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지역향토사 - 당성(唐城, 당항성)

달이선생 2011. 6. 5. 11:47

*일러두기 - 이 글은 2011년 5월 1일 답사를 하고 작성한 글이다. 당성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은 말미의 참고자료를 참조하여 서술하였다. 2016년 2월 23일 다시 답사하여 최근 화성시의 의뢰로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3차발굴을 진행한 결과 처음 내용과 달리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있어 이를 수정하고 첨가하여 바로잡는다.

 

 

 

 

서해로 열린 화성시 궁평항

 

 

 

당성(唐城, 당항성)

 

 

 

  해가 지는 곳, 서쪽 끝. 내가 사는 화성은 우리나라 서해와 접했고 그 서쪽 바다는 가까이 중국에 닿아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곳은 중국과 교류, 멀리 세계와 만나던 길목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삼국시대 의상과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당(唐)에 가는 배를 타고자 목적지로 삼았던 유례도 있다.(최근 당성 인근 백곡리고분을 득도처로 본다) 조선후기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1882 개화정책을 하며 신식군인인 별기군을 우대하고 구식군인을 차별하여 일어났다.)이 일어나 중전 민씨(명성황후)와 민씨척족(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가 무너지고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낸 외척 민씨세력을 부르는 명칭-매천야록 기사 참조)이 청나라를 불러들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나서 그 배후인 흥선대원군(이하응, 고종의 아버지)을 청나라 장수 오장경과 마건충이 납치하였다. 그리고는 당성 인근의 포구인 마산포(馬山浦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끌고 가 청나라로 데리고 간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이곳 당성은 예전부터 중국 등 외부와 교류하는 최적의 기항지였다.

 

  2011년 5월 1일 황사주의보가 내려져 시야가 뿌연 오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의 당성(唐城)과, 궁평항을 찾았다.  

 

 

  당성의 입구와 진입로이다. 사적비와 안내판이 서있다.

 

 

  먼저 찾은 곳은 당성(唐城)이다. 당성은 서신면 소재지에서 남양쪽으로 가다가 새로 뚫린 길이 아닌 옛날 도로로 빠져 가면 좌측으로 신흥사를 지나 당성표시가 되어있다. 여기서 작은 산길로 오르면 당성 안내문과 사적비가 서있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는 차 서너대 정도가 주차를 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과 맑은 샘물이 솟는 약수가 있어 나그네의 갈증을 풀어준다. 물맛이 좋았다. 

 

  당성은 당항성(黨項城)이라고 널리 알려진 곳으로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경계가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에 있는 해발 165.7m인 구봉산(九峰山) 정상부와 계곡 및 서남쪽 능선에 성벽이 둘러져 있다. 당성을 기준으로 북서쪽으로 화량진성, 북쪽으로 해운산봉수, 서남쪽으로 염불산봉수,  남쪽으로는 백곡리산성, 청명산성 등 관방유적이 널리분포하며 가까이 서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처럼 서해와 인접한 이곳은 외부세계와 만나는 곳이었고 그곳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거점이기에 옛사람들에게 여기 화성의 바닷가는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성곽이며, 토루며, 봉수 등의 관방유적이 널리 분포했던 것이다. 아래 지도에서 보면 해안과 물길을 따라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당성이 위치한 이곳은 고대 마한(馬韓)의 54개국 중, 원양국(爰襄國은 지금의 비봉 · 남양 · 마도 · 송산 · 서신 · 팔탄면 일대)에 속하였고 이후 한성 백제의 강성에 따라 처음 백제에 속하였다가 고구려의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멸하고(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살해 당하였고 뒤를 이어 아들 문주왕이 파괴된 한성을 떠나 곰나루=웅진=공주를 수도로 삼았다. )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면서 당성군(唐城郡)이 되었다. 바로 당성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온 것이다.   한강유역을 상실하면서 위축된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고토를 수복하고 개로왕의 원수를 갚고자 무령왕 대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아들 성왕이 드디어 신라의 진흥왕과 한강유역을 수복하고자 군대를 일으킨다. 하지만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를 배반하고 한강유역 전체를 신라에 편입시켰다. 결국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진흥왕의 군대에 의해 붙잡혀 노고산성에서 살해당했다.(당시 성왕을 패퇴시킨 장수는 가야 출신 김무력 장군으로 김유신의 할아버지로 신주도독이었다.) 따라서 당성을 확보한 신라는 당항성을 설치하고 이 길을 통해 서해 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통하는 출입구를 확보하였다. 이러한 한강유역 확보는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의 안정적 교류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를 통합하는 삼국통일의 기반이되었다.    또한 당항성이 가지는 위치는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해상교역로의 중간 기착지로서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왜(일본)의 나라까지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대외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신라 하대에 와서 경덕왕 16년(757년)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고 대당교역의 교두보로서 우뚝 솟은 당성은 신라인들이 신라의 왕도(금성=경주)에서 상주와 삼년산성을 거쳐 당성에 이르는 길을 당은포로(唐恩浦路)라고 불렀다. 흥덕왕 4년(892년)에 당은군은 다시 당성진(唐城鎭)으로 고쳤다. 당성진은 강화에 설치된 혈구진(穴口鎭), 장산곶 근처에 설치된 장구진(長口鎭)과 함께 북방을 방어하는 군사적 역할, 서해안에서의 안전한 해상교통로 확보와 해상무역 보호를 담당하였다. 

