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수원 연등회

달이선생 2026. 5. 24. 09:02

 

 

〈무진〉 특별히 흥왕사(興王寺)에서 5일 밤낮을 연등대회(燃燈大會)를 열었다. 칙서를 내려 모든 관사 및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개성부(開城府), 광주(廣州)·수주(水州)·양주(楊州)·동주(東州)·수주(樹州) 등 5개 주(州), 강화현(江華縣)·장단현(長湍縣) 등 2개 현(縣)에게 대궐 뜰에서 흥왕사 문까지 채붕(綵棚)을 얽되 연달아 서로 잇닿게 하고, 왕의 수레가 지나는 길 좌우에는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를 만들게 하니 불빛이 낮과 같았다. 이날에 왕이 의장을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行香)하며 재물과 의복을 시납(施納)하니, 불교 행사의 성대함이 예로부터 일찍이 없었다.

『고려사』 권8 세가(世家) 문종(文宗) 21년 1월 흥왕사에서 연등회를 열다

 

[오늘] 불기 2570년 부처님 오신 날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 ‘넓고 커서 끝이 없는 자비’)하신 부처님은 요즘 말로 금수저였다. 샤카족으로 카필라 왕국에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목(木)수저이다.(흙수저로 표현하지만 바른 표현이 아니라 생각) 수저는 사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조차 갖기 어려운 것이었다.(무[無]수저) 소설 『남부군』에는 빨치산의 필수품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숟가락이었다. 그래서 산중에서 빨치산의 당원증으로 통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숟가락은 특별하다.

귀하신 부처님이 세상에 오셔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감사하고 축원하는 일, 그 가장 대중적인 것이 연등회(燃燈會)이다. 이러한 연등회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습과 같이 행해진 것을 묘사한 최초의 기록이 위의 고려 문종 때 일이다.

 

“불교 행사의 성대함이 예로부터 일찍이 없었다.”

 

라고 할 정도로 연등회가 성대하고 화려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마애석불이다. 하나는 '백제의 미소'로 불린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이고 또 아래는 시흥소래산마애보살입상이다. 화려한 경주 석굴암 부처님도 있지만 친근한 미소로 반겨준 삼존불과 산허리를 돌아 빛처럼 다가왔던 소래산 보살입상 잊을 수가 없다. 한때 '맨날 절로만 소풍 간다'라고 푸념도 했지만 말이다.

 

수원에서는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그 전야제의 행사로 전전주 토요일 화성행궁 광장에서 연등회를 개최하고 있다. 연등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등행렬은 광장에서 출발하여 팔달문(남문)-종로-장안문(북문)-행궁광장에 이르는 수원시 사찰들이 모두 나와 기념하는 큰 행사이다. 연등회 즈음 기독교에서도 수원지역 연합으로 사순절 행사(행렬)를 가진다. 이처럼 불교의 봉축식(점등), 성탄절의 트리 점등식 등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경쟁이나 하듯 시민을 상대로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서로가 나서 열심히다.

이른 더위로 한참 덥다가 모처럼 선선한 봄날 저녁 두 아해와 길을 나섰다.

2026.5.9.

봉축탑

봉축탑은 연등회를 알리는 상징이다. 연등회에 앞서 미리 화성행궁광장에 조성해 연등회와 부처님오신날까지 불을 밝힌다. 기독교의 트리와 같은 상징물이다. 해마다 봉축탑은 불교의 대표 유산인 석가의 각종 탑을 조성한다. 올해는 석가탑이 모셔졌다. 우리나라 탑이 많지만 균형과 조형미, 안정성에서는 단연 으뜸이 석가탑이다. 단순하지만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한국미를 대표한다. 일반적인 탑은 부처님을 상징한다. 그래서 탑에는 진신사리를 모신다. 이러한 불보를 모신 사찰이 불보사찰이다.

염불(간성 건봉사)을 포함해 사불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불보(진신) 통도사, 법보(경전) 해인사, 승보(고승 국사) 송광사를 들어 삼보사찰이 일반적이다.

연등회는 등(燈)을 밝히는 것이다. 연등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으로 등을 밝히는 것은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

 

을 의미한다.

부처님이 영취산에 계실 때,

밤을 밝힌 다른 등들은 다 꺼지고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지극한 서원과 정성으로 밝힌 등불만이 끝까지 밝게 빛나고 있었다.(貧者一燈)

이것을 본 부처님께서

 

‘이 여인은 등불 공양의 공덕으로 성불할 것이다’

『현우경』 ‘빈녀난타품’

라고 하여 이로부터 등공양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따라서 연등은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불덕(佛德)을 찬양하고, 대자대비한 부처에게 귀의하려는 불자의 정성이다.

