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金玉均)을 포경사(捕鯨使)에 임명했다. 김옥균은 장김(壯金)의 변족(邊族)으로 그의 아버지 병기(炳基, 양부)는 음직으로 부사를 지냈다. 옥균은 재예가 많지 못해서 등제한지 10여 년에 벼슬길은 고쳐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서양 학문을 연구(태서학[泰西學])했으며 손바닥을 치며 부강책을 담론하며 시예에 간여하였다. 박영교와 그의 아우 영효, 이도재, 신기선, 서광범, 홍영식 등은 서로 당을 지어 두둔하며 김옥균을 영수로 삼았다. 이러한 소문이 새어 들어가 고종도 알게 되었고 그가 재주가 뛰어나고 남다른 능력이 있어 보여 왕도 그에게 기울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고래를 잡아 많은 이득을 본다 하며 일본 사람도 또한 그렇게 하며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런데 김옥균은 들어앉아서 입으로만 고래잡이의 이득을 떠들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비웃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98

'어느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 ’
공주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높은 차령산지가 둘러친 산골, 여기서 태어난 어느 소년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현달한 족친에 양자로 가서 영민한 머리로 일찍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 소년에게는 애국심이 있었다. 임금에 대한 사랑 또한 깊었다. 그래서 그는 청나라의 압제에 시름하던 군주와 백성을 위해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믿었던, 그리고 사랑했던 군주는 그가 그렇게 믿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자신을 등에 업고 세도 부리던 척족들이 무참히 쓰러지는 것을 보고 지레 겁을 먹은 군주는 더 나아가 이들이 정말 충신인가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결국 군주의 맘이 떠나자 이들의 거사는 3일 천하로 끝났고 이들은 급히 현해탄을 건너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물론 가족 친지, 미처 피하지 못한 홍영식과 같은 동지들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떠난 그곳에서 그는 깊은 실망감에 살았고 또 다시 황해를 건넜지만 흉탄에 차디찬 주검이 되어 고국에 돌아와서 사지가 절단되고 저작거리에 조리돌림되었다. 군주와 백성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이 슬픈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결국 그 슬픈 일은 민족의 가장 큰 슬픔인 경술국치로 이어졌다. 이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 김옥균이다.
일찍이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쓴 정철도 선조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냈지만 냉혹한 권력은 그를 철저하게 버린다. 그런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배반당한 인물이 김옥균이기도 하다.
그제는 6월 민주항쟁 기념일이었다. 1987년 전두환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우리 민주주의가 진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있어서 핵심은 나라의 권력이 어디로부터 나오느냐의 문제, 바로 주권의 문제였다. 서구유럽사회가 르네상스 이후 여러 시민혁명을 거쳐 민주주의를 완성해 간 반면 우리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주권을 되찾았다. 봉건왕조 조선을 우리 손으로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을 실현시키기도 전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앞서 우리 스스로 국민주권을 실현시키고자 한 선각자가 바로 개화당이었고 그 개화당을 이끈 영수가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다.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38번지) 감나무골이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황현은 김옥균이 10년 간 벼슬길이 밝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는 박지원의 손자이자 유능한 관료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서 역관 오경석(吳慶錫, 오세창 선생 부친)과 의관 유홍기(劉鴻基), 개화승 이동인을 통해 그 당여들과 개화사상을 배우고 약관의 나이의 알성문과 장원(1872년[고종9])을 차지하여 고종에게 장동김문의 일족으로 눈에 들고, 홍문관 교리를 시작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런 그가 서구사회와 같은 부국강병을 위해 체제를 바꾸고자 한 사건이 바로 1884년 갑신정변이다.
이날 밤 우정국(郵政局)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洪英植)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閔泳翊)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凶徒)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金玉均)·홍영식·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闕內)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寢殿)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移御)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日本公使)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是夜, 郵政局設落成宴, 總辦洪英植主之。 宴將終, 見牆外火起。 時閔泳翊, 以區右營使, 亦與會, 爲救火, 先起出門外。 有何許凶徒數名, 揮劍迎擊, 泳翊被刺還仆堂上。 座皆驚散, 金玉均、洪英植、朴泳孝、徐光範、徐載弼等, 自座中起走, 入闕內, 直至寢殿, 急奏有變, 請亟移御避之。 上離次景祐宮, 各殿、宮, 亦蒼皇步從。 玉均等, 以上命求日本公使來援, 夜深, 日本公使竹添進一郞率兵來護衛。)
고종실록21권, 고종 21년 10월 17일 무자 2/2 기사 / 1884년 조선 개국(開國) 493년
민영익이 우정국 낙성식에서 피습되고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에게 원조를 청하다
이렇게 우정국에서 시작된 갑신정변은 무능하고 의심많았던 고종을 너무 믿은 개화당의 실책으로 끝났지만 그들이 주창한 '14개조 개혁정강'은 바야흐로 조선이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방향을 인민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서구근대국가와 같은 국민국가 개조에 있었다.
