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간척마을 문화촌에서 만난 사람들

달이선생 2026. 6. 19. 12:52

나에게 고향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은 출생지인 합천이 아니고 성장지인 수원이다.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유년기와 소년기를 나는 바로 수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생으로 지냈기 때문이다

소설가 홍성원(洪盛原, 1937~2008) , 쌕쌕이의 기억 담긴 팔달산, 홍성원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1997], 269쪽.

 

『간척마을, 문화촌에서 만난 사람들』(2025, 화성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은 화성시 만세구 장안면 덕다3리의 어르신 구술기록이다.

“넓은 벌 서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농수로가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를 개사한 늘 떠오르는 잔상, 이곳이 내 고향 덕다리다. 덕다리는 행정리이고 3리까지 있으며 ,그중 3리가 본가이다. 3리에는 자연마을이 두 곳인데 덕다리 염장산 구릉 초입 마을이 간척주택인 덕다주택이고 내가 자란 곳은 간석지 수렁개인 문화촌이다.

간척된 너른 들판 염전논에서 평택화력발전소가 바라다보이고 그 옆으로 쿠니사격장이라고 불린 고온리가 있어 노진리와 사곡리의 산야 위로 때론 낮과 밤에 무수히 많은 전투기와 폭격기, 헬기가 날아들어, 밤에는 떨어뜨린 조명탄이 서쪽 하늘을 밝혔다. 어린시절 너무도 신기한 볼거리였다.

문화촌에서 본 너른 독정개 평야로 멀리 평택화력발전소가 보인다.
염전집, 염부사는 없어지고 염전창고가 남아있다.

덕다리는 또 다른 내 이름이다. 고약한 친구들의 놀림은 덕다리를 ‘닭다리’로 부르기도 하였고 내 이름에도 ‘병딱이’, ‘병달이’로 불리기 일쑤였다. 한 때는 그게 싫기도 하였으나 약관을 지나니 굳이 성낼 것이 아니었다. 별명인데, 조상들이 뜻으로 또는 상징적인 것으로 그리고 대개는 자신의 고향으로 ‘호(號)’를 짓는데 ‘덕다리’와 ‘병딱(달)’으로 호로 삼았다. 퇴촌 퇴계선생, 밤촌 율곡선생처럼 덕다촌 ‘달이’로 말이다. 한자로는 ‘達理’다. 이렇게 내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남양만방조제

우리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남양만 간척을 통해서이다.

장안나루터(장안대교)를 지나면 대규모 담수화된 남양호가 펼쳐진다. 화성시와 평택시의 너른 들판을 적시고 사시사철 농사를 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관개시설의 기반이다. 특히 장안리와 노진리 사이 독정개가 합수하는 지점에 이르면 여느 호수 못지 않은 엄청난 규모의 호반이 펼쳐진다. 그 끝에 남양방조제가 서있다. 1974년 5월 22일 준공하고 그 자리에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남양호’가 담긴 기념탑이 서있다.

'오늘 우리는 대자연과의 대결에서 줄기찬

민족의지의 또 하나의 위해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74. 5. 22.

박정희 대통령 각하 치사 중에서

이러한 대단위 간척사업은 박정희 정부가 식량자급계획에 따라 대단위 금강․평택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을 계획하고 그 자금으로 세계은행에서 장기저리차관(1969)을 들여와서 처음으로 시행한 국책사업이다. 최초 국책사업으로 시행된 간척사업인 평택지구 남양방조제가 이렇게 1974년 5월 22일 준공되었다.

남양대교를 지나 서해로 다다른 발안천 하구로 남양호이다.

남양호는 화성시 봉담 삼봉산에서 시작한 발안천의 하구로 옛 분향만(汾鄕灣)이다. 간척 이전에는 밀물과 썰물이 되는 순연한 어촌지역이었지만 1974년 남양방조제의 준공으로 분향만을 막은 남양방조제의 건설은 지역에서 너른 간석지를 발판으로 염전 및 어로와 조개채취가 성행하던 지역을 내륙으로 탈바꿈시켰다. 따라서 방조제 완공 이후 남양호 담수화와 관개시설을 확충하여 농경지로 개간하면서 오늘과 같은 농촌으로 변모하였다.

독정천에서 본 장안면 덕다3리 문화촌, 뒤의 산이 염장산.
『화성시사』4, 「연해지역의 간척과 주민 생활의 변화」 (2018).

노진, 사곡, 덕다주택 일대는 간석지인 독정개로 새랭이천과 독정천이 만나 발안천 하구 분향만에 합수되는 기수지역이다. 이 넓은 간석지에 한국전쟁이후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이기창이다. 덕다3리 일부 구간은 이봉연이 맡았다. 이들 간척사업은 물막이가 쉽지 않아 결국 남양만방조제가 1974년 완공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남양방조제 이전 이봉연이 문화촌에서 시행한 간척 방조제 구간이다.

이봉연이 문화촌에서 시행한 간척 방조제 구간의 현재 모습.
야경
방조제로 잇던 곳에 작은 산이었는데 모두 헐어지고 드론연습장이 섰다.

장안면 덕다3리 수렁개는 독정천 하류 독정개에 속하는 갯벌로 이곳을 농경지를 만들기 위한 난민 정착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문화촌으로 마을을 부르는 명칭이 바뀌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촌 간척공사는 잦은 물막이 실패로 결국 남양방조제 준공으로 완성되었다.

문화촌 간척사업을 주도한 것은 이봉연이다. 그는 ’난민정착사업장‘ 간판을 내걸고 마을 내 사무실(버스 종점 10여 미터)을 열어 간척사업을 하였다. 이시기 농업이주한 조찬열은 초기 열댓 집이 참여하며 거주 중이었는데 사업 난항으로 피난민은 두어 가구만 남고 거의가 떠났다고 한다.

조찬열(1935~2025)은 전라북도 김제 백구면 출신으로 5남매 중 맏이로 1960년 제대 후 옥구 출신 아내와 혼인하고 이듬해 1961년 27세로 문화촌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같은 시기 이주한 김용만(1933년생) 가 1가구가 있다. 조찬열은 동향 출신자 서모 씨의 권유로 이주하였다.

