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수원 한하운 시비

달이선생 2026. 4. 25. 10:28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故鄕) 그리워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放浪)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ㄹ 닐리리.

 

「보리피리」 한하운(韓何雲)

* 인환 : 사람들이 살고 북적대는 곳. 기산하(幾山河) : 많은 산과 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아름다운 기념물이 있다면 시인의 시비(詩碑)가 아닐까. 답사를 다니다 보면 도처의 수많은 비와 탑을 본다. 우뚝 솟은 탑은 그 자체로 상징성이 장엄하다. 공경대부가의 신도비는 엄숙하다. 그런 비도 우쭐한 비도 산골 묘 아래에 있다.

그러나 시비는 우리 가까이 서, 시인을 드러내고 시를 통해 품격을 담은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다.’

 

그래서 저 산위 당상관의 지체 높은 위인에 신도비보다 단촐하나 곁에 선 시비가 특별하다. 그런 시비 중 수원시 세류동 수원천 아래 ‘한하운 시비’가 있다. 대표작 보리피리를 새긴 시인 한하운의 시비이다.

이 비가 선 것은 다름 아닌 한하운 시인이 이곳에 잠시 머물러 살았기 때문이다.

팔달산과 수원천
수원천변 세류동 전경

해방 후 지주 집안으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고 동생과 서점을 운영하다 1946년 3월, 함흥학생데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수감됐다가 풀려난 뒤 29세(1948년) 때 월남했다. 남쪽으로 내려와 곳곳을 떠돌며 밤에는 쓰레기통 옆에서 자고 낮에는 깡통을 든 채 빌어먹는 걸인으로 연명하다 구걸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서울 명동으로 왔다.

명동의 문인들이 자주 다니던 다방에서 자신이 쓴 시 '파랑새' '비오는 길' '개구리' 등을 팔았다. 그 인연으로 당대 유명한 시인들을 만났다. 몇몇 시인의 도움으로 1949년 4월 문학잡지 '신천지(新天地)'에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를 포함해 시 13편이 실렸다. 시인 이병주의 도움으로 한 달 뒤 '한하운시초(정음사. 1949)'를 출간했다. 잡지에 실린 시에 11편의 시를 보탰다.

그가 시인으로 전국에 알려지자, 같은 병을 앓던 환자들이 '구걸하지 말고 같이 모여 살자'고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1949년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수원천 근처 나환자 정착촌에서 8개월간 지냈다. 나병 환자들에 대한 차디찬 시선이 가득하던 시절, 정부는 경기도와 강원대 일대에 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하기 위해 인천 부평에 새로운 나환자 수용소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으로 한하운과 교섭했다. 한하운은 수원천변에 함께 거주하던 나환자 가족 70여명과 함께 1950년 새 정착지인 '부평'으로 옮겼다.

'한하운'이 살았던 곳이라 알려지는 게 싫다" 김영숙, 오마이뉴스2016. 10. 28. 15:21 : 『시사인천』

매교역

시인이 잠시 살았던 수원천은 지금의 수원시 세류동이다. 당시는 수원시로 승격(1949.8.14. 부 승격, 8.15. 시로 개칭)하였으나 시보다는 시골 읍내 정도의 모습이었다. 더욱이 팔달산과 그 아래 수원읍내 팔달문(화성) 밖 이곳은 수원의 변두리였다.

지금은 한강변, 천변이 조망권과 수려한 환경으로 사람들이 선호하는 값비싼 주거지였으나 사실 옛날부터 천변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다. 비가 오면 범람하는 곳이기 때문에 제대로 집을 짓지 않고 임시로 거주하면 할 수 있지 사시사철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사람이 산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이 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 청계천 판자촌이 유명하듯, 수원천변도 가난한 이들의 삶터였다. 특히 이곳은 읍내인 화성안팎의 남문이 가깝고, 지척으로 수원역이 있었다. 이런 곳에 나환자 정착촌이 들어서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상유천 표석.

지지대 고개에서 현륭원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원행이 이어지는 주요 곳에 장승과 표석을 세웠다. 이곳 세류동은 상유천이라고 하여 그 표석을 세운곳이다. 하유천은 지금의 전철 1호선 세류역이다.

