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무작정 나가고 싶다.
어디든 거닐고 싶다.
이런 날이면 가족과 지인들과 다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다 보면 꼭 알아보고 싶었던 것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던 것이 적잖이 많은데, 수원의 옛 거리는 옛것들과 옛이야기가 담긴 장소가 많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꼭여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오늘 그런 곳들을 찾는다.
“날씨가 좋아서...”
수원 교동은 옛 수원 읍치인 지금의 화성시 융건릉에서 옮겨온 수원 향교가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국에 향교가 있는 곳은 죄다 교동, 교리라고 불린다.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일제는 향교 위 팔달산 자락, 지금의 중앙도서관에 신사를 건립하였다. 조선의 정신 위에 일제의 정신을 심으려는 책략이다. 힘없는 우리는 거기에 머리를 조아렸다.
하여튼 이 거리에는 수원 근현대를 아우르는 많은 역사유산이 자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국원이 있고 수원시청, 수원문화원, 성공회 교회 등이다.






자주 지나쳤지만 기독교 장로회 수원교회도 교동에 위치한 중요한 신앙처이다. 그 형태를 들어 돌집교회라고도 불린다. 특기한 것은 ‘기독교 장로회’이다. 기독교 장로회는 한 때 이단으로 몰린 개신교의 한 파이다. 특히 이 교단은 한국 대부분의 교세가 미국 장로교에서 유래한 평양 신학의 복음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이에 반하여 캐나다 북장로회를 시초로 장공 김재준이 조선신학을 주창하면서 성립된 교단이다.
보통의 장로회 교단은 선교사들을 ‘양대인’이라고 하여 그들을 신성시하고 이들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래서 구한말 신교로 받아들인 교회가 수십년을 지나도 조선인 목회자 한 명을 배출하기도 어려웠고 그러한 교육에도 미국 선교사들은 관심도 없었고 냉소적이었다. 그러다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전쟁을 시작하여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듭 일으키며 내선일체를 주창하는데 이때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서야세력을 아시아에서 추방하고 아시아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거창한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조선에 있던 미 선교사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더욱이 전쟁을 위해 그간 조선인 징병까지는 끝끝내 용인 않던 일제는 총력전 체제에서 조선의 병력 징발도 필요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러한 체제결속을 위해 내선일체를 주창하고 그들의 신앙인 신사에 대한 참배를 강요한다. 당연하지만 선교사와 복음주의자들에 있어서 이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결국 일제의 강요에 대부분 넘어간다. 물론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와 경남 함안의 손양원 목사와 같은 철저한 복음 신앙자는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때 장공은 김재준은 숭인상업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 1935년 일제는 공사립은 물론 선교사 학교 등 모든 기관을 일제 통제 아래 두고 통제에 들어갔다. 따라서 이사회는 형식상 존재했고 교사 임면 및 교과목 배정도 일제의 허가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당시 도지사령으로 ‘교장 인솔 아래 교사와 학생이 모두 신사에 참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때문에 기독교계 사립학교는 문을 닫고 선교사들은 조선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가 있자 김재준은 학교 3년째 당시 교장 김항복이 ‘일제의 닦달에 고충이 많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지 말고 신사참배에는 함께 행동하라’부탁을 하자 곧장 사표를 내었다.53쪽
조선 장로교회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강요에 따라 항거로 자진 폐교를 하는 이때 1940년 조선신학교의 창설은 신사참배에 대한 묵인 내지 자진 참여의 결과로 파악된다.
이러한 이유로 김재준은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이므로 일사를 각오 순교한다’는 순교자 삶을 따르지 않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처럼 신사참배에 동행했다. 순교할 만큼 용기를 가질 수 없기에 ‘신사참배 항거 신앙’이 아닌 ‘적응하면서 저항한다’라는 길을 간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장공의 회고이다.
나는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초대 교회 때 로마 황제 예배 강요와 유(類)를 갗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 예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초대신자들의 모습을 사모했다. 나는 평양신학 도서실에서 『성자열전(Story of the Saints)』 오십여 권을 한 번에 두세 책씩 빌려다 읽었다. 그 중에서 우리와 비슷한 경우에 순교한 분들을 골라 『순교자열전』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지 살 돈도 없어서 잘못 쓴 데를 도배질하면서 날마다 여념 없이 써 갔다. 원고지 천 매를 넘겼다.
김경재, 2001, 『김재준 평전』, 도서출판 삼인, 54쪽 : 『전집』 13권, 147쪽.
이 시기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던 친우 송창근 목사(평양 산정현교회)가 교회를 사직하고 부산 호주 선교부의 후원으로 성빈학사 개설을 위해 평양을 떠났고 친구 한경직 목사도 신의주로 더 큰 교회 목회를 위해 떠났다. 삼총사 중 장공만 실직자로서 신사참배 거부를 못한 신앙적 나약함과 부끄러움에 하루하루를 버텼다.
