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蔡相)이 세상을 떠났으니 허무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근래에는 풍속이 야박하여 남인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을 가지고 배꼽 잡는 웃음거리로 삼는다고 한다. 저 대신은 유독 남인이 아니란 말인가? 마치 안개 속 앉아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인재를 보충하여 조정을 더욱 튼튼히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찌 밤마다 방을 맴돌며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429. 1799.1.18. 수원화성박물관, 2011, 『정조의 비밀 어찰 정조가 그의 시대를 말하다』, 290쪽.
1799년 1월 18일,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이 졸(卒)하였다. 향년 80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장수하였다. 남인의 영수로 노론(시, 벽파)과 정국을 주도하던 그가 죽으니 정조는 마음이 바빠졌다.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가니 그 괴로움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430. 1799.1.20, 290쪽.
이른바 사류(士類)라는 것들의 꼴이 어째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나도 모르게 팔뚝을 걷어붙이고 분개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430. 1799.1.20, 278쪽.
번암과 몽오는 사사로이는 정조의 스승이다. 채제공과 몽오 김종수(노론 벽파로 심환지, 윤시동과 영수를 맡았다)는 당파적 입장에서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역사의 라이벌이다. 그럼에도 사도세자 추숭과 화성축성 등 정조의 역점사업과 정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군왕 정조를 지지한 스승이었다. 이들에 대해서 정조는 채상, 몽상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
채제공이 죽자 정조는 정적이었던 벽파의 영수 만포 심환지(晩圃 沈煥之, 1730~1802)에게 채상의 조문(弔文)을 가라고 하였다.
채상 집에 조문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 있을 적에 한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는데, 죽은 뒤에 조문 한 번 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정(人情)이 아니다. 더구나 조정의 체모로 보아서도 더욱 이러해야 할 것이다.
어찰 529. 1799.10.14. 291쪽.

어찰을 통해 조용히 조문을 권유한 것은 당시 조정의 상황이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여 예송을 통한 붕당 간 경쟁이 노소 분당과 숙종 대 환국을 거치며, 영조 대 사실상 노론 전제화에 따라 붕당 간의 대결은 이미 학문적 예학의 논쟁에서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조문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정조가 죽자 심환지는 정순왕후와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는 한편, 노론 시파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때로 남인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다시는 조정에 출사하지 못했다. 채제공 자신도 황사영의 백서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된 것은 물론이다. 그래도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라 영남 만인소에 따라 1823년 관작이 복구되었다.
채제공은 영조가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
라고 이를 정도로 아낀 충신으로 정조 즉위 초 신변의 위험 속에서 그를 보호하고자 자진해서 수궁대장을 맡았던 정조에게는 아버지 같은 대신이었다. 실제로 정조의 아비 사도세자의 구명을 위해 목숨 걸고 간언한 충신이 채제공이다. 게다가 그 어려운 사도세자 추숭에 있어서 적극 협조하여 어머니 혜경궁과 사도세자의 환갑을 맞아 대대적으로 진행한 을미원행(1795년)과 회갑연을 준비한 그였다.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원찰 용주사에 정조 효심을 담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경판, 조판 또한 채상공의 업적이다. 따라서 정조는 채제공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사림장(士林葬, 3.26.)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에 친히 뇌문(제문)을 지어 내린다. 그 제문이 바로 묘 아래 비각에 세워진 '어제뇌문비'이다. 그리고 전례와 달리 파격으로 바로 시호를 내렸다.
영중추부사 홍낙성에게는 효안(孝安)으로, 봉조하 김종수(金鍾秀)에게는 문충(文忠)으로,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에게는 문숙(文肅)으로, 증 영의정 민진주(閔鎭周)에게는 정간(貞簡)으로, 좌참찬 윤봉오(尹鳳五)에게는 숙간(肅簡)으로, 공조 판서 유신동(柳辰仝)에게는 정민(貞敏)으로, 공조 판서 신응현(申應顯)에게는 충헌(忠憲)으로 각각 증시(贈諡)하였다.(贈諡領中樞府事洪樂性 孝安, 奉朝賀金鍾秀 文忠, 判中樞府事蔡濟恭 文肅, 贈領議政閔鎭周 貞簡, 左參贊尹鳳五 肅簡, 工曹判書柳辰仝 貞敏, 工曹判書申應顯 忠憲。)
정조실록51권, 정조 23년(1799) 2월 5일 계사
홍낙성·김종수·채제공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이렇게 내려진 채제공의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문은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숙은 마음가짐을 과단성 있게 한다는 것이다.

