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빛을 본다.'(관국지광觀國之光)..
관광(觀光)은 '빛을 본다.'라는 말로 주역 관국지광에서 유래되었다. 2011년 11월 19일(토).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는 2기 배달학당 마침보람으로 2박 3일동안 고성 제정구 선생 묘소와 남해의 빛을 찾아본다.
길동무엔 배달학당에서 씨알사상의 귀한 말씀을 나눠주신 씨알재단 상임이사 박재순 박사님과 제정구기념사업회 박재천 상임이사님 외 10분이 함께 하였다.
남해기행 경로
서울 압구정도 현대백화점 주차장 출발 ▶ 경상남도 고성군 제정구 선생 묘 및 생가 ▶ 남해도 일원(방죽렴, 물건 방조어부림, 미조항 등 ▶ 전라남도 진도군 일원(울돌목, 운림산방, 진도문화원 등) ▶ 해남군 일원(달마산, 땅끝마을, 미황사 등) ▶ 나주시내 ▶ 서울 남산 도착
서울 압구정 현대백화점 주차장에서 오전 8시, 경상남도 고성으로 출발하였다. 압구정 현대백화점 주차장은 오래전부터 제정구기념사업회의 추모기행(제정구 선생 추기에 맞춰 묘소 참배 및 인근 답사)을 떠나는 출발지가 되고 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하지만 도심지에서 너른 주차장을 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버스를 타기 좋고 아울러 한남IC나 잠원IC에서 바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심에서 허비할 수 있는 이동시간까지 절약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장점을 가진다.
이렇게 좋은 출발장소를 알려준 사람은 바로 제정구기념사업회의 이사이기도 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널리 알려진 저자다. 이는 유홍준 교수가 답사를 많이 하게되면서 얻게된 삶의 지혜라고나 할까.. 지금도 답사를 떠날 때면 애용하는 곳이라고 하니 우연히라도 이른 아침, 현대백화점주차장에서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서울에서 단체로 답사나 여행을 떠나기 위해 모이는 출발지로 이만한 자리가 없다.
오랜만에 떠나는 길인지라 차창 밖 풍경은 눈에 익기도 하고 설기도 하여 긴 차속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서둘러 출발한 기행길이라 아침을 김밥, 고구마 등 간단한 요깃거리로 채웠다. 먹는 사람은 쉽게 허기를 달랠 수 있어서 좋았으나 밤새 준비하였던 손길은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즐거움이 어떤이의 땀방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고마움과 따뜻한 정을 느낀다.
서울을 떠나 먼길을 가는 길이라 운전 역시 쉽지 않지만 운전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덕분에 편하게 간다. 점심시간이 다다라 경부 고속도로에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소재지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단성은 옛 산청군의 지명이다. 점심으로 먹은 것은 방아잎을 넣은 깔끔한 맛이 일품인 추어탕이다. 박재천 이사님의 추천으로 찾은 목화식당(단성농협 맞은편)은이름난 맛집이었다. 이름에 걸맞게 추어탕과 함께 나온 반찬도 가짓 가도 많고 정갈하였다. 그중 매실짱아치의 땡땡한 과육과 맛이 일품이었다. 목화식당은 추어탕 말고도 돼지고기 소금구이도 맛이 좋다고 한다. 이름난 맛집 치고 찾아가면 알려진 것에 비해 많이 미치지 못하거나 소홀한 곳이 더러 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역시 나들이길에는 풍경도 풍경이지만 입을 즐겁게 하는 맛난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싸한 방아잎이 들어간 추어탕의 산뜻한 풀내음이 입안에 감도는 듯 하다.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이곳은 故(고) 제정구 선생의 고향이자 1999년 폐암으로 명을 달리한 후 자리하게 된 곳이다. 높고 낮은 산들이 둘러치고 남사면에 위치한 제정구 선생의 묘소는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이다. 묘소 앞에는 남도지방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굵고 긴 대나무숲이 마치 방문 앞의 발을 치듯 심어져 있다.
무덤의 형식이 이채로운데 제씨가의 특성인지 이곳 고성의 풍습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혼유석을 놓았는데 그 형태가 상석과 같은 높이로 갖추어 있다. 또한 나중에 제정구 선생 부인인 신명자 여사를 같이 자리하기 위해 묘 옆으로 작은 봉분으로 가묘를 만들고 있어 그 모습이 특이하다. 대개 무덤자리를 비워두거나 원무덤을 크게 조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지역내지 집안의 전통으로 보인다.
제정구 선생은 1944년 3월 1일 아버지 제병근과 어머니 박수연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억척스런 할머니와 어머니의 뒷바라지와 기대로 자랐다.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수를 하며 서울대에 들어갔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事件), 줄여서 민청학련(民靑學聯)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이 시기 청계천 활빈교회에 들어가 살면서 일생일대의 도반 정일우 신부(미국인 예수회)를 만나 청계천 판자촌 빈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로 양평동으로 옮겼으나 이곳 역시 철거를 피할 수 없었고 마침내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과 철거민들이 힘을 합쳐 시흥시 신천동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복음자리 마을이다. 현재는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의 작은자리 복지관이 남아 옛터를 지키고 있다. 1986년 정일우 신부와 함께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이렇듯 빈민운동의 전기를 마련한 제정구 선생은 새로이 정치에 나서 14, 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제정구 선생은 짧지만 불같이 살다간 사람이다. 그의 생애를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늘 '사람이 되는 길'을 갈구한 그의 신념을 통해 제정구 선생의 꿈과 살다간 자리를 생각 해 볼 뿐이다. 그는 지고 없으나 그가 세우고 함께한 사람들이 제정구를 대신하여 사회 여러곳에서 사람이 되는 길을 걸어간다. 우리 사회가 제정구에게 받은 큰 빛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 함께한 2기 배달학당 학승분들 또한 그 길에 동참한 소중한 인연이 아닌가..
이곳 척정리, 자실마을(척골)은 씨알재단 박재순 박사님의 "제정구는 높고 낮은 산이 빽빽하게 둘러진 곳에서 오로지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보고 살면서 하늘의 척도를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평한 것처럼 높은 산들이 촘촘히 둘러선 분지였다. 산등성이와 골짜기 마다 삼삼오오 집들이 모여 있고 층층히 마치 계단처럼 논과 밭이 어우러져 있는 작은 시골마을..
마을 한켠에 제정구 선생의 생가가 있다. 현재 생가는 4칸짜리 안채만이 남아있다. 그 형태는 부엌 한 칸에 방이 좌우로 한 칸, 그 가운데 한 칸짜리 마루 겸 광이 위치하고 있고 우진각지붕의 一자형 구조다. 남도지역 전통가옥은 집 가운데 넓고 큰 대청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여기 고성 등 남해 지역의 집들에서 보여지는 좁은 마루형식의 광은 이 지역 만의 특색인거 같다. 이는 무더운 여름을 대비하여 너른 개방적인 대청마루를 한 남도지역 가옥과 달리 좁으면서도 문을 달아 여닫는 구조를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경우에 따라 곡식 등 물건을 놔둘 수 있는 수납적 공간 기능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남해지역이 태풍 등 강한 돌풍이 자주 부는 날씨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함께 집 왼편으로 대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남해지역만의 특색이 엿보인다.