“논도 삼천 평 주고 소도 주고 집도 준다,”

고 하여 입주금 당시 3만 원을 지불하고 왔다. 올라와서 보니 사업이 지지부진하니 사람들이 떠나는 마당에 입주금을 빼주려고 모집되어 온 거였다. 힘들었지만 기왕에 왔으니 눌러 정착하였다. 때문에 고향도 자주 못 가고 부모님 봉양도 못하였다.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마을 내 다른 집 토담집에 세로 살았다. 구들도 없어서 살면서 놓았다. 흙벽돌이었고 지붕은 기와였다. 모두 직접 찍어서 만들었다. 5, 6년 살다 자가를 마련하였다. 마을 식수는 버스정류장 인근 동네 우물이 있었다. 밭은 주변 국유림(국유지, 주민들은 구구지라 부름)을 개간하여 사용하여 임대료 없었었지만 2000년 대 들어 국유재산관리가 체계적으로 되면서 캠코가 만들어지고 이곳에서 임대료를 추징하고 매년 납부하고 있다.

가난한 농업이주민의 처지로 농토가 없으니 식량을 마련하는 것이 고초가 심했다. 고지(논 한 마지기에 값을 정하여 모내기부터 김매기까지의 일을 해 주기로 하고 미리 받아쓰는 삯이나 일) 다니면서 마련하였다. 고지는 주로 원주민이 사는 장안리(1, 2리)로 다녔다. 그런데 문제는 원동네에서는 자가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 얼굴 붉히지 않고 고지를 잘 줬는데 식량이 모자란 이주민들이 고지를 중복으로 받아 먹어 고지 준 사람과 또 고지 받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키며 서로 갈등이 심하였다. 고지 값으로 일을 해야는데 보통 농번기는 같아 일을 하는 날짜가 겹쳤기 때문이다. 원주민 마을인 원 덕다(1리) 사람들과는 터부시했다. 아무래도 이주민의 열악한 경제적 처지 때문이었다.

수렁개의 간척사업은

미공법 480호 원조 밀가루로 바다를 막는다고 한 건데, 아주, 참 뭐라고 할까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를 갖다가 거기다 결부시킨 거예요 아주 터무니없는 짓이었는데, 내가 뭣도 모르고 들어온 거였지. 바다를 막는 일을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짓들만 그렇게 했다니까, 바닷물 드나드는 자리에 지게로 흙을 갖다 부으니 다시 씻겨 내려가고, 다시 씻겨 내려가고, 이런 한심한 짓을 한 거여, 그때는 리어카도 몇 대 없었어. 갯바닥 높은 데서부터 막아 가기 시작해서 마지막에 골을 막는데, 높은 데 막는 걸 뚝매기, 골 막는 걸 대청매기라고 했어요. 뚝매기부터 실패하기도 하고, 대청매기까지 완료해서 마친 적도 있었는데, 바닷물이 계속 드나드니까, 가만히 왔다가 그냥 슬며시 가는 게 아니고, 와서 파도치고, 또 나가면서 세게 나가고 하니께 터지는 거지.

『화성시사』4, 「연해지역의 간척과 주민 생활의 변화」 (2018), 275쪽.

분향만 독정개(독정천) 수렁개 문화촌의 간척과 농업이주 이야기(조찬열)

남양만 간척지 문화촌 농업이주 1세대 조찬열 씨 댁

이러한 간척에는 인력이 모자라 인근 장안리 고잔 사람들이 참여(원 덕다 사람들은 적음)하였다. 이들은 입주 신청을 받아 명부에 올리고 실제 사는 것은 자기 마을이고 사업장에서 출역부를 기록, 나중에 출역 날짜를 계산하여 원조로 받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배급 받는 형식이었다. 일은 물때를 맞춰하여 매일 나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형편이 어려워 일이 없을 때는 품을 팔러갔다. 이봉연 간척지보다 아래쪽의 이기창의 남양방조제 공사에 일을 다녔다.

남양방조제 완공으로 이봉연 간척지 구간 간척도 완공되었다. 기간이 지체되어 원래 약속 받은 1정을 초과해서 받은 사람도 있었다. 이봉연 간척지는 남양간척지 분배대상에서 제외되어 분배하였다. 공사에 참여했던 출역 일수를 계산해 신규 간척지를 분양 받은 것이다. 개간은 농토가 갯벌로 염기가 많이 서려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물만 잘 대주면 염기를 ’욹어 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초기 관개시설이 좋지 않아 잘되지 않았다.(1984년 이후 개선, 장안양수장을 통해 남양호 물을 농수로를 통해 관개-이희연 구술) 물은 보통 오후에 염기 서린 논물을 빼고 새 물 받았다. 경작을 위해 경운기를 각자 장만했으며, 1정 논에서 첫 해 20가마를 수확했다.(1975~1980년 사이)

(1정보의 단위는 3천 평. 보통 1정보 쌀수확은 60가마가 소출되며, 풍작은 70가마이다. 1984년 독정개 간척지 개간농토(장안4리 고잔) 이희연의 논 2정보에서 120가마를 수확하였다.)

남양간척지 신규 촌락 규모

대상자 일반 공모 서울시 철거민 국가보훈대상자 반공청년회

화성군 장안면

독정4리 75호 장안5리(8리와 분리) 194호 장안7리 45호 덕다3리 20허 사곡5리 39호 노진3리 90호

평택군 포승면 홍원7리 대청댐 수몰민 33호(청북 고잔7리 21호) 원정4리 70호 원정5리 71호 홍원4리 60호 홍원5리 31호 홍원6리 40호

『화성시사』4, 「연해지역의 간척과 주민 생활의 변화」 (2018), 283쪽 : 박상인 남양호주변 문화경관 변화 연구 : 간석지 개간과 생활공간형성을 중심으로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과 석사학위논문37 2003 48쪽

 

덕다리(3리)의 역사

덕다리(德多里)는 삼괴(三槐)지역에 속한 마을이며 삼괴는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과 우정읍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삼괴 이전에는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의 속현이었던 쌍부현(雙阜縣)이다. 쌍부현은 쌍봉산(雙峰山=쌍부산, 우정읍, 조선시대 조창 쌍창=쌍부창[雙阜倉]이 위치함)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쌍부현의 폐현과 함께 조운창 쌍창이 설치되고 면이 설치되면서 우정, 장안면에 걸쳐 설치된 7개 면을 일러 삼괴칠면이라고 하였고 이중 초장면(草長面)이 덕다리가 속한 곳이다. 1914년 일제가 부군면통합에 따라 장안면과 합쳐 장안면(長安面)이 되어 현재까지 장안면 덕다리로 편재되어 덕다 1리(원덕다), 2리(구래)에 이어 3리로 되고 그 안에 자연마을인 주택과 문화촌으로 구성된다. 현재 덕다리의 유래로 ‘덕이 많다’라는 뜻을 주민들이 선호한다.

