영릉지기 책임자였던 참봉이 머물고 각종제례의식과 제물을 준비했던 재실(齋室) 있다. 능참봉(陵參奉)은 종9품의 말단이며 2인 벌갈아 근무하였다. 능참봉직은 생원·진사 혹은 유학중에 삼망(三望)을 거쳐 임명이 되는 음직(蔭職, 고위관료의 자제들이 과거없이 관직에 등용. 음서와 같은 말)으로 임용기준은 ``연소하지 않고 경륜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다고 한다. 경륜이라는 단어로 보건데 집안의 후광이 상당히 작용하는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왕릉수호의 상징성과 함께 관직진출의 수단이 되었다. 그럼에도 고위관료로 승진하려면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은 과거를 통해 문과에서 급제하여야 했다.  

  재실 옆으로 세종대왕상이 서있고 재실 건너편 왼쪽으로는 세종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기념관인 세종전이 있다. 세종전 오른편 공터에는 세종시대 천문관측기구들이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는 용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혼의, 혼천의 등의 천문기구가 눈길을 끌어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곳이다. 해시계인 앙부일구 역시 해그림자를 보며 시간을 가늠해보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위 두번째 사진) 

  세종전 왼편에는 자동시계인 자격루와 기상관측을 했던 풍기대(바람의 방향을 살핌), 측우기(강수량을 측정), 수표(하천의 수위를 측정) 등이 복원되어 있었다. 이들 발명품은 세종 대 농본정책에 힘입어 비약적인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던 놀라운 발명품이다. 특히 세종시대 농업생산력과 그를 바탕으로 인구와 농지 대폭 늘어 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급감했다. 이렇게 피폐해진 조선은 이를 회복하는데는 상당히 오래 걸렸는데 이렇듯 세종이 즉위한 조선은 요순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라고 할 정도로 풍요로운 시대였다. 그래서 세종은 살아서는 해동의 요순이라 불렸고 죽어서는 만고의 성군인 된 것이다.

 

 

  훈민문을 지나니 왼쪽으로 연못이 있다. 연못에 열심히 물을 대고 있는 이무기의 머리가 무서운 괴물보다는 둥근 얼굴에 땡그런 눈에서 보듯 친숙한 모습이다. 서구와 일본문화를 접하며 괴기하고 흉측한 괴물에 익숙한데 이런 피폐해진 정서에 해학과 풍자가 담긴 우리의 이무기를 보며 정화되는 느낌이다. 

  우리 문화는 그러고 보면 참 둥글둥글하고 사람 냄새가 나고 정이 넘친다. 귀신을 쫓는다는 괴수를 무섭고 흉측하게 만들기 보다는 보는 사람이 꺼릴까봐 보기 좋게 익살스런 괴수를 만드는 우리네 정서.. 우리 문화의 독특하면서도 사람냄새나는 소중함이다. 

  정면으로 바라보니 신성한 릉지역과 그 밖을 나누는 붉은 홍살문이 서있다. 그리고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비켜서 뒤로 영릉이 보인다. 현재 공사장 펜슬이 가로막아 영릉전망을 답답하게 가리고 있는데 이는 정확한 검증을 위해 문화재청에서 한창 발굴을 하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발굴조사로 어지러운 영릉을 들어서서 어도로 영릉 앞으로 갔다. 울퉁불퉁한 박석으로 영릉 앞 정자각까지 중간에 거의 75'로 꺽여 이어졌다. 가운데 좀 더 높인 부분이 영혼이 드나들 때 다니는 신도이고 그 오른쪽 길이 임금이 걸어가는 어도이다. 그 왼쪽길은 세자도이다. 이처럼 3도로 만들어진 것은 황제의 예를 따른 것이다.