1. 대원군을 며칠 안에 모셔 올 것(조공, 허례는 의논하여 폐지함)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에게 관직을 택하게 하고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말 것
3. 전국적으로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어려움을 펴게 하는 동시에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4.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고, 그 가운데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모두 등용할 것
5. 전후(前後)로 간악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가장 두드러진 자는 정죄(定罪)할 것
6. 각 도(道)의 환곡은 영구히 와환(臥還)할 것
7. 규장각을 혁파할 것
8. 급히 순사(巡査)를 두어 도둑을 막을 것
9. 혜상공국(惠商公局)1)을 혁파할 것
10. 전후로 유배간 자와 금고(禁錮)된 자는 사정을 참작하여 석방할 것
11. 4영(營)을 합하여 하나의 영으로 하고, 영 중에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육군대장은 우선 세자궁(世子宮)으로 추천한다)
12. 무릇 국내 재정에 속한 것은 모두 호조가 관할하고, 그 외의 모든 재정 관청은 폐지할 것
13. 대신과 참찬(새로 임명한 6명은 지금 그 이름을 쓸 필요 없다)은 매일 합문(閤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회의하여 아뢰어 결정하고, 정령(政令)을 반포해 시행할 것
14. 의정부와 6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은 모두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참작 협의하여 아뢰도록 할 것
一. 大院君不日陪還事 【(朝貢虛禮 議行廢止)】
一. 閉止門閥 以制人民平等之權 以人擇官 勿以官擇人事
一. 革改通國地租之法 杜吏奸而叙民困 兼裕國用事
一. 內侍府革罷 其中如有優才 通同登用事
一. 前後奸貪 病國最著人 定罪事
一. 各道還上永永臥還事
一. 奎章閣革罷事
一. 急設巡査 以防竊盜事
一. 惠商公局革罷事
一. 前後流配禁錮之人 酌放事
一. 四營合爲一營 營營中抄丁 急設近衛事 【(陸軍大將 首擬世子宮)】
一. 凡屬國內財政 摠由戶曹管轄- 其餘一切財簿衙門革罷事
一. 大臣與參贊 【(新差六人 今不必書其名)】 課日會議于閤門內議政所 以爲稟定 而布行政令事
一. 政府六曹外 凡屬冗官盡行革罷 令大臣參贊 酌議以啓事
김옥균, 『갑신일록』, 우리역사넷
김옥균을 길거리에서 효수할 때 그곳을 지나던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기록을 참고하면, 그 사건을 국치(國恥)로까지 언급하였으니 김옥균이 무슨 덕을 쌓아 일본인들에게 그와 같은 인심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갑신정변 때 제적 중에서도 김옥균이 가장 흑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가 만일 죽지 않았다면 갑오경장 이후에는 정반대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김옥균의 재주가 서(서광범)과 박(박영효)보다 더 낫기 때문에 그가 갑오경장을 맞았다면 그의 솜씨를 볼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方玉均之懸首藁街也, 日人過者莫不墮淚, 及參以右記所錄, 則至引以爲國恥, 未知玉均何以得此於彼中也, 或言甲申(高宗21年)諸賊, 玉均最黠, 若不死則甲午(高宗31年)之後, 必反噬尤劇, 或言玉均之, 才實優於徐·朴, 使當甲午之局, 其施措必多可觀。)
김준, 1994, 『완역 매천야록』, 주)교문사. : 梅泉野錄卷之二 高宗三十一年甲午 高宗 三十一年

높은 산등성이 고개마루를 지나 내려오니 눈앞에 '김옥균 선생 유허'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무덥지 않고 청명한 날씨 가족이 모두 대전으로 떠난 여행길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유허이다. 대전이 가차운 길이나 경부고속도로는 차가 많이 다녀 그 자체로도 잘 막히고 소소한 차량 사고와 고장으로도 길이 잘 막히는 쉽지 않은 길이다. 이날도 작은 사고로 고속도로가 꽉 막히며 국도로 내달리던 길이었다.
"나도 나도" 하면서 막내가 따라 나선다. 막내 손잡고 작은 길로 조금 올라서니 풀이 무성한 유허지가 눈에 든다. 가까이 다가서 안내판과 표석을 살펴보니 광정리 감나무골 김옥균의 생가지로 이곳이 고균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 살까지 살았는지 혹은 여섯 살까지 살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쨋든 이곳에서 나고 이어 천안으로 이주하여 곧바로 한양으로 떠난 그이다.




이곳 광정리는 삼남지방에서 차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일찍부터 역참인 광정역(廣程驛, 제일로)이 있던 교통의 요지이다. 현재도 국도 1호변이다.