이러한 ‘연등회’가 처음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 하대 경문왕 때 기록이다.

 

〔6년(866) 정월〕 15일에는 황룡사(皇龍寺)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구경하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경문왕(景文王) 황룡사 연등회에 참석하다

지금은 신라 중대 김대성(경덕왕대 이찬 중시 역임)이 건립한 불국사가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로 유명하지만 현재 터만 남아있는 황룡사가 신라를 대표하는 국찰이었음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 왕이 궁궐을 짓다 황룡을 보고 절로 지어 이름한 신라왕실사찰로 육중한 장륙존상을 모신사찰이었다. 따라서 황룡사(장륙상)는 신라 증흥 대조 진흥왕의 상징이었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

연등회라고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이러한 연등회가 551년(진흥왕 12)에 팔관회(八關會)와 더불어 국가적인 행사로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에 이르러 혜량법사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軍禮)로써 절을 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지난날 유학할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뜻밖에도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혜량법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고구려〕는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원하건대 그대의 나라[貴蜮]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에 거칠부와 함께 말을 타고 〔신라로〕 돌아와 왕을 뵙게 하니, 〔왕이〕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法)을 베풀었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거칠부(居柒夫) 혜량법사가 신라로 망명하다

연등회는 불교행사이다. 지금은 석가탄신일에 앞서 이를 경축하는 행사로 이어오지만 실은 정월 대보름에 등불을 밝혀 부처에게 복을 비는 불교행사이다. 따라서 연등을 밝히는 것은 부처 앞에 등불을 밝혀서 마음을 밝고 맑게 하여 부처의 덕을 찬양하고 부처에게 귀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등불을 밝히는 것을 연등(燃燈), 연등을 바라보는 것은 ‘간등(看燈)’ 또는 ‘관등(觀燈)’이다. 따라서 연등행사는 연등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등을 밝히고 보는 것도 중요한 행사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지금도 그 화려함에 준비도 어렵고 돈이 많이 든다. 연등회를 개최하는 것 자체가 황제국으로서 중요한 의례였으나 행사 하나에 들어갈 국가 재화와 공력이 너무나 과하다 당연히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국가 의례로 이어지지 못했다. 등 하나 밤에도 못 밝히는 집들이 수두룩 백백인데 한날한시에 이걸 태운다는 것은 성리학자들인 선비들의 머리로는 절대 불가한 것이다.

신라에서 고려까지의 불교의 위세와 불교도의 신앙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신라에 이어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은

 

계묘〉 26년(943) 여름 4월 왕이 내전(內殿)에 나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친히 「훈요(訓要)」를 내렸는데 〈여기서〉 이르기를, (중략)

여섯째, 내가 지극하게 바라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 있으니,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까닭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 및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까닭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는 것을 결단코 마땅히 금지하라. 나도 처음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연등회‧팔관회를 하는 날짜가 국가의 기일[國忌]을 범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겠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이대로 시행하라.

『고려사』 권2 세가(世家) 태조(太祖) 26년 4월 왕이 훈요10조를 내리다

이처럼 훈요하여 연등회를 고랴의 국가의례로 후대 전승을 못 박았다.

이러한 연등회가 정월 대보름에 거행된 것은 그날이 신라의 세시풍속에서 명절의 하나였기 때문인데, 고려 시대에는 성종 때 연등회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신라 때처럼 정월 대보름에 연등 행사를 개최하였고, 현종 때 복설된 후로는 2월 15일에 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이어왔다.

조선에서는 국가의례로 폐지(1392년[태조 1] 8월 5일 도당에서 팔관회와 더불어 처음 폐지 논의 후 세조 때 원각사 연등회 기록[세조13년 4월 8일]이 보이나 이는 탑을 세우고 낙성한 일시적인 행사로 그침) 후 민간에서는 오늘날처럼 부처님 오신 날인 4월 초8일을 연등회로 가졌다. 사월초파일 연등회를 연 기록은 고려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 환관)이 4월 8일에 점등하였다 사실이 가장 앞선 사실이고 이후 공민왕이 연등회를 사월초파일에 열었다.