나는 그 당시 새벽마다 모란봉 꼭대기 솔밭 속 바위 밑에서 기도했다. 눈 쌓인 겨울에도 거의 예외가 없었다. 가고 오는 길에서도 기도하며 걸었다.
55쪽. : 『전집』 13권, 132쪽.
이처럼 장공 김재준은 이때 ‘적응하면서 저항한다’라고 하면서 일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젊은 혈기에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한때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그에게는 선교사가 떠난 조선에서 조선신학과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고 보여진다. 그렇게 시작된 신학교가 조선신학교(1940년), 즉 한신대학교이다.
물론 장공의 선택 이후 일제는 신사참배에 협조를 하건 말건 모두 다 총력전을 위해 사상검열을 철저히 하면서 일체 교육 및 종교활동을 금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기독교 장로회이다. 기독교 장로회는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면 후일 민중신학으로 거듭나는데 여기에 김재준, 만우 송창근, 문동환, 문익환, 함석헌 등 걸출한 교계 인물들이 함께하면서 주류 예수교 장로회와는 더욱 더 척을 지게 된다.
더욱이 장공을 비롯한 장준하, 문익환 등은 해방 후 박정희 정권의 불법성과 군부독재에 대한 철저한 항거를 하였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교세의 확장에는 외면 아닌 외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교파의 특성에 따라 장공는 과거 친일에 대한 신앙적 고배를 통한 반성, 교단 차원, 한신대 차원에서도 이를 정확히 짚고 반성하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20여 년 전 기억까지다. 이후 교단과 한신대 신학자들이 민중신학과 결을 달리하는 많은 모습을 보여서 지금도 이러한 기조가 유지되는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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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의 산실 한신대학교
늦봄을 늦가을 한신에서 맞는다. 늦봄 문익환(文益煥, 1918~1994)은 청소년시절에는 잘 몰랐다. 배우 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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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지나쳤지만 기독교 장로회 수원교회도 교동에 위치한 중요한 신앙처이다. 그 형태를 들어 돌집교회라고도 불린다. 특기한 것은 ‘기독교 장로회’이다. 기독교 장로회는 한 때 이단으로 몰린 개신교의 한 파이다. 특히 이 교단은 한국 대부분의 교세가 미국 장로교에서 유래한 평양 신학의 복음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면 이에 반하여 캐나다 북장로회를 시초로 장공 김재준이 조선신학을 주창하면서 성립된 교단이다.
보통의 장로회 교단은 선교사들을 ‘양대인’이라고 하여 그들을 신성시하고 이들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래서 구한말 신교로 받아들인 교회가 수십년을 지나도 조선인 목회자 한 명을 배출하기도 어려웠고 그러한 교육에도 미국 선교사들은 관심도 없었고 냉소적이었다. 그러다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전쟁을 시작하여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듭 일으키며 내선일체를 주창하는데 이때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서야세력을 아시아에서 추방하고 아시아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거창한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조선에 있던 미 선교사들의 입지는 좁아진다. 더욱이
전쟁을 위해 그간 조선인 징병까지는 끝끝내 용인 않던 일제는 총력전 체제에서 조선의 병력 징발도 필요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러한 체제결속을 위해 내선일체를 주창하고 그들의 신앙인 신사에 대한 참배를 강요한다. 당연하지만 선교사와 복음주의자들에 있어서 이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결국 일제의 강요에 대부분 넘어간다. 물론 경남 함안의 손양원 목사와 같은 철저한 복음 신앙자는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장공 김재준은 이때 ‘신사참배는 개개인의 몫이다’라고 하면서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젊은 혈기에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한때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그에게는 선교사가 떠난 조선에서 조선신학과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고 보여진다. 그렇게 시작된 신학교가 조선신학교, 즉 한신대학교이다.
물론 장공의 선택 이후 일제는 신사참배에 협조를 하건 말건 모두 다 총력전을 위해 사상검열을 철저히 하면서 일체 교육 및 종교활동을 금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기독교 장로회이다. 기독교 장로회는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면 후일 민중신학으로 거듭나는데 여기에 김재준, 만우 송창근, 문동환, 문익환, 함석헌 등 걸출한 교계 인물들이 함께하면서 주류 예수교 장로회와는 더욱 더 척을 지게 된다.
더욱이 장공을 비롯한 인물들은 해방 후 박정희 정권의 불법성과 군부독재에 대한 철저한 항거를 하였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교세의 확장에는 외면 아닌 외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교파의 특성에 따라 장공는 과거 친일에 대한 신앙적 고배를 통한 반성, 교단 차원, 한신대 차원에서도 이를 정확히 짚고 반성하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20여 년 전 기억까지다. 이후 교단과 한신대 신학자들이 민중신학과 결을 달리하는 많은 모습을 보여서 지금도 이러한 기조가 유지되는지는 모른다.