5월의 첫날 노동절이 된 국경일에 두 아해와 길을 나섰다. 공휴일에는 용인시 주차장이 무료이다. 가까운 처인구청에 차를 놓고 나선다.
"또 무덤을 가냐? 무덤 지도 만들려고?"
아내는 맨날 묘만 찾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역사는 사람의 기록이고 시간인데,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많은 글이 묫자리를 찾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당대를 이끌었던 인물을 가장 가까이에서 추모하고 역사하는 것은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묘를 찾는다.
『택리지』 에
'살아서는 진천이요 죽어서는 용인이다(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
라는 말이 유명하다. 용인은 천하 명당과 길지가 예로부터 많았다. 일명 3대지 8명당의 풍수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우리 역사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인 정몽주 남은, 이석형, 조광조, 이자, 김세필, 공서린, 정보, 오윤겸, 이단상, 이경증, 남구만, 이익, 이만성, 오명항, 이재, 황효원, 임정 등 그들이다. 이들의 유택(무덤)이 용인에 즐비하다.
이곳에 영정조대를 풍미했던 채제공의 무덤이 있다. 맑은 금학천을 건너(문화교)면 바로 용인경전철 에버라인 김량장역이 나오고 그 1번 출구에서부터 낙은로를 따라 북쪽으로 500미터를 오르면 역북동 숲숙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 돌봉산자락(가지능선)으로 오르면 바로 채제공 선생의 묘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역북동 낙은마을이다. 역북동은 본래 용인현 수여면의 금령역인 역동과 북동이 합쳐져 역북리의 자연마을을 이루었다. 이곳의 마을이 낙은(樂隱)마을이다. 낙은말은 용인 대로(大路)가 마을이라 나그네가 와서 쉬어 가는 여곡(旅谷), 즉 나그네골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낙은골에서 낙은으로 변음 된 것이다. (2006, 『용인시사 지명유래』, 691쪽.)





돌봉산 자락 높은 계단에 이르러 보면 왼편으로 먼저 어제뇌문비각이 나온다. 그 뒤로 산길을 잠시 오르면 산자락에 채제공 선생 묘와 그 아래 후손 묘 2기가 있다. 묘역과 뇌문비각 등은 2014년에 용인시에서 단장되었다.
사실 채제공 선생은 친혈육으로 제사를 잇지 못했다. 서손으로 아들을 두었지만 서손은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없어 양자를 들였고 그 양자도 또 양자를 두어 양자, 양손이 세계를 이으니 채제공 선생의 친혈육은 아니다.
화성을 설계하고 지은 사람, 그가 수원에 유택을 마련하다
채제공 선생의 묘가 고향인 홍주(홍성 청양)이 아닌 이곳에 들어선 것은 정조의 역점 사업이었던 화성축성과 관련이 깊다. 화성축성은 조야의 반대 속에서 당대 노론 벽파의 영수 몽오 김종수의 지지를 얻어 시작한 대역사로 이 역사에 채제공은 총리대신을 맡아 총지휘하였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93년(정조 17) 1월 수원에 행차하여 수원의 위상을 주나라의 풍이나 한나라의 패와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확인한 후(제왕의 고향, 즉 풍패는 자신의 아비의 유택이 있어 자신의 고향이라고 하여 수원을 신풍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관아 정문누각이 신풍루이다.), 수원부의 이름을 화성이라고 고쳐 유수부로 격상시키고, 수원유수는 대신과 무장이 맡아 장용외사와 행궁정리사를 겸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친위영인 장용영을 서울 내영과 수원의 외영으로 확대 개편(내외영신정절목)하고 화성의 걸맞는 축성 계획한다. 이른바
‘외영을 위해 내영을 세웠다‘
라는 정조의 의지였다.