이곳 고성 척정리마을의 중심된 씨족은 칠원제씨(漆原諸氏) 부원군후(府院君后) 고봉파(高峯派)이다. 제정구 선생의 일가이다.
제씨(諸氏)는 본래 제갈(諸葛)씨에서 갈려나온 성씨로서, 그 연원은 중국 주(周)나라 때 우림장군(羽林將軍)을 지낸 제갈영(諸葛嬰)이 원조(遠祖)이다. 우리나라에서 본관은 문헌에 칠원(漆原)과 의성(義城) 2본(本)이 전하지만 의성제씨는 현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칠원제씨세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제갈량(諸葛亮)의 증손 제갈충(諸葛忠)이 나이 13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형제들(父兄)이 모두 죽자 신라 미추왕(味鄒王, 262~283)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밭을 갈고 글을 읽으며 살았다 한다. 그후 후손 한(漢)은 고려 현종(顯宗)이 예로서 맞이하여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니 왕이 어질게 여기고 그의 큰 아들 홍(泓)을 제씨(諸氏)로 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하고, 둘째 아들 형(瀅)을 갈씨(葛氏)로 하여 낭야군(瑯琊君))에 봉하여 각각 분성(分姓)하게 하였다. 득성조(得姓祖) 남양군 홍(泓)의 9세손 휘(諱) 문유(文儒)는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서 토번(吐蕃)으로 귀양갈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 1등으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옥대(玉帶)와 궤장(几杖)을 하사받아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 : 구산은 칠원漆原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칠원(漆原)으로 하고 부원군 문유(文儒)를 중조(中祖)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이곳 고성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중조 6세손인 철손(哲孫)이 중종(中宗) 14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고성(固城)에서 은둔(隱遯)하였고 고성지역의 큰 선비로서 그 위패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봉안하였다. 이곳 척정리의 입성조가 된다. 이후 후손 의병장 제말(沫)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낙(洛)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웅천(熊川), 김해(金海), 정암(鼎巖) 등지에서 대승하여 그 공이 홍의 장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고 높이 되었으나 이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생전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으며 선무공신에 이르고 정조(正祖)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어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충절사(星州忠節祠)와 이곳 척정리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祭享) 되었으며, 묘는 마산시 진동읍에 있다.
입향조와 운곡서원의 내력에서 척정리 제씨일가를 살펴보면 이들 제씨가는 제철손의 후손들로서 조선 전기에 훈구파와 대립 속에서 밀려났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를 위시한 사림파(기묘사림)로 고성으로 들어와 향촌사회를 성리학에 따라 일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해서는 그 후손 제말장군 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가문을 중흥시킨다. 이들 제씨형제들의 활동에 근거하여 생각할 때 학맥에 대해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남명학파와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경상좌도(경상도 동부=안동)가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퇴계학파가 성하였다면 경상우도 지역은 합천을 중심으로 문무를 겸비하여 의(義)를 실천(실천궁행實踐躬行실천궁행=실천을 몸소 행한다.)하는 것을 중시하였던 남명학파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후학들은 조식의 학풍과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에 당해 선비지만 칼을 들고 일어나 싸웠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 많은 걸출한 의병장을 배출하였는데 곽재우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지리적으로나 당시 정황상으로 볼 때 제말 장군 역시 남명의 문하나 그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명학파는 임진왜란에서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고 그의 문하였던 정인홍 등이 조정에 출사하여 붕당인 북인을 형성하여 광해군 조에 정권을 잡았으나 인조반정(1623)과 함께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정권에 밀려났다. 고성의 제정구 선생의 일가인 제씨가도 이와 같은 불운은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말장군 이후 사적이 뚜렸한 행적을 나타내는 인물이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연유로 생각된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에서 밀렸났지만 고성의 향촌사회는 여기 운곡서원을 중심으로 유림들의 중심이 되어 향촌사회를 이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향촌사회에서 정신적 구도로서 지역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고 이끌었던 모습들이 척정리 곳곳에 비석 등의 사적을 통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씨가문의 역사와 전통이 훗날 제정구 선생의 활동에 있어서 그 정신적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특히 그의 선조인 제철손과 제말장군 등의 실천적 삶과 이지역에 파다했던 남명학풍의 정신적 유산은 훗날 제정구 선생이 감상적 활동가(지식인)가 아닌 보다 실천적이고 실제적 삶을 살았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인물의 성장과 그 이면에는 가문의 내력과 그 유산 역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성군의 제정구 선생 묘소와 생가를 둘러보고 나와 다음 목적지인 남해도를 찾았다. 남해군은 남해도와 창선도의 두 개의 큰 섬과 작은 부속도서로 이루어진 곳이다. 특히 남해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강화에 이어 5번째로 큰 섬이다. 남해도는 행정구역상 남해군으로 참여정부 시절 이장 출신으로 남해군수를 역임하고 행정자치부장관이 되었던 스타 장관 김두관, 현 경남도지사의 고향이다.
남해도는 현재 연륙교(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세워져 섬 아닌 섬이다. 남해도를 들어가는 다리는 두 개로 남해 창선도와 동쪽 사천시가 맞닿아 있는 삼천포대교를 건너 창선도와 남해도를 잇는 창선대교를 건너는 길과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연결한 남해대교가 있다.
삼천포대교가 위치한 삼천포는 일상에서 쓰는 관용구인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말의 어원지이다. '이야기가 곁길로 흘러가거나 어떤 일을 하다가 엉뚱하게 그르치다'라고 흔히들 쓰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이야기 중에 하나를 소개하면, 옛날에 어떤 장사꾼이 장사가 잘 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장사가 안 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야기야 어쨌든 삼천포는 지리적으로 이 지역의 물산이 최종적으로 모여 운송 되었던 거점, 즉 바다를 이용한 수운 교통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지역의 물산들이 모두 삼천포로 모여 나갔기에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마치 "모든 길은 로마에 통한다."라는 표현처럼.. 그러나 지리적 유래와 상관없이 이 지역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말이라고 한다.남해대교가 위치한 노량리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지인 노량해협, 바로 그 노량이다. 노량(露梁)이라는 이름은 파도가 칠 때 그 솟은 물방울이 마치 이슬다리와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노량해전(1598년)은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이다. 전쟁의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사망하자 출병하였던 왜군들이 조선철수를 서둘렀는데 이 때 순천왜성에 있던 조선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는 퇴각을 위해 인근에 주둔한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왜성의 다치바나 요네시게, 남해왜성의 사위 소 요시토시(대마도주)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400여척이 넘는 연합군이 형성되어 구원에 나서게 된다. 이에 150여척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명나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구원군으로 나선 왜수군 막아 고니시와 만나는 것을 차단하였다. 바로 이 싸움이 노량해전이다.
노량에서 시작된 싸움이 근접전으로 이루어지며 남해도 서편 관음포 앞바다까지 학대되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순신 장군 뿐 아닌 명나라 장수 등자룡, 조선 장수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홍양현감 고득장 등 많은 장수가 희생되었다. 이때 손수 북채를 쥐고 전투를 독려하던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 직전에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愼勿言我死)"라고 유언을 남긴 것이 유명하다. 그의 나의 쉰넷, 1598년 11월 18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유해는 해전이 끝나자 관음포에 며칠동안 시신을 모셨다가. 이곳 노량 충절사 자리로 옮겼다. 지금도 가묘가 남아있는데 가묘라고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운구하여 충청남도 아산의 현충사에 모시기 전 6개월 간 묘를 썼다가 무덤을 없애지 않고 보존하여 유지하였기 때문이다.(가묘는 시신이 없는 무덤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1632년 지역 유생들이 모여 노량해전과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며 가묘 옆에 초사를 지었고 1658년(효종9년) 사당을 짓고 1663년(현종 4년)에 충렬사라고 사액되었다. 통영의 충렬사와 같은 이름을 쓴다.
