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에 깨어 다시 잠들었다.
어느 큰 거실 고풍스런 쇼파에 않은 박정희 대통령이 테이블 위로 조상에 관련된 자료가 흐트러져 있고 휴대폰으로 무언가 찾으며
‘박충헌 장군’
이라하였다. 돕고 싶은 맘에 얼른 휴대폰을 들어 검색하려는데 휴대폰 화면이 이지러져 몇 번이고 되풀이 하지만 못하였다. 그런 뒤 꿈에서 깼다.”
(夢見朴大統領爲朴忠憲[몽견박대통령위박충헌])

어제 새벽 꿈이 너무 생생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너무 다정하고 친근하게 느껴져서 혹시나 하고 말씀하신 ‘박충현’, ‘박충헌’을 검색하였다. 박충현은 특별한 것이 없었는데, 박충헌을 검색하니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 1691~1756)가 나오고 그의 시호가 ‘충헌(忠憲)’임을 알았다.
“참 기이하다.”
박문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방계 선조가 된다. 박정희 대통령 가문은 고령 박씨로 직계 선조로 유명한 분이 문효공(文孝公) 박장원(朴長遠)이고 그의 아들이자 소론의 저명한 학자 지포 박심(芝浦 朴심·1652∼1707)이 선조이다. 박문수는 박심의 둘째 형님이신 박선의 손자이니 박심은 종조부이다.
전(前) 군수(郡守) 박심(朴鐔)이 졸(卒)하였다. 박심의 자(字)는 대숙(大叔)이고, 문효공(文孝公) 박장원(朴長遠)의 아들인데, 박장원은 지극한 행실과 맑은 덕으로 세상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박심은 어려서는 가정에서 배우고 장성해서는 또 박세채(朴世采)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였는데,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독실(篤實)하여 ‘비록 만 사람이 막더라도 나는 나아간다.’는 뜻이 있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적에는 경계를 두지 아니하고 말하기 어려운 잘못을 면전에서 나무라고 비록 대인(大人)이라 할지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아니하였으며, 질박하고 성실한 기운과 슬퍼하고 애달파하는 정성이 얼굴빛과 말에 나타났다. 그 학문을 하는 것은, 늘 《논어(論語)》와 《소학(小學)》 등의 책을 일상 생활에 몸으로 실천하려 하였으며, 분발하고 각고하여 하나의 동정(動靜)도 감히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상(居喪)을 잘하여 이세필(李世弼)은 그 지극한 행실이 신명(神明)에 통하였다고 칭송하였으며, 비록 문학(問學)과 사변(思辨)에 있어서는 혹 그의 장처(長處)가 아닌 것도 있었으나, 거경(居敬)014) ·근독(謹獨)015) 함에 있어서는 진정 옥루(屋漏)016) 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세상의 여러 유자(儒者)들이 능히 미치지 못할 바였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혹 도리어 그 고체(固滯)함을 병통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천거(薦擧)로 서연(書筵)에 뽑히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만년에 군읍(群邑)에 부임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끼친 은덕을 생각하였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호는 지포(芝浦)였다. 형 박빈(朴鑌)과 박선(朴銑) 그리고 동생 박진(朴鎭)도 모두 높은 행실과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는데, 박선은 더욱 일세의 중망(重望)을 짊어지고도 불행히 수명이 짧았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前郡守朴鐔卒。 鐔字大叔, 文孝公 長遠之子。 長遠以至行淸德, 爲世名臣。 鐔少學家庭, 長又從遊於朴世采之門, 爲人剛毅篤實, 有萬人吾往之意。 與人言, 不設畦畛, 面斥難言之過, 雖大人不少饒, 質慤之氣, 惻怛之誠, 達於容色言辭。 其爲學, 每以《論語》、《小學》之書, 體驗於日用, 奮發刻苦, 一動靜, 不敢放過於繩墨。 善居喪, 李世弼稱其至行通神。 雖於問學、思辨, 或非其長, 而若其居敬、謹獨, 眞不愧於屋漏者, 世之諸儒, 莫能及焉, 不知者, 或反病其固滯也。 以薦被選書筵, 不就, 晩赴郡邑, 皆有遺思。 至是卒, 號乏浦。 兄鑌、銑, 弟鎭, 皆有高行美質, 而銑尤負一世重望, 不幸無年, 世皆惜之。)
숙종실록보궐정오45권, 숙종 33년(1707) 12월 4일 임오
전 군수 박심의 졸기
그리고 지포 박심은 그의 아호인 지포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안산 초지동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박세채(南溪 朴世采, 1631-1695)의 문하로 그와 돈독했던 친우가 양명학의 대가 정제두였고 정제두가 그의 조상선영이 있는 안산 가래울, 지금은 시흥시 화정동 추곡(楸谷)에 낙향하자 그를 따라 처가가 있는 안산 동산골(초지동 부근)로 갔다. 가래울은 추곡인데 이때 박심은 정제두를 일러 추곡 선생(박심 묘지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정제두는 친구 박심은 물론 스승 박세채(『양명학학변(陽明學學辨)』을 지어 정제두를 타일렀다.), 친구 최석정(崔錫鼎), 민이승(閔以升, 1649-1698) 등과 서신논변을 통해 그의 사상인 양명학이 한층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한국양명학의 큰 토대가 되는 『학변』과 『존언』이 안산 추곡에서 저술되었다

