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히 결혼하지 않으리라.
나는 문학과 함께 살란다.
그것이 나의 애인이요, 아내이다.
안회남 겸허(김유정전(傳)).

'어느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 ’
먼저 ‘산골 소년’으로 말한 이는 개화당의 영수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 1851~1894)이다. 공주 정안의 산골 광정리 감나무골에서 태어난 소년 고균이 산골을 추억한 것을 알지 못한다.
김유정(金裕貞)은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실레마을 산골짜기를 향수한 산골 소년이다. 고균이 혼군 고종을 사모한 슬픈 산골 소년이었다면 유정은 평범하고 서정적인 가슴앓이를 하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아팠고(박록주, 박봉자), 실제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가까이한 끽연으로 골초 되어 가뜩이나 약한 가슴, 폐병(폐결핵, 1933)이 되고 심신을 앓는 가슴앓이였다. 결국 그 가슴앓이로 요절하였다.(1937)
복원된 김유정 생가에서는 김유정의 해설이 장광설이다. 그 이야기 중에 횟배앓이 어린 유정에게 아버지가 끽연을 시킨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객들이 모두 땅을 치고 혀를 찼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990년대 이전에는 담배가 너무도 흔하디흔해 어디에서나 남녀노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더 올라가는 시절에는 사람들이 아프면 끽연하였고 특히 좋다는 효험은 회충이었다. 그래서 어린시절 할머니들이 모여 수다를 건너 들을 때면 담배들을 곧잘 하시고 누가 배앓이를 한다고 하면 끽연을 하라고 하였다. 저 유명한 위인 정조도 담배를 남령초라고 예찬하며 자신의 흉증을 낫게하는 최고의 영약으로 들었다.(홍재전서 제52권 책문 5 남령초편)
지금이야 금연이 상식이지만 어린 시절 이전에는 끽연이 단순 기호를 넘어 건강을 위한 탐닉이었다. 김유정의 사인을 알고 있으니 끽연이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누군들 죽자고 했을까 사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지 않고 형이 파락호가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병약한 그라고 해도 폐병으로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의 천형이 폐병이었고 폐병에는 병도 병이나 잘 먹어야 했다. 그런데 그 큰 부잣집도 김유정이 머리가 클 때 탕진에 탕진을 거듭하여 빈털터리가 되고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부칠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러한 작가의 고통과 번민이 주옥같은 작품을 낳았다.

