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달이선생 2026. 4. 11. 10:35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 삼일절 노래

[오늘] 1919년 3•1운동에 따른 독립 열망으로 국내ㆍ외에서 총 7개의 임시정부가 등장했다.

<전단 발표 4 임시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

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

<정식 수립 3 임시정부>

조선 인천 만국(자유)공원.경성(서울)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 통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일명 한성정부

러시아 연해주(노령)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일명 노령정부(露領政府)

중국 상해(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일명 상해 임정

그 중 대표성 있는 정부는 1919년 3월 17일 들어선 러시아 연해주인 노령에 처음 수립된 대한국민의회이고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의하고 4월 23일 경성에서 선포한 한성정부, 그리고 오늘 4월 11일 상하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이 반포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전에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일을 반포한 4월 13일을 기념일로 지정하였다.(2019년 4월 11일 변경 기념) 이밖에 천도교측에서도 대한민간정부(大韓民間政府)라는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가 통합의 모의하는 가운데 마침내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하면서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하고 정부를 중국 상해에 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 수립되었다. 이때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고 새롭게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따라서 1948년 8월 15일 남한 반쪽만 수립된 정부이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의 수립은 이와같은 3.1운동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을 바탕으로 수립된 정부이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시행 1919. 4. 11.] [임시정부법령 제1호, 1919. 4. 11., 제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대한민국임시정부헌장선포문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야 한성에 기의한지 삼십유일에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자손려민에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급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유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 병역의 의무가 유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 급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 신체형 급 공창제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후 만일개년내에 국회를 소집함.

대한민국 원년(1919) 4월 일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선 서 문

 

존경하고 열애(熱愛)하는 아이천만 동포 국민이여, 민국 원년 삼월일일 아 대한민족이 독립선언함으로부터 남과 여와 노와 소와 모든 계급과 모든 종파를 물론하고 일치코 단결하야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하게 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한지라 금에 세계의 동정이 흡연히 아 집중하였도다. 차시를 당하야 본정부일전국민의 위임을 수하야 조직되었나니 본정부일전국민으로 더불어 전심코 육력하야 임시헌법과 국제도덕의 명하는바를 준수하야 국토 광복과 방기확고의 대사명을 과하기를 자에 선언하노라. 국민 동포이여 분기할지어다. 우리의 유하는 일적의 혈이 자손만대의 자유와 복락의 가이요. 신의 국의 건설의 귀한 기초이니라. 우리의 인도일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할지요. 우리의 정의일마침내 일본의 폭력을 승할지니 동포여 기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지어다.

정 강

1. 민족평등 국가평등 급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3. 일체 정치범인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일의함.

5. 절대독립을 서도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하는 자는 적으로 인함.

 

대한민국 원년 사월 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칙<임시정부법령 제1호, 1919. 4. 11.>

대한민국임시헌장 / 사료로 본 한국사,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과 대한민국임시헌장(헌법재판소전시관)

 

대한민국의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법제화 하는데는 석오 이동녕이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석오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어 임시헌장을 제정 선포하였다.

천안 목천 석오 이동녕 생가와 기념관.

 

누가 가 본 길인들 쉽지 않다. 더욱이 독립운동이가. 김구 선생이 미주 한인들의 피땀어린 돈을 받아가며 감내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그의 곁에는 묵묵히 '대의(大義)'를 실천한 석오 이동녕 선생이 함께있었다. 석오 선생은 자기희생으로 대의를 실천한 살신성인의 전형이다. 석오는 늘

산유천석(山溜穿石)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는 말을 인용하며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분명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헌법 전문(1987년 10월 29일 9차 개헌)에 따른다고 나오며,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는 아무개(의병-민중)들이 피땀흘려 조국을 구하려고 떨쳐 일어난 3.1운동의 민족정신을 계승한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엄연한 국민국가였다.

대한민국헌법(일명 제헌헌법)

[시행 1948. 7. 17.] [헌법 제1호, 1948. 7. 17., 제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단기 4281년 7월 12일

대한민국국회의장 이 승 만

제1장 총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헌법(현행)

[시행 1988. 2. 25.] [헌법 제10호, 1987. 10. 29., 전부개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제1장 총강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다. 1948년 건국이 아니라 1919년 건국이다. 이러한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1910년 나라를 잃고 주체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던 우리 애국선열에 대한 부정이다.