기독교 장로회 수원교회는 해방 후 1946년 11월 27일 김갑희 집에서 임춘성 목사와 장순덕 전도사, 그리고 수원 농대교수 현신규, 이태현을 비롯한 장로교인들이 모여 첫 예배로 시작되었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 2-7에 건립된 교회는 1956년 11월 준공했다. 본당은 2층 건물이고, 믿음관이다. 이외에 사랑관, 소망관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믿음관은 정면에서 보면 박공모양이 있는 사각형 건물이며, 지붕 중앙에 네모난 종탑을 이어서 올렸다. 종탑 지붕은 8각뿔 형태로, 철판으로 마감했다. 측면은 앞과 뒤, 중간에 2개의 네모 기둥형태를 돌출형태로 지붕위까지 올려 세우고, 끝은 사각뿔 형태의 철판으로 마감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초기 성당 건물에 주로 사용했던, 첨탑형식(고딕양식)을 본뜬 것이다. 측면은 7칸, 끝 칸을 제외하고 각 칸마다 상하 두개의 창호를 내었고, 2층 창호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했다. 2006년에 내부 리모델링을 하였다.
본당 건립은 1954년에 미공군 군목 로건 목사의 도움으로 건축자재를 지원(미군사 AFK 물자와 복구비) 받아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외벽을 화강석 습식으로 마감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일명 ‘돌집교회’, 혹은 ‘돌교회’라고 불린다. 외벽 공사를 교인들이 손수하였다고 한다.




교동에서 화성(華城) 팔달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선다. 남북의 대로를 따라 북쪽 종로사거리에서 화홍문 방향으로 가다가 수원천을 건너면 삼일중학교가 나온다. 삼일학교의 후신이다. 삼일학교는 수원지역 민족운동의 요람이다.
삼일은 1903년 매일학교 학당장에 위촉된 이하영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삼일(三一)을 따서 학교 이름을 삼일학당(三一學堂)이라하고 여학교는 따로 이름을 짓지 않고 삼일여학당이라 하였다. 학교설립은 1902년 6월 수원 종로교회의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회 스크랜튼(M.F Scranton) 선교사에 의하여 여학생 3명으로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삼일학교의 교명인 삼일이 신앙적 의미이지만 1919년 3.1운동의 삼일과도 다아있다. 신앙의 모태로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을 위해 수원의 애국자 필동 임면수, 동방 김세환과 제자들 임순남, 최문순, 차인재,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김노적, 이선경 등이 활동하였다.






삼일학교는 현재도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니다. 교육 공간이라서 쉽게 방문이 허락되지 않는다.


동방 김세환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결국 그의 동지들과 제자들에 의해서 계속되는데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수원 구국민단과 혈복단 활동이다. 여기에 김노적, 이선경 등 수원 민족운동의 주역들이 산화하였다. 특히 이선경 지사는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여성 애국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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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비밀결사 서호 구국민단 수원 혈복단 축만제 항미정
수원지역 수원읍 3.1운동 기독교 청년이 이끌다 수원지역은 3.1만세운동이 강렬하게 전개된 대표적인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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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신교회는 삼일학교 자리에서 화홍문 도착 직전에 만나는 작은 교회이다. 일본 최초의 선교사 노리마츠 마사야스가 세운 교회로 그는 승송목사라고 불린 조선인의 친구였다. 그의 목회가 이루어지고 그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곳, 동신교회다.


화성행궁 광장 앞 종루는 종로사거리로 불리는 수원 화성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천주교 박해로 유명한 북수동 성당이 있고 그 북수동 성당 사제관 뒤편으로 동학에서 유래한 천도교 수원교당이 있었다.