 

4월 8일의 연등회와 7월 보름의 우란분(盂蘭盆)과 12월 8일의 욕불(浴佛 불상을 물로 씻는 관불(灌佛)) 때에는 다투어 다과와 떡 같은 것을 시주하여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을 대접한다(如四月八日燃燈七月望日盂蘭盆臘月八日浴佛。爭施茶果餠物。供佛而邀僧)

『대동야승』, 『용재총화』 제8권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용재 성현의 수필집)

이처럼 조선시대 세시풍속으로 사월초파일에 호기(呼旗)놀이와 관등(觀燈)놀이로 이어지던 연등회는 해방 후 1955년 처음 서울 조계사 부근에서 제등행렬을 한 것이 시작이 되었다. 이후 1975년 사월 초8일이 국가 공휴일로 제정되고 이어 1976년부터는 여의도광장에서 조계사(종로)까지 이르는 연등행렬을 하였다.

그리고 1996년부터 동대문운동장에서 조계사에 이르는 연등행렬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그 행사 기간도 사월초파일 전주 이틀에 걸쳐 전통문화행사를 곁들여 축제로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수원과 같이 지방에서는 그 전 주에 행사를 하고 서울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1,200여 년 동안 이어진 연등회는 무형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4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0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등재 이유는 자발적인 공동체의 가치와 개개인의 창의성이 담긴 세대전승,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배려·평등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가무형유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연등회(http://www.llf.or.kr/)

날아라 슈퍼보드(서울 종로 보신각 2015)

서울의 연등회는 그 규모나 참여자, 구경꾼 등 엄청난 인파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또한 부산의 연등회, 진주 유등이 유명한 동네들의 화려한 연등회가 곳곳에 많아 수원의 연등회가 비교가 되는데 이들 행사와 더불어 수원도 화성과 행궁, 그리고 수원 시내를 서울 종로거리를 걷는 서울 연등회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더욱이 평상시 개방이 되지 않는 팔달문(남문)이 개방되어 그곳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수원 연등회 만의 큰 즐거움이다.

 

조선 후기 조선 성곽의 걸작 수원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이다.

사통팔달을 의미해서 팔달문이라고 하고 수려한 화성에 우쭐해진 정조가 중국 북경 만리장성의 최고 걸작인 이 팔달준령과 같다고 해서 팔달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오는 사절들이 방문하는 코스였고 지금도 만리장성을 찾는 관광객 대부분이 가는 대표 명소이다.

보통 성곽의 정문은 남문인데 수원 화성은 북쪽인 한양으로 열린 북문 장안문이 정문이다. 정문 장안문은 한국전쟁 당시 엄청 파괴되어 복원된 것이지만 북쪽 성곽에 연결되어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팔달문은 현재 화성 성곽과 도로로 단절되어 로타리 가운데 섬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팔달문이 여러차례 보수 공사가 있었다. 때문에 수원시는 팔달문을 알리는 차원에서 곁에 작은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홍보('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를 하고 있다. 이미 공사는 완료되었지만 홍보 공간이 남문 버스 환승 공간에 위치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최적의 홍보 공간이다.

앞으로 팔달문도 남쪽 성곽이 제대로 복원되어 연결되고 남문의 명소였던 남공심돈까지 온전히 복원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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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팔달문

성이면서 치雉가없으면 이것은 쓸모 없는 성이요, 문에 옹성甕城이 없으면 또한 쓸모 없는 성이니, 치와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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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천장 4조룡 용문양
팔달문 현판. 흰색 바탕의 팔달문 현판. 최근 고증하여 제대로 달은 것이다. ​
 

팔달문 현판은 당대 명필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다. 장안문, 방화수류정, 신풍루, 봉수당, 낙남헌의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 팔달문 현판은 화성과 행궁에 있는 현판 중 가장 크다(105.9*319.7).

호는 송하(松下), 조문수(曺文秀)의 5대손이다. 오체를 잘 썼고, 특히 초서와 예서로 필명을 떨쳤다. 부친 조명교도 당대 명필이다. 장인은 백하 윤순이고, 사위는 자하 신위이다.

조윤형의 해서 대자는 주로 안진경과 유공권체를 익혔고, 해서 소자는 진(晉)의 서법을, 행서와 초서는 윤순과 이광사를 본받아 진·당과 송·명의 서법을 잘하였고, 전서는 이양빙을 익히는 등 오체를 모두 잘하였다.

북경 자양문(紫陽門)의 현판도 그의 글씨로 청에서 필명을 떨쳤다.

정조의 서체반정에 적극 참여하여 총애를 받았다. 정조에게

“군왕의 글씨는 바쁜 기운을 띠지 말고 바른 획이 드러나도록 노력하며 신중히 하여 근엄한 기상을 돋우시오.”