김유정은 청풍(淸風) 김씨 문의공파로, 김육(金堉, 1580~1658) 선생의 아들로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숙종의 모후)의 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의 직계손이다. 또한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 아버지 김시묵이 김우명의 4대손으로 종손이다. 따라서 조선의 명재상이자 대동법의 실행자로 알려진 김육 선생이 김유정의 10대조이자 조선의 국구 김우명이 직계선조이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상소하기를,
"신의 병이 날로 더욱 깊어지기만 하니 실날 같은 목숨이 얼마나 버티다가 끊어질런지요? 아마도 다시는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까 생각되므로 궁궐을 바라보며 비오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왕의 학문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하께서 종전부터 학문을 강마하시면서 과연 이 도리를 잃지 않으셨습니까? 악정자 춘(樂正子春)은 한낱 필부였습니다만, 한 발자국을 뗄 때에도 부모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오늘날 다치신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악정자 춘에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송 효종(宋孝宗)에게 철장(鐵杖)과 목마(木馬)가 뜻을 가다듬어 원수를 갚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주희(朱熹)와 같은 때에 살면서도 주희로 하여금 수십 일도 조정에 있게 하지 못하였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심학(心學)에 힘을 써야 하실 것은 다만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015) 를 완미하고 탐색하시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백성을 보호하면서 왕 노릇을 하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편안하여 삶을 즐겁게 누리면 어찌 군사가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열 번 명령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인데, 찬선을 맡길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공경스러운 예로 맞아 지성으로 대우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이 없게 하소서.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 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병이 위급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대략 만분의 일만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황송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살펴보니 매우 놀랍고 염려가 된다. 진술한 말은 모두가 지극한 의논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적임자를 얻어 맡겼으니 우려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경은 늙었으나 근력이 아직도 강건하고 병이 깊이 들었지만 신명(神明)이 도와줄 것이다. 어찌 쾌차의 기쁨이 없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잘 조리하라."
하였다.
김육은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대사성 김식(金湜)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효행이 독실하였고 장성하자 문학에 해박하여 사류들에게 존중받았다. 광해조 때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산 속에 묻혀 살면서 몸소 농사짓고 글을 읽으면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인조 반정에 이르러 제일 먼저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특별히 현감에 제수되고 이어서 갑과(甲科)에 뽑혔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 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金集)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이는 79세였다. 그의 차자 김우명(金佑明)이 세자의 국구(國舅)로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己亥/大匡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金堉卒。 臨終上疏曰:
臣之病, 日益沈綿, 如縷之命,幾何而絶也。 恐不得更覩天顔, 瞻望宸極, 泣涕如雨。 所貴乎帝王之學者, 謂存心主一, 而不外馳也。 殿下從前講學, 果不失此道乎? 樂正子春, 一匹夫耳, 一擧足而不敢忘父母。 殿下今日之所傷, 乃至於此, 不瑕有愧於子春乎? 宋 孝宗鐵杖木馬, 何益於銳意復讐, 而與朱熹同時竝生, 不能使立朝數十日, 誠可惜也。 殿下今日之所當致力於心學者, 只玩索衛武公之抑戒也。 孟子曰: "保民而王, 莫之能禦也。" 民安而樂其生, 則豈患無兵哉? 凶年饑歲, 民將散而之四, 而陞戶之擧, 又出於此時, 大臣爭之, 而不能得, 此何事也? 殿下之所當悔也。 雖十易其令, 何害焉? 輒養國本, 今日之急務, 贊善之任, 無過於兩宋。 願殿下終始敬禮, 待之以誠, 俾無遐心焉。 湖南之事, 臣已薦徐必遠而付之, 臣若溘然, 則恐一朝無助, 而事至於中廢也。 陛辭之時, 願殿下慰勉而送之, 以終臣意。 臣之所欲陳者, 不止於此,而疾病危急, 精神怳惚, 略擧萬一。 不勝惶恐。
答曰: "省卿箚辭, 深用驚慮。 所陳之言, 無非至論, 可不體念焉。 湖南事, 卿旣得人而付之, 何憂何慮。 且卿雖老, 筋力尙强, 病雖深, 神明所扶, 豈無勿藥之喜乎? 卿其安心善攝。" 堉己卯名賢大司成湜之後也。 自少篤於孝行, 及長文學該博, 爲士類所推重。 在昏朝, 無意於世, 屛居峽裏, 躬耕讀書, 若將終身。 及仁祖反正, 首擧遺逸, 超授縣監, 尋擢魁科, 官至首相。 爲人剛果, 操履端確, 殉國之誠, 出於天稟, 遇事盡言, 不避忌諱。 丙子奉使燕京, 聞本國被兵, 日夜號哭, 華人義之。 平生以經濟自任, 及爲相, 多所施設。 兩湖大同之法, 其所建白也。 但自信太過, 初議大同之法, 與金集不合, 堉遂懷不平, 累陳疏攻集, 人以此短之。 及卒, 上歎曰: "安得擔當國事, 堅確不撓如金堉者乎?" 年七十九, 次子佑明, 以當宁國舅, 封淸風府院君。)
효종실록20권, 효종 9년(1658년) 9월 5일 기해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김육의 상소와 졸기