천도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3.1독립(혁명)운동을 전국적이고 전민족적 운동으로 촉발시킨 중심된 저력이었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3.1운동에 들어가는 기금을 중앙대교당 건립비용 모금인양 충당하여 3.1운동을 지원하여 우리 민족운동사에 큰 족적을 내었다.
특히 당초 1차 세계댜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의 영향으로 자치청원 정도로 준비하던 천도교 인사들은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그 선언서를 비밀리 가지고 들어온 송계백을 통해(중앙고등보통학교 비밀결사 전달. 현상윤이 교장 송진우와 최남선에게, 다시 최린을 찾아갔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 전달했다.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계획을 바꿔 독립운동으로 추진)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의지를 확인하면서 자치청원 계획은 평화적 독립선언으로 준비하였다.
당시 수원군의 천도교 교세는 각지에 전교실이 위치하고 1909년 8월, 1911년 전국 천도교 교구 성미 실적 1등 표창, 1912년 1,2등으로 표창되고 성미 모금에서도 1등이었다. 특히 3.1운동 당시 천도교가 재정을 확보한 방법으로 특별성미를 모금하였는데, 손병희가 1918년 종령을 선포하여 현 중앙 대교당 건축비용 충당이 명목으로 모금하자 이에 수원지역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수촌리 백낙렬 등이 적극적으로 헌납하였다.


이처럼 수원지역에서 천도교는 근대교육과 3.1운동을 적극 참여한 곳으로 천도교 강습소가 중심에 있었다. 수원교구 교리전문강습소가 설립되고 성호면 종학강습소 이어 지역내 제309강습소 등 7개 강습소(제암동, 압정면 사기촌, 장안면 장안리)가 생길 정도로 활발하였다. 또한 3.1운동 당시 면사무소와 주재소의 일본 순사 가와바타 토요타로를 처단한 삼괴(우정읍과 장안면을 이름)의 4.3항쟁인 '수원군 우정,장안면 3.1운동' 당시 8개의 전교실과 신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때 수촌리 구장 백낙렬은 동학교도이자 천도교 순회교사로 3.1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제암리학살사건 역시 교회 예배당이 만행 장소가 되었지만 당시 제암리(두렁바위) 마을 사람 대다수는 천도교인이었다. 제암리 안정옥, 고주리 김흥렬도 대표적인 3.1운동 순국지사(4.15 제암리학살사건)이자 천도교 순회교사이다. 고주리 김흥렬은 이웃한 제암리와 함께 일가족이 몰살되는 참변을 당했는데 이 김흥렬 일가가 천도교인으로 발안만세시위(3.31.)의 주모자로 여겨져 이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으로 무참히 학살된 것이다.

수원 개신교의 역사를 상징하는 수원종로교회이다. 종루 맞은편에 위치한 곳으로 병인박해 당시 박해의 중심이 되었던 수원 중영의 자리였고 따라서 교회 입구 자리는 천주교도의 순교지이다. 이곳에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과 함께 개신교 포교과 용인되면서 교회가 섰다.

병인박해 성지 북수동 성당이다. 서세동점의 시기 서학은 종교적 색채를 더해서 수원지역에 전파되었고 특히 수원은 인천, 서울을 통해 들어와 수원을 거쳐 충청도를 잇는 근거지였다. 수원의 대표적 천주교 유적은 북수동 성당이다. 1891년 왕림(갓등이) 본당의 공소로부터 출발하였다.(현 왕림성당, 수원 가톨릭대학교) 수원시 남서쪽 30리 지점의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는 1839년 기해박해 이래로 신자들이 숨어 살기 시작한 곳이다.
특히 이 왕림리 성당을 다니던 수원군 장안면 김선문의 주도로 장안리에 최초로 천주교교당이 세워졌다. 김선문(안드레이), 김여춘(요셉), 안경덕(가별), 김삼만(배드로), 김광옥(베드로), 최경팔(도마) 등 천주교 신자들로 그중 김선문은 3대 전부터 천주교를 신앙해 온 독실한 집안이다. 당시 장안리 천주교인은 장안리에서 50리 떨어진 봉담의 왕림리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보았는데 이를 김선문은 집근처에 교당을 세워 미사를 보고자 하였고 김여춘, 안경덕, 최경팔, 김삼만 등이 출연하여 예배소를 건립하였다.이들 천주교인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우정, 장안면의 삼괴 4.3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신유박해(1801), 기유박해(1839)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박해에 의한 순교자가 없다가 병인박해(1866) 이후로 순교자가 나와 수원 출신자 및 연고자를 포함하여 77명에 이른다. 병인박해 때 수원은 경기남부 지역의 천주교도를 재판하고 처형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 전교가 잘되지 않는 지역으로 알려졌다.