덕다3리 마을을 이루고 있는 터전은 염장산(廉障山 바다를 향해 우뚝 솟은 담과 같은 산으로 원덕다에서 문화촌에 이르는 산으로 ’짠물이 들어오는 곳을 막는다‘라는 뜻, 덕다리 주변 지명의 연원에는 독쟁이 수성최씨가와 연결된다. 따라서 덕다리 염장산도 덕다리 주민들은 잘 모르는 산이름으로 독정리 수성최씨 등과 같은 주민들이 부르는 명칭). 이러한 염장산과 안산(원 덕다[덕다1리])이 이룬 마을이다 보니 언덕을 뜻하는 덕대, 덕미 등으로 불렸다. 특히 덕 다음 붙는 ‘미’는 언덕을 뜻하는 접미사로 강화지역에 마을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덕다리는 과거 해안에 바다로 돌출된 지형으로 인해 덕다곶이라고도 한다. 덕다 3리 자연마을인 주택은 남양만간척공사 당시 정부에서 개간을 위한 농업이주민 개척촌(대상자 일반 공모 서울시 철거민 국가보훈대상자 반공청년회, 20호)으로 건설한 주택을 말하는 것으로 인근 장안, 노진, 이화, 사곡 등 같은 경우이다. 이후 지명으로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문화촌은 간척 당시 간척을 주도한 공사감독이 문화류씨라서 문화촌이라고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리

발안천 하구 분향만 간척지.(분향은 이 일대 번성했던 포구 중 하나로 현재의 향남읍 상신1리)

덕다3리 문화촌은 분향만의 북쪽의 대규모 갯벌로 독정천이 발원하여 갯골로 이어진 노진리, 장안리에 걸쳐 이르는 독정개에 속하는 기수지역이다. 문화촌의 초입에 해당하는 염전집 혹은 염전으로 불린 곳이 수렁개(문화촌 능곡 고개 전 모퉁이로 총 6정보에 이르는 곳[1정보 3천평]), 원덕다 쪽의 갯벌은 반개골이다. 육지로는 작은 구릉인 안산(원 덕다에서 구래에 걸친 산)과 염장산이 덕다곶을 형성하여 이 구릉으로 원덕다, 주택, 문화촌 마을이 입지하였다.

남양방조제 건설과 간척사업

발안천 하구, 즉 과거 분향만 일대(남양호)인 경기도 화성시 서남부 지역(향남읍, 팔탄면, 장안면, 우정읍 등)은 순연한 농촌마을이다. 2000년대 이후로 동탄신도시의 개발로 중소기업들이 대거 이전되면서 도농복합도시가 되었다. 이 지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기까지 가장 큰 역사적 격변은 바로 1974년 남양방조제의 준공이다. 발안천 하구인 분향만(汾鄕灣)을 막은 남양방조제의 건설은 지역에서 너른 간석지를 발판으로 염전 및 어로와 조개채취가 성행하던 지역을 내륙으로 탈바꿈시킨 사건이었다. 따라서 방조제 완공 이후 남양호 담수화와 관개시설을 확충하여 농경지로 개간하면서 오늘과 같은 농촌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대단위 간척사업은 박정희 정부가 식량자급계획에 따라 대단위 금강․평택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을 계획하고 그 자금으로 세계은행에서 장기저리차관(1969)을 들여와서 처음으로 시행한 국책사업이다. 최초 국책사업으로 시행된 간척사업인 평택지구 남양방조제가 이렇게 1974년 5월 22일 준공되었다.

덕다리 사회문화

염장산 기준으로 남동쪽은 오랫동안 지역 향반 독쟁이 수성최씨가에 농업경영 북쪽 원덕다인 반개골은 김, 박, 양씨 등 토박이들이 농업(독정리 수성최씨들의 양안, 호적을 통해 조선시대 영농상황을 알 수 있고 이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한국전쟁 기 한국정부의 토지조사 실태를 통해 확인)경영하였다.

독정리 세족 수성최씨는 한림공파 최함(한천) 후손들로 가장 벌열한 인물은 인조 때 이괄의 난을 진압한 진무공신 한풍군 최응일 장군(염장산 맞은편 독정리 능머루 산에 묘소가 위치)이다.

염장산 끝 수렁개는 일부 어염(漁鹽)이 있었으나 이를 생업기반으로 한 마을 형성은 되지않고 본격적인 마을 형성은 한국전쟁 후 피란민 이주정착 사업으로 이루어진 간척사업이었다. 이때 산촌(散村) 형태로 문화촌이 이루어진다. 특히 이 사업을 인수한 이봉연 간척사업단이 마을형성에 직접적인 역할이 되었다. 남양만방조제 완공(1974년)에 따라 간척에 기여한 가구들이 많게는 2정보씩 불하를 받았으나 초기 간척은 농지들이 염해(鹽害)로 농업경영이 쉽지 않아 소수의 불하 가구(김용만, 조찬열)만 남고 이후 현재의 마을 구성원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염기가 빠진 논에서 본격적인 논농사가 가능해졌기 때문으로 1970년대 말에서 80년 대 초 전후의 상황이다. 염장산 언저리인 녹지보존지구에 개척된 마을로 주민들의 출신은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는 물론 경기도(화성군 남양, 평택)에서 온 각성바지 마을이다. 이밖에 주택보다는 적지만 원덕다 토박이로 정착한 2가구가 있다.(박병철, 유용진, 현재 후손들은 거주를 않고 박병철 묘, 유용진 주택만 있음)

반면 덕다 3리를 같이 이루는 주택은 남양만간척사업이 본격화되며 정부 이주민주택사업으로 조성된 곳으로 인근 장안, 노진, 사곡, 이화리 등지의 주택과 같은 경우로 현재는 일반명사로 지명이 된 곳이다. 문화촌과 달리 원덕다와 가깝고 그곳의 토박이들이 많이 들어와 마을형성에 주된 역할을 하여 초기부터 문화촌과 달리 원덕다와 가깝게 교류하였다. 반면 문화촌은 원덕다와 교류가 적었다. 오히려 간척지 건너 장안리와 일손, 식량 등 교류가 많았다.

현 이주 1세대로 피란민 이후 4.19를 이후 이봉연 간척사업단에 들어와 정착한 가장 오래된 가구는 김용만, 조찬열 2가구로 동네에 대가족을 형성하여 살고있는 집은 김용만이다. 그 외 가구는 간척사업이 완료된 후 본격적인 영농이 이루어진 1980년대 전후로 대부분 이주하였으며, 이들 중 마을에 자손이 많이 사는 가구는 김봉계이다.