 

 

고대 동아시아 한, 중, 일 해상교역로(대당교역로)이며 한반도 중부의 당항성의 위치가 주목된다.

출처 : 한신대학교 2010,『한신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한신대학교 박물관 20년의 발자취』

 

 

 

당성 진입로로 오르면 서편, 좌측으로 난 성벽이다. 최근에 복원된 모습이다.

 

 

  현재 당성은 돌로 쌓아(석축) 복원을 하여 석성의 위용을 보이고 있다. 

  일찍이 당성의 규모를 말해주는 제일 오래된 기록은

 

  "남양부에 옛 당성이 있는데 부 서쪽 20리쯤의 옛 성으로 둘레가 2,415척(약 730m) 높이가 10척이다.(南陽府 有曰 古唐城 在府 西二十里 有古城 周 二千四百十五尺 高十尺 世傳 남양부 유왈 고당성 재부 서이십리 유고성 주 이천사백십오척 고십척 세전)"-동국여지승람 남양부기(

東國輿地勝覽

南陽府記,  1481년 성종12년에 편찬한 지리지)

 

  지금 복원된 규모와 달리 조선 전기무렵에 전하는 당성의 규모는 상당히 작다. 삼국의 항쟁에서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지역이었던 특성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고자 치열했던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작은 규모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다. 이는 통일신라시대까지 대당교역으로 중요했던 당성이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와 해상교역로의 다변화, 그리고 육로 등의 개발되면서 당성의 쓰임이 현저히 줄어들었던 시대의 변화로 결국 보수가 되지 않아 점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현대에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예전에 충청도의 공주와 홍성은 대전과 천안보다 큰 고을이었으나 1900년대 철도가 놓이면서 성장하기 시작하여 60년 이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면서 대전과 천안이 충청도에서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이렇듯 도도한 시대의 물결은 당성이라고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성 내 바닥에는 여러조각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해 있다. 대부분이 통일신라기의 유물이다.

이렇듯 당성은 통일신라기에 중요한 거점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성내 상당수의 사람들이 거주를 하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당성의 서북쪽 성벽의 모습이다. 외벽을 돌로 쌓은 편축식이다. 높이는 대략 2m 남짓이다. 돌은 자연석으로 그대로 이용하기 보다는 일정한 크기로 연마하여 쌓은 것으로 보이고 그 흔적을 말해주듯 성벽 돌에 돌을 가공하였던 구멍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2차 발굴조사로 이와 같이 복원된 성곽은 실제 당성의 2차 성벽과 거리가 멀다. 신라하대 당성진의 성벽은 토석혼축식으로 중심부를 석회를 뿌려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이다.