과거 상유천, 세류동 수원천변에 한하운이 잠시 머물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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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계동 정조마을 화소표석

화성시 황계동 정조마을 화소표석 화성시 황계동 황계1통은 점말로 최근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정조마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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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교역에서 세류동 방향(정조로)으로 백여미터 가면 정조사거리가 나온다. 건너편 사거리 왼쪽에 세류동(세류[細柳]’는 ‘세[細里]’의 ‘세[細]’와 ‘류천[柳川]’의 ‘류[柳]’이고 곧 버드나무이다. 수원천을 버드나무 잎새를 닮아서 유천이라고 한다)을 나타내는 버드내 장승이 섰다. 장승 아래 방향목에 걸린 ‘한하운 시비—>’ 방향(권선로)으로 건너편 주유소로 도로를 건너서 조금 가면 수원천을 만난다. 유천2교 앞에서 사잇계단을 내려서면 그 아래 시비가 있다.

세류3동 주민센터 벽에 그려진 동 상징.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동구 밖에 서서....

 

장승의 직절 조각(直截彫刻)이

 

무엇 때문에 눈알을 부라리나

무엇 때문에 이빨을 내세우나

 

이 형(形)의 의미는

주력(呪力)인가,

 

 

이 위대한 미분화(未分化)는

조상들의 지성과 행동이런가.

 

원시가 현대문명을 넘어선

오늘의 쉬르 레알리즘.

 

시원의 미(美)

원시의 생명력.

 

이 괴위(魁偉)한 조형 언어(遭形言語)는

 

그것은 노(怒),

그것은 공(恐),

그것은 이(異),

그것은 기(奇),

그것은 혁(혁),

그것은 경(驚),

그것은 탄(嘆),

그것은 허(虛),

그것은 포(布),

그것은 의(疑),

그것은 응(凝),

그것은 보(보),

그것은 살(殺),

그것은 사(死),

 

 

그리고 원(願),

그리고 기(祈),

그리고 도(禱),

............

.............

 

 

억울린 백성들이

생존의

길흉화복의

액막이 살(煞)풀이를,

 

하늘과 땅을 믿고

하늘과 땅만을 믿고 살 수 없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에

매달려

 

마음의 수호신이라 믿던

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도

이제 동구(洞口)에서 볼 수 없는

 

원시의 알리바이.

 

오늘의 오후예는

오늘은 오늘

오늘을 살아가는 오늘만의 오늘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조형 언어(造形言語)가

눈망울, 가슴으로 불이 당겨져

 

그것은 노(怒),

그것은 공(恐),

그것은 이(異),

그것은 기(奇),

그것은 혁(혁),

그것은 경(驚),

그것은 탄(嘆),

그것은 허(虛),

그것은 포(布),

그것은 의(疑),

그것은 응(凝),

그것은 보(보),

그것은 살(殺),

그것은 사(死),

 

 

그리고 원(願),

그리고 기(祈),

그리고 도(禱),

.................

..................

한하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 , 『한국문학』 1977년 6월호.

정조는 아버지 묘가 있는 화산 현륭원에 이르기까지 5리마다 장승을 세웠다. 예전 수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장승이 많았다. 수원에 잠시 머물렀던 한하운이 장승을 보고 쓴 시일지는 모르나 그가 살았던 동리의 상징이었던 장승에 대한 시다. 사실 장승은 우리네 전국 방방곡곡 마을 동구밖 어디에나 있었다.

유천2교 아래 수원천에 시비가 있다.
한하운 시비 '보리피리'

 

시비 있는 수원천 건너 구 경기도청에 이르는 고개(세곡사거리, 태장면고개)는 현재 힐스테이트푸르지오수원아파트가 위치한 곳으로 1960년대까지도 너른 보리밭이었다. 보리를 꺽어 불던 시인이 옮겨 간 부평 일대도 지천이 보리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50년대 이곳 보리밭 5천 평을 사서 수원 화교 자녀들을 위한 중등학교를 건립하려는 일이 있었다. 교동 수원중화교회를 설립(1955.7.22.)한 마수신 집사가 나선 것이다. 마수신은 본명은 세광으로 그는 교동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등, 성공한 부자였다. 그는 수원지역 화교로서 지역유지였다. 그 맞은편에는 1953년 정식으로 설립된 수원화교중정소학교가 위치한다.

 

보리피리

 

한하운(韓何雲)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故鄕) 그리워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放浪)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ㄹ 닐리리.

 

 

* 인환 : 사람들이 살고 북적대는 곳.