문화촌의 초기 가옥은 하꼬방 같은 피란민, 임시 가옥 형태의 흙벽돌에 기와를 얹은 작은 집에서 차츰 슬레이트지붕이나 양철지붕, 벽체는 시멘트 벽돌로 대체되나 열악하였다. 이후 원 덕다 토박이와 본격적인 이주 정착을 위해 들어온 가구에서 집다운 집을 지어 정착. 대체적으로 대여섯 채 정도로 지금 김봉계, 김용만씨 댁 가옥이 제일 컸고 원 덕다 출신 박씨인 염전의 박병철 가옥이 큰 초가집이었다. 덕다고개에 능곡집(고양 능곡에서 이주)이 아담하게 있었고 작지만 전망이 좋고 뒤란에 토굴을 파서 만든 광이 있는 윤택한 가옥이었다.

덕다리 변화 도로 확포장

그간 도로는 사랑리 고개로 넘어와 원덕다의 안산 산등성이(능선)을 따라 염장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주된 교통로였다.(2000년대 이전까지 길이 남아있었음) 바다에 접한 갯벌로 인한 것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남양만방조제로 간척 이후 새마을운동으로 원덕다(이장 양문석)에서 주택을 거쳐 문화촌(이장 오승룡, 새마을지도자 이희연)에 이르는 염장산 아래 갯벌의 좁은 길을 원덕다 주민들과 협력하여 확장 및 포장하는 것이었다.(현 마을길) 도로포장을 위한 시멘트 등 자재는 장안면사무소의 지원을 받았고 인력은 주민들의 부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도로확보장 이후 비만 오면 진창이 되었던 마을길이 버스도 들어오고 안정적으로 유지(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 상황)되는 큰 변화였다. 이렇게 길을 확포장하여 버스와 자동차 교통이 편리해지기 이전에는 조암장날(4,9일)이면 주민들은 양수장길이라고 하여 수렁개에서 사랑리로 이어지는 새랭이천(옛 갯고랑) 옆 농로길(조암으로 이르는 지름길)로 5일장을 오갔다. 장날만 되면 문화촌을 비롯한 덕다리 주민들이 삼삼오오 행렬을 이루며 장을 가는 모습이 선하다. 주요 교통수단으로는 농사지을 때 쓰는 경운기였다.

이병권, 「화성시 찬우물마을의 어제와 오늘」, 『2020 경기지역학활성화 공모지원 개인연구 모음집 생기를 찾아가는 명랑경기학2 물』, 경기문화재단

이병권, 「남양만 간척지 농업이주민의 어제와 오늘」, 『2022 경기학 활성화논문집』, 경기문화재단

염전집에서 조암의 쌍봉산이 보인다. 쌍봉산은 우리 지역의 상징이다.
덕다3리 문화촌 입구로 과거 천일염전이 있어던 곳으로 산 아래 염부사가 있어서 염전집으로 불렀다.
염전집 염전창고

동남쪽으로 가서 수원부의 여러 산이 된 뒤에 바다에서 그쳤으며, 충청도 아산현과 포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중간에 금수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물빛이 황색으로 물들인 것 같다. 전설에는 옛날부터 그 속에서 금이 산출되기에 그렇다는 말이 전해온다.

옛날에 지기(땅의 기운)를 잘 아는 당나라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산에 금의 보기가 서려 있다."

금수산에서 나온 다른 산줄기가 서쪽으로 달려가서 남양부가 되었고, 부의 서쪽에 있는 문판현(文板縣)을 지나 서해에서 그쳤다. 충청도 당진과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단히 가까워서 간조 때에는 쉽게 통한다.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좌우로 포구와 항구를 끼고 바로 바다로 들어갔고, 소금을 굽는 수백 호의 집이 남쪽과 북쪽의 바닷가에 별처럼 깔려 있다.

이중환, 『택리지(擇里志)』

 

안산

수리산에서 나온 줄기 중에 서쪽으로 간 것이 가장 짧은 줄기로 안산 바닷가에서 그쳤다. 이곳에는 서울 공경가 조상의 무덤이 많다. 또한 서울과 가까우며, 소금과 생선이 풍부하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안이 많다.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가 서남쪽으로 가다가 광주 성곶리에서 그치면서 생선과 소금이 생산되는 갯마을을 만들었다. 근해의 상선이 많이 모여드는 덕에 백성은 어물을 판매하여 부유하게 산다.

수원

또 하나의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가서 수원부의 여러 산이 된 뒤에 바다에서 그쳤으며, 충청도 아산현과 포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중간에 금수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물빛이 황색으로 물들인 것 같다. 전설에는 옛날부터 그 속에서 금이 산출되기에 그렇다는 말이 전해온다.

옛날에 지기(땅의 기운)를 잘 아는 당나라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산에 금의 보기가 서려 있다."

남양

금수산에서 나온 다른 산줄기가 서쪽으로 달려가서 남양부가 되었고, 부의 서쪽에 있는 문판현(文板縣)을 지나 서해에서 그쳤다. 충청도 당진과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단히 가까워서 간조 때에는 쉽게 통한다.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좌우로 포구와 항구를 끼고 바로 바다로 들어갔고, 소금을 굽는 수백 호의 집이 남쪽과 북쪽의 바닷가에 별처럼 깔려 있다.

육지가 끝나는 바닷가에 화량포 첨사진을 두었다. 그 진에서 바닷길 십 리를 건너면 대부도에 닿는다. 이 지역은 모두 어민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남양부 서쪽 마을이 생선과 소금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있다.

대부도는 화량진에서 무너진 석맥이 바닷속을 굴곡을 이루며 지나가서 된 것이다. 그 등마루가 바다 위에 나타나 있어서 그 위는 물이 대단히 얕다.

옛날에 학이 물속에 있는 석맥 위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섬사람들이 학을 따라가서 그 길을 발견하였다고 하여, 그 길을 학지(鶴指)라고 부른다. 이 길은 오직 섬사람들만이 익숙하고 다른 지방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병자년(1636)에 섬사람들이 청나라 병사에게 쫓겨 이 석척(石脊)을 따라 도망쳤다.