의왕시 왕림마을 청풍김씨묘문. 김육 가계와 더불어 벌열했던 김우증 가계

김육의 후계로 국혼을 통한 정비 2명을 배출한 청풍김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벌열(閥閱) 가문이다. 김알지를 비조로 김순응의 12대손 김대유가 문하시중이 되어 청성부원군이 되어 제천 청풍을 본관으로 하면서 세계를 이룬다. 특히 그 아들 대에서 크게 청풍부원군파와 청로상장군파로 나뉘었는데 김유정의 가계가 청로상정군파이다. 이와 함께 청풍부원군파도 크게 현달하는데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의 왕림마을의 숙,영,정조시기 세도가였던 판서공파이다. 비조 김우증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국공신 3등이 되어 의왕 왕륜(림)을 사패하였다. 손자인 계자 김계 이하 후손들이 특히 현달하였는데, 인백파로 분계한 3남 김인백의 후손들이 가장 현달하여 영정조시기 영의정 김상로(화성시 쌍봉산 유택 후 현재 왕림 이장), 부자 영의정 김재로(인천), 김치인(시흥시), 정조의 스승 우의정 몽오 김종수가 유명하다. 인백파에서만 재상이 6명이나 배출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비조 김우증의 묘갈과 신도비를 인백파의 후손으로 영조가 신임한 노론 영수였던 영의정 김상로가 지었고 영의정을 역임한 후손 김치인이 신도비를 써서 위엄있게 세웠다.
신도비의 내용이 김계 이하 아들들을 지파로 후손이 번창하고 현달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다. 특히 후손들이 2백여 명이 넘어 모두 싣지 않고 과거급제자나 벼슬에 오른자만 기록하여 당대 왕림의 청풍김씨의 세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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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청평사 입향조 김우증 묘 및 신도비 김인백 묘 백운사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입향조 정국공신 김우증 묘역 김우증 신도비, 청평사(사당), 김우증 묘 및 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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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는 고조부 김기순(金基恂)이다. 증조부 김병선(金秉善)이 실레마을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거유(巨儒)인 김평묵(金平默)을 모셔서 학당(學堂)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김유정의 할아버지 익찬(益贊, 1845년 ~ 1909년)은 자가 자영(士英)으로 증광 진사시에 급제(1891년)하여 통사랑 행의금부도사를 지내 김유정의 집은 김도사댁으로 불렸다. 위정척사(衛正斥邪)파인 할아버지는 춘천 의병(義兵)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아버지 춘식(春植)은 자가 윤주(允周)고 식년 진사시(1894년)에 급제하여 사마좌임금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 예식부주사, 궁내부의관을 역임하여 김참봉이라 불렸다.
이처럼 김유정 집안은 청풍김문 변족(邊族)이 아닌 벌족을 이으면서 더욱이 할아버지가 갈꾼들을 이끌어 개간한 6천 석의 토지를 통해 춘천 만석꾼이자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이곳 김유정의 고향 실례는 그런 곳이다.



김유정문학촌 스탬프 투어를 시작하였다. 먼저 복원 생가와 기념관으로 간다.







김유정기념관






24세 자 裕貞 유정. 일명羅伊(라이) 무신1908년1월11일생 무인1938년3월29일졸 묘문인
비공유작시산골나그네 김동리서행장 비부총리유택찬 족제유구서기적비 공자작시내가그리는신록향 문인김동리서
문인김유정의밤행사매년3월29일밤춘천시내 유고산골나그네외오십편
김유정기념사업회에서 춘천시후원으로
종합문화예술회관앞에 김유정선생동상건립 조각공원에 김유정선생문학비건립 한국문인협회에서한국현대문학표징석건립
김유정선생가복원및문학촌개관촌장전상국 신남역명을김유정역으로명명 도로명을김유정로로 실레마을을스토리빌리지로선포
청풍김씨대종회, 청풍세보 제5권