이렇게 장용영을 강화하여 4유수부(개성, 광주, 강화) 가운데서도 정이품 이상의 대신급이 총찰하는 가장 상위의 유수부로서 서울 다음 가는 정치적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초대 유수로 채제공이 특파되었다. 도백인 관찰사(도 감사는 정2품 판서 이상) 이상인 정승이 차출된 것이다.
특히 수원 축성에 대하여 신기경(愼基慶)의 「시무십이조」 등 여러 제안이 있었지만 정조가 받아들인 것은 수원유수로 특파된 채제공이 1793년(정조 17) 5월에 개진한 축성 방안이다.
1793년 1월 정조는 수원에 나아가 장용외영을 출범시키고 화성이라 명명하여 축성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채제공은 5월 영의정으로 임명되기 직전 「축성방략(築城方略)」을 올려서 화성성역의 구체안을 올렸다. 그러나 영상으로 내직에 오르면서 일시 중지되었다가 정조가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채제공의 축성방략을 이야기하고 10년 계획의 축성과 비용을 금위영, 어영청의 정번군전을 이용할 구상을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정조는 10년치 정번전 25만량 등 45만량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하고 성제(城制)에 관한 구체적 논의를 하고 채제공이 조심태를 감동(監董)으로 추천하자 이에 정조는 총찰(摠察)의 책임을 채제공에 맡겼다.
따라서 채제공은 주관총찰(主官摠察)을 조심태가 감동당상(監董堂上)이 되어 수원에 축성을 하는 화성성역(華城城役)의 방침이 이날 조정에서 결정되었다.(정조실록 권8, 정조 17년 12월 을축.)
이렇게 화성축성은 본 궤도에 올라 남인 정약용이 화성 설계안인 「성제(城制)」를 지어올렸다. 이를 시작으로 총리대신 채제공과 감동당상 조심태는 화성 축성을 빠르게 진행하여 10년 계획의 축성 기간을 무려 2년 반이라는 엄청난 단축을 이뤄내는 신기를 발휘하였다.(유봉학, 1996, 『꿈의 문화유산 화성』(신구문화사), 149~150, 162~163쪽.

화성 축성과 함께 정조는 화성을 대도회로 만드는 구상을 적극 추진한다. 여기에 채상, 채제공이 적극호응하였다.
수원의 인구 집중책에 호응하여 전라도 해남 등에서 남인(南人)인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대거 수원으로 이주하였다. 남인 등용 등 정조의 정책방향에 크게 고무되던 남인의 명가(名家)들이 적극호응한 것이다. 따라서 수원에서 치루어진 과시(科試)에 윤지운(尹持運), 윤지섬(尹持暹), 윤지홍(尹持弘), 윤지철(尹持哲), 윤지익(尹持翼), 윤지식(尹持軾), 윤지상(尹持常), 윤지민(尹持敏) 등 여덟 사람의 시권이 남아있다.(수원지령등록[水原旨令謄錄], 경술 12.8.)
그런가 하면 중앙의 고위관료로서 정조의 측근이었던 인사들도 수원 인근에 그들의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여 미래를 대비하였던 흔적도 보이고 있다. 채제공이 수원에 가까운 용인에 새로운 근거를 마련하여 훗날 이곳에 유택(幽宅)이 들어서게 되며, 수원 인근 어천(漁川)에 조심태(趙心泰)가 근거지를 가져 이곳에 주택과 유택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양반과 일부 관료층의 이러한 적극적 호응으로 수원은 대도회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모습에 정조는 정조 15년 1월 원행에서 거리에 가옥이 즐비하여 대도회의 면모를 갖추게된 수원의 상황을 둘러보면 크게 기꺼워하고 있다. 정조 17년 수원의 성내 인구는 1,347호(戶) 5천여 명으로 급증하여 신읍치에 천여 호의 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유봉학, 1996, 『꿈의 문화유산 화성』(신구문화사), 79쪽.
이렇게하여 용인 낙은말에 채제공의 유택이 마련되며, 평강채씨 가문의 용인, 수원 입향이 이루어진 것이다.