그런데 석척이 모두 구부러져 있으므로 찾기가 어려웠다. 청나라 병사들은 길을 모른 채 따라오다가 빠져 죽었으며, 그런 연유로 섬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 섬(대부도)은 땅이 비옥하고 백성이 많으며, 남쪽에서 올라오는 뱃길의 첫 관문으로 강화도와 영종도 두 섬의 바깥문과도 같다. 옛날 이곳에 수군 영을 설치하였으나 후에 교동도로 옮겨 간 다음에는 말을 치는 목마장으로 변하여 군

이중환(조선)(李重煥(朝鮮)) 저(著) 택리지(擇里誌)

『택리지(擇里志)』의 묘사처럼 별처럼 무수히 많은 전통 자염전이 있었던 우리 고장은 일제강점기 자연스럽게 천일제염으로 옮겨갔다. 덕다3리 염전집은 천일염전이었다. 아울러 염전이 발달한 드넓은 간석지는 다른 한편으로는 간척하기도 매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진다. 따라서 일제의 농업수탈과 맞물려 농업이 중시되면서 조선 후기 간간히 이어지던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는 가운데 지역에서는 방응모와 같은 경성을 근간으로 하는 부재지주, 그리고 여산 송씨가와 해풍 김씨가와 같은 토착 대지주가 나타났다. 이들의 경제적 성공은 지역사회에 교육운동으로 이어져 삼괴중고교의 설립(김진구)으로 이어졌다. 덕다리 인근 대표적인 지주는 원독정(1리, 한천:찬우물) 수성최씨가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염장산 아래 독정개를 간척하며 경제적 바탕을 일구었다.

전통염업과 천일염전이 발달한 분향만

분향만은 너른 간사지가 발달한 곳으로 전통염업도 발달하였다. 염업은 보편적인 서해안 제염과정인 전오제염(煎熬製鹽)과 천일제염(天日製鹽)이 있다. 분향만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전오염, 화염(火鹽), 혹은 자염(煮鹽)이라 부르는 제염법이 주류였다. 자염은 일제에 의해 천일염전이 조성되기 전까지 생산되던 전래소금이다.

관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의 토산(土産)에 소금을 첫 번째로 꼽고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수원과 남양의 각종 읍지류와 『택리지(擇里志)』도 비슷하다. 이를 통해 분향만 일대에서 자염이 일찍부터 널리 생산된 것을 알 수 있다.

자염의 생산 방식은 바닷물을 직접 끊여서 수분을 증발시키는 해수직자식(海水直煮式)과 해안의 갯벌을 갈아서 염분이 달라붙은 흙(鹹土)을 생산하고 이 흙을 해수를 침투시켜 염도를 높이는 채함(採鹹 : 염분의 농노를 높이는 작업)하여 함수를 끊여 소금을 만드는 무제염전식(無堤鹽田式)으로 구분한다. 대부분의 서남해안에서는 염전식으로 채함을 위해 염전을 조성하였다. 염전식은 염분함량이 높은 함사(鹹砂)를 얻기 위해 염전 가운데 염정을 만들고 조금(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작은 시기) 때를 이용하여 써레를 단 소를 이용하여 염전바닥을 하루에 2~3차례 갈아엎었다. 이렇게 하면 갯벌의 흙이 햇볕을 쪼이면서 소금기가 모래 알갱이에 달라붙어 함토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써레질을 반복하면 소금 농도가 짙은 함토로 변화한다. 염분함량이 높아진 함사에서 염수(간수)를 뽑아낸다. 채함을 거쳐 뽑아낸 염수를 ‘벌막(벗)’으로 옮겨 솥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소금으로 응결된다. 해안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개흙과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제작할 수 있는 토부(흙으로 만든 솥)가 주로 사용되었다. 도중에 비가 오게 되면 모든 과정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소금가격이 금값이었다.

자염 염전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인 '벗주'가 큰 쇠솥, 장작, 일꾼들의 식비 등 돈을 대고 구워진 소금의 40%를 가져갔다. 염전 한 자락을 경영하는데 대체로 소 1마리, 염부 4~5명이 있었다. 땔감마련과 아궁이 불 지피기 담당은 '염한이', 소금물을 염벗까지 져 나르는 일꾼은 '간장이(간쟁이)'라 부르는데, 가장 고돼 "간쟁이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동이 힘들었다. 염전 대부분은 소작이라 염부들의 삶은 매우 어렵지만 소유주는 수입이 많아 윤택하였다. 시흥해역의 경우 주민들은 대부분 주업이 농업이고 부업으로 염업에 종사하였다.

개항이후 자염은 일본염과 청국염의 수입으로 가격경쟁에서 도태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더욱이 자염은 일본이 인천 주안(朱安)에 시범적으로 설치한 천일제염의 소금생산보다 효율성이 떨어졌다.

천일염은 전래의 자염과 달리 중국 남부와 대만에서 생산하던 제염법으로 바람과 햇볕을 이용하여 생산된 소금이다. 천일염 생산은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농축함으로써 고농도의 함수(鹹水)를 제조하고, 결정지면(結晶池面)에서 소금을 결정시켜 채염(採鹽)하는 방식이다. 천일염은 막대한 양의 바닷물을 원료로 사용하여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특별한 기계설비가 필요 없다. 자연력을 이용하므로 연료비, 인건비 등을 절감할 수 있다. 다만 염전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넒은 평지가 필요하고 바람과 햇볕에 의해서만 생산이 되므로 기후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일제의 통감부는 1907년 염업조사를 통해서 염세를 부과하여 제정수입의 확대와 종래의 한국인 제염업자를 해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통감부의 염업정책은 식민지재원 확보를 위한 조세증가정책으로, 염을 새로운 과세 대상으로 파악하고, 조선염업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통감부는 1907년 염업에 관한 전면적 조사를 하여 1911년에 완료한다. 당시 경기도는 부옥(釜屋) 815개, 염정(鹽井) 3,527개, 제조인원 1,770명, 소작 667명, 종업자 5,725명, 염전면적 525.57정보, 생산량 5,248만 1,264근이다.(朝鮮總督府專賣局, 『 朝鮮專賣史』第3券, 1936, 276쪽) 전국적으로 전남이 1위, 경기도·충청도 순으로 염업이 발달하였다. 통계수치로 인천, 시흥, 화성, 안산 등지가 주요 생산지고 1936년의 자료에 자염은 급격히 쇠퇴하여 경기도의 경우 수원지역, 오늘의 화성해안가 정도에 일부 남았다.

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 바닷가 사람들의 일과 삶」,『시흥시사』6, 2007, 275쪽

일제는 자염의 개량을 통하여 생산량을 늘리고 보다 수세를 강화하려 하였다. 1907년 염세규정은 자염 생산에 일차적인 통제책이자 생산력 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었다.