소설 '봄봄'에서의 점순이 키재기 조형물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
五月의 산골작이
나의故鄕(고향)은 저 江原道(강원도) 산골이다. 春川邑(춘천읍)에서 한 二十里假量(이십리가량) 山(산)을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左右(좌우)에 굵찍굵찍한 山(산)들이 빽 둘러섯고 그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山(산)에 묻친 模樣(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다하야 洞名(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大槪(대개) 씨러질듯한 헌 草家(초가)요 그나마도 五十戶(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貧弱(빈약)한 村落(촌락)이다.
그러나 山川(산천)의 風景(풍경)으로 따지면 하나 흠잡을데 없는 귀여운 田園(전원)이다. 山(산)에는 奇花異草(기화이초)로 바닥을 틀었고, 여기저기에 쫄쫄거리며 내솟는 藥水(약수)도 맑고 그리고 우리의 머리우에서 골골거리며 까치와 是非(시비)를 하는 노란 꾀꼬리도 좋다.
周圍(주위)가 이렇게 詩的(시적)이니만치 그들의 生活(생활)도 어데인가 詩的(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對(대)하면 딴 世上(세상)사람을 보는듯 하다.
僻村(벽촌)이라 交通(교통)이 不便(불편)함으로 現社會(현사회)와 去來(거래)가 드물다. 片紙(편지)도 나달에 한번식밖에 안온다. 그것도 配達夫(배달부)가 自轉車(자전거)로 이 산골짝까지 오기가 괴로워서 道中(도중)에 마을사람이나 만나면 片紙(편지)좀 傳(전)해달라고 附託(부탁)하고는 도루 가기도 한다.
이렇게 都會(도회)와 因緣(인연)이 멀음으로 그人心(인심)도 그리 野薄(야박)지가 못하다. 勿論(물론) 極(극)히 窮(궁)한 生活(생활)이 아닌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들은 아즉 齷齪(악착)한 行動(행동)을 모른다. 그證據(증거)로 아즉 나의 記憶(기억)에 傷害事件(상해사건)으로 마을의 騷動(소동)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들이 모이어 일하는것을 보아도 퍽 友誼的(우의적)이요 따라 愉快(유쾌)한 勞働(노동)을 하는것이다.
五月(오월)쯤되면 農家(농가)에는 한창 바뿔 때이다. 밭일도 急(급)하거니와 논에 모도 내야한다. 그보다도 논에 거름을 할 갈이 于先(우선) 必要(필요)하다. 갈을 꺾는데는 갈잎이 알맞게 퍼드러젔을때 그리고 쇠기前(전)에 불야살야 꺾어나려야 한다.
이러한 境遇(경우)에는 一時(일시)에 많은 품이 든다. 그들은 열아문식 한떼가 되어 돌려가며 품아시로 일을 해주는것이다. 이것은 일의 倦怠(권태)을 잊을뿐만 아니라 또한 일의 能率(능률)까지 오르게 된다.
갈때가 되면 산골에서는 老幼(노유)를 莫論(막론)하고 무슨 名節(명절)이 나처럼 空然(공연)히 기꺼웁다. 왜냐면 갈꾼을 爲(위)하야 막걸리며, 고등어, 콩나물, 두부에 이팝 ——— 이렇게 別食(별식)이 버러지기 때문이다.