이처럼 남해도와 남해지역은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과 이야기가 넘쳐난다. 아니 이순신을 빼고는 이야기가 안될 정도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고 지역과 지역민에게도 큰 자랑이다.이밖에 노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음포에 이순신장군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가 있다. 노량에서 시작된 전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이 이곳 관음포 앞바다에서 처음 뭍으로 옮겨진 곳이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전몰유허지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 바다를 이락파, 관음포에 바다로 돌출된 곶을 이락산, 거기에 사당을 지어 이락사(李落祠)라고 하였다. 이락사라는 뜻은 이순신 장군의 성 이(李), 죽음을 의미하는 떨어질 락(落)을 써서 이락사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 사당과 유허비를 세운 것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의 8대손인 이항권이 1832년(순조 32년) 충무공이 돌아가신지 243년 후 정작 돌아가신 자리에는 비와 사당이 없음을 알고 순조에게 상소하여 건립한 것이다.
한편 남해도는 예부터 '한점 신선이 사는 섬(일점선도一點仙島)'라 불리며 그 자연경관이 신선이 살정도로 신비롭고 빼어나다. 현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경상도 지역의 바다와 섬을 한려해상국립공원, 전라도 지역의 바다와 섬을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다.) 따라서 해안도로와 섬과 섬사이의 풍경 등이 아름답다.
특히 삼천포대교가 지나는 삼천포 앞바다와 창선대교(창선대교를 넘어 우측 해안도로 빠지면 지족리 어촌체험 마을이 있고 그곳에 죽방렴과 석방렴을 체험하고 관람할 수 있게 시설을 하였다.)가 지나는 바다에는 우리 전통 어로방식인 죽방렴(竹防簾)이 설치되어 지역 특산품인 멸치 등 다양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원리는 일반 개울에 설치한 통발과 같은 방식으로 물고기들이 들어와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죽방렴은 이 통발을 바다로 옮겨 온 것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나무를 박아 물고기가 피하지 못하게 하고 그 가운데에 대나무 등을 엮어 만든 발로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전통 어로이다. 죽방렴 말고도 그 재료에 따라 돌로 만든 석방렴(石防簾)도 있다.
이 죽방렴에서는 주로 멸치가 많이 잡히고 한 상자에 20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특산품이라고 한다.
창선대교를 넘어 좌측 해안도로로 가다보면 그 해안가 풍경이 절경을 이룬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지나면서 크고 작은 어촌마을이 위치하고 그 중에 물건리 마을의 풍경이 특히 빼어나다. 물건리 해수욕장 산등성이에 위치한 마을이 독일마을이다. 이 마을은 KBS의 유명 오락예능방송인 1박2일에도 소개가 되었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2001년부터 총 30억을 출자해 1960년대 파독 광부, 간호사로 나갔던 독일교포들의 한국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건축부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교포들이 독일재 건축자재를 일부 들여와 독일풍의 가옥을 지어 이국적 분위기를 내는 마을이다.
명성과 달리 집들의 모양이 다 비슷비슷해서 딱히 풍부한 볼거리와 체험으로 여겨질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국적 풍경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동해나 서해의 바닷가를 가면 으례 만나게 되는 방풍림(해풍림).. 대개 소나무를 심어 호젓한 해안가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방풍림은 가끔, 또는 처음 찾는 여행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쉴 곳을 주는 정말 반가운 곳이다.
이곳 남해 물건리의 방풍림은 소나무가 아닌 잎이 넓은 활엽수종인 느티나무, 상수리, 푸조, 팽, 보리수, 동백나무 등으로 심어져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 찾았기에 잎은 다 떨어져 마치 머리가 숭숭 빠진 중년의 머리처럼 나무와 나뭇사이로 바닷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해송(海松)이 아닌 활엽수로 이루어진 방품림이 여름에 찾았다면 그 풍경이 가히 볼 만 했을 것으로 보인다. 넓은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시원스레 떨리는 소리.. 한여름에 시원함이 대단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활엽수들은 주민들이 오랫동안 보호하여 나무 하나 하나가 수십년에서 백년 이상 자란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이와 같은 방풍림은 해안이나 강가 등에 조성하여 바람에 인한 풍해를 막기도 하고 해일과 홍수에 물이 넘어오거나 두둑의 흙이나 모래등이 침식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자연 보호방벽이다. 이렇게 숲을 조성한 자연유산은 우리 조상들이 자연친화적으로 나무를 심어 재해를 막았던 지혜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밖에 해안가에 푸른 숲을 조성하면 물고기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특성에 따라 연안에 물고기가 몰려든다고 생각하여 숲을 조성했다고도 전한다.
물건리 해수욕장은 해안가를 따라 둘러진 활엽수와 몽글몽글 굴러다니는 몽돌이 해안을 이루며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물건리를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 미조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곳곳에 마주치는 남해도의 자연풍광은 뭍에서 보던 모습과는 색다른 것이 많았다. 제주도에 갔을 때 바람이 심하고 흙이 적어 돌을 이용해 가옥의 지붕을 방비하고 집벽과 담, 심지어 무덤까지도 돌로 두르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었는데 여기 남해도 역시 태풍의 길목이고 외해와 맞닿아 바람이 심해서인지 무덤에 돌을 두르고 지붕과 담벼락 등에 돌을 이용한 생활모습이 등이 제주에서 보던 풍광과 매우 닮아있었다. 특히 아기자기하게 쌓은 낮은 돌담들이 볼만 하다.
해안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가며 멀리서 바라본 미조항의 모습은 푸른 바다에 접해 안으로 굽어진 항의 모습이 마치 유럽의 미항 나폴리가 연상되듯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다랭이 논과 밭이 층층이 수놓은 산마루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닮지 않은 우리 만의 삶의 유산이자 멋스런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패한 왜장 소 요시토시가 이곳에서 패잔병을 규합하여 퇴각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바다가 오른쪽에 있다가 왼쪽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오른쪽에 나타나는 마치 도깨비에 홀린듯이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늦은 저녁에 찾아든 숙소는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로 가깝게 남해도의 명산 호구산(627m)이 바라다 보이는 당산 자락의 작은 마을이다. 우리가 묵은 집은 씨알재단 회원의 집으로 마치 주인없는 주막처럼 저렴한 돈을 내고 자유롭게 숙소의 여러 시설과 물건을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하루 관리비 조차도 안될 숙박비와 숙소 사용에 대해서 주인처럼 쓰시고 주인처럼 아껴주시길 당부하는 주인장의 마음 씀이 각박한 요즘, 보기 드물게 넉넉한 인심과 자유로운 체험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옥의 형태는 우리가 먼저 살펴보았던 제정구 선생 생가와 같은 구조이다.