1906년 10월 「조세징수규정」의 제정이 그 전단계이며 면장, 임원에 의한 지세의 부과를 세무관=세무주사, 면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세수취구조로 바뀌자 염세 또한 그와 같이 부과되어 염민들은 염제조면허신청서를 제출하지 않고, 생산 즉시 반출함으로써 염세미납을 통한 염세저항운동을 벌였다.

이동근, 「수원지역 3․1운동에서 천도교의 역할」(한신대학교 대학원), 2003, 201~204쪽

특히 일제는 천일염 생산에 관심이 높았다. 당시 화학공업의 원료로써 천일염이 주목받기 시작하였지만 일본은 지리적 요건이 충족되지 못했고, 조선은 천일염을 생산하기 마땅한 기후 조건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일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천일염의 원료 생산지로서 매우 적합한 곳으로 여겼다. 일제는 ‘우리나라 화학공업의 장래와 조선 천일제염의 장래가 긴밀한 관계가 있다.’라는 할 정도로 조선에서의 천일염 생산에 관심이 높았다. 관영 천일제염의 확산은 식민지적 생산력 발전과 종래의 생산 관계를 재편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경기도에서는 소래염전(현 인천, 부천, 시흥시 소재)과 군자염전(현 시흥시, 안산시 소재)이었다.

이병권, 「시흥시의 어제와 오늘-간척을 중심으로-」, 『2019 경기학 활성화논문집』, 경기문화재단.

일제강점기 삼괴지역 간척과 대지주

분향만의 북쪽지역인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지역은 오래전부터 삼괴로 불렸다. 이러한 삼괴지역은 지형적으로 삼괴반도 또는 조암반도를 형성하였다. 이곳의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염업과 간척을 토대로 대지주가 형성되었다. 삼괴지역 대지주는 수원의 차유순, 멱우리 송 주사, 방응모 방농장(조선일보, 간척사업가로 명성), 마파지방죽의 유씨, 수원사람 양성관이 있다.

특히 멱우리 지주 송 주사, 송영만은 일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으로부터 ’간척왕‘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한정택(1926년생 중지주)은 삼괴 출신 지주로 천석지기 멱우1리 송 주사 송영만(7~800석, 여산송씨, 삼괴 4.3항쟁을 주도한 차병혁지사가 송영만의 석포리 땅의 마름이었음), 화산3리 김연설(천석), 호곡리 범아지 삼괴칠면 만석지기로 불린 김 참봉 김진구(5~600석)를 들고 있다. 김연설과 김진구는 해풍김씨 쌍부파로 지역에서 대대로 위세를 가지고 있는 무반명가이다. 후손들은 외지로 다 나갔다. 같은 집안으로 일제 때 말을 탈 정도로 부자인 화산리 김각규도 이름난 대지주이다.

송영만의 손자 송기항(1926년생)은 조부 송영만이 고조부 때 화수리 큰댁에서 멱우리로 분가하였고 증조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송인호가 재산 불렸다. 특히 송영만은 개화기 때 남들 앞서 상투를 자르고 측량학교 다니며 신학문을 하여 우체국 주사 지내 송 주사로 불렸다. 특히 땅을 조선식산은행 담보로 인천에서 돌을 사와 장안면 석포리와 팔탄 서근리 일대의 자기 산에서 나무를 베어 토차를 실어다 갯고랑을 막아 300정보 이루고 아들 송운섭(송기항의 부친) 대에 3천 석에 이르는 등 대지주가 되었다.

당시 개간은 염기를 빼고 10~15년 걸렸다. 해방 후 농지개혁에 따라 소작인들에게 농지를 분배하였다.

송연만 일가는 간척을 통해 부를 이뤘으며 송영만의 사촌 형으로 화수2리 종손 송연빈은 만석꾼이었다. 99칸 집에 천석을 들여놓을 곳간이 있었으며, 1919년 삼괴의 4.3항쟁 당시 일제의 화수리 주재소 습격 보복에 따라 일본 헌병에 의해 가옥이 한달이나 불탔다고 한다. 일가붙이 송운섭과 구장이었던 송찬호도 이때 붙들려 갔다가 발안주재소에서 옥사를 부수고 탈출하였는데 송찬호는 다시 붙들려 72군데를 난자 당하고 목이 잘려 발안천 냇가에 버려졌다 이를 가내 하인들 말을 듣고 송운섭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이들 여산송씨 종가처럼 지역 명가인 해풍김씨 종가 역시 수난을 당했다. 송찬호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대토벌 당시 화산리 일원동 종가(99칸)를 지킨 김연방 지사는 발안거류민단장이자 제암리, 화수리 토벌 향도였던 사사카 리키치에게 주모자로 지목되어 종가가 불태워지고 일가인 집사와 함께 무참히 학살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지주라서 집안 사람들 고초가 많았지만 송운섭은 인민위원회 세포위원장에게 쌀을 바쳐 무사하였다. 아들 송기항은 1952년 삼촌 송충섭과 삼괴중학교를 설립자 김진구로부터 인수하여 1958년 백성기(대표적인 염전사업가, 현 삼괴학원 초대이사장)에게 넘길 정도로 대지주였다. 이화리, 멱우리, 화수리, 석포리, 서근리에 땅이 있었고 멱우리, 이화리, 석포리, 주곡리에 각각 마름을 두었다. 이런 마름 집에 큰 창고를 두어 소작료인 쌀을 보관하였다.(석포리 차병혁 고택이 남아있음)

한정택의 경우 큰 지주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땅을 가진 집안이었다. 한정택은 어렸을 때 수확량을 조사한다고 따라가면 “지주의 귀한 아들이 왔다.”고 해서 연시감도 주고 과일도 주고, 또 보토 ’건낙‘이라고 부르는 낙지 말린 것도 주어서 얻어먹었다고 했다. 운평리 일대 식민지 시기 소작료는 반병작 해방 후 삼칠제 밭은 정액제 도지로 하루갈이 이틀갈이로 해서 소가 하루 가는 면적으로 계산 콩 몇 말 하는 식으로 계산 하루갈이 평수는 대략 천 평으로 추측된다.(142쪽)

석포2리 버들마을 일제강점기 마파지(무봉) 간척과 저수지 착공으로 ’흉년밥그릇‘으로 여기던 좋은 논들이 수몰되자 쟁의를 일으켰다. 수확기에 물막이를 하면서 주민들이 쟁의를 일으켜 차병협(이들 중 가장 연장자로 60이 넘은 차유순 지주의 마름으로 유지 나머지 이들 30대), 차남규, 차진명, 차근규 등이 주재소로 붙들려 갔다. 이러한 쟁의투쟁의 결과 버들저수지에 있던 토지 면적에 비례하여 대토(代土) 받았다.