그리고 동산골은 그 유명한 숙종의 명신 동산 윤지완의 본향으로 윤지완(東山 尹趾完, 1635-1718)의 사위가 박심이다. 박세채와 함께 소론의 영수였던 동산 윤지완은 율곡 이이의 친우 성혼의 제자인 윤민헌(尹民獻, 1562-1628)의 손자로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다. 아버지 윤강(尹絳)이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특히 형 윤지선(尹趾善)과 함께 형제정승으로 유명하였다. 동산골과 가까운 시흥시 산현동은 안산의 옛 지역으로 윤승유(尹承柳)와 그 아들 성종의 부마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이래 대대로 세거한 곳으로 이들을 일러 ‘안산 윤씨’라 하였다.



꿈에서 박대통령이 ‘박충헌 장군’이라 한 것도 신기한데 박충헌이 충헌공 박문수로 그의 선계라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본인이 장군이었기에 박문수를 일러 장군으로 한 것인가 이는 무조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영조 즉위 초 소론과 일부 남인 과격파들이 이인좌를 중심으로 무신란을 일으킨다.(1728년[영조 4] 3월) 이때 박문수는 소론의 명장 오명항을 따라 동기 조현명(趙顯命, 1691~1752)과 함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이를 크게 격파하여 영조의 큰 신임을 얻어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成君)에 봉해졌다. 오명항은 문신이지만 병무에도 밝아 숙종 조 병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이들 소론 온건파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면서 광해군 때 폐문의 화를 입은 북인의 전철을 모면할 수 있었다.