  이는 1970년 성역화사업 때 영릉를 잘못 복원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발굴조사 결과 지금과 달리 신도와 어도, 이도로 구성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금처럼 75' 꺽인 것이 아니라 왼쪽으로 비슴듬하게 직선으로 참도가 나있는 것을 확인 하였다. 그리고 무덤 양쪽에 배수시설인 어구가 발견되었고 그 바닥을 박석으로 깔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앞으로 이를 바탕으로 영릉의 모습을 정확히 복원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자각은 위에서 보면 정자(丁) 모양으로 지어진 건물로 왕릉의 제사를 올리는 시설이다. 왕릉에 위치한 사당이다. 왕이 참배를 오면 이곳 정자각에서 제물를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정자각 오른쪽으로 능지기가 머무는 수복방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수라간이 있다. 이 수라간은 궁궐의 수라간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로 여기서 제수음식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은 수라간이 복원된 곳은 여주의 화성의 융릉, 건릉과 세 곳 뿐이다. 그리고 융릉과 건릉의 수라간은 영릉처럼 정자각 오른편 비각 아래 위치하지 않고 홍살문 바로 왼편에 복원되어 있다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 위치한 영릉, 이 영릉이 여주에 오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흔히 왕릉은 왕이 참배를 해야하기 때문에 의미상 하루 참배 거리로 도성 100리 이내에 둔다라는 전례가 있다. 거리로 100리(40km)라고 하면 여주는 100리가 넘는다. 100리 밖 여주가 장지가 된 것은 영릉이 위치한 이곳 여주가 남한강 뱃길이 있다. 그래서 이곳까지 뱃길로 하루 거리가 된다는 논리에 따라 세종과 그의 비 소원왕후 심씨를 모시게 되었다. 100리가 넘는 왕릉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서 명을 다한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있다.

  이렇게 전례를 깨면서까지 영릉을 옮기게 된 것은 바로 원래 세종과 소원왕후 심씨를 모셨던 초장지(옛 광주 서강, 현재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가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고 하면서 이쪽으로 옮긴 것이다. 이렇게 세종과 그의 비의 능을 두고 말이 많았던 것은 바로 세종 이후 골육상쟁이 다시금 이루어지며 피바람이 일어난 것이 큰 이유였다.(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을 죽인 수양대군은 이후 단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고 이를 반대한 사육신을 죽여 그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은 노비로 만들어 공신들에게 나눠 주었다. 단종도 영월로 사람을 보내 죽임.)   

  태종대 1,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찬탈했던 골육상쟁이 세종대 이후 그 자식이었던 수양대군과 안평, 금성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 보좌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세종의 영릉자리가 좋지 않아서 후손들이 화를 당한다고 생각했다. 세조 역시 단종을 폐위해서 죽이고 이후 맏아들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인수대비 남편)가 갑작스럽게 죽었고 그 뒤를 이었던 예종 역시 병약하여 건강을 장담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따라서 세조는 살아서 영릉을 옮기고자 노력하였고 그 차남 예종 때 영릉을 옮기기로 결정되었다. 영릉의 천장지로 지금의 여주지역이 결정되었다. 본래 이 자리는 광주이씨 이계전의 묘라고 실록에 전하는데(예종실록 2권 즉위년 12월 27일 2번째 기사) 한산 이씨 이인손의 묘택이었다라는 주장과 이장한 기록(예종실록 3권 1년 1월 1일 3번째기사)이 있다. 아마도 이는 영릉을 천장하면서 왕릉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 일대를 모두 능역으로 조성하면서 이 두 집안의 묘택이 포함되어 모두가 이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은 명당지로 위치를 확인할 때 이계전 묘로 표시한 것으로 보아 명당지 정면에 이계전의 묘가 쓰여졌고 그 아래나 위, 혹은 주변에 이인손의 묘가 있지 않았나 추정된다.

  조선후기에는 산송이라고 하여 무덤지를 두고 후손들이 그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는 일찍이 명당지라고 소문난 곳이 있으면 자손의 번창을 위해 그 위나 아래에 무덤을 몰래 쓰면서 후대에 와서 그를 두고 혼란을 빚으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일들로 볼 때 이계전과 이인손 무덤 모두가 영릉내 포함되어 영릉이 천장되면서 이장된 것으로 보인다. 

 

   세조의 염원으로 그 아들 예종이 천장을 결정짓고 드디어 영릉을 옮기고자 능을 파니 석실에는 물기가 없고 임금이 입었던 의복 등이 그대로 였다고 예종실록에 나오며 흉한 징조를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영릉은 원래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죽자 쌍실의 석실과 사대석(봉분의 아래를 병풍처럼두른 돌, 대개 십이지를 새겨 꾸민고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한다. 김유신 릉이 대표적이다.)을 세워 능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 우실(右室)은 세종의 수릉(壽陵)으로 먼저 조성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이 죽자 우실에 모시고 합장하였다.(이 능제(陵制)는 ≪국조오례의≫ 치장조(治葬條)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묘제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는 죽기에 이르러 유교(遺敎)를 내려  "원(園)·능(陵)에는 석실(石室)이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사대석(莎臺石, 屛石)을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석실과 같이 힘이 많이 들고 비용이 드는 묘제를 대신하여 석회를 이용한 회격으로 조성 방식을 바꿔 능을 간소하게 만들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후 조성된 왕릉에는 석실을, 왕후릉에는 병풍석을 만들지 않았다.