석평리 마을은 집집마다 귤닮은 노오란 열매가 달린 유자나무가 자라고 있고 여유가 된다 싶은 짜투리 땅에는 어김없이 마늘들이 심어져 있다. 남해도가 유자와 마늘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기 배달학당 마침보람, 마지막 일정으로 앞으로의 씨알활동에 대해서 나누었다. 씨알사상은 도산 안창호에서 남강 이승훈, 그리고 유영모, 함석헌 선생으로 이어진 것으로 씨알재단 박재순 박사님으로부터 정리되고 많은 사람들과 그 생각과 가치를 나누고 있다.
제정구기념사업회에서도 1기에 이어 2기 배달학당을 열어 그 소중한 이야기를 나누는 값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마침보람에서 10명의 배달학당 씨알동문이 탄생하였다. 사회 여러곳에서 씨알로서 사회의 빛이 되었고 배달학당에서 씨알공부를 통해 더욱 빛나는 씨알이 되리라 축원한다.
남해에서 1박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진도로 간다. 남해는 정말 아름답고 빼어난 절경을 가진 소중한 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길은 여러일정으로 너무 주마간산격으로 쉽게 지나쳤다. 그래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이 크다. 꼭 다시 찾아보고 싶다. 동행한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선동수 팀장님이 "남해가 참 좋네요 인남씨와 배낭매고 다시 한 번 찾아와야 겠어요"라고 하니 아쉬움, 그리고 좋은 경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구나 생각된다. 다시 찾아보자 다시 찾아와 남해를 둘러보자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일정은 단촐하게 남해에서 마무리를 하였지만 남해는 빼어난 절경과 함께 둘러볼 곳이 많다. 다랭이논과 밭이 절경을 이루고 수미륵과 암미륵, 서낭당을 통해 민간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가천마을.. 남해의 소금강산을 불리는 금산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백일지성을 드려 왕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해수관음보살상을 모신 보리암(강원도 양양 낙산사, 강화도 보문사의 관음보살상과 함께 3대 해수관음보살상으로 손 꼽힌다.)은 영험하기로 소문난 기도처이다. 또한 서포 김만중이 유배되었던 노도, 진시황의 영생불멸의 설화가 담긴 상주리 석각(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西市過此라는 그림문자, 서불은 진 시황제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떠난 도교의 방사), 그밖에 크고 작은 많은 항과 해수욕장은 남해의 뛰어난 자연유산이다.
더욱이 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유적이 충렬사와 전몰유허지를 그냥 지나쳐 노량의 남해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다. 그래도 노량해협을 남해대교로 건너면서 이곳을 눈에 담고 가는 것을 그나마 위안 삼는다. 다시 찾아 꼭 이순신 장군 유적을 찾자!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금신전선상유십이 今臣戰船尙有十二).”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이끈 수군이 왜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칠천량에서 몰살당하고 다시금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한 말이다. 이 장계는 명량대첩 직전에 올린 것이다.
명량(鳴梁)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의 해협으로 물살(조류)이 빠르고 소리가 요란하여 바닷목이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 불렸다. 명량은 그 한자식 표현이다. 현재 울독목에는 진도대교를 놓아 배가 아닌 다리로 건널 수 있다. 이곳 울돌목에 서면 정말 물살이 휘돌아 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렇게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서 싸움을 했던 것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명량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120명, 12척의 배와 백성들이 가져온 배 한척 총 13척으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이긴 싸움이지만 이 해전은 처음부터 무모한 싸움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주는 경상우수사 배설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다. 배설은 칠천량에서 패한뒤 전세를 돌릴 수 없기에 원균을 떠나 자신이 지휘하던 12척의 배를 이끌고 달아났다. 원균도 육지로 달아났다가 죽었다. 바로 배설과 함께 도망한 이 수군과 전함이 명량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 역전의 용사들이 되었다. 패배자이자 도망자였던 그들이 말이다. 역사는 이럴 땐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당시 배설은 12척의 배를 들어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 휘하에 들어갔지만 이미 전세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고작 열두척으로 그 수십, 수백의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목을 내밀고 죽여달라고 하는 것밖에는 생각이 안되었다. 이는 배설 뿐만 아니라 이들 수군 및 백성들.. 그리고 조정의 판단도 그랬다. 따라서 조정은 이미 손쓸 수도 없이 망가진 수군을 패하여 모두 육전으로 합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제 아무리 이순신이라 할지라도 무슨 수나 있을 수 있나하는 판단이었다. 수군을 파해 육전에 합류시키려던 생각은 당시 그런대로 육전에서는 관군에 재정비되고 의병들과 명군이 왜군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서해와 남해바다에 대한 제해권을 가지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만약 지금처럼 바다가 수군에 의해 통제가 되지 않고 왜군이 바다를 통해 북진하여 군량미와 병력이 원활히 조달된다면 전세는 금방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이 점이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킨 노림수였다.
이런 위기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배설은 신병을 핑계로 휴가를 내고 그날로 도망쳤다. 이미 칠천량에서 원균에게서 달아난 그였다. 이처럼 당시 상황은 아무도 조선수군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순신 본인도 명량으로 출천하는 전날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글씨에서 결연한 의지를 피력하였고 싸움이 끝나고 쓴 일기에서 "천행이었다."라고 밝히고 있어 이순신 본인도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서 싸움을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위기를 타계하고 도요토미의 야욕을 막아 일본의 북진을 멈추게 했던 것이 바로 명량대첩(9월 16일)이었다. 명량에서의 승전 이후 경기와 충청도로 진군했던 왜군은 서둘러 후퇴하였다.
이렇듯 칠천량에서의 패전은 경악할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전세를 역전시키며 경상도 지역으로 왜군을 몰아 넣으면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이 꽃필 때, 다시금 정유재란을 일어난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따라서 왜군들이 일본에서 건너와 다시 부산으로 집결하자 조정에서는 이 참에 아주 부산에서 완전히 차단하여 확전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이는 임진왜란의 참담한 공포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바람에서였다.(특히 선조는 끝까지 한양을 지킨다고 말했으나 한양을 버리고 야반도주하여 의주까지 갔다. 그래서 백성들은 한양 궁궐 대부분을 방화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마치 한강철교를 끊고 달아났던 이승만과 같다.) 따라서 유능한 이순신이 부산을 쳐서 일본의 북진을 막을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생각이 달랐다. 현재 부산은 육지와 인근 섬들이 이미 왜군들에 의해 장악되어 요새화가 되어있었고 거기에 엄청난 수의 왜수군이 건너와 방비는 물론이고 그 세가 대단하였다. 이런 이곳을 수군 단독으로 공격한다면 호랑이굴에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었다. 따라서 그나마 육지와 바다에서 함께 공격하는 수륙양면작전으로 협공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이것도 굳이 공격해야 한다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여러차례 불가하다는 장계를 올렸다. 하지만 조정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조는 오히려 이순신 장군이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였다. 이런 때에 원균의 상소는 선조를 격노하게 하였고 따라서 조정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무군지죄無君之罪),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을 들어 이순신을 파직하고 서울로 압송한다.