이곳의 풍경은 높은 산으로 둘러진 산촌이다. 때문에 어린 고균이 그렇게 넉넉한 형편에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옥균의 생부인 김병태는 김상용의 후손(홍성의 김좌진 가문도 같은 일족으로 이들 가문은 장동의 청음 김상헌가의 세도 김조순 일족과는 갈라진다.)이지만 가난하여 같은 가계로 한양에서 세거하던 김병기에게 장남 옥균을 양자로 보낸다. 가난한 선비가 집안에서 현달한 집으로 양자로 입적시키는 것은 조선시대 오랜 전통이며,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도 진천향반 이행우 자제로 친족인 양부 이양우에게 입양되어 벌족이 되었고 그러한 지위를 누리며 살다 친일파로 남은 것이 아닌 삼한갑족 이회영 일가처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살신성인하였다.
고균은 어머니 은진 송씨에게 나서(1851.1.13.) 이곳 감나무골에서 3년을 살고 천안으로 이주하였다.(김옥균 연보) 그리고 7살에 아버지의 6촌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한양으로 떠났으니 이곳 광정리를 고향으로 말하기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김옥균은 자신의 고향을 천안이라 하였다. 그곳에 생부 김병태와 어머니 송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교리 김옥균(金玉均)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의 본생가(本生家)가 충청도 천안(天安)에 있는데, 조금 전에 입직을 하고 있던 차에 조금 전에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니, 신의 아비(생부 병태)가 평소에 담벽증(痰癖症)을 앓고 있는데, 이처럼 환절기를 당하여 한층 더 심해졌다고 하면서, 신에게 집으로 와서 살펴보기를 재촉하였습니다. 신은 이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타는 듯하여 편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감히 황급하게 짧은 상소를 지어 올리고는 곧장 시골로 떠나갑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굽어살피고 양찰하시어 속히 신의 직책을 체차하심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병구완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어 신이 마음대로 자리를 떠난 죄를 다스림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가서 병구완을 하라.”
하였다.(副校理金玉均疏曰, 伏以, 臣本生家, 在於忠淸道天安地, 而卽於持被之中, 得見家信, 則臣之父素患痰癖之症, 迨此換節之時, 一倍添劇, 促臣歸視, 臣聞此報, 方寸煎灼, 按住不得, 玆敢忙陳短章, 徑尋鄕路。 伏乞聖明, 俯垂鑑諒, 亟遞臣職, 俾便救護, 且治臣擅離之罪, 以肅朝綱焉。 臣無任云云。 省疏具悉。 爾其勿辭往護。)
승정원일기 2882책 (탈초본 133책) 고종 17년 12월 30일 신해[계해] 25/26 기사 1880년 光緖(淸/德宗) 6년
아비의 병을 구완할 수 있도록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부교리 김옥균의 상소
이렇게 생본가를 천안이라고 한 것은 요즘과 같은 고향과 의미가 달라서이다. 지금은 단순히 태어난 곳을 고향으로 여기지만 전근대 우리 고향의 의미는 아버지와 부모가 사는 곳, 우리 가계를 이어온 곳이 고향이 된다. 그래서 그 유명한 율곡 이이 선생도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본인의 고향을 파주 밤나무골(율곡)이라고 여긴 것이 그 때문이다. 사실 율곡의 고향은 강릉이 맞다. 김옥균처럼 어린 시절 떠나와 아무런 기억이 없던 거와 달리 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사임당 슬하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하여간 김옥균의 태생지를 두고 이곳 정안 말고도 외가인 대전 이사동(송시열, 송준길 등 회덕을 중심으로 은진송씨가 거족을 형성) 혹은 옥천군 인포면 도율리(정납, 옥주유고[沃州遺稿])로 비정하기도 하는데, 현재 그의 무덤이 있는 아산은 물론 국가유산청까지 충청남도역사문화원의 연구조사에 따라 이곳 정안면 광정리를 김옥균의 탄생지로 하고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의 일족은 모두 멸문지화 당하고 그 자신도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홍종우(洪鍾宇, 1850~1913)에게 사살되며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김옥균의 시신은 한양으로 옮겨져 대역죄로 다스려져 육시되어 전국으로 조리돌림되었다. 그렇게 육신조차 보존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의 아비 김병태가 천안 집에서 체포되어 10년 옥고를 치르던 중 옥균이 돌아와 육시되면서 그 역시 73살 노구로 교살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충청도 천안 군수(天安郡守) 김병수(金炳洙)가 올린 첩보(牒報)와 성책(成冊)을 보니, 모반 대역 부도 죄인(謀反大逆不道罪人) 김옥균(金玉均)의 아비 김병태(金炳台)는 나이 73세로서 갑신년 11월 21일에 천안군 옥사에 잡아 가두었고, 그 어미와 어린 누이동생은 김병태가 체포될 때 모두 독을 마시고 자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김병태가 현재 천안군 옥사에 갇혀 있다고 하니, 규례대로 본부의 도사를 보내어 지방관과 함께 그곳에서 율문대로 연좌하여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又以義禁府言啓曰, 卽接忠淸道天安郡守金炳洙牒報及成冊, 則謀反大逆不道罪人玉均父炳台年七十三, 甲申十一月二十一日捉囚本郡獄, 其母與少妹, 竝於炳台就捕時, 報[服]毒自裁云矣。 炳台方囚天安郡獄云, 依例發遣府都事, 與地方官眼同, 卽其地依律文緣坐處絞之意, 敢啓。 傳曰, 知道。)