 

 

  당성의 성곽을 보다 상세히 알아보면 이 성은 지금까지 복합식 산성으로 알려져 왔으나(1992년 사적보존회 지표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벌여 1998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책임조사원 김병모)에서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일부와 건물지, 북문지를 조사하고 신라시대에 사용된 중요한 성곽이자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성으로 밝혀 당항성의 존재를 높혔다.  이어 2000년에 한양대학교 박물관(책임조사원 배기동)에서 2차 발굴조사를 벌여 당성의 성곽이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2중의 성곽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밝히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성벽(1차 성벽)은 구봉산 정상부에서 봉화산으로 뻗는 남서능선을 따라 테뫼식으로 축조된 삼국시대 성벽이다.(테뫼식이란 산성의 특징으로 산정상부에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여 테뫼식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테뫼식 산성은 산정상부에 위치하여 그 규모가 작으며 이에 반해 계곡을 둘러 쌓은 특징을 가지는 포곡식 산성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다. 테뫼식과 포곡식이 함께 조성된 산성은 혼합산성으로 분류한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599m이며, 면적은 14,299㎡이고 외벽의 높이가 4~5m에 이르며 성벽 위로 2~3.5m의 회곽도가 조성되어 있다. 발굴조사에서 북쪽에서 동쪽으로 꺾어지는 부분이 확인되었는데 장방형의 화강편마암 섬돌로 쌓아올렸으며 기단 바깥쪽에 보축을 하여 성벽의 안정성을 도모하였다. 성내에서는 6~8세기 대의 신라유물들이 주로 출토되었다.(망해루지 사진 다음 성곽 사진)

 

  두번째 성곽은 이 성벽의 중간부를 관통하며 구봉산 동북쪽 능선을 따라 가다가 동남방향의 산복부를 감싸안은 장방형의 포곡식 성벽이다. 석축으로 복원된 지금의 2차 성벽은 보이는 것처럼 석축성이 아닌 일부 구간 적심을 쌓고 석회를 사용하여 판축하여 쌓은 판축기법의 토석혼축에 성벽으로 밝혀졌다.(아래 2차 발굴 사진-토축성벽 단면에 석회를 켜켜히 다진 판축모습이 확연하다.) 따라서 지금껏 알려져 온 석성이 아닌 토축된 토성이 당성의 모습이므로 석축으로 복원된 성곽은 잘못된 것이다. 특히 2차 성벽은 통일신라시기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므로 신라하대 당성진 설치(829년)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의 높이는 3~4.5m, 둘레 1,168m 면적 72,598㎡이다.  지금까지 이 성벽이 내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 정상부의 테뫼식 산성의 협소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통일신라 말기에 새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3차 발굴조사에서 2차 성벽 내 곡간부 집수시설 및 일대를 조사하는 가운데 당성 2차 성벽 동쪽벽을 조사하면서 성벽 하부 매립층 바닥면의 뻘층에서 이른시기 어골문 기와가 확인되고 있어 성벽 축조시기가 신라하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높혀주고 있다. 또한 이곳의 성벽 구간이 내부의 판축된 토축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외곽으로 석축으로 붙여넣은 것이 확인되고 있어 당성이 전체 토축성을 이루면서도 구간에 따라서는 석축으로 보강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석축부에서는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발견되므로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보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16,『당성 3차 발굴조사 전문가검토회의 자료집』제2016-1집

 

  이처럼 당성은 발굴조사 결과 시대를 달리하여 1차, 2차로 쌓은 성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대중국 항로(대당교역로)의 기착지로서 역사적인 중요성이 매우 큰 유적이다.

 