이때 권율과 이순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발탁했던 유성룡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라고 불가하다 적극 간하였고 당시 영남지방을 순시하다. 소식을 들은 도체찰사 이원익은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서울로 압송된 장군은 갖은 고문과 함께 죽음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이 때 우의정 정탁은 이순신을 살리고자 간절하게 상소를 올렸고 다행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이순신이 거부했던 부산진 공격의 명을 받아 부산을 치러갔다. 부산에 이른 그는 바다와 육지에서 방비하고 있던 왜군의 기세에 부산진은 그야말로 사지(死地)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결국 후퇴를 거듭하던 끝에 칠천량에서 모두 몰살 당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유재란을 통해 다시금 침략한 왜군은 승리를 확신하였고 반대로 조선과 명은 긴박한 위기에 내몰렸다.
이 때 조정은 긴급히 비변사 회의에서 열었지만 어찌할바 모르고 허둥됐는데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 만이 이순신을 통제사로 다시 기용하자고 주청하였다. 이렇게 다시금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굳은 결전의 의지를 밝힌다. 그것이 바로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금신전선상유십이 今臣戰船尙有十二).”이다.
이순신 장군은 희대의 명장이다.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아는 사실이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순신의 학익진을 써서 대승을 거둔 일본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승리 후 기자회견에서 넬슨과 비교되자 자기가 더 낳다고 생각한다고 하고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하사관에 불과하다며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일본해군은 진해기지에서 이순신 사당을 지어 매년 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렇듯 적국의 장수조차도 탄복하게 하였던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영광의 이면에는 백성을 보호하고(保民) 나라를 보호한다.(保國)라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전투에서 패하면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한다. 이 무거운 책임감.. 이건 두려움이었다.. 때문에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던 것이고 그 엄청난 중압감은 수시로 복통을 호소하며 그를 며칠이고 병상에 눕게 만들었다.
이렇게 뛰어난 인재이자 장군을 누구보다 시기하고 두려워했던 사람은 당시 임금인 선조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선조실록』에 보면 선조는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를 받고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라고 애써 공을 깎으려 했으며 또한 휘하에 있던 원균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를 우려한 치계에서 이순신의 잘못을 강조하고 있으며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는 무군지죄(無君之罪)를 비롯해 네 가지 죄를 지었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마땅히 율에 따라 죽여야 한다(『선조실록』 30년 3월 13일)"며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제거하려고 했다.
결국 이 영웅은 영화와 같이 마지막 전투 노량에서 숨을 거두었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건너는 이 바다가 이순신이 울었고 왜군들이 울부짖으며 죽어간 바다이다.
진도대교를 건너서 진도읍으로 들어간다. 이곳 진도는 숱한 이야기와 사연이 깃든 사람의 땅이다. 먼저 찾아간 곳은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9-1892)이 살았던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을 찾으면 정면으로 잘 꾸며진 우리나라 전통연못을 만나는데 허련의 후손들이 만들었다. 그 멋스러움 때문에 영화 '스캔들'이 촬영되기도 했다.
연못 뒤로 초가로 이루어진 소치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있다. 검정색 어두운 돌들로 만든 낮은 담장과 짚을 엮어 올린 아담하고 소박한 초가 지붕, 대문을 지나 들어서면 행랑과 안채가 두루 갖춰져 있다. 일반사람들은 이런 초가를 보면 평범한 살림살이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집들은 초가였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반움집 같은 곳에서 살았다. 옛날 사진이나 문화유적을 발굴하다보면 이런 사실을 곧잘 확인한다.
이렇게 초가를 짓고 살려면 자신이 경작하는 땅이 일정 이상 소유하지 않는 이상, 초가지붕을 유지 할 수 없어 보통 이상의 집이다.
흔히 청빈을 빗대어 초가 삼칸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당시 고위관료가 초가삼칸을 짓고 산 것은 대단한 검소였고 청백리라해도 손색없다. 이는 마치 수조에 달하는 자산가인 삼성 이건희 회장이 일반 아파트에 사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파트에 사는 걸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나
소치 허련은 헌종 때 시서화 삼정이라고 불리던 화공이다. 그 빼어난 미적 재능은 남종화풍의 산수화를 통해 빛을 발했다. 소치는 남종화의 새바람을 일으켰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이 남종화는 북종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명(明) 말기의 동기창(董其昌)과 막시룡(莫是龍) 등이 당나라 선종(禪宗)이 남북분파(南北分派)를 이루는 것을 착안하여 그 개념을 중국 산수화에 도입하여 그 출신성분과 화풍에 따라 남북화풍으로 구분하였다.
남종화는 우리나라에서는 남파(南派)라고도 하며 그 특징은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그렸기 때문에 남종문인화라고 한다.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직업이 아닌 여가나 수양 측면에서 수묵과 옅은 담채를 써서 작가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시정적(詩情的)으로 그림에 뜻과 생각을 담아 그린 그림으로 품격 높은 그림이다. 우리나라는 17세기 전반경에 유입되어 이영윤(李英胤)·조속(趙涑) 등의 일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소개되다가 1700년경 윤두서(尹斗緖)·정선(鄭敾)·조영석(趙榮祏)에 의해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그리고 다음 세대인 심사정(沈師正)·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鱗祥)을 중심으로 정착되면서 조선 후기 화단의 주도적인 화풍이 되었다.
때문에 그림의 내면보다는 그림 자체의 화려함과 세밀함에 치중하고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공필화(工筆畵) 계통의 북종화풍을 따르던 직업화가들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남종화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종화풍은 간략하면서도 거칠고 강렬한 토착적인 경향을 심화시키면서 점차 형식화되기에 이르는데 이 형식화 현상에 대해 반대하며 남종화 본래의 문인화적 이념과 정신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는 새바람을 일으킨 사람이 소치의 스승 추사 김정희다.
이와같은 회화의 전통이 남종화를 일제강점기와 8·15해방 후에도 꾸준히 사랑받게 하였고 주로 호남지방 화단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소치 일가가 있고 그의 손자 남농 허건이 대표적이다. 남농의 등단과 활동이 일제강점기에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있다.
소치가문이 남종화로 회화의 일가를 이뤄 현재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특히 진품명품이라는 문화재 감정프로그램에도 자주 소개 될 정도로 유명하다. 때문에 위작도 많다.
참고로 남종화와 대비되는 북종화의 대표적 작품은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 세종 29년 안평대군의 꿈을 그림 일본 덴리대天理大 소장)가 대표적이다.
소치의 이력에 등장하고 그 평생 거목이 된 인연.. 바로 스승들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와 추사 김정희다. 이들의 남다른 인연을 소개한다. 유홍준의『완당평전』에 따르면 조선후기 추사체라는 우리 고유의 서체인 추사체를 만든 추사 김정희와 초의, 소치의 각별한 인연이 소개되고 있다. 노론 벽파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같은 경주 김씨가문에서 태어난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에 사랑과 주목을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가문이 김조순의 안동 김씨와 세를 다투다. 1830년 아버지 노경이 윤상노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조의 배려로 풀렸났다가 다시 윤상노 옥사로 인해 나이 55세에 제주도로 9년간의 유배를 떠난다.
초의선사는 추사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서로 생각이 통하여 평생지기가 된 사람이고 소치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한 사람이다. 이 때부터 소치는 추사문하에서 서화를 배우게 되었고 추사가 평생을 아낀 제자가 되었다.
초의선사와 소치의 우정은 각별하였다. 특히 소치는 추사가 귀양 온 지 넉 달 만에 추사를 찾아왔으며 귀양살이 중에 세 번이나 찾아와서 뒷바라지를 해줬다. 그 때 추사 곁에서 생활하며 소치가 그린 초상화가 ‘완당 선생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 이다.