화성행궁 광장에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연등회 준비를 알리는 석가탑 등이 섰다. 서울 종로를 가로지르는 연등회가 제일이나 수원의 연등회도 볼만하다.



연등 석가탑 뒤로 수원 종로교회와 종로를 상징하는 수원 종루가 자리한다. 저 뒤편 길로 계속 나아가면 수원화성박물관, 팔달구청, 연무대(동장대), 창룡문(동문)으로 이어진다.

화성은 정조가 만든 성곽이자 신도시다. 정조13년(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 아래 영우원(永祐園)에서 경기도 화성시 화산 아래 옛 수원(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및 와우리 일대)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여 조성하고 본래 수원 읍치를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집값과 이사비용을 국고로 지불하며 갑작스런 이주로 민생이 동요하는 것을 현명하게 처리하여 기존의 봉건적 전통에서 벗어나 사유재산에 대한 보전을 봉건국가가 부담하는 등 당시의 파격적인 정책을 단행하였다.
상이 높은 곳에 올라 고을터를 바라보고 곁에 모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 6호였었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地理)의 흥성함이 절로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
하였다. 인하여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보고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 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지금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같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이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어제 화성과 유천의 뜻을 이미 영부사에게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성을 좁고 길게 하여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들어맞지 않겠는가."
하였다.
(癸卯/上登覽邑基, 謂左右曰: "此地本是空曠大野, 人家僅爲五六戶, 而今則千餘民戶, 屋舍櫛比, 不出數年, 居然一大都會。 地理之興旺, 自有其時矣。" 仍登八達山, 周覽築城基址。 上曰: "此地占得山頂最高處, 便於瞭望。 氣勢雄爽, 可謂天造地設之將臺矣。 今見揷旗處, 則築城範圍, 可以領略, 而至於北里人家毁撤之論, 終非計之得者。 園所, 花山也; 此府, 柳川也。 取華人祝聖之意, 名此城曰華城, 花與華通。 花山之義, 蓋以八百峰巒, 拱護一岡, 圓正如花瓣之謂也。 然則柳川之城, 南北稍長如柳葉, 則實有意義矣。 昨以華城、柳川之義, 已有諭及於領府事者, 而此城挾而長, 旣似柳葉, 則於北角人家相錯處, 三曲折以象川字, 豈不尤襯於柳川耶?。")
정조실록39권, 정조 18년(1794) 1월 15일 계묘 1번째기사
수원성 축조에 대해 하명하다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정수인 수원화성의 탄생은 제22대 정조(1752탄생 재위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恨)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는 위치에 있는 수원을 상업 활동이 활발한 경제 신도시로의 건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보통 지역의 관아에서 제일 위엄 있는 공간은 바로 객사이다. 화성의 객사는 우화관이다. 화성행궁 북쪽 끄트머리에 객사가 있다. 예전 일제가 헐어낸 자리에 보통학교에서 신풍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화성행궁을 본격적으로 복원하면서 다시금 최근에 세워졌다. 임금이 행차하여 머무는 행궁의 건물이니만큼 여느 지방 객사보다 규모가 크다.