* 기산하(幾山河) : 많은 산과 들

 

1955년 간행된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의 표제시이다. 1953년 서울신문, 서울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던 오소백에게 신문사 안에서 즉석으로 써 준 즉흥시다.

자서(自序)에

 

“천형(天刑)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

 

나병(癩病)에 걸려 떠돌아 다니던 한하운이 보리피리를 불며 인간적 고독, 향수, 천형(天刑)과도 같은 괴로움을 나타낸다.

평론가 김윤식(金允植)은,

 

“성한 사람이 되려는 희원이 성한 사람에의 적의를 동반하지 않고, 그 단계를 넘어서서 멀리 거리를 두고 바라다 보는 상태에 이 시는 도달되어 있다. 또한 이 시는 한국적 서정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보면 한하운의 서정적 가락은 한국시사에 길이 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한하운의 문학과 생애’-새빛 75년 3월호

 

한하운의 시 중에서도 「보리피리」는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이다. 1957년 작곡가 조념(趙念)이 중앙방송라디오(현재 KBS)의 청탁으로 <금주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서 곡을 발표하여 대단한 호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시가 [서울신문]에 발표됨으로써 한하운은 '보리피리의 시인'이라고 불렸다. 그의 제2시집 『보리피리』의 표제(表題)가 되었다.

 

시집 『보리피리』

B6판. 90면. 작자의 두 번째 시집, 1955년 인간사(人間社)에서 간행되었으며, 책꾸밈은 박거영(朴巨影)이 맡았다. 시인 자신의 서문과 박거영의 서문이 있고, 이어서 총 17편의 작품이 3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1949년에 첫 번째 시집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가 나오고 6년 만에 발간되었다. 한하운은 6년간 구라사업(救癩事業: 문둥병 환자를 돕는 일)에 몰두하며 시를 쓰지 않다가 박거영의 권고에 못 이겨 불과 2개월 동안에 급히 쓴 것이다.

 

‘자서(自序)’,

 

“청운의 뜻이 어허, 천형(天刑)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 이 윤회 속에서 나는 노래를 불렀을 뿐 시를 쓰지는 않았다.

허나, 이번에 내가 시를 다시 쓰게 된 동기는 오로지 시인 박거영 선생님의 부단한 격려의 결정(結晶)이라 하겠다. 동면 6년 후 이번 처음 불과 2개월 동안의 분망 중에서 급작히 지난 방랑여정(放浪旅情)을 엮은 회상시가 바로 이 시집이라 하겠다.”

 

 

버드나무 잎새. 풀피리는 다양한 잎새들이 사용된다. 보리잎새처럼.
버드나무 줄기로 만든 피리를 본뜬 대나무 피리.
하유천 방향
유천1 교

 

나병은 문둥병이라고 하여 이들에 대해서 문둥이라고 멸시한다. 한하운은 문둥이다. 문둥병은 사람의 역사와 함께한 가장 사람들이 꺼린 병이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나병이 전염성이 낮은 병임이 밝혀졌지만 오랜 인간의 삶에서 문둥병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었다. 몸이 썩어 손가락, 발가락, 더욱이 코, 귀가 떨어져 나가는 이 병은 보기에도 최고의 형벌 중에 형벌, 천형(天刑)이다.

그래서 오랜 기록인 구약성서 욥기의 욥의 시험당한 병이 문둥병이었고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은 소록도라는 나환자 격리시설이 사회적으로 유명하다.

드라마 허준에서도 묘사했듯, 전근대 나환자들은 멸시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이들이 병을 퍼뜨린다는 무서움도 있었지만 어린아이를 잡아 먹어야 문둥병을 고친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과 혐오로 문둥이를 쳐 죽여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되지 않는 차별된 대상이었다.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제자로 상화의 과거가 허준의 스승(삼적대사 : 정욱)이 문둥이 부부에게 아들을 잃고, 그들을 무참히 죽였는데,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던 문둥이 자식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그 아이를 거둔 이야기가 알려진 줄거리다.

한하운

본명은 '태영', 본관은 청주이다. 1920년 3월 10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한종규(韓鍾奎, 1900 ~ ?)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이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부호의 외동딸로 17세에 다섯 살이나 어린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는 양반가문으로 고조부 한국보(韓國輔, 1822 ~ 1900)가 1860년(철종 11)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1894년(고종 31) 사헌부 집의(執義, 종3품), 조부 한전채(韓甸埰, 1884 ~ 1925)는 순릉 참봉을 지냈다.