그리고 초의는 귀양 온지 2년이 되는 해에 서울에 있는 아내가 죽어 상심한 추사를 찾아와 반년을 함께했다. 유배지에서나 떨어져서 함께했던 초의는 유배지에서 회한에 젖어 있는 벗, 김정희를 위해 자신이 직접 기르고 덕은 차를 멀리 제주까지 소치를 통해 전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답례로 차향이 은은하게 나는 방에 걸라고 일로향실(一爐香室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의 향이 향기롭다.')’이라는 글씨를 써서 소치에게 주어 초의에게 전했다. 초의는 자신이 머물던 대둔사 일지암(一枝庵 ‘다만 한 개의 나뭇가지로 지은 암자’)에 걸었두고 친구의 마음 씀을 고마워했다.
이렇듯 초의와 추사의 사이에는 그들의 믿음직한 소치가 있었다.
차에 대한 일가를 이룬 초의는 맥이 끊어져가던 조선 차(茶)문화를 일으킨 다인(茶人)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와서 초의와 사귀며 차 맛을 익혔고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워 초의에게 차를 자주 요구하고 즐겼던 애호가였다.
말년에 소치는 헌종 부름까지 받았던 남종화의 대가였지만 스승 추사가 세상을 뜬 다음에는 고향 진도로 내려와 조용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소치의 글씨는 추사체를 따랐다.) 그때 남긴 것이 몽연록(夢緣綠 '꿈속에서 만난 인연' 후에 소치실록이라 바꿈)인데 마치 지난날 스승 추사와 초의와 보냈던 추억을 마치 일장춘몽으로 생각하며 지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봄꿈이 덧없음이 아닌 옛날 기분 좋은 추억이 한순간의 기분 좋은 꿈처럼 느껴진 노년의 소치에 마음이지 않았을까?
이들의 인연을 잘 설명해주는 『내일』, '추사와 초의 그리고 소치'라는 김세곤의 글을 소개하며 운림산방에서의 여운을 담는다.
"운림산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인연(人緣)’, ‘만남’이라는 단어를 되새긴다. 추사와 초의의 만남. 초의와 소치의 만남. 추사와 소치의 만남. 좋은 만남. 평생을 같이하는 인연. ‘일십백’이라는 말도 생각난다. 세상을 살면서 한 사람의 스승과 열 사람의 친구와 백 권의 책을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소치는 행복한 사람이다. 추사, 초의 같은 스승을 둘이나 두었으니. 추사는 행복하다. 초의 같은 친구, 소치 같은 제자가 있어서. 초의도 행복한 사람이다. 추사, 소치 같은 사람과 인연을 같이 했으니까."
진도 운림산방은 빼어난 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운림산방을 둘러싼 첨찰산(485m)은 마치 한폭의 병풍처럼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어 그 모습의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때문에 이 경치를 즐기고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 운림산방이 진도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고 찾는 이들도 많아서 진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진도역사관도 그 옆에 위치하고 있다.
진도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섬이다. 일찍이 그 역사도 깊고 오래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진도는 오래되고 낡은 낙후된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적고 아이들과 젊은이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이밖에 진도의 역사가 말해주듯 진도는 가까이 강화, 제주와 아주 많이 닮아있다. 뭍에 살지 않고 섬에 살기에 그 억척스러움이 남달랐고 따라서 이들 섬지역 여자들이 출가하면 집안을 잘 건사하고 잘 산다고 한다.
진도가 우리 역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삼별초(三別抄)의 역사와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전인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은 이미 앞서 이야기를 했다. 이밖에 진도지역 향토사가들이 밝혀낸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를 공략할 때 그 배후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조선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라는 왜구를 소탕하였던 황산대첩(지리산 부근)의 전적지(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가 남도 지역을 휩쓸 때 그 안정 배후가 진도였다라는 것)로 그 의미를 높이고 있는데 그러나 직접적인 것보다는 그 상황적 환경에 따른 역사적 접근이라서 이를 두고 진도지역의 빛나는 역사로 중심되게 말을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고려와 조선 건국에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자부심만은 대단하다.(진도 전 문화원장 강연에서)
그래도 진도를 대표하는 것은 배중손(裵仲孫, ?-1271)이 이끄는 삼별초의 새 고려의 꿈일 것이다. 배중손은 잘 알듯 고려 무신정권을 마지막까지 수호한 인물이다. 당시 국왕 원종은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를 찾아가서 항복하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다시 환도 하는데 이를 반대하고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새 고려를 건국(진도정부)한 인물이다.
당시 고려는 1232년 몽골과의 첫 싸움이후 고려의 전국토가 몽골군의 발굽에 유린되었다. 우리가 잘아는 황룡사 9층탑이 불탔고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이렇듯 몽골과의 항전은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를 하여 끈질기게 싸웠고 고려에게는 너무도 힘겨운 나날이었다.
이러한 대몽항전 시기 승장 김윤후가 몽골장수 살례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전투 등 혁혁한 전공도 있지만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들어간 당시 최씨 무신정권(최우)은 뭍에 있는 수많은 고려의 백성에 안전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방치 되었다. 오히려 몽골이 침략할 때는(몽골은 유목민족으로 전투 시 침략과 약탈 후 강화를 맺고 철수 하는 식의 전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평시에 항상 몽골군이 주둔 한 것은 아니다.) 나몰라라 하고 몽골군이 철수하면 강화도의 임시 조정에 막대한 유지 비용 때문에 전국에 걸친 조세수탈이 극에 달해 백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이렇듯 최씨 무신정권은 백성의 인망도 잃고 아울러 왕권을 농락하며 갖은 사치를 다 부렸기에 점차 대몽항쟁의 기운을 잃고 있었다.
결국 당시 국왕이었던 원종은 문신들과 함께 최씨 정권을 무너뜨렸고 아울러 무신정권 자체를 붕괴시키고 고려 왕권을 강화하고자 원나라에 항복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무신정권에 주요 군사력이었던 삼별초는 조정에 반기를 들고 강화를 떠나 새로운 은거지 진도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때 진도 동편에 용장산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을 조성하였다. 진도역사관에 전시된 여러 기와들이 당시 고려의 건축물에 쓰였던 것들이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 시절에 당시 집정자 최우(崔瑀, ? -1249)가 전국에 민중봉기(고려사에 도둑이라 기록)가 끊이질 않자 이들을 잡아들이고 진압할 목적으로 만든 야별초다. 점차 그 규모가 커지자 좌우별초를 나누고 거기에 몽골에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으로 만든 신의군(神義軍)을 합쳐 삼별초라고 했다. 이러한 삼별초의 목적은 최씨정권의 권력를 위한 치안유지였다.
이렇게 진도에 들어온 삼별초는 승화후 온(承化侯溫, ?- 1271 고려의 왕족으로 현종의 후손, 원으로 귀화한 남향 홍다구에게 피살됨, 무덤이 현재 진도에 남아있다.)을 추대하여 진도에 고려 정부를 세워 야심차게 대몽항쟁을 전개하지만 이미 전운은 기울어져 있었다. 진도라는 넓은 섬을 기반으로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주변 도서 및 전라도 일부를 경유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어디까지나 삼별초는 반쪽 정부였다. 또한 삼별초를 도와 참가한 지역민들 역시 몽골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자 했던 생각보다는 현 조정의 갖은 수탈이 지역민의 이반을 부추긴 것이기 때문에 그 항쟁은 오래 갈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271년 5월 전라도토역사 김방경과 몽골장수 흔도의 연합군이 진도에 들어가 배중손과 승화후 온을 죽이며 진도정부는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가 탐라(제주)로 옮겨가 2년 반의 항쟁을 이어가지만 끝내는 실패하고 말았다.(이로 인해 탐라는 몽골 직속하의 목마장으로 복속되었다.)