살펴본 것처럼 임시헌장에서 87년 헌법에 이르기까지 3.1운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처음 정부 수립이 되는 제헌헌법에서 정확하게 임시정부라는 명칭이 들어가지 않아 이를 계승치 않았다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제헌헌법 전문에 드러난 내용은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안 썼던 것이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해서 정확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적인 논란으로 87년 헌법에서는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전문에 수록하였다.

대한민국헌법 | 국가법령정보센터

일명 무오독립선언서 (독립기념관)

노령이라고 불린 연해주 러시아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였다. 때마침 국내 기미독립선언이 이루어지는데 이보다 앞서 러시아, 노령에서 대한독립선언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무오독립선언은 무장독립투쟁을 천명한 것으로 독립군기지 건설이 활발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지사들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이후 대한국민회의는 1919년 3월 17일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를 수립 하였다.

대한국민의회 임시대회의실(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전로한인회중앙총회가 결성되고 이어 1919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되었다. 최재형 선생 저택 근처에 당시 대한국민의회의 임시대회의실이 있다. 현재는 초등학교로 사용되다가 방치되어 창문의 유리가 깨지고 스산하다. 당시 정면으로 보이는 아치형 창문 네 개 정도만 임대하여 임시로 회의실로 썼다고 한다. 이 역시 최재형 선생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 한성정부, 상해 임시정부와 함께 각 지역을 대표한 해외 망명정부로서 만주와 연해주지역의 한인을 대표하고 무장항일독립투쟁의 중심이었다. 1차세계대전의 종식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그 어느 때보다도 약소국의 독립의 열망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높았던 당시 발빠르게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서구열강과 교섭에 나섰던 정부이다.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

노령 임시정부 수립의 숨은 주역은 최재형이다. 최재형,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매국노, 일본간첩이라고 매도할 때도 그의 사람됨과 의지를 높이 샀고 막후에서 지원하였다. 최재형이 믿어준 사람, 바로 안중근(1879-1910)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 메이지유신과 총리대신을 역임하고 1대 조선통감을 지낸 제국주의자)이를 저격하여 사살한 사건은 안중근 의사 개인의 역량도 작용했지만 그 치밀한 계획과 거사의 준비는 연해주의 최재형이 없이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의병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홍의동 등 국내진공작전을 폈다. 그 때 패퇴시킨 일본군 정찰대 포로를 사로잡고 여러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풀어주었다. 그런데 그만 수비병이 돌아가 길잡이가 되어 일본군 본대를 이끌고 의병을 추격하였다. 그때문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의병부대는 일시에 일본군의 역습으로 궤멸되고 말았다. 이 일로 연해주 한인사회는 격앙되었다. 안중근 개인의 역량은 물론 사상이 의심되었고 민족반역자로까지 매도되는 상황에서 그를 믿고 그와 큰 거사를 도모한 막후 인물이 바로 최재형이었다.

 

1860년 8월 함격북도 경원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1살 어린 나이로 가출을 하여 선원생활과 상업에 종사하며 러시아어를 익혔다. 이러한 재능으로 최재형은 남다른 수완으로 러시아군대와 거래를 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에서 러시아 부호로 일약 출세한 최재형, 당시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일제는 마지막 가는 숨마저 틀어쥐고 누르는 절박한 시대였다. 이와 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최재형은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하여 이범윤의 의병부대에 군자금을 대고 동포신문인 '대동공보', '대양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경술국치 이후 국민회와 권업회를 설립하여 회장에 추대되고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의원,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4월 이른바 '4월 참변'이라고 불리는 그 때 일본군에 납치되어 피살되었다. 이 참변은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을 무력화 하기 위해 적군 토벌을 명목으로 연해주에 출병했던 일본이 한인 항일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이었다.