7세에 함흥으로 이사해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우등생으로 음악과 미술에 뛰어났다. 13세에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수의축산과에 입학했다. 당시 이리농림학교는 국가기관이 세운 식민지 유일의 5년제 학교였다. 수원에서 수원농림학교가 유명하다. 특히 정치가로 부통령을 지낸 장면이 수원농림학교 출신자이다.

 

이리농림학교시절 한태영(왼쪽). 한국근대문학관 소장.

 

17세(1936년) 때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나병(한센병) 확정 진단을 받았다. 『나의 슬픈 반생기(인간사, 1957)』에서 한하운은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고 하였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한하운,「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보리피리』.

 

 

태영은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도청과 장진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급성으로 한센병이 발병해 공직을 그만두고 낙향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경기도청에도 근무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게 맞다면 수원과 인연이 깊다. 당시 경기도청은 수원에 있었다.(1886년 한성부에서 이전) 이밖에 용인군청에서도 근무하였다고 한다. 다만 현재까지 연구에서는 공직 출사는 확인되지 않았다.(부평역사박물관.한하운온라인문학관)

이때 중요한 것은 한하운이 문둥이 이전에 일제강점기 관료를 했다면, 그의 출신성분이 낮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 식민지 관료는 당대는 물론 해방 후 한국사회의 중추 기득권이 되었다. 소위 친일파이기 때문이다. 관료로서 최고 성공한 사람은 최규하 대통령(만주국 길림성 통양현사무소 행정과장 역임)이다.

나병의 발병으로 두문불출 병마 속에서 문학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필명 '하운(何雲)'을 썼다.

나환자 시인으로 알려지고 정처없이 떠도는 그를 수원세류동 하천부락에서 맞아들였다. 그리고 이들 전체와 인천 부평으로 이주하였다.

우선 부평은 이 지방민의 반대가 없을 것이라 믿고 불모의 산협이지만 우리가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우리들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택하기로 하였다.

나는 그들을 설득시키고 수원시의 알선으로 서력 1949년 12월 30일 밤 8시에 70명 환자를 인솔하고 부평으로 갔다.

나는 기뻤다. 그렇게도 원하였던 땅을 얻게 된 까닭으로……

<황토길 中>

1950년에 정착한 나환자촌의 이름은 '성계원(나환자 요양소)'이다. 여기서 자치위원장이 되었다.

“나는 600명 환자의 선거에 의하여 이곳 자치위원장에 취임하고 원명을 성계원이라 명명하였다. 도리지하 자성계(桃李之下 自成蹊) 이라는 뜻에서 성계란 이름을 얻었다.”-<황토길 中>

1960년 서울 명동에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를 설립하고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을 간행하였다.

1962년 영화 “황토길” (USIS)이 제작되었다. 영화 에서 한하운은 한센병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외로운 삶을 이어가지만 완치를 위한 강한 의지와 주변의 적극적인 도움, 그리고 시작(詩作)활동을 통해 역경을 이겨낸다. 1963년 제 2회 대종상영화제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 월간 「새빛」 창간, 「정본 한하운 시집」 을 간행하였다.

1973년 최초로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시비를 건립하였다.

1975년 2월 28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산39번지의 자택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 향년 56세였다. 수원천을 떠나서 새로이 정착한 부평 나환자촌에서 25년만이다. 시에 대한 열정과 나병환자, 즉 한센인의 권익을 위한 삶이었다. 김포시 계양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해설

 

‘나해방(癩解放)’을 향한 울음의 시학

한하운 시를 읽는 것은 처절한 고통과 대면하는 일이다. 이 고통은 관념의 차원이 아니라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를 엄습해 오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살을 저미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한하운은 이른바 ‘문둥이 시인’이다. 평생 나(癩)환자로서 천형(天刑)의 삶을 살았다. 그의 시 곳곳에는 문둥이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울음이 배어 있다.

 

人間(인간) 癈業(폐업),

天刑(천형) 怨恨(원한)을 울었습니다.

 

몇 백 번 죽엄을 고쳐 죽어도 자욱자국 피맺힌

그리움과 뉘우침이 가득 찬 문둥이 아니겠습니까.

-「靑芝有情(청지유정)」 부분

 

죽엄을 차져가는 마지막 나의 우름은

고명철, 2013, 『한하운 시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231쪽.

 

 

 

유천2교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