삼별초가 보여준 기나긴 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최고의 군대를 자랑했던 몽골에 고려 자존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역사였고 바다 건너 왜와 연결을 시도하면서 북방세력을 견제하고자했던 역사기도 했다.
이렇듯 진도의 역사 속에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고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남해라는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큰 혜택을 누리기도 하였지만 반면에 삼별초와 임진왜란 등의 어려움에 한복판이 되면서 바람잘날 없는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이것이 오늘의 억척스럽고 강인한 진도 사람의 정신과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진도문화의 민초적 기질, 민중적 성격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운림산방과 진도역사관을 둘러보고 진도읍으로 향했다. 진도읍 일정은 옥주서당(마지막 사진)에 훈장을 맡고 있는 장의균 선생(61 맨 위 사진)의 '우리말 한자이야기' 특강을 듣고 진도문화원 진도실버민속예술단 공연(중간 사진)을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장의균 선생은 제정구기념사업회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일찍이 제정구 선생님이 청계천 판자촌에서 시작한 배달학당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래서 제정구 선생님이나 박재천 상임이사님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친밀한 사이다. 서울에서 같이 구두닦이도 하고 장의균 선생이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가서 군대있던 박재천 이사님을 찾아왔던 일화, 간첩혐의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 때는 국회의원이 된 제정구 선생님과 면회를 했던 이야기 등 두 분의 해우로 끝을 모를 과거 이야기가 이어졌다. "저 형은 욕으로 시작해서 욕을 끝난다."라고 말씀 하시는 이사님의 표정이 장의균 선생님에 대한 깊은 우정과 애정이 닿아있음을 느낀다.
현재 장의균 선생이 하는 옥주서당은 옛날 진도 지명인 옥주(沃州, 땅이 기름져서 붙여진 것으로 고려 현종 9년에 진도로 개칭)라는 것에 따와 붙여진 이름이다. 서강대를 나와 빈민운동을 하였던 장의균 선생은 지난 1987년 7월 '간첩 혐의'로 체포돼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일본 유학 시절, 진도 출신 지인과 만나 재일 조선인(북한 출신)들과 친분을 나눈 일들이 국가보안법에 걸려 간첩 활동으로 누명을 쓴 것이다.
같이 간첩 혐의를 받았던 진도 출신 지인은 2000년 재조사를 받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장의균 선생은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누명을 못 벗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1995년 8월 만기 출소한 장의균 선생은 늘 간첩이라는 딱지가 붙어 취업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웠고 7년 전 고향인 서울을 떠나 진도로 내려왔다.
진도에 정착한 선생은 진도의 산야와 바다를 벗삼아 진도에서 새로이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힘을 합쳐 옥주서당을 열었다. 그래서 현재 옥주서당은 인근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무료로 한자 기초와 중국어와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 평소 독학으로 한자 발음을 우리말로 해석하는 연구를 하며 '우리말 한자 1800자(상용한자)'를 저술하고 있다. 현재 1천400자가 해독된 최초 한자인 갑골문(甲骨文)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몇몇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A4 60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책 3권으로 나눠 곧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진도문화원의 대강당에서 '우리말 한자이야기'라는 주제로 특강을 들었다. 갑골문인 상형문자를 풀이하며 그 음과 뜻이 우리말로 표현되어 온 것이 중국과 일본보다 원형에 가깝다는 해석을 하는데 퍽이나 흥미롭고 관심이 간다. 특히 우리말을 통한 한자의 재해석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시도로 비춰질 수 있으나 한자의 기원이 단순히 중국이라는 한정된 문화 특수성에서 완성된 것이 아닌 동아시아문명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역사성을 생각하면 초기 한자의 우리말 풀이는 매우 타당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고어에 대한 연구로서 우리말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어의 시원이 되고 현대 일본어로 발전하였던 그 뿌리를 찾는 연구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강에 이어 진도실버민속예술단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처음 이 공연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특강이 끝나고 바로 이어진 공연을 보며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자 많이 애를 쓰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단체를 만들고 공식적인 활동들을 왕성하게 하고 있음을 알고 난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어른신 중에 80이 훌쩍 넘은 할머니도 계셨다.
진도의 인간문화재 소리꾼 조오환 단장은 "우리 공연이 100회 때는 이명박 대통령이 참관하실 것이다라고 예술단을 독려하면서 공연했는데 그렇게 했더니 대통령은 안왔지만 그래도 군수도 오고 시의원도 오고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200회 공연에는 김정일이 올 겁니다. 북에서 김정일이 오면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겠어요"라며 소개를 했는데 그의 진도실버민속예술단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공연은 경쾌한 진도북놀이춤을 시작으로 성주풀이, 남도민요의 대표곡 진도아리랑 등 진도의 멋과 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즐거운 자리였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우리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군을 물리쳤던 역사적 배경을 가진 흥겨운 놀이, 강강술레를 예술단과 관람자들이 모두 어울려 한판 돌아가며 놀고 마무리 했다.
진도에 오기 전까지 맛과 멋이 있었다면 이곳에서 만난 흥이 넘치는 어른신들을 뵙고 흥이 더해져 남해기행은 멋과 맛, 그리고 흥이 더해진 최고의 나들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진도읍 진도문화원에 가면 남도가락을 흥청하게 즐길 수 있다.
해남 달마산(489m) 자락에 위치한 전 서울민족예술총연합 사무처장 심상구 선생(56)의 집, 이곳이 우리 남해기행 마지막 날의 숙소가 되었다. 늦은 밤 찾아들어 그 경관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른 아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둘러본 집과 주위 풍경은 한폭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심상구 선생은 우리 제정구기념사업회와 인연이 매우 깊다. 우리의 자매단체인 천주교도시빈민회에서 활동도 하고 제정구 선생을 도와 문화로 주민운동을 하였다. 현재는 이곳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 자락에 정착하여 자연친화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집안에 갖가지 담근 술과 솔잎 등 다양한 효소를 담그며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려는 열정이 대단하다.
암탉과 수탉을 함께 길러 이번에 처음 난 초란이라고 건네준 작은 달걀을 먹었는데 그 맛이 비리지 않고 구수하다. 아침 공복에는 손수 솔잎 효소 타서 주었는데 그 달콤하고 싸한 향기가 코 끝에 아른하다.
이른 아침 짐을 챙겨 마지막 일정을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해남하면 늘 우리가 떠올리는 생각은 "땅끝"이다. 끝, 시작, 처음, 마지막, 최초 등 우리 삶 속에 무수히 의미를 붙여가면 쓰고 있는 말이다.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는 바로 끝~ 땅끝마을이다. 뭍으로는 우리 한반도 빛의 끝자락..