최재형 저택(우스리스크)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내의 동향이었다. 이러한 때 4월 2일 인천 제물포 만국공원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회의 결의되었다. 바로 한성정부이다. 인천 제물포 만국공원이 선택된 것은 일찍이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 각국의 조계가 위치하여 빠르게 우리의 입장을 알릴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곳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다. 바로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최초로 맺은 외교 관계 조약으로 한국과 미국의 떼래야 뗄 수 없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2019)

이 중요한 역사적 순간은 그간 장소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보통은 청나라 함선에서 청나라 속방으로 체결하려고 하였으나 미국 군함에서 독립적으로 체결되었다고 알려졌으나 미국이 상륙한 곳에서 군막을 치고 체결되었다는 등 정돈되지 않은 사실이 전승되었다. 현재는 조약 체결 당사자인 미해군 제독으로 미국전권대사로 조약 체결자였던 슈펠트(Robert W.Shufeldt, 1822~1895) 제독의 회고를 통해 당시 인천 해관(세관)의 사택 부근 천막에서 거행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선교사 아펜젤러 저술 '슈펠트의 회고') 따라서 인천해관장이 표기된 인천 근대 지도(사바틴 '대조선 인천제물포 각국조계지도', 1888)를 발굴하여 이 장소로 특정하였다. 인천차이나타운 경계지로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의 중요 상징인 공자상(중국 청도시 기증 2002) 뒤로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32번길 23(중국 북성동 3가 8-3)에 위치한다.

 

상해는 친숙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위치했던 곳이고, 백범 김구를 통해 매헌 윤봉길이 홍구공원(현재 루쉰공원)에서 상해사변(1932)에 승리한 일본이 전승 및 덴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를 열자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육군대장이 폭사하고 일제 패망(1945) 항복 조인으로 미주리호에 다리를 절며 올라서 서명했던 시게미츠 마모루(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에게 상해를 입혔던 대한 청년 의기가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인애국단(김구)의 활동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을 움직였고, 그로부터 우리나라 임시정부는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결국, 우리는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1940)'을 창설하였고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연합군에 참가하여 태평양전쟁에 oss 공작 등 참전하였다. 이 모두가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으로 한국의 독립, '카이로 선언(1943)'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쾌거였으며 이로부터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윤봉길 지사의 성공은 한 번이었으나 그 성공이 있기까지 이봉창 지사의 피가 있었고 이덕주, 유진만, 최흥식, 유상근 등 많은 애국지사의 피와 땀을 흘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상해 임시정부청사)
백범 김구 주석 상
백범 김구와 석오 이동녕 선생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지사.

이들의 의거는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중정)을 움직여 임시정부가 국제적 공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자주독립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었다. 그 결실이 대한광복군 창설이다. 또한 장개석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과 만나 이들이 조선의 즉각적 독립에 대해 생각이 없었고 특히 처칠은 부정적이었는데 장개석이 나서서 조선의 독립을 관철시켜 '카이로 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카이로 선언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되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최초의 국제적 선언과 명시였다.

 

1945년 11월 4일 개인자격으로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였다. 8.15해방이 되고도 3달이 넘어 벌어진 일이다. 38선 이남의 어떠한 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조치 이후 벌어진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해방군 미군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좌우익 대립과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 등 엄청난 혼란이 빚어진다. 개인자격으로 입국한 임시정부의 수뇌들과 백범이 사실상 국내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한 것이 바로 서대문 경교장이다. 친일부역자로 임정의 후광으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했던 금광업자 최창학이 자신의 별장 죽첨장을 임시정부 청사로 제공하였다.

경교장

 

이곳에서 1945년 12월 3일, 충칭에서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미롯한 각료들이 첫 번째 국무위원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미군정 하에서 좌우익 대립과 남한 단정 수립, 그리고 김구를 중심으로 북의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한 임정은 1949년 분단주의자 안두희(특무대장 김창룡 사주)의 총탄으로 주석 김구 선생이 서거하면서 역사적 소임을 다하였다. 물론 이시영, 이범석 등 많은 임정 고위 각료들은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응하여 대한민국 수립(1948.8.15.)에 기여하였다.

안두희에게 저격 당한 김구 선생의 자리와 피탄 흔적.

 

오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의 여정을 마무리 하는 곳,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다. 서대문 독립문을 나와 서대문형무소를 지나면 언덕 위에 서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전망대. 아래로 서대문형무소가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