라고 간하자 정조가 좋아하여 필간(筆諫)하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당시의 서가들이 이왕(二王)의 진(晉) 서법만을 배우는 세태를 비판한 후 당의 안진경이 진의 왕희지 법첩을 공부한 뒤에 쉽게 공교로워졌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안진경과 유공권을 마음 깊이 연구하여야 서도가 비로소 크게 신장된다고 하였다. 이는 정조가 안진경과 유공권의 서체를 좋아한 것과 서로 부합되었다. 이에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조윤형을 매우 총애하고 후원하였으며, 궁중의 각종 행사에 서사관으로 임명하여 궁궐의 금석문과 편액을 쓰도록 하는 등 정조대 진경문화 발전에 일조하였다.

유봉학, 「정조시대의 명필과 명비」, 『정조시대의 명필』, 한신대학교박물관, 2002, 92∼101쪽.

 

팔달문 축성자 각석

감동(監董, 공사책임)전(前)목사 김낙순

전목사 이방운

패장가선(嘉善) 이도문

한상희

임준창

전오위장 신속

석수(石手) 가선 김상득

등 85명

 
팔달문 옹성 안
옹성 대문 천장 오조룡 용문양 . 우리나라 용문양은 중국에 사대하는 제후국으로 4조룡이 일반적인데 옹성에 오조룡이다. 당대가 아닌 후대 작품으로 생각된다.
팔달문 옹성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정수인 수원화성의 탄생은 제22대 정조(1752탄생 재위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恨)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는 수원을 상업 활동이 활발한 경제 신도시로의 건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화성을 축조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영조 즉위부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붕당 서인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다. 영조 즉위 이래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탕평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강력한 기득권을 누리던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 이성(李祘정조의 이름인 祘이 한자독음법에 따라 '산'으로 널리 읽히어 그간 정조의 이름을 '산'으로 불렀으나 정조가 지시하여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따르면 정조가 자신의 이름을 훈민정음으로 '셩'이라고 쓰고 있어 당시 중세국어의 '셩'발음이 지금 '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산'이 아닌 '성'으로 부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밖에 당대 기록들 역시 '산'이 아닌 '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조의 이름은 한자는 '祘'이 같으나 정조이름으로 부를 땐 '성'으로 불러야 한다.)의 즉위를 강력히 막고자 하였다.

이는 연산군 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 이후 많은 신료들이 죽었던 갑자사화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노론 대신들의 강력한 의지였고 그에 따라 세손 이성의 즉위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뿐만 아니라 세손 시절 및 즉위 초까지도 정조는 끊임없이 노론 대신의 견제와 암살 위협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정사를 돌보았다.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즉위부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寡人思悼世子之子也)”

라고 천명하며 아버지에 대한 복권(장헌세자로 추존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과 노론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통한 왕권강화를 천명하며 개혁에 착수 하였고 그 개혁의 상징적 의미와 효과는 바로 ‘화성’으로 집약되었다.

화성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수원의 읍치는 원래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화산(花山)에 있었는데, 정조가 현륭원(융건릉)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읍치를 옮기면서 새로 지은 성의 이름을 읍치가 있던 화산에서 따와 '화성(華城)'으로 하고, 수원도호부도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하였다. 따라서 화산에는 아직도 수원 고읍성(水原古邑城)이라는 흔적이 남아있다. 즉, 화성은 정조가 현륭원이 있는 화산의 '화(花)'자와 통용될 수 있는 '화(華)'를 써서 화성이라고 한 것으로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고사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에서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화(華)라는 지방의 제후가 요(堯) 임금에게 부귀, 장수, 다산을 기원했다는 의미로 정조는 이를 ‘백성은 왕실의 안녕을, 임금은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뜻으로 이어받아 화성이란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여하튼 화성의 공식 명칭은 '화성'이지만 수원에 있는 성이므로 조선 시대부터 일명 '수원성'으로도 불렸는데, 1935년 조선총독부가 고시 제318호로 화성을 '고적 제14호 수원성곽'으로 등록했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문화재 분류 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화성의 공식 명칭은 그대로 '수원성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화성 이름을 되찾아주자는 운동(수원시장 심재덕이 화성 복원과 행궁 복원에 열심히 하며, 한신대 유봉학 교수 등의 학계 의견을 적극 수용한 결과였다.)이 일어나 마침내 1996년에 문화체육부 고시 제1996-40호로 '화성'이라는 공식 명칭을 찾았다. 특히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따라 지역명과 동시에 붙은 ‘수원 화성’을 공식화 하였다.

 
 
 
 
 
 
 

화성 봉돈 팔달문 남수문 방화수류정

수원 화성(水原 華城) 봉돈(烽墩) 수원 화성 팔달문 동편 지동시장은 순대로 유명하다. 특별히 싸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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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팔달문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