승정원일기 3045책 (탈초본 138책) 고종 31년 4월 15일 신유
도사를 보내 대역 부도 죄인 김옥균의 아비 김병태를 교수형에 처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연좌로 처벌이었다. 이는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선포한 ‘노적(孥籍) 추시 금지’ 원칙에 위배된 처분이다. 고종의 김옥균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얼마나 깊었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군주 고종에게 처참하게 육신이 잘렸던 그이였건만, 부친 역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1989년 2월 22일 공주군(공주시)가 대지 8,475㎡에 생가지를 조성하고 이 추모비를 세웠다. 본래 계획으로는 생가 복원까지 계획되었으나 현재는 그 터만 유지 보존하고 있다. 김옥균이 태어난 이곳은 생가 복원 등 많은 계획이 있었지만 잘 추진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생가를 복원하고 작은 전시관이라도 꾸려진다면 멀리서라도 찾아볼 일이지만 지금의 모습대로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 지나는 길에 잠시 들리는 것은 무리가 없겠다.

1894년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저격으로 사살된 그가 같은 해 개화당 동지였던 금릉위가 친일내각으로 정권을 잡자 그를 신원하였다.
총리대신(總理大臣)과 각 아문(衙門)의 대신(大臣)들이 아뢰기를,
"이 달 16일에 칙령(勅令)을 전후하여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을 해명하여 놓아 보내며 죽은 사람은 벼슬을 회복시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명령을 받고 이전 의금부(義禁府)의 문건을 가져다 상고하면서 공동으로 사실을 조사한 결과 죄명을 취소해야 할 사람과 벼슬을 회복시켜야 할 사람을 갈라서 쭉 기록하여 보고하니 결재하기 바랍니다."
【죄명을 취소할 부류는 홍국영(洪國榮)·권유(權裕)·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조연승(曺演承)·조락승(曺洛承)·신철균(申哲均)·장동근(張東根)·정선교(丁善敎)·홍재학(洪在鶴)·김응룡(金應龍)·오윤근(吳潤根)·김응봉(金應鳳)·채동술(蔡東述)·임철호(任哲鎬)·이휘정(李彙靖)·이원진(李源進)·이회정(李會正)·임응준(任應準)·정현덕(鄭顯德)·조병창(趙秉昌)·조채하(趙采夏)·조우희(趙宇熙)·이재만(李載晩)·조총희(趙寵熙)이고, 벼슬을 회복시킬 부류는 박영교(朴泳敎)·박호양(朴顥陽)·홍진유(洪晉裕)·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이원진(李源進)·이회정(李會正)·임응준(任應準)·정현덕(鄭顯德)·조병창(趙秉昌)·조채하(趙采夏)·조우희(趙宇熙)·이재만(李載晩)이다.】 하니, 윤허하였다.(總理大臣、各衙門大臣奏: "本月十六日勅令, 前後被罪冤枉人, 昭晣放送, 身死者復官事命下矣。 臣等欽遵聖旨, 取考前義禁府文案, 公同閱實, 罪名可合爻周者及應復官者, 分別開錄上奏, 伏候聖裁。" 【罪名爻周秩: 洪國榮、權裕、南鍾三、洪鳳周、曺演承、曺洛承、申哲均、張東根、丁善敎、洪在鶴、金應龍、吳潤根、金應鳳、蔡東述、任哲鎬、李彙靖、李源進、李會正、任應準、鄭顯德、趙秉昌、趙采夏、趙宇熙、李載晩、趙寵熙。 復官爵秩: 朴泳敎、朴顥陽、洪晉裕、洪英植、金玉均、李源進、李會正、任應準、鄭顯德、趙秉昌、趙采憂、趙宇熙、李載晩。】 允之。)
고종실록32권, 고종 31년 12월 27일 기사 4/7 기사 /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총리대신과 각 아문의 대신들이 죄명을 취소할 사람과 벼슬을 회복시켜 주어야 할 사람을 보고하다
이는 갑오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혼군 고종이 민비가 청군을 불러들이자 동시에 출병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하고 친일내각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내각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개혁 바로 갑오개혁을 하였고 이어 을미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청군을 급습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렇게 우리는 일제 식민지로 차근차근 내달리고 있었다. 