  이 외에도 동북쪽 능선과 서북쪽, 서남쪽 능선을 따라가며 작은 외성과 서남쪽 외성에서는 남양장성이라 불리는 토루가 연결되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1978년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이준선의 석사학위논문에서 15km 이르는 대규모 성곽으로 발표) 그러나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3차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위 '남양장성 트렌치 사진'에서 보듯 당성 북편 남양장성으로 비정되었던 능선 일부를 시굴조사하여 절개된 단면에서 인위적인 축조흔적이 없는 자연능선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졌던 남양장성은 역사적 실체(문헌자료)는 물론 고고학적 증거도 확인되지 않은 것이 되므로 이를 조속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서쪽 1차 성벽에 인접한 정상부에는 노목이 우거진 숲이  있는데 여기에 성황당이 있었다. 이 성황당을 헐고 발굴조사를 한 결과 망해루터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노출되었다. 사진에서 망해루라는 표지판이 서있는 곳이다. 망해루는 고려 말에 남양부사로 재임(在任)했던 정을경(鄭乙卿)이 1391년경 이곳에 망해루를 신축(新築) 한 것으로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정을경이 아들 정강(鄭崗)을 시켜서 그 스승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 - 1396)에게 글을 청하여 쓴 '남양부 망해루의 기문(南陽府望海樓記)'이 전한다.

 

   남양부는 삼국 시대에 당성(唐城)으로 불리다가, 본국에 들어와서는 중세(中世) 이래로 익주(益州)가 되었다. 이 고을의 홍씨(洪氏)는 태조(太祖)가 일어날 때부터 익대(翼戴 받들어 추대함)의 공이 있었으니, 휘(諱) 은열(殷悅)이 바로 그분이다. 대대로 대족(大族)을 이루며 살아오다가 강도(江都) 시대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남양군(南陽君 홍규(洪奎))이 권신(權臣 임유무(林惟茂)를 가리킴)을 죽이고 왕실을 중흥하였는데, 이분의 따님인 문예부주(文睿府主 충숙왕의 비(妃) 명덕태후(明德太后))가 양조(兩朝)의 태모(太母)가 되었으므로, 주(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게 되었다.

  대개 산천의 신령스럽고도 빼어난 정기(精氣)가 한데 뭉쳐 아름다운 상서(祥瑞)를 드러냄으로써 억만년토록 끝없이 이어 갈 기업(基業)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니, 다른 군현(郡縣)과 똑같이 간주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지키는 신하도 중하게 여겨, 반드시 신중을 기해서 뽑아 보내곤 하였던 것이다.

  해정 어수(海亭漁叟) 정후(鄭侯)가 이곳에 부임하여 말하기를, “태양도 나오고 들어가는 곳이 있고 장강(長江)의 물도 솟아 나오는 곳과 돌아가는 곳이 있으니, 아무리 멀고 큰 것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잘 살필 줄만 알면 모두 그 시원(始原)을 알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군상(君上)이 나오게 된 곳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신하 된 자라면 그곳에 대해서 당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서 감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나로 말하면 덕음(德音)을 널리 입고서 군상이 나온 이 땅을 지키는 신하가 되었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고는, 이 때문에 더욱 밤낮으로 외경심을 지니고서 가능한 한 덕을 앞세우려고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아전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하였을 뿐 무턱대고 그들에게 법을 가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노력하였을 뿐 무턱대고 위엄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가자 온 고을이 크게 평화롭게 되면서, 이로운 것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고 해로운 것은 모두 없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을의 치소(治所)에다 누각을 세워 외관(外觀)을 웅장하게 하는 한편 찾아오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하였는데, 누각의 이름을 망해(望海)라 하고는 그의 아들인 국자감(國子監)의 학생 이(彝)를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이 고을에 옛날에는 못이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방치하고 수리하지 않은 결과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아래에는 진흙만 쌓여서, 주민들이 그 속에 들어가 서로들 뒤섞여 경작을 하였습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그 못의 용이 다른 경내(境內)로 옮겨 가는 바람에 그 뒤로 말라붙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이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사(府使)께서 부임하고 나서 이 못을 파내고 수축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날 먹구름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일어나더니 바람과 우레가 뒤따라 이르렀습니다. 이때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꿈틀거리는 용의 꼬리가 하늘 높이 보이다가 못까지 내려왔는데, 그 뒤로 못물이 사흘 동안이나 끓어오르고 흰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나면서 그치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감탄하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하였다.

나는 말한다.