땅끝마을은 현재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 땅끝마을 정상인 사자봉에 모노레일을 설치하여 몸이 불편한 분들도 쉬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동행하신 씨알재단 박재순 박사님은 다리가 좀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땅끝정상에 쉬이 오를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사자봉 정상에는 그 주변을 잘 볼 수 있도록 땅끝전망대가 있어 360'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다. 동쪽으로는 멀리 완도와 가까이 동화도, 백일도가 보이고 서로는 가까이 마치 커피전문점의 허니브레드와 닮은 꽃섬과 저멀리 진도가 보인다.
모노레일은 일반 왕복 4,000원, 전망대는 1,000원이다. 모노레일은 민자유치로 개발한 것이라서 할인이 없다. 다만 전망대는 전라남도 주민이면 신분증을 제시해서 면제 받을 수 있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땅끝마을의 멋진 경관을 둘러볼 수 있는 오늘, 이 여유가 감사하다.
땅끝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예술품의 극치.. 자연이 만든 최고는 달마산이고 인간이 만든 최고는 여기 달마산 중턱의 미황사가 아닐까
달마산과 산중턱의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대해 달마선사의 설화가 전한다.
달마는 인도 불교 28대 조사이자 중국 선종을 만든 사람으로 인도 파사국에서 태어나 반야다라존자에게 배우고 그의 권유로 470년 중국으로 들어와 소림사(소림사는 중국 무림의 본산 중 하나다.)에서 9년간 벽을 보며 좌선수행을 한 승려이다. 그때 혜가가 달마의 가르침을 받고자 눈 속에서 팔을 자르며 법을 받아 수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런 달마가 죽은 뒤에 달마는 죽은 것이 아니라 부처의 몸이 되어 짚신 한 짝을 지팡이에 꿰어 차고 서천(인도)로 갔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동국여지승람』고외스님의 이야기편에 따르면 1264년 고려 때 중국 남송으로부터 큰 배가 달마산 동쪽 바다에 들어와 "내가 듣기로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고 하는데 그 산이 이 산인가?" 고관이 묻자 주민들이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산을 향해 절을 하고 산을 그려갔다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마가 서천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해남으로 왔고 미황사를 달마대사의 법신이 계시는 곳이고 이 산은 달마산이되었다라는 이야기다.
단청이 없고 세월에 씼긴 듯 엷은 하얀 빛이 감도는 대웅보전은 달마산 산봉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단연 으뜸으로 치는 풍광이다. 아마도 해남 땅끝에서 만나는 빛은 이 미황사가 아닐까
미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1692년(숙종 18)에 세운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돌로 된 배가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경전·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53선지식(五十三善知識)·16나한·불화(佛畵)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通敎寺)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미황사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고 1601년(선조 34), 1660년 중창하고 1752년 금고(金鼓)를 만들고, 1754년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남 땅끝에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은 명산 중에 명산이다. 기감이 좋은 분들은 그 기가 매우 세서 오래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경이로운 매력을 가진 산임에는 분명하다. 서울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아쉽게도 달마산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달마산을 오면 달마산 제일봉인 도솔봉에 올라서 미황사의 여러 암자 중에 하나인 도솔암을 찾아야 한다.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풍광이 해남의 제일경치로 꼽으며 특히 해질녁 낙조가 그만인데 창건자였던 의조화상도 이곳 도솔암에서 낙조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서 땅끝마을을 둘러보고 우리집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하태욱 원장님이 이곳으로 귀농하기 위해 마련했다는 농가주택도 잠깐 들렸다. 아름다운 미황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미황사에서 동행했던 심상구 선생과 작별인사를 하고 서둘러 서울로 길을 잡았다. 서울로 가는 길에 얼추 점심 때가 되어 나주에 들렸다. 나주는 구시내 나주목객사인 금성관 정문 망화루 앞에 곰탕집들이 즐비하다. 그중에도 나주매일시장입구에 위치한 남평할매집이 제일 맛이 좋다고 이현옥(성동우리생활협동조합) 사모님이 적극 추천한다. 이현옥 사모님은 박재천 이사님의 반려자이자 동지로서 시흥 신천동에서 나고 자라 복음자리 때부터 제정구 선생님과 함께했던 한국주민운동의 산 증인이다.
점심으로 맛보는 남평할매집의 곰탕에 맛은 그 국물이 담백하고 구수했다. 또한 수육도 한 접시 시켜서 먹었는데 고기가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며 잡내가 없이 깔끔했다. 이곳 나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한우고기가 지역특색 음식이 되는 경우는 나주말고도 광주의 떡갈비, 수원의 갈비 등이 유명한데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모두가 교통의 요지였으며 물류의 집산지였다. 그리고 주변지역이 농업활동이 활발하여 과거 우시장이 크게 열렸던 특징이 있다. 나주 역시 영산강을 낀 기름진 나주평야에 위치해서 우리나라에 대표적 곡창지대이자 중심지다.
일행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나주목 관아 객사인 금성관을 둘러봤다. 그 규모가 상당한 것에 놀라웠다. 이곳 나주가 호남지역에서 꽤 위상이 높았던 큰 고을임을 알수 있다. 일찍이 나주는 서남해의 해상교통(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하며 발전한 곳으로 고대에 백제에 맞서 오랫동안 마한의 중심이 되어 독무덤의 거대고분을 영산강 유역에 남겼다. 뿐만 아니라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이곳 나주를 견훤으로부터 빼았아 세력을 키워서 고려를 건국했다. 이렇게 중요한 나주는 고려와 조선에서 목(牧)을 설치했다. 목은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단위로 부목군현 중에 큰 고을에 속하며 대개 지방의 거점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부임하는 관리도 종3품의 고위관료였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로 객사는 왕의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관리와 유림이 모여 망궐례 행하던 전각과 거기에 딸린 건물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나주목관아다.
기록에 따르면 금성관에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가졌고 구한말 을미사변(1895년) 때 중전 민씨(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의 관을 모셨던 충절의 역사가 깃들어있다. 김천일 장군은 호남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고 수원(독산성)과 강화도에서 활약하며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에 참가하였다. 이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역사가 깊은 나주에서 점심을 먹고 잘 딲인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를 거쳐 서울로 간다. 이번 2박3일 간의 남해기행은 고성 제정구 선생 묘에서 시작하여 나주에서 마무리하였다. 남해기행을 돌이켜 보면 '관광', 즉 '빛을 본다.'라고 생각하고 떠난 길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봤나? 시간, 공간에서 사람의 빛을 봤다. 시간에서 가을의 빛을 느꼈고 두루두루 거친 남해의 여러 지역은 공간의 빛이다. 그 속에서 빛이 발하고 있었는데 바로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살았던 제정구를 고성에서 만났고 남해 전지역에서 이순신 장군의 희생을 알았다. 또한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 옥주에서 거름이 되고 있는 장의균과 그의 사람들.. 땅끝 해남에서 자연을 벗삼은 농부 심상구.. 바로 이 소중한 만남과 인연이 이번 남해기행에서는 좋은 풍광과 잔잔한 옛이야기를 간직한 문화재와 함께 빛이 되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사람 사는 곳곳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라고 한다. 우리의 삶이 여정이라면 그 여정에서는 무수히 많은 인생 상수들을 만난다. 그들과 소탈하게 마음을 나눴던 남해기행, 진정한 '빛을 본' 관광이 되었다.
삶은 미정고(未定稿)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빛을 볼 것인가? 마음을 열고 뜨겁게 오늘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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