농군하면 얼뜬 앉은 자리에서 밥 몇그릇식 치는 貪食家(탐식가)로 定評(정평)이 났다. 事實(사실) 갈을 꺾을때 그들이 먹는 食稟(식품)은 놀라운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먹지 않으면 몸이 堪當(감당)해나가지 못할만치 일도 亦(역) 고된 일이다. 거한 山(산)으로 헤매이며 갈을 꺾어서 한짐잔뜩 지고 오르나리자면 방울땀이 떨어지니 여느 일와 勞働(노동)이 좀 다르다. 그러니만치 산골에서는 갈꾼만은 特(특)히 잘 먹이고 잘 待接(대접)하는 法(법)이다.
開東(개동)부터 어두울때까지 그들은 밥을 다섯끼를 먹는다. 다시 말하면, 朝飯(조반), 點心(점심)겨누리, 點心(점심), 저녁겨누리, 저녁 ——— 이렇게 여러번 먹는다. 게다가 참참이 먹이는 막걸리까지 친다면 하루에 無慮(무려) 여덟번을 食事(식사)를하는 세음이다. 그것도 감투밥으로 처올려담은 큰 그릇의 밥한사발을 그들은 주는대로 어렵지않게 다 치고치고 하는것이다.
“아 잘먹었다. 이렇게 먹어야 허리가 안휘어 ———”
이것이 그들의 가진 知識(지식)이다. 일에 過勞(과로)하야 허리가 아픈것을 모르고 그들은 먹은 밥이 삭어서 창자가 훌쭉하니까 허리가 휘는줄로만 안다. 그러니까 빈 창자에 연실 밥을 메꿔서 꼿꼿이 만들어야 따라 허리도 펴질걸로 알고 굳이 먹는 것이다.
갈꾼들은 흖이 밖앝뜰에 멍석을 펴고 쭉 돌라앉아서 술이고 밥이고 한태 즐긴다. 어쩌다 洞里(동리)사람이 그앞을 지나가게되면 그들은 손짓으로 불른다.
“여보게 이리와 한잔하게 ———”
“밥이 따스하니 한술 뜨게유 ———”
이렇게 옆 사람을 불러서 가치 飮食(음식)을 나느는것이 그들의 禮儀(예의)다. 어떤 사람은 아무개집의 갈 꺾는다 하면 일부러 찾아와 제목을 堂堂(당당)이 보고 가는이도 있다.
나도 故鄕(고향)에 있을때 갈꾼에게 여러번 얻어먹었다. 그 막걸리의 맛도 좋거니와 웅게중게 모이어 한家族(가족)같이 주고받는 그 氣分(기분)만도 깨끗하다. 산골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귀여운 團欒(단란)이다.
그리고 산골에는 잔디도 좋다.
山(산) 비알에 포곤히 깔린 잔디는 제물로 寢臺(침대)가 된다. 그우에 바둑이와 가치 벌룽 자빠저서 默想(묵상)하는 자미도 좋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우뚝우뚝 섯는 모조리 푸른 山(산)이매 雜音(잡음)하나 들리지 안는다.
이런 산속에 누어 생각하자면 비로소 自然(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느끼게 된다. 머리우로 나라드는 새들도 각가지다. 어떤 놈은 밤나무 가지에 앉어서 한다리를 반짝 들고는 길음한 꽁지를 회회 두르며
“삐죽 ———! 삐죽 ———”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얀 새가 “뺑!” 하고 나라와 앉어서는 고개를 까땍까땍 하다가 도루 “뺑!” 하고 다라난다. 혹은 나무줄기를 쪼며 돌아다니는 딱따구리도 있고. 그러나 떼를 지어 푸른 가지에서 遊戱(유희)를 하며 짖어귀는 꾀꼬리도 몹시 귀엽다.
산골에는 草木(초목)의 내음새까지도 特殊(특수)하다. 더욱이 새로 튼 잎이 한창 퍼드러질 臨時(임시)하야 바람에 풍기는 그 香臭(향취)는 一筆(일필)로 形容(형용)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개운한 그리고 졸음을 請(청)하는 듯한 그런 나른한 香氣(향기)다. 一種(일종)의 煽情的(선정적) 魅力(매력)을 느끼게하는 짙은 香氣(향기)다.