  여주의 영릉은 세조 이후 예종 때 천장이 되었기에 이를 쫒아 석실과 사대석을 쓰지않고 회격으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현재 서초구 내곡동의 영릉 초장지의 석물과 잡상, 비석 일체는 땅에 파묻고 능원을 둥근 산처럼 조성하였다.(예종실록 6권 7월 10일 네번째기사) 1973년 영릉터가 발견되어 땅에 묻었던 석물과 비석을 발굴하여 현재 청량리 영휘원 북쪽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 보관하고 있다.

 

 

  영릉 역시 강(岡 , 둥근언덕으로 조선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풍수에 따라 흙이 생기의 몸으로 그것을 두텁게 하면서 생기를 모으고 그 위에 봉분을 하면서 풍수 승생기를 달성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높은 강을 쓰면서 일반무덤과 달리 높이고 웅장함을 더하는 시각적 효과이다.) 위에 조성되어 있다. 강은 중국에서 보는 산과 같은 대규모 무덤이나 고대 신라의 거대 봉분과 달리 상대적으로 무덤을 축조하는데 힘이 덜 들여 조성하는 왕릉 구조이다. 이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백성 위에 군림하며 무덤마저도 사치스럽게 꾸미고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릉의 위엄과 웅장함을 주기 위해 산지지형을 최대 활용하여 사치스럽지 않고 웅장하게 보이는 무덤 구조이다.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풍수에서 지기를 응축해서 혈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잉(孕)이 봉분 뒤에 불룩 솟아 있어 더욱 왕릉의 봉분을 웅장하게 보이게 한다.

  우리 왕릉은 보면 볼 수록 그 의미나 의도에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잉 아래 오른쪽으로 돌아 봉분으로 올라가는 길 정면에는 왕릉의 주인공과 이름을 밝힌 비석을 세우고 그것을 보호하고자 비각을 세웠다. 영릉의 비석에도 또렸이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朝鮮國 世宗大王 英陵 昭憲王后 祔左)'라고 적고있다.

 

 

 

  비각 뒷편으로 작은 길이 나있는데 그쪽으로 가면 영릉의 또 다른 주인공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으로 이어졌다. 

  영릉은 다른 왕릉들과 달리 봉분 위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잉 오른쪽 가장자리에 계단이 있어 오르면 된다.

 

 

 

 

  능상(능침)에 오르면 일반묘에서는 상석으로 쓰일 것 같은 혼유석 두기와 봉분을 안락하게 감싸고 있는 담장 곡장이 있다. 혼유석은 일반묘라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을 올리는 상석의 역할을 하였겠지만 왕릉에서는 정자각에서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하기 때문에 혼이 나와서 노는 돌받침이라고 하여 혼유석이라고 한다. 일반묘에도 상석 뒤, 무덤 앞에 작은 돌을 하는데 그게 혼유석이다.(본 블로그 http://blog.daum.net/ilovepk/80 참조.) 대개는 혼유석을 생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영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혼유석이 한개가 아닌 두개를 갖추고 있다. 합장은 하였으되 세종과 소원왕후을 각각 모시기 위해 놓은 것으로 영릉만이 가지는 독특함이다.   

 

  영릉에 올라 가볍게 목례로 4배를 올렸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한번, 죽인이에게는 두 번, 부처님께는 세 번, 왕에게는 네 번의 절을 하는 것이 예이다. 남의 집에 가도 인사를 하는데 사람이 죽어 잠든 곳에 가서 잠을 방해하는 결례를 하고 있으니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뒤에 계신분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종이 아닌가.. 기쁘고 영광된 맘에 기분좋게 네 번 절하였다.

 

 

  영릉은 사대석, 즉 병풍석이 없이 간소하게 꾸며진 왕릉이다. 그래서 무덤 봉분은 둘레돌(난간석)이 두르고 있다. 이 둘레돌은 연꽃으로 다듬은 석주와 낮은 동자석주, 이를 가로로 연결하는 죽석의 구조로 이루어졌다.

 

 

  영릉의 문인석(문석인=문신석)은 길쭉하고 장대한 조선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문인석은 복장에 따라 복두공복형과 금관조복형으로 나뉘는데 조선전기는 대개 복두공복형이다. 머리에 쓰는 것이 비단을 만든 복두로 신라시대 이후 착용하던 관으로 과거 급제자가 쓴 사각의 관이다. 공복은 관리들의 일반적인 의복이다. 조선의 일반적인 관모는 요즘 폐백하면서 신랑이 쓰는 사모가 쓰였다. 금관조복형은 왕의 즉위식 등 국가의 큰 행사에서 신하들이 착용한 복식을 말한다. 문신상은 복두공복형이든 금관조복형이든 모두가 손을 가지런히 가운데로 모으고 홀을 들고 있다.