  마음의 작용이야말로 위대하다고 할 것이니, 그 마음을 한군데로 집중하기만 하면 천하의 일이란 족히 하고 말 것이 없는 것이다. 정후(鄭侯)의 공경하는 그 마음이 환하게 통해서 막힘이 없었기 때문에, 밝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화목하게 되고 어두운 곳에서는 용과 같은 영물(靈物)이 찾아오게 된 것이니, 이 누각과 같은 작은 일이야 굳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 고을의 연혁(沿革)을 먼저 적어 넣은 다음에 용이 돌아오게 된 사연을 기록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고 한 것이다. 정후의 이름은 을경(乙卿)이요 자(字)는 선보(善輔)인데, 일을 맡길 만한 재능이 있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다.(南陽府。在三國時號唐城。入本國中世以來爲益州。州之洪氏。自太祖興時有翼戴功。諱殷悅者是已。世爲大族。至江005_050a都末。南陽君誅權臣。反政王室。生文睿府主。爲兩朝大母。陞之爲府。蓋山川靈異之氣鍾。而休祥以基。夫萬億年無疆之業。固不可以他郡縣等夷之也。故重其守臣。亦必愼簡。海亭漁叟鄭侯之至也。以爲日之有出入也。水之有源委也。雖遠且大。善其術者皆能知之。況君上之所自出乎。爲之臣者。固當敬止而毋敢忽也。矧余光被德音。得爲君上所出其地之守臣哉。是以。夙夜惟寅。務以德先。化其吏。不敢加以政。惠其民。不敢施以威。朞歲大和。利無不與。而害悉去之。迺作樓于州理。以壯瞻視。以娛賓使。揭名曰望海。使005_050b其子國子生彝徵余文爲記。且言曰。州舊有池。久廢不修。上葑下游。居人雜耕其中。州人相傳池之龍徒宅境。其後乃涸。然莫知其信否也。侯旣至。命浚而築之。是日。黑雲暴起東南。風雷隨之而至。州人望之。矯矯見龍之尾及池而下。池水沸三日。白氣蓊然不止。老幻嗟異。余曰。心之用大矣。一定其心。則天下無足爲者。鄭侯敬止之心。洞遠無間。故明則人和。幽則物格。是樓之微。何足道哉。故先書郡故。後錄龍返之由。以告來者焉。侯名乙卿。字善輔。以幹材行于世云)

                                                                                       -『목은집』, 목은문고 제6권 기 '남양부 망해루기'

 

   2차 발굴 당시 1차 성벽 정상부근에서 위의 망해루기의 실제로 파악되는 기초시설(팔각건물지-신전 또는 제사처)을 확인하는 한편, 토제마(흙으로 만든 말)와 같은 제사관련 유물과 '관(官)', '관(館)' '대관(大官)' 등 명문기와와 통일신라 인화문 토기 등 다양한 시기에 걸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3차 발굴 조사까지 이루어진 결과 망해루지는 건물의 구조와 규모로 보아 목은 이색의 기가 전하는 고려말 중창된 망해루로 추정된다. 그러나 출토되는 기와가 고려시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도 출토되고, 북편의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어서 고려 이전부터 사용이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 조사된 초석간 거리가 240cm로 고구려척(36.6cm)을 축조 당시 이용한 것으로 보여, 삼국시대 고구려척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볼 때 이른시기 건물이 조성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곳 망해루지는 1차 성벽은 물론 2차 성벽에 있어서도 구봉산 정상부이므로 전망이 가장 좋아 중요한 관방 거점으로 성의 축조와 함께 망루 또는 장대의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이 사용된 시기 지속적으로 개보수가 이루어졌고 고려 말 이색이 망해루기를 남길 때의 중창된 모습은 관방의 성격보다는 풍류와 경관의 즐기려는 이유가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폐기되면서 기와층(와적층)을 남기며 없어지고 소규모의 다른 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다.