그와중에 고균과 개화당의 신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신원된 그는 이후 14년만인 경술국치 직전 추증과 시호가 내려졌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고(故)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은 잘못된 일을 바르게 고쳐 구제하려는 계책을 품고 충정(忠貞)한 절개를 지켰으며 처신이 청백하고 경서에 밝았다. 이전에 나라의 시정 방침이 정하여지지 않았을 때에는 초연하게 특립(特立)하여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 기간에 이 대신은 나라의 주춧돌과 기둥이 되어 힘써 유신(維新)을 도모 하였다. 탁월한 견해와 고심은 대개 시국이 점차로 어려워진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미연에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화를 준 것을 후회하지 않아서 충직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하겠는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비통함을 견딜 수 없다. 짐이 지난번에 덕수궁 처분을 받고 원통함을 머금고 억울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정상을 듣고 이미 명백히 해명해 주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시호(諡號)를 내리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 만큼 유사(有司)로 하여금 시장(諡狀)이 올라오기 전에 시호를 의정(議定)하고, 연시(延諡)하는 날에는 시종(侍從)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홍영식(洪英植)은 대각(臺閣)에서 영특한 이름을 날려 일찍이 재상의 물망을 지니었으며 해외에 사신으로 나가서는 매번 나라를 운영할 계책을 품었다. 앞을 내다보는 소견을 확고하게 가지고 장차 일을 전개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뜻밖의 참화를 당하였으니,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슬프고 애석하기 그지없다. 지난 갑오년에 이미 해명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표창하는 은전을 베풀지 못하였으니 특별히 대광보국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규장각 대제학(奎章閣大提學)에 추증(追贈)하라. 시호를 주는 절차는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정하고, 연시하는 날에는 시종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김옥균(金玉均)은 일찍이 나라를 다스릴 포부를 안고 벼슬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해외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계의 대세에 대해 통찰(洞察)하였으며 여러번 사리에 맞는 훌륭한 말을 아뢰어 나라에서 근심을 스스로 맡았다. 갑신년(1884)에 개혁할 것을 결의하고 세상에 더없는 큰 공적을 세우자고 하였는데 그만 일이 실패하여 갑자기 이웃 나라로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겪다가 마침내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정성스러운 일념은 한 번도 나라를 잊은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유신의 선창자이고 문명의 선각자였다.
지난 갑오년에 비록 이미 명백히 해명해주었으나 아직 표창하는 은전을 베풀지 못하였으니 특별히 대광보국숭록 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라. 시호를 주는 절차는 시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정하고, 연시하는 날에는 시종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고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은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뜻이 굳고 기개가 확고하였다. 크게 나아갈 자질로 악한 것을 배척하고 착한 것을 내세우는 기풍을 지니고 여러 번 재정과 부세에 대한 일을 맡아보면서 오랜 폐단을 정리하였으며 변경의 일을 경영하면서 국방 대책을 강구하였으니, 참으로 새 정사의 귀감이고 큰 집을 지탱할 동량(棟樑)이었다. 그런데 그 포부를 펴보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새삼스럽게 돌이켜 생각하여 볼 때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아직도 표창하는 은전을 베풀지 못하였으니 특별히 정1품 보국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도록 하라. 시호를 주는 절차는 시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정하고, 연시하는 날에는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치제하라."