  홀(笏)은 일반적인 의례도구로서 처음에는 왕의 교명(敎命)이나 자신의 계사(啓辭)를 그 위에 적어 비망(備忘)으로 삼기 위해 쓰였었다. 홀은 품계따라 왕은 옥으로 만든 홀, 즉 규(圭)를 잡고 이하 대부(大夫)나 사(士)는 홀을 들었다. 신라가 당제(唐制)의 관복을 입은 뒤로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쓰였다. 길이 약 60㎝, 너비 약 6㎝의 장판(長板)이다. 조선시대에는 조복(朝服)·제복(祭服)·공복(公服) 차림에 1~4품관은 상아로 만든 상아홀, 5~9품관은 괴목(槐木)으로 만든 목홀, 향리는 공복에만 목홀을 갖추었다.

 

 

   반듯하고 단조로운 듯한 느낌의 문신석과 달리 무인석은 그 표현할 것이 많아 문인석보다 해학적인 모습이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있지만 둥근 얼굴과 한일(一)자로 다문 입술에서 보여지는 무인석의 모습은 푸근한 인상이다. 겹겹이 두른 갑옷에 한껏 움츠린듯한 자세에서 더 한 것 같다. 옅에서 보면 다부진 몸에 곧추선 무인석이 앞에서 볼 때와는 달리 웅장하고 힘이 느껴진다. 

 

 

  여느 조선왕릉과 달리 능상에 올라 왕릉의 주요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영릉 답사는 일반 왕릉답사의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어 좋았다. 많이 찾기도 하였지만 늘 아쉬웠던 왕릉은 바로 융건릉이다. 조선후기 17, 18세기를 진경시대라고 한다.(교과서 등은 실학) 조선의 문화가 꽃피고 그 문화의 정수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무덤을 쓴 현륭원(고종 때 황제로 칭하면서 왕 장조로 추존, 융릉)의 석물들이다. 죽을 당시 세자에 불과한 사도세자를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부 화산(현 화성시)으로 천장하면서 왕릉급으로 무덤을 쓰고 세조 이후 거의 사용하지 않던 병풍석을 무덤에 둘러 그 면에 불로초 등 각종 문양을 한 호사스런 무덤장식을 하였다. 그럼에도 사치스럽지 않고 근엄함이 느껴지던 미적모습.. 정조시대 꽃피웠던 문화의 진가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이는 뒤에 쓴 정조의 무덤인 건릉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 문화의 정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시대의 문화와 이후 세도기의 문화의 차이를 살펴볼 수 없다. 영릉처럼 능상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조선왕릉들이 다 이와 같다. 조선왕릉은 단순히 무덤이 아니다. 그 당시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열쇠이다. 장례만큼 중요한 일도 없고 거기에 쏟는 정성도 대단하기 때문에 조선왕릉은 그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이다. 따라서 당대 문화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알기위한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이 많은 왕릉답사다. 그에 비해 영릉은 조선백성을 사랑했던 세종이 죽어서도 백성들과 어울려 지내듯 그의 능상은 하루도 조용히 지나갈 날이 없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기도 하고 능상 위 세종과 소헌왕후의 봉분을 찾아 참배할 수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물론 고인이 되신 혼을 위해서 무덤에서 엄숙하고 행동의 자유로움을 자제해야 할 필요도 있다. 또한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무분별하게 능상까지 개방하는 것도 문제가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왕릉 역시 사람이 찾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왕릉을 찾은 이에게 당대문화의 정수를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것이며 알려고 할까?

  예전 우리 어른들은 "무덤에 가서 뛰어 놀아라"라고 하였다. 극성맞은 아이들의 장난에 무덤이 훼손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덤을 덮은 때(잔듸)가 뜨지 않고 흙들이 단단히 굳어지게 하여 무덤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했던 어른들의 지혜이다. 

  이처럼 문화재는 단순히 사람의 접근을 막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어떻게 우리 문화재와 만나고 보호 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도 한옥의 특성상 사람이 살면서 사용을 해야 오래 보존되는 것이지 무작정 덮어놓고 보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잠들어있는 영릉을 찾았던 오늘, 세종이 우리에게 어떤 위인인지..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영릉의 정확한 복원을 발굴이 여기저기에 이루어져 어수선한 영릉이었지만 다음에 찾을 땐 원래대로 복원된 영릉의 모습을 볼 수 있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