뻐꾹이도 이 내음새에는 敏感(민감)인 모양이다. 이때로부터 하나 둘 울기 시작한다.
한해만에 뻐꾹이의 울음을 처음 드를적만치 반가운 일은 없다. 憂鬱(우울)한 그리고 구슬픈 그 울음을 울어대이면 가뜩이나 閑寂(한적)한 마을이 더욱 느러지게 보인다.
다른데서는 논이나 밭을 가를때 노래가 없다한다. 그러나 산골에는 소모는 노래가 따로히 있어 논밭일에 소를 부릴적이면 依例(의례)히 그 노래를 부른다. 소들도 洗鍊(세련)이 되어 主人(주인)이 부르는 그 노래를 잘 理解(이해)하고있다. 그래서 노래대로 左右(좌우)로 方向(방향)을 變(변)하기도 하고 또는 步調(보조)의 速度(속도)를 느리고 주리고, 이렇게 順從(순종)한다.
먼 발치에서 소를 몰며 처량히 부르는 그 노래도 좋다. 이것이 모두 산골이 홀로 가질수있는 聖(성)스러운 音樂(음악)이다. 산골의 音樂(음악)으로 치면 물소리도 빼지는 못하리라. 쫄쫄 내솟는 샘물소리도 좋고 또는 촐랑촐랑 흘러나리는 시내도 좋다. 그러나 세차게 콸콸 쏠려나리는 큰내를 對(대)하면 精神(정신)이 번쩍 난다.
논에 모를 내는것도 이맘때다. 시골서는 모를 낼적이면 새로운 希望(희망)이 가득하다. 그들은 질거운 노래를 불러가며 가을의 收穫(수확)까지 聯想(연상)하고 한포기 한포기의 모를 심어나간다. 농군에게 있어서 모는 그야말로 그들의 자식과같이 貴重(귀중)한 물건이다. 모를 내고나면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한해의 農事(농사)를 다 진듯 싶다.
안악네들도 일꾼에게 밥을 해내기에 눈코뜰새없이 바뿌다. 그리고 큰 함지에 처담아 이고는 일터에까지 나르지 않으면 안된다. 아이들은 그 함지 끝에 줄레줄레 따라다니며 默默(묵묵)히 제목을 要求(요구)한다.
그리고 갈때 前後(전후)하야 송아가 한창이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적이면 시냇面(면)에 송아가루가 노랗게 엥긴다.
안악네들은 機會(기회)를 타서 머리에 手巾(수건)을 쓰고 山(산)으로 송아를 따러간다. 或(혹)은 나무우에서 或(혹)은 나무아래에서 서루 맞붙어 일을하며 저이도 모를 소리를 몇마디 지꺼리다는 抱腹卒倒(포복졸도)할듯이 깔깔대고 하는것이다.
이것이 五月頃(오월경) 산골의 生活(생활)이다.
산 한중턱에 번듯이 누어 마을의 이런 生活(생활)을 나려다보면 마치 그림을 보는듯하다. 勿論(물론) 理知(이지)없는 無識(무식)한 生活(생활)이다. 마는 좀더 有心(유심)히 觀察(관찰)한다면 理知(이지)없는 生活(생활)이 아니고는 맛볼수 없을만한 그런 純潔(순결)한 情緖(정서)을 느끼게 된다.
내가 故鄕(고향)을 떠난지 한 四年(사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山川(산천)이 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금쟁이의 禍(화)를 아즉 입지않은 곳이매 桑田碧海(상전벽해)의 變(변)은 없으리라.
내내 健在(건재)하기 바란다.
五月의 산골작이, 1936년 『조광』 5월호 발표
김유정이 실레를 그리는 수필, 오월의 산골작이는 서정적인 이야기가 나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아주 좋아하는 글이다. 나도 모르게 김유정의 작품이 곳곳에 배였는데, 오랫동안 김유정을 모르고 살았다.
내 마음 속 향수, 정지용, 명동 청년 윤동주. 그리고 실레 김유정이다.