하였다.(二十九日。 詔曰: "故內閣總理大臣金弘集, 懷匡濟之策, 矢忠貞之節, 持身淸白, 濟以經術。 向在國是靡定之時, 超然特立, 不避標榜, 及至甲乙年間, 此大臣屹若砥柱, 力圖維新。 其卓見苦心, 蓋有以灼知時局之漸艱, 而欲救之於未然者也。 奈天未悔禍, 丹忠莫暴, 而碧血先墜。 追憶往事, 不勝愴衋。 朕曩承德壽宮處分, 其含冤負屈之狀, 旣已昭晰, 而尙未有易名之擧。 其令有司, 不待狀議諡, 延諡日遣侍從致祭。 祭文親撰以下矣。" 又詔曰: "故吏曹參判洪英植, 蜚英臺閣, 夙負公輔之望; 肇使外洋, 每懷經國之策。 確有先見, 將施展布, 而忽遭意外之慘禍, 追惟往事, 殊深悼惜。 越在甲午, 雖已昭晰, 而尙未有府襃恤之典, 特贈大匡輔國奎章閣大提學。 易名之節, 不待狀議諡, 延諡日遣侍從致祭。" 又詔曰: "故戶曹參判金玉均, 夙抱經綸, 不屑榮進。 遊歷海外, 洞察宇內大勢, 屢陳昌言, 自任宗國之憂。 及當甲申, 決意改革, 期樹不世之勳業, 乃者事敗倉卒, 漂泊隣境, 備經風霜, 意至殞身。 然其眷眷一念, 未嘗忘國, 實爲維新之首倡, 文明之先覺也。 粤在甲午, 雖已昭晰, 而尙未有襃恤之典, 特贈大匡輔國奎章閣大提學。 易名之節, 不待狀議諡, 延諡日遣侍從致祭。" 又詔曰: "故度支部大臣魚允中, 器識宏深, 志氣堅確。 以萬往之姿, 有激揚之風, 屢典財賦, 整理宿弊, 經略邊界, 講究國防, 實爲新政之蓍龜, 支廈之棟樑也。 未展蘊抱, 遽歸泉塗, 今焉追惟, 曷勝傷衋? 尙未有襃恤之典, 特贈正一品輔國奎章閣大提學。 易名之節, 不待狀議諡, 延諡日遣地方官致祭。")
순종실록4권, 순종 3년 6월 29일 양력 1/1 기사 / 1910년 대한 융희(隆熙) 4년
김홍집, 김옥균, 어윤중 등에게 표창하고 시호를 주도록 하다
고(故)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에게 충헌(忠獻), 증 규장각 대제학(贈奎章閣大提學) 홍영식(洪英植)에게 충민(忠愍), 증 규장각 대제학 김옥균(金玉均)에게 충달(忠達), 증 규장각 대제학 어윤중(魚尹中)에게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였다.(贈諡故內閣總理大臣金弘集, ‘忠獻’, 贈奎章閣大提學洪英植, ‘忠愍’; 贈奎章閣大提學金王均, ‘忠達’; 贈奎童閣大提學魚允中, ‘忠肅’。)
순종실록4권, 순종 3년 6월 30일 양력 3/3 기사 / 1910년 대한 융희(隆熙) 4년
김홍집, 홍영식, 김옥균, 어윤중에게 시호를 주다
대제학으로 추증되고 충달공이된 김옥균은 아직도 그의 평가가 논란인 인물이다. 그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간 시세와 그의 신원으로 볼 때는 친일파의 궤를 한다. 그렇지만 우정국에서 있었던 그날 그전 김옥균은 애국자이자 근대국민국가를 이루려던 지식인이자 선각자였다. 이 부분에서 일반 친일파와 다른 그의 삶이다. 동지였던 금릉위 박영효는 왕실일원이라 극형을 면하고 바로 복권되어 살아남아 나라를 들어 바친 친일의 길을 갔지만 탄탄대로 관로에서 장동김문이라는 가문의 뒷배와 명석함으로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이완용 못지 않은 삶을 살다 그 이상의 친일파 거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고균의 평가가 아직도 분분하다.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정일품 금릉위 박영효 찬, 김옥균 묘비명
그가 믿고 의지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선생은 훌륭했을지언정 그의 조국이 일본제국주의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대전 유성으로 떠난 1박2일의 여정을 마친다.(5.31.)

『매천야록』은 매천 황현)이 쓴 역사서로 1864년 고종이 등극한 해로부터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까지 47년간의 역사를 매천 자신의 견문을 기초로 하여 섬세하게 기록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저자 황현(黃玹, 1855~1910)은 호(號)가 매천(梅泉)으로 세종대에 영의정이었던 황희(黃喜)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병사 황진(黃進),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黃暐)의 후손으로 이후 현달하지 못한 시골 선비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황현은 11세에는 시를 짓고 20세 되던 해(고종 12년)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문장가 이건창과 교우하며 시를 지어 매천 황현의 이름이 알려졌고 1883년(고종 20년) 보거과에 응시하여 초시에 장원으로 뽑혔으나 매천이 시골 사람이라는 것이 이유가 되어 2등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이로인해 당시 민씨척족의 부정부패에 대한 회의와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출사를 포기하고 낙향한다. 이후로 생원會試에 응시하여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또 다시 1890년(고종 27년)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렇게 시골 구례에 산천재에서 『매천집(梅泉集)』,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記略)』 등을 저술하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경술국치의 소식을 접하고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을 식음을 전폐 한 채 괴로워하다가 9월 10일 새벽에 절명 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을 하였다.

김옥균의 마지막에 대한 『매천야록』의 기록이다.