 

 

출처 :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16,『당성 3차 발굴조사 전문가검토회의 자료집』제2016-1집

 

   당성에 대해 지금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부분이 협소하여 성곽의 정확한 구조와 내부양상, 주변에 분포하고 있을 생활유적이나 고분군, 생산시설 등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다행히 화성시는 당성 복원과 관광자원화 등의 목적으로 종합적인 조사계획을 수립하여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소장 배기동)에 의뢰하여  2015년 8월 7일부터 2016년 1월 22일까지 3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출처 :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16,『당성 3차 발굴조사 전문가검토회의 자료집』제2016-1집

 

    현장에서 3차 발굴을 맡아 진행한 김기룡 팀장의 설명으로 이번 3차 발굴의 성과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당성이 '당항성'이라는 그간의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는 '唐'자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당항성의 위치비정을 두고 분분한 논란이 종식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고학에서 명문기와의 발견이 그 유적의 성격과 존재를 밝히는데 중요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3차 발굴조사에서 1차 성벽과 내부 시설물 조사에서 나온 성과로 1차 성벽 북편으로 4*5m의 트렌치 조사를 통하여 2m를 쌓아올린 석축에 풍화암반 상부의 적갈색점토층 위로 와적층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唐자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 기와는 명문수키와로 '?宅唐'이 장박으로 반복적인 타날로 전사되었다. 기와는 협단부가 파손되어 정확한 길이는 알 수 없다. 경질 소성이며 태토는 세사립이 혼합된 점토이나 비교적 정선되었다. 외면은 장박으로 두들길 때 생긴 각이 남아있다. 내면은 포목흔, 그 위로 빗질로 쓸어내린 흔적이 있고 와도를 외면에서 내면으로 1/2가량 그은 후 분활하였다. 잔존길이 30cm, 너비 13cm, 두께 2.5cm이다.

  이 층은 건물이 폐기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풍화암반 위로 목탄층이 확인되는데 이 목탄층은 건물이 불이 타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전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성이 당항성으로서 관련된 역사기록의 사실이 명문기와의 출토로 고고학적인 자료가 최초로 확인되었다. 초기 1차 성벽에서 나온 '당'자문이 찍힌 기와는 그동안 논란이 없지 않았던 당성의 역사적인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대단히 희귀한 자료이다. 이 명문와는 과거 당항성 또는 당성으로 불리던 성의 비정에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이 성이 당성이고 당항성은 아마도 음의 혼차일 가능성도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서부터 당성으로 불리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당성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한 근거가 제시되어지지 않고 현재의 위치로 비정하고 있었으나, 이번조사를 통해 확인된 당자명 기와를 통하여 당성의 위치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확인된 것이다.

 

 

 

 

 

출처 :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16,『당성 3차 발굴조사 전문가검토회의 자료집』제2016-1집

 

  또한 2차 발굴과 마찬가지로 3차 발굴에서도 망해루지를 발굴조사 하면서 다량의 토제마가 출토되었다. 모두 17개체이다. 토제마는 일반적으로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 지방에서 많이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신라와 가야에서는 산성 뿐 아니라 무덤에서 말모양 토제품이 부장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당성에서 확인되는 토제마의 경우 그 형식이 매우 다양하여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망해루지는 서해 바다가 조망되는 당성의 가장 정상부에 위치하고, 망해루지 남편으로 2차 발굴조사 당시 8각 건물지가 확인되기도 하여 제와 같은 의례가 있었으며, 거기에 토제마가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례와 관련된 유적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다수 분포하는데 해상활동과 관련하여 제사를 지낸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안의 죽막동유적이 대표적인데 이를 통해 당시 당성이 해상무역의 전초기지로서 이용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많은 의례 행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토제마의 출토로 당성이 신라와 통일신라에 걸쳐 대중교역의 중심 거점이었던 것으로 볼 때 신라의 특징을 가지는 토제마가 시기를 달리하며 다수 출토된 것은 이를 증명하는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16,『당성 3차 발굴조사 전문가검토회의 자료집』제2016-1집

 

 

망해루지 발굴 전경이다. 쌓여 있는 돌들이 건물지를 이루던 석축이다.(3차 발굴)

 

  현재 발굴단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당성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앞두고 있다. 