『화성시사』1, 「농업환경과 생산문화의 변화」 (2018), 133~142쪽

살펴본 것처럼 일제강점기 천일염전은 일제소작제에 따라 염세저항운동으로 이어졌고 경제적으로 일본인의 이주를 독려하던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정책은 결국 지역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1919년 4월 3일 전날 봉화횃불 시위 이후 삼괴지역민 전체가 일어나 '삼괴4.3' 즉, 3.1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삼괴지역 호구가 2천 정도였는데 이날 시위에 참가한 사람이 2천을 넘겼다고 한다. 물론 덕다리도 참가했다. 다만 3리는 당시에는 마을이 없었기에 원덕다인 1리와 구래인 2리의 주민들이 장안면사무소로 달려가 불태우고 아울러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주재소의 순사 가와바타 토요타로 순사를 처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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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기념비 삼괴 4.3

(1919)4월 3일, 폭민 약 천명이 장안 우정 양면사무소를 파괴해 서류 전부를 소각, 폐기해 면장을 데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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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장안리에 가면 평택시 포승읍 사이로 넓은 들판 가운데 강이 흘렀다. 우리는 늘 강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멱도 감고 한참을 놀았었는데, 나이를 먹고 강이 아니라 발안천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른 수변으로 큰강으로 보인 것은 이곳이 평택 청북에서 내려오는 광승소하천이 합수하여 큰 물줄기를 이루는 한편, 1974년 분향만(汾鄕灣) 하구를 막아 담수화가 진행된 남양호(남양방조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린 눈에는 그저 넓고 큰 강으로 보인 것이다. 현재 이곳에 장안대교가 놓여 중요한 교통로가 되고 있다. (총 길이 525m, 왕복 4차선. 2000. 12. 개통) 예전에도 그 아래 장안나루터(장안포)가 있어 맞은편 포승 자오포(홍원3리), 호구포(홍원2리 마장)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닌 곳이다. 이 나루로 우리 할아버지(마장 예전 본가), 선조(석정1리 감탕개)들이 수원과 멀리 한양을 하루 일정으로 올라가셨다.(원정리에서 배를 타고 가는 길도 있다. 과거에는 육로보다 바닷길이 편리했다.) 『택리지』에서 보듯 이곳은 너른 갯벌(간석지)를 발판으로 어업과 염업(전통 자염이 발달하고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천일염이 발달)이 발달한 천혜의 요지였다.

감탕개의 우리 선조들은 강원도 원주, 춘천에서 출자한 무반으로 입향조인 10대조 이징(통덕랑) 이후 포승 석정, 홍원리 일대 간척사업을 통해 토반으로 이어갔다.(찬우물 수성최씨가와 유사)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교육에 적극 힘써 집안에 관료, 교육자를 여럿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종손가의 이병직 박사이다. 연희전문 세브란스의대를 나와서 수원의료원장과 수원여자대학교를 설립하였다. 5공의 실세 전두환 장인 이규동(영부인 이순자 부친)과 바둑친구로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다는 풍문이 있다.

독정개 새랭이천이 만나는 남양호 합수지점

 

이곳에 있는 우리 고잔논이다. 아버지는 1980년대 농업이주를 하신 농업선구자셨다. 덕다 원촌 토박이분들과 사귀면서 논농사를 배웠고 그렇게 대규모 임차농으로 일시 성공을 맞보기도 하였다.

남양만 간척지 장안4리 고잔에 있던 논. 2정보 6천 평에서 120가마를 수확했다.