유생 홍종우가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하고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김옥균의 역률을 추가해서 시행하고 종우과를 개설하여 그를 급제시켰다. 홍종우는 경기도 안산 사람이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버티지 못하고 전전하여 고금도에 들어가 살았다. 일본에 들어가 김옥균 등과 교유하면서 항상 틈을 보아 그를 죽여서 나라의 근심을 없애고자 하였으나 김옥균 일당의 무리가 많아서 실천할 수 없었다. 이 해에 김옥균이 청나라로 건너갈 때 홍종우를 데리고 상해에 이르자 홍종우는 그를 살해하고 양칠로 시체를 칠하여 상하지 않게 하여 싣고 돌아왔다. 노량진에서 육시처참하라 명하여 시체를 꿇어 앉혀놓고 처참했다. 유재현의 아들은 그의 배를 째서 간을 씹었으며 이조연의 아들 탁도 또한 가서 보았다. 민영선, 민형식, 조동윤, 한인호 등 갑신정변에 희생된 아들들은 모두 와서 보지 않았다. 중궁 민비는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재상의 혈윤(血胤 : 혈통)들이 중궁의 명사(螟嗣 : 양아들)에도 미치지 못하나”
하였다. 고종은 홍종우를 불러 두터이 위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과장을 설치하고 홍종우를 뽑아서 바로 홍문관 교리를 제수하고 서울에 집 한 채를 내렸다.
(儒生洪鍾宇, 誅金玉均于上海, 東還, 朝廷追施玉均逆律, 擢鍾宇科, 鍾宇京畿安山人也, 家貧落魄, 流寓古今島, 入日本, 與玉均等游, 常欲伺隙殺之, 除國患, 以玉均黨羽甚衆, 不得發, 是年玉均游淸國, 携鍾宇至上海, 鍾宇槍殺之, 以洋漆漆其尸, 得不壞, 載之還, 命戮尸于鷺梁方其跽斬也, 柳在賢子某, 剖腹啖其肝, 李祖淵子倬, 亦往見, 其餘死難諸人之子, 如閔泳璇·亨植·趙東潤·韓麟鎬等皆不往, 中宮聞之歎曰, 宰相血胤, 不及中宮之螟嗣乎, 上召見鍾宇, 慰勞之甚厚, 未幾設科, 擢鍾宇, 即除弘文舘校理, 賜第京師。)
梅泉野錄卷之二 高宗三十一年甲午 高宗 三十一年
四(金玉均 被殺)


5
『중동전기』에서 홍종우가 김옥균을 살해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부재(附載)하였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자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김옥균은 성을 암전(岩田), 이름을 주작(周作)으로 변경하였다. 중국에 가서는 화삼(和三)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양의 각국으로 전전하면서부터는 서양 복장을 입었고 서양말을 하였다. 홍종우는 각국의 말을 잘 구사하여 서양사람으로 변장하기가 용이했다. 독일, 프랑스 등의 나라를 유력하다가 혹시 김옥균과 만나면 거짓 기쁨을 교환했다. 계사(1883)에 김옥균이 대판(오사카)에 이르니 홍종우도 그를 따라서 이르렀다. 갑오(1894) 봄에 중국에 걸 것을 서로 언약하고 2월 21일 상해(上海)에 도착하여 북하남로 동화가에 자리잡은 길조덕삼(吉島德三)의 객저에 여장을 풀었다. 김옥균은 일본인 하인 북원연차랑(北原延次郎)을 데리고 중국인 오정헌(吳靜軒)과 함께 2층에서 동거했고 홍종우는 다른 방에 들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그가 자기를 해치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22일 새벽 홍종우가 서양 돈 5천원권을 김옥균에게 보이며 소동문(小東門) 천풍전장(天豊錢莊)에서 교부한 뒤에 함께 무역을 하자고 말을 건넸다. 조금 있다가 돌아와서 고하되 “천풍주인이 출타하였는데 유서 경각에(오후 6시 정각)에 곧 돌아온다고 하니 김옥균은 머리를 끄덕 끄덕했다. 신시 초(오후 4시쯤)에 조선관복을 갈아입고 김옥균이 들어있는 방으로 갔다. 김옥균은 그때 서쪽 창구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홍종우는 일본 하인 북원연차랑을 내보내고 갑자기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처음 것은 뺨 오른쪽에 맞았고 선혈이 뿜어 올라왔으며 통증을 느껴 발광을 하였다. 홍종우는 다시 창탄으로 갈기니 가슴 왼편에서 비껴 오른쪽을 뚫어서 피부의 막이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창탄은 왼편 어깻죽지의 뒤편을 맞혔다. 길도덕삼 등 모든 사람들은 누각 밑에 있었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려 문밖에 있는 사람들이 화폭을 터뜨리나 생각하였다. 