김유정이 자신의 고향을 실레라고 하였다. 물론 그의 태생지는 이곳이 아닐 수 있다. 여기는 김유정의 선대가 개간하여 터를 잡은 곳이지만 김유정의 셋째 누나 김유경은 김유정의 출생지를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재 실레마을의 주민들 가운데 김유정이 춘천에서 태어났음을 증언하는 사람도 없다. 문학촌 촌장 전상국은 대대로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김유정의 선대가 춘천 의병이 잇따라 봉기하고 경술국치 때 이르러 경성(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그 곳으로 이주하면서 이때 김유정도이 이 무렵에 태어났을 가능성을 증언했다.(경성 이주는 일본의 재산 몰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본다.)
그러나 과거 고향은 자신의 태생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선대의 출신지가 고향이며, 더욱이 본인이 생각하는 곳이 고향이다. 일찍이 파주 밤골의 이이도 강릉 오죽헌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가 생각한 고향은 율곡, 즉 밤골이었다.
향수에 젖은 실레지만 유정은 실레에서 술에 취해 살기도 하였고 병치레인 폐병으로 고생의 나날이었으며, 특히 하나 뿐인 형인 김유근은 파락호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는 것은 물론, 실레의 터전 역시 다 들어먹어 아픈 기억도 공존하는 곳이다.
그의 집 재산은 오륙십만원, 그러니까 그때 법제대로 불러서 육천석이나 되는 것을 그의 백씨(유근)가모두 탕진하여버렸다.
‘유정아, 어떤이가 느이 아주머니냐?’
‘퍼렁 치마 입은이냐? 회색 치마 입은이냐?‘
‘아 저기 저 흰저고리 입고 섰는이?‘
언젠가 나는 유정이의 방에서 몰래 안채를 들여다보다가, 할수없이 이렇게 유정이더러 물어봤던것이다.
그의 집에는 유정이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여인네가 수없이 많은 것 같아, 나는 그의 형수인 정말 아주머니를 알아내기까지 사실 오래 걸렸다.
묻는 나도 얼굴을 찡그렸지만, 대답하는 그도 얼굴을 찡그렸다.
경향 각지의 딴곳에도 첩이 있었는지 그것은 내 알지 못했고, 또 알아 무삼하리오마는, 하여간 이 한집안에도 그 외 백씨의 요새말로 제이부인 제삼부인이 득실득실했었다. 한때는 돈을 끼얹다시피 하고, 취하여 십 원짜리 따위로 코를 풀어 버리면 옆에서 시중을 들고 섰던 기생들이 집어넣고, 집어넣고 했다는 소문까지 있는데,
‘못났다!’
이런 욕을 유정 듣는데서 한 일도 있는상싶다.
그러나 유정의 형님이 결단코 악인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변인이고 어떻게 보면 좀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
안회남(필승), 1939, 謙虛 : 金裕貞傳(겸허 : 김유정전), 문장사.
유정이 경성에서 귀향하여 아픈 몸으로 다시 실레에서 살 때는 옛집이 아닌 그 위 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작인인 주민들을 규합하여 농우회를 조직(동지 마름 아들 조명희와 조카 김영수 등)하고 야학(금병의숙)을 펼치며 브나로드 운동을 나섰다.
실레를 고향으로 여긴 유정은 그 깔탈스러움도 여기서는 자신보다도 신분이 낮은 동리사람들에게 항상 존대하였다고 한다.






전국에 많은 작가를 모티브로 한 문학촌이 있지만 이곳처럼 ‘다운’ 곳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김유정 자신은 매우 불우하였지만 그가 남긴 소설과 글들은 후세들에게 정말 많은 생각과 실행을 할 수 있는 자산이 되고 있다. 동백꽃은 그 자체로 훌륭한 소설이지만 그 내용은 동화로도 연극으로도 드라마나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손색없다. 특히 김유정 이야기집에서 틀어지고 있는 만화영화는 길손이 머물며 잠시 시간을 잊는 최고 중에 최고다.
따라서 실레 곳곳에 김유정이 있고 없다. 이 작지만 아기자기한 곳이 정말로 문학촌 답다.
‘이게 다 김유정 덕이다.’





옛 신남면을 들어 세워진 신남역, 김유정역이 된지 오래다. 신동면 증리인 이곳이나 곳곳에 아직도 신남이 들어있다. 김유정도 말이다.























김유정이야기집

















동백꽃, 또는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연분은 유정 자신이 오랫동안 가슴앓이한 그것에 대한 회한인가 얄밉지만 아름답고 얄궂지만 행복하다.



이틀의 춘천 가족 나들이를 마친다.
초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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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문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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