조선의 양반 풍속과 관련하여 박문수 일화이다.
"문무관(文武官)이 길에서 서로 만났을 때 회피하는 법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 문무관이 서로 어지러이 다투는 것이 매양 여기에 있다. 지금은 이미 선조(先朝)의 전교와 고(故) 상신(相臣)의 연주(筵奏)에 의거 법식으로 정한 것이 있으니, 이조·병조로 하여금 이것을 가지고 각사(各司)에 알리게 하라. 그리고 선조의 정식 전교(定式傳敎) 1통을 등서(謄書)하여 게시판이나 벽에 붙여 두고 준행하게 하라.'
하였다.【영조[永宗] 계해년418) 3월 14일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이 인견(引見) 때문에 입시하였었다. 이때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뢴 내용에, "문·무(文武)는 사체가 비록 분별이 있다고는 하지만, 당하 문관이 당상 무신에게 길을 피하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법의(法意)가 분명합니다. 합외(閤外)의 반열에서 무신 당상이 와서 절을 하면 신 등도 또한 허리를 굽혀 답배(答拜)합니다만, 당하 명관(名官)의 경우에는 신 등이 단지 손만 들뿐입니다. 무릇 경외(京外)의 조체(朝體)는 모두 당상과 당하를 대우함에 있어 구별이 현격합니다. 근래 당하 명관과 병조 낭관이 길에서 무변(武弁)을 만났을 경우 당상·당하를 막론하고 일례(一例)로 벽제(辟除, 지위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 구종 별배(驅從別陪) 등이 잡인(雜人)의 통행을 통제하는 일.) 하는 것을 마치 비미(卑微)한 중서(中庶)의 부류에게 하듯이 합니다. 말에서 내리게만 해도 될 터인데, 어떻게 품계가 높은 현직(顯職)에 있는 무변을 뒤섞어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조 낭관이 길에 있으면 제사(諸司)의 관원들은 말머리를 돌리고 병조 낭관이 길에 있으면 당하 무변이 말머리를 돌리게 되어 있는 것이 본래의 고례(古例)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랑(騎郞)이 당상 무변을 만났을 때도 또한 반드시 벽제하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구성임(具聖任)과 서로 따질 적에 상소 내용에 ‘무신은 비록 일찍이 곤수(閫帥)를 역임한 사람일지라도 길에서 기랑을 만나면 또한 회피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것이 바로 법례(法例)를 상세히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인 것입니다. 연소(年少)한 문관들이 고사(故事)를 잘 모르고 단지 그 상소만 보고서 그것이 정례(定例)인 줄 인식하여 지나치게 스스로 높이고 있으니, 뒷날 끝없는 폐단이 야기될까 우려스럽습니다. 이제부터 양반(兩班)의 당상 가운데 무변(武弁)에 대해서는 기랑과 당하 명관이 벽제하지 못하도록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조제(朝制)에 관계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진달한 바가 옳다. 각별히 신칙시키라. 뒤에 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들이 듣는데 따라 규정(糾正)토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 전교를 게시판에 걸도록 명한 것이다.】
(命定文武官路逢回避之法。 敎曰: "近來文武官之互相紛競, 每在於此。 今則旣有先朝傳敎, 故相筵奏定式事, 令吏ㆍ兵曹, 以此知委各司。 先朝定式傳敎, 謄出一通, 揭板壁上, 以爲遵行之地也。" ○【英宗癸亥三月十四日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領議政金在魯所啓: "文武事體, 雖曰有別, 而堂下文官之不可加於堂上武臣, 則法意審矣。 閤外班列, 武臣堂上來拜, 則臣等亦俯答其拜, 而堂下名官, 則臣等只擧手而已。 凡京外朝體, 皆於堂上、堂下, 待之逈別矣。 近來, 堂下名官及兵曹郞官路逢武弁, 則毋論堂上、堂下, 一例辟除, 若中庶卑微之類, 則雖下馬可也, 而何可混禁職顯、秩高之武弁乎? 吏曹郞官在途上, 則諸司官員回馬首;兵曹郞官在途上, 則堂下武弁回馬首者, 自是古例, 而今則騎郞逢堂上武弁, 亦必辟除, 豈不誤乎? 向日, 靈城君 朴文秀與具聖任相較時, 旣中以爲: "武臣則雖曾經閫帥者, 路遇騎郞, 亦廻避云。" 者, 此乃不能詳思法例之言, 而年少文官, 未諳故事, 只見其疏, 而認爲定例, 遇於自尊, 恐爲日後無窮之弊。 自今兩班堂上武弁, 則騎郞及堂(上)〔下〕名官, 不得辟除事, 各別申飭宜矣。" 上曰: "此則關係朝制, 豈宜若是乎? 所達是矣。 另加申飭。 後又有如此者, 卿等隨聞糾正。" 至是, 命以此傳敎揭板。】)"
정조실록12권, 정조 5년(1781) 8월 10일 경진
문무관이 길에서 만났을 때 회피하는 법을 정하게 하다
신분제의 토대 위에 반상의 법도도 지엄한 조선에서 문반과 무반의 처우에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엄정했다. 특히 무반은 당상인 고위직 곤수(병마,수군절도사)들 조차도 문반 당하관과 길에서 만나면 벽체를 당하여 문무반이 끊임없이 분쟁과 갈등을 한 것이 특기하다. 특히 박문수가 무반 당산 구성임과 논쟁에서 무반을 없이 여기는 이야기가 실려 있어 민중의 지팡이로 암행어사 박문수의 또 다른 면모를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 수원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자취가 깊게 남아있다.
수원 옛 농촌진흥청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녹색혁명성취'라고 쓰인 기념탑이 서있다. 1978년에 장덕진 농수산부장관과 김인환 농촌진흥청장이 농촌진흥청이 그간에 이룬 업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그 뒤로 농어촌공사와 여기산, 서호(축만제)가 위치한다. 축만제는 농업을 최우선 한 정조가 농업경영을 위해 둔전으로 개발한 저수지다.

그리고 수원, 화성, 오산이 교차하는 독산성 아래로 황구지천이 지나며 지금도 넓게 펼쳐진 들판은 박정희 정부의 야심찬 농촌근대회사업의 일환으로 정비된 대표적인 곳이다. 물론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1966)에 따른 급조된 상황도 있지만 이미 농업분야에 있어서 수원은 정조 이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현대의 농업진흥청과 공사, 서울 농대가 위치한 중심지였다.



이곳 화성시 태안읍 화산동 현충탑이 위치한 구릉은 지금도 일명 '존슨 동산'이라고 부르는데 헬기에서 내린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오를때 낙후한 우리내 사정으로 존슨 대통령이 이때 길을 오르다 고꾸라진 일화가 유명하기도 하다. 축구 명가 차범근의 고향이자 차범근과 박지성의 모교 안용중학교가 바로 옆에 위치한다.
일장하몽(一場夏夢)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꿈에서 만나고 그냥 넘길 수 없어 끄적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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