 

  이밖에 당성 주변의 백곡리 토성이 당성과 관련한 보조성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특히 백곡리 토성에는 백곡리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백곡사지가 있으며 백곡사의 건립은 이 곳 당성이 통일신라 시대 흥덕왕 대 당성진의 중요한 지역 거점이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당성 진입로에서 좌측으로 난 서벽을 따라 서북능선, 동벽을 거처 내려오면 중앙에 넓은 대지가 나타나고 맑은 샘물이 솟는다. 푯말에 우물터라고 설명이 되어있고 주변에 건물터라는 푯말(2차 발굴 당시 건물지 확인)이 서있듯 당성의 중요 관아와 건물들이 이곳에 밀집하였을 것이다.

  샘물이 풍부하게 솟는 것으로 보아 산성의 취약성이 음용수의 문제인데 당성은 물이 풍부한 안정된 성이며 주거생활하기에 적당하리라 본다. 물이 콸콸나오고 시원스레 내달리니 가슴이 뻥 뚫리듯 시원하다. 물흐르는 소리가 사람에게 제일 안정된 소리라고 하더니 나같이 번잡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이 깃든다.

 

 

 

  3차 발굴조사로 지금은 한적하게 우물물이 흐르는 풍광을 느낄 수 없다. 이번 조사에서는 2차 성 내 곡간부에서 방형의 집수시설 및 원형연못지가 확인되었으며, 일부 중국 교역품(중국 자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변에 철기생산관련 공정 및 건물지가 확인되어 당성 내 시설물의 다양한 용도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확보되었다.

  교역품의 출토는 교역품이 유적 내에서 일상적인 사용이 이루어진 것은 교역거점이었음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집수시설은 규모가 14*9m로 크지 않은데 주변에서 철기생산과 관련된 작업을 비롯한 다양한 생산작업이 이루여졌음을 보여주어 성의 복합적 기능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3차 발굴에서 얻어진 성과로 당성의 존재 확인 및 당성이 단순 성곽을 넘어 대당교역의 거점이며, 아울러 철기공방 관련 시설의 확인으로 성내 자급자족 생산시설이 기능하였던 중요한 유적임을 밝혀주고 있다. 3차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차후 전면적인 추가 발굴이 진행될 예정으로 앞으로 역사의 그늘에서 감추어 있던 당성의 민낯을 확연히 볼 날이 멀지 않았다.

 

 

 

 

(출처 : 대부도 어촌박물관)

 

  바다가 그립다고 바다가 보고프다는 사람이 있어서 내 마음도 동하여 바다가 보고팠다. 그 사람과 함께가지는 못하지만 혼자서 궁평항 방파제로 서해의 넓고 넓음을 만끽하였다. 이곳 궁평항은 경기도 보트축제도 열리는 명소 중에 명소고.. 바다 가운데서 낚시를 즐길 수도 있는 재밌는 곳이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이 저마다 기쁨,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찾는 이 바다는.. 그 옛날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권을 놓고 사투를 벌였던 곳이고 신라가 꿈꾼 문화의 보고 당으로 가던 항구, 고려 때 몽골과 왜구가 드나들며 극성을 부리고, 고려를 이어 조선에서도 삼남지방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들이 지나며 조선 후기 서구 열강이 저마다 개항을 구실로 제 집 드나들듯 오갔던 뱃길이었다.

  그리고 1876년 일본제국주의가 해안에 출몰하여 갖은 해악을 끼치며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었고 갑오년(1894년) 청나라와 일본이 맞붙어서 이 바다, 풍도 앞에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함대가 수장되었다.  

 

 

 

(출처 : 대부도 어촌박물관)

 

  우리의 역사와 함께한 바다, 시원한 바닷바람 사이로 코 끝 찡하게 전해오는 예전의 아련한 기억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되고 영광의 역사는 시간에 묻힌다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

  궁평항을 끝으로 오늘 당성 나들이를 마친다.

 

 

 

 

- 참고 -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전문가검토회의자료집 제2016-1집 당성 3차 발굴조사 2016. 2

한신대학교박물관총서 제16책 吉城리토성 2003

한신대박물관총서 제20책 남양만의 역사와 문화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신대학교 박물관

경기도 오산시 양산동 411

031) 370-6594

한신대학교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hsmuseum.org

 

화성문화원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발안로 89 

031) 353-6330

화성문화원 홈페이지http://www.hs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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