일제는 조선의 궁궐도 훼손하였지만 화성 행궁 역시 철저하게 파괴한다. 그런데 행궁 옆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은 놔두었다. 보통의 신성적인 공간은 맛배지붕으로 엄숙함을 더한다. 종묘가 그렇고 향교의 대성전이 그렇다. 조선에서 어진을 모신 곳 중 선원전과 경기전도 맛배 지붕다. 이를 모방했는지 이순신 사당인 현충사도 팔작지붕이다. 그런데 화령전 운한각은 이와 달리 팔작지붕으로 엄숙한 위용을 자랑하는 걸작 중에 걸작이다. 팔작지붕은 화려한 위용으로 엄숙함이 저해되는 모습이 아산 현충사에 보듯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데 화성의 운한각은 그렇지 않다.
신유년097) 에 궁시(宮寺) 노비들의 세공법(世貢法)을 파기시키고 그 적안(籍案)을 가져다가 큰 거리에서 불에 태워버림으로써 소민(小民)들의 누적된 고질적인 억울함이 이제야 제거되었다. 여름에 화성부(華城府)에 화녕전(華寧殿)을 건립하고 선조(先祖)의 어진(御眞)을 유여택(維與宅)에서 이봉(移奉)하였는데 이는 우러러 의지하고 싶다는 유의(遺意)를 따른 것이다. 묘전(廟殿)의 의제(儀制)를 꾸밈에 있어서는 견고하고 박실(樸實)하게 하는 것을 법도로 삼으라고 하교했는데 이는 선왕의 검소한 덕을 본받은 것이다.
(辛酉, 罷宮寺奴婢世貢之法, 命取其籍案, 火于通衢, 小民積痼之冤, 乃袪。 夏建華寧殿于華城府, 先朝御眞, 自維與宅移奉, 式遵瞻依之遺意。 庸賁妥虔之儀制, 敎以堅固樸實爲度, 體先王昭儉之德。)
순조실록 1권, 순조 대왕 행장(行狀)
순조 대왕 행장(行狀)
이처럼 순조의 각별함으로 지어졌다. 화성에서 고졸미의 정점은 단연 화령전이다.




화령전(華寧殿, 사적 115호)은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과 내삼문과 외삼문을 갖췄다. 화령전은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49세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조의 무덤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결정하자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현륭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명령했다.
수원 유수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베옷을 입고 낮은 궁실(宮室)에 거처하여 검소함을 보이신 성덕은 백왕(百王)보다 탁월하셨습니다. 화령전(華寧殿)은 선대 의관(衣冠)을 월유(月游)하던 곳인데, 무릇 용마루·기둥·섬돌·지도리 등에 관계된 제도를 한결같이 견고하고 소박함을 위주로 함으로써 옛날의 성덕을 본받았으니, 전내(殿內)의 배설(排設)도 당가(唐家)를 설치하지 않고 앞에 합자(閤子)를 설치하되, 한결같이 주합루(宙合樓)의 예에 의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건릉(健陵)에 봄, 가을로 봉심(奉審)하는 것 또한 현륭원(顯隆園)의 예에 의거하여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편의(便宜)할 것이므로, 감히 진달(陳達)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水原留守李晩秀啓言: "惟我先大王菲衣、卑宮、昭儉之德, 卓越百王。 華寧殿, 乃是衣冠月游之地, 凡係棟楹陛卮之制, 一以堅固朴素爲主, 以體昔日之德, 殿內排設, 不設唐家, 前設閤子, 一依宙合樓例似好。 健陵春秋奉審, 亦依顯隆園例, 令守臣擧行, 實合便宜, 故敢達矣。" 從之。)
순조실록2권, 순조 1년(1801) 2월 10일 병진
건릉의 봉심에 관해 수원 유수 이만수가 상소하다
순조 1년, 1801년 4월 29일 화성행궁 객사 우화관 위에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정조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는 1804년에 화성에 능행에 현륭원과 건릉,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올렸다.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를 행하였다. 이러한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서 작헌례를 올렸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5일마다 어진과 화령전 건물을 살폈고, 매년 정조 탄신일과 납일(臘日, 동지[冬至]로부터 세 번째 미일[未日])을 가리키는 세시풍속, 음력 연말 무렵)에 제사를 올렸다. 이처럼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지방수령이 받들었던 곳으로 위상이 높다.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화령전을 지나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선경도서관이다. 요즘 핫한 행궁동 가장 위쪽에 있는 곳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수원 향토기업 선경의 유이다. 선경그룹은 노태우 정권을 지나 엄청난 성장을 하여 지금은 글로벌 대기업인 SK다.




선경도서관에 들어서면 로비 정면으로 걸작이 보인다. 선경도서관의 상징이다. 로비에 작은 전시를 자주 하므로 온전히 감상하기 어렵다. 방향을 달리해서 전시가 이루어길 바라지만 말이다.




"선경그룹 창업자이신 고 최종건 회장의 애향의 뜻을 기리고, 수원시의 지역발전 및 문화창달에 기여하고자 이 도서관을 수원시에 기증합니다. 1994. 12. 31. 선경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은 현 최태원 회장이 총수인 SK그룹이다. 최태원 회장은 최종현 회장의 아들이고 창업자 최종건 회장의 조카이다.

답사를 다니며 다리도 쉬고 물도 마시고 길손에게 더 없는 선물은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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