남양만 간척지 대규모 임차영농의 선구자 문화촌 이희연 이야기

이희연(李喜淵, 1947~ )은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덕다3리 문화촌에 거주하는 남양만 간척지 농업이주민이다. 직업은 농부이자 목수이다. 1947년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출생으로 아버지 이형선(李亨善, 1916~1999, 어머니 김정기)이 본적지 평택군(진위군) 포승면 홍원리(마장馬場:말마당, 조선시대 국영 말목장 위치) 130번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정착, 자수성가하면서 살게 된 것이다. 본적지 홍원2리 마장마을은 이웃한 석정1리 감탕개마을이 약 400년 전 입향조 이징(李徵, 통덕랑, 10대조)이 강원도 춘천에서 해안가 진전개발로 정착한(개척입향) 원주이씨 집성촌으로 여기서 분가한 것이다. 이후 아버지 이형선이 사업상 부하직원의 회계부정으로 책임지고 서울역철도화차 하역(마루부시 : 주식회사 대한통운 전신) 총책임자에서 사직하고 횡령액을 대신 배상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만리동으로 이사, 이어 중림동 판자촌, 1960년 남가좌동 판자촌으로 이주하였다.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군정)이 경제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서울 근교 빈민들 중에서 귀농 희망자를 모집하여 전국 각 지역에 정착시켰는데, 이때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이주(1961)한 곳이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남산2리 귀농촌(귀농정착사업장)이다. 이곳에서 정부로부터 밭 6천평을 불하받아 참개, 밀, 보리, 무, 땅콩 등을 재배, 아버지를 도와 처음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밭농사만으로 춘궁기 기아를 해결하지 못하자 많은 이주민들이 밭을 팔고 임노동을 위해 귀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고 남아 있는 이주민 조차도 생계를 위해 임노동을 위하여 도시로 향하였다. 대상자도 한동네 김성만을 통해 1969년 서울로 가서 삼일빌딩 건축 일(조공)을 시작하였다. 이는 가을걷이를 돕고 농한기에 단순노동으로 생계를 위한 돈벌이였다. 이렇게 시작된 건축노동은 1974년 평택군 안정리 주둔 주한미군부대(USAG 캠프 험프리스)에서 건축일을 하면서 전기를 맞는데 이때 처음으로 철근기술을 익히면서 본격적인 목수(기공 : 철근공)의 길로 나선다. 박정희 정부가 식량자급계획에 따라 대단위 금강․평택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을 세계은행에서 장기저리차관(1969)을 들여와 처음 국책사업으로 시행한 평택지구 간척사업인 남양방조제가 1974년 5월 22일 준공되고 개간을 위한 대규모 관개시설 공사가 이루어진다. 이때 현대건설과 국제상사에서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장안리에 한국농어촌공사 장안양수장(옛 장안나루터, 현재 포승장안로 장안대교 아래)을 건설 하자 철근공으로 참여하여 남양만 간척지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장안면 어은리의 농업용 수로 공사(현재 쌍봉산 인근)를 하고 이어 박정희 정권 마지막 간척지 사업인 충청남도 당진군 삽교천방조제 준공과 더불어 관개시설을 공사하기 위해 당진군 송산면 서정리 농수로 공사에도 참여하였다. 여기서 배우자 최성남(崔成南, 1960년생)을 만난다. 수로공사 임부에게 밥해주던 장모 김영애(장인 최경식)의 중매였다. 빠듯한 살림에 혼인신고(1980.3.26.)만 한 채 살기 시작하였다. 슬하에 아들 2명을 두어 장성하여 결혼해서 분가하였다. 처음 신접살림은 경기도 평택군 팽성읍 노와리에서 시작하였다.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 생계를 위해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과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의 양계장을 전전하다. 덕다리 지주인 박보균(朴輔均, 전 19대 여주군수)의 사촌동생에 권유로 드디어 1984년 화성군 장안면 덕다3리 문화촌(문화촌의 유래는 간척 당시 공사감독이 문화류씨라서 불러지게 된 신생마을로 마을 이전에는 간석지인 ‘독정개’의 일부분인 ‘수렁개’였음)에 농업이주(염전집)를 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논농사를 시작하여 논 2정보를 임차(박보균 친구)하여 직접 농사를 짓고 염전논 6정보를 임대경작하였다. 특히 논 2정보을 임차하여 농사를 지은 것은 지금은 농촌에서 논농사가 대규모로 임차가 이루어져 광작(대농)이 다반사지만 지역에서는 선구적이었다. 때문에 당시 쌀값 안정화 영향까지 겹치면서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특히 평택 귀농촌에서는 밭농사를 짓다 문화촌에서 본격적인 벼농사를 짓게되자 벼농사 기술이 없어서 덕다1리(원덕다) 토박이(박씨, 양씨) 주민들과 사귀면서 이들을 통해 판모(못자리 모판 이전 육묘 방법)내는 것부터 배우면서 본격적인 영농을 하였다. 아울러 1986년에는 지역의 격변으로 인근에 대규모 기아자동차 아산만 공장(현 현대기아 화성공장)이 화성시 우정면 석천리 일대에 조성되자 목수 기술을 살려 농사와 겸업으로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해 기아자동차 공장 건설공사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농사와 목수 일을 하면서 경제적기반을 마련하면서 혼인신고만 하고 미뤘던 결혼식을 삼괴농협(현 조암농협)예식장에서 마을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혼인한지 7년 만에 모든 비용을 스스로 마련하여 식을 올렸다.(1987.12.14.) 또한 당시 문화촌은 같은 덕다3리에 속한 농업이주민을 위한 주택단지 외의 언저리인 녹지보존지구에 개척된 마을로 이주민들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는 물론 경기도(화성군 남양리)에서 온 각성바지 마을로 농촌마을계획에 따른 마을형성이 되지 않아 마을기반 시설이 매우 열악하였다. 이를 극복하고자 마을주민들은 합심하여 농촌새마을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대상자는 마을 원로들의 권유로 한창 젊은 나이이니 만큼 새마을농촌지도자(1986)가 되어 주민들과 함께 열악한 마을환경 개선을 위해 여러 사업을 펼쳤다. 특히 마을길 포장과 버스 개통 사업을 주도 한 것이다. 그 전까지해도 비만 오면 진창이 된 비포장길로 통행이 어려운 것은 물론, 이러한 길로 인해 시내버스 유치가 어려웠다. 이를 위해 주민들과 함께 장안면에서 시멘트 등 도로포장을 위한 건설재료를 지원받고 마을주민들이 동원되어 마을 포장에 나섰다. 그렇게 완공된 마을길로 회차는 적지만 읍내(조암장=삼괴장)를 나가기 위해 걸어 다녀야 했던 마을에 버스가 아침, 저녁으로 다니게 되었다.(1989) 아울러 1987년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 올림픽 특별 회원(10.20.)이 되었고 1989년 10월 13일 읍내 목욕탕 공사 일을 끝내고 오토바이로 귀가하다 사고로 불구가 되었다. 이 사고로 그간 해오던 농사와 목수 일을 모두 그만 두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배우자 최성남이 가장이 되어 오산시 삼포만두, 어은리(조암) 영신연와(벽돌공장)를 다니며 가계경제를 책임졌다. 불구가 되었지만 수년 후 회복한 다음 기아자동차 하청 기양에 취직하여 일하였다. 2001년 사)한국지체장애인협회 경기도협회 화성시지회 장안분회장이 되어 2008년까지 종사하였다. 현재는 밭농사 조금과 2016년부터 장안여자중학교(화성시 장안면 사곡리 소재) 학교안전지킴이 활동과 덕다3리 노인회 총무, 2022년부터 회장을 맡아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병권, 「남양만 간척지 농업이주민의 어제와 오늘」, 『2022 경기학 활성화논문집』, 경기문화재단

 

독정2리 버섯말에서 한천마을인 원독정을 지나 염장산 아래 독정개로 들어가는 마을길

 

잿빛으로 기억되는 어린시절, 가난했지만 부족한줄 몰랐다. 그 시절 시굴은 어디나 산다는 집도 오십보 백보였다.

염장산과 원독정으로 이어지는 독정개. 이곳은 남양만방조제 이전부터 간척되어 있었다. 이를 간척한 사람들은 한천마을(찬우물) 수성 최씨가로 이 지역 토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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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경기학2(물) '화성시 찬우물마을의 어제와 오늘'

2020 경기지역학활성화 공모지원 개인연구 모음집(경기문화재단) 생기를 찾아가는 명랑경기학2 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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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바닷물이 들어와 밀물을 대비해 쌓은 석축
버스정류장 (종점)
권사님댁 앞 마을우물. 10년전까지도 식수는 아니나 사용했는데 우물담을 헐고 덮어 놓았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나 사용치 말라는 것이다. 예전 우물이 제법 깊고 물도 많아 물고기를 잡아 넣기도 하였다. 옛집선 1980년대 말이나 90년 초 KBS 6.25전쟁 기념 드라마가 촬영되었다. 고인이 된 김영애 배우를 처음 보았었다. 배우들이 타고온 버스에서 손 흔들던 모습이 선하다. 특집극이 촬영될 정도로 오지 중에 오지였던 곳이 덕다리다.

 

원덕다에서 이어지는 마을 입구

문화촌 고개
소나무산 아래 능곡집터.

동네 이장형의 부탁을 받았다. 동네에서 역사를 한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그러니 책을 만드는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2025년 그간의 마을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서 손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