3층 누상에서 묵는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깜작 놀라서 모두 내려와서 보니 김옥균은 창탄을 맞은 뒤에 바로 뛰어 동쪽 끝 5호실 밖에서 쓰러져 뒹굴다가 죽었다. 길도덕삼은 일본영사에게 알렸으나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은 서로 원수지간이라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청나라 상해령 황승훤(上海令黃承暄)이 일본, 영국, 미국 관원을 대동하고 와서 심문하니 홍종우의 생김새가 체격이 크고 훌륭하며 의복 또한 유아(儒雅)하며 언사가 깐깐한데 큰 말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놈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니 이제 나라를 위해 국적을 죽였으니 죽어도 또한 후련하다“하였다. 또한 나라에서 이러한 명을 받았다고 하니 청국관리가 조선에 전보를 쳐서 돌아온 회신은 대략 이러했다. ‘김옥균은 조선의 반역 신하이며 홍종우는 조선 관원이니 이 사건은 조선으로 돌려보내 임금의 재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26일 황승헌은 홍종우를 호위하여 현서(縣署)에 이르러 다시 군문의 용감한 군인 4명을 뽑아서 홍종우를 호위하여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일본 하인 북원연차랑은 처음에 김옥균의 시체를 싣고 일본으로 가려하였으나 청국 관원이 못하게 하여 (2)7일 북원연차랑은 25일 자기 나라로 싣고 가려 호남회관(湖南會館)에 묵었는데 홍종우가 마침내 선척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거리에 시체를 달아놓고 소금물로h 절였다고 한다. 또한 이르되 일본사람들은 김옥균이 참사한 소실을 듣고 곧 그의 떨어진 머리털로 장사지냈다고 하며 고관 향신 및 상하의원의 인원들이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모두 즐겨 관을 잡았다고 한다. 또한 김옥균을 유식한 소식이 전해지자 각 신문들은 봉기할 것을 논의했고 치욕을 씻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홍종우가 조선에 돌아온 이후 만 리 밖에서 있었던 일이라 들리는 소리가 서로 달라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중동전기』에 실린 내용은 청국 사람들이 목격한 것을 듣고 전한 것이니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잘라서 기록했다.
(五
按中東戰紀, 附載鍾宇誅玉均事曰, 金玉均甲申(高宗21年)構逆事敗, 與朴泳孝等挾貲逃入日本,玉均變姓岩田名周作, 及至中國, 又變名和三, 轉徙泰西各國, 服西服, 言西言, 洪鍾宇者, 能操各國方言, 易作泰西裝, 游歷德·法等國, 或時與金相値, 佯爲交歡, 癸巳(高宗二十年)金回至大坂, 洪隨之而至, 甲午(高宗三十一年)春, 相約游中國, 二月二十一日抵上海, 僑寓北河南路東和吉島德三客邸, 金携倭僕北原延次郞, 偕淸人吳靜軒, 同居二層樓, 洪則別居他室, 金固不疑其圖己也,
廿二晨, 洪持洋銀五千圓之券示金, 以小東門天豊錢莊照付後, 共圖貿易爲言, 少焉, 洪回告曰, 天豊主人出他, 須酉正遄回, 金頷之, 申初換穿朝鮮官服, 至金房, 金方晝眠西窓口藤榻, 洪揮令北原出外, 突出手槍轟擊, 初中其左頰, 彈由頰斜穿而上, 直達頷門之右, 鮮血噴薄, 痛極狂嘶, 洪復擊以鎗彈, 由胸之左旁入橫穿過右, 未透皮膜, 第三鎗彈中左肩胛稍後, 吉島諸人方在樓下, 驀聞有聲甚厲, 猶疑門外人放花爆, 三層樓上寓客聽之較切, 群下察看, 則金取槍後正奔至東首第五間房外, 倒地宛轉而斃, 吉島禀報倭領事, 倭以韓人相讐, 不願與聞, 淸上海令黃承喧帶同倭·英·美各官審問, 洪相貌魁梧衣服儒雅, 言詞侃侃, 大言大逆不道之人, 人人得以誅之, 今得爲國討賊, 死亦甘心, 又稱奉國之命, 於是淸官轉電朝鮮, 回電大略, 以金玉均係朝鮮反臣, 洪鍾宇係官員, 此案理合解歸本國定奪, 二六日黃令護洪至縣署, 復差軍門勇丁四名護洪回國, 北原初欲載金尸往日本, 淸官令停, 七日北原自以廿五日東返尸棺, 留寄湖南會舘, 洪竟附載回國, 懸街漬鹽云云, 又云倭人聞玉均慘死, 即營葬其遺髮, 朝貴鄕紳及上下議院人員不下數千衆, 皆甘心爲之執紼, 及聞戮尸之報, 各新聞訾議蜂起, 益堅雪恥之心云云, 鍾宇東還以後, 以事在萬里之外, 傳聞互異未可詳也, 及据中東戰紀所載, 則係淸人所目擊保無詿誤, 故節錄于此。
梅泉野錄卷之二 高宗三十一年甲午 高宗 三十一年
四(中東戰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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