묘 아래 80미터 떨어진 곳에 방부개석 양식의 오석으로 세운 어제뇌문비석이다.
전액은 '어제뇌문'이라고 올렸다. 정조가 짓고 쓴 제문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해서(楷書)로 각자했다.
어제뇌문御製誄文
의정부영의정 규장각제학 화성부유수 북용외사 사시 문숙공 체제공 장례날에 각신을 보내며 그 영에게 제문을 보내니 이와 같다.
소나무는 높고 높아 송연히 솟아있고, 산 또한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 경의 법식이 저 같으니 길고가 아님을 알리로다. 정연히 혼자 임하고, 외로운 일을 세 번씩이나 하시었고, 한결같이 순일무잡하였다. 목천을 잡아 역사를 편찬하고, 손수 법률이 아닌 것은 뿌리쳤다. 부월로 소인을 물리치고, 밤낮없이 충성을 다 하였다. 촉와도 쉽게 놀라고 파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밝히 분별하고 넓게 열어서, 우리들을 추노로 돌아가게 하였다. 무릎 펼 곳을 알고 눈물을 비가 내리듯 흘렸다. 일편단심 그 마음은 천신에게서 바탕한 듯하다. 만육을 빼앗음이 수레를 끌도록 하지 않으리오. 그 기개는 엷은 구름 같이 넓고, 국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도다. 문장에 발표하니 강개하고 청명하여 장주의 정을 취한 듯 열자의 진액인 양, 사마천의 골수 같고, 반고의 힘줄 같다. 잔치에는 남쪽의 축 풍류를 노래하고 양양하여 새롭게 하였다. 광주리에 가득 차고 또 찼으나 자기의 정을 다 쏟지 못하였다. 내가 매달린 거울이 아니고, 경은 실로 빈 배와 같도다. 만뢰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삼품은 화로 속에서 나온다. 번암이 일어나서 거리를 편안하게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다. 슬프다! 경을 거리에서 만남이여! 영고는 명철하여, 특별히 경악을 설치했다. 스스로 미관이 됨을 알았다. 우나라의 용과 같아서 왕명을 출납하고, 정나라의 교와 같아 사령을 윤색하였도다. 입으로는 임금의 약을 맛보기도 하고, 손으로는 천장을 철하기도 하였다. 위의가 정돈되어 엄숙하며 붉은 감과 푸른 노리개로다. 경을 알고 경을 쓰니 내 독실하게 스스로 믿노라.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채택하고, 경의 쌓인 포부를 취하였다. 책을 읽으면 반드시 끝까지 캐어 깊은 뜻을 알고, 경의 집정을 아름답게 여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을 청하고, 경의 해답에 기뻐하고, 풍류가 있으면 반드시 초대한다. 경의 풍운을 사랑하여 한 번 불러 사과드린다. 온 세상이 청렴, 결백하여지고, 이름 조정에 세워 50여년 지내왔다. 화려함을 청하고 백성을 위로해 줄 것을 요구하니 어찌 불의를 행하리오. 탁지중권과 예원추사를 역임하고 오랫동안 규각에 올랐으며 강한에 접무하였다. 육절은 빛나고, 변방에 머물기도 하고, 조정에 있기도 하였다. 이에 영상이 되어서 복몽함이 없었다. 흐름을 막는 돌같이 우뚝하여 큰 집을 지탱하는 기둥이시다. 은택이 백성까지 미치고 녹은 구족에 미쳤네. 도문에서 위포를 입고, 괴정에서 발석을 입으셨다. 서루친분은 위로 수성에 응하고, 학발상홀은 오히려 전형을 지녔도다. 이에 화성에 주둔하고, 청승이 길에 임하였다. 봄 이슬 받고 받아 손으로 송음을 가르친다. 70세 늙은이로 조정 원로로서 청주에서 기거하였네. 얼굴은 윤택하고 눈동자로 빛이 나며 단정 안온하다. 경이 80세를 기약하면 나는 백세를 살라고 하겠네. 서쪽에서 한 기운 와서 감히 진을 무너뜨린다. 중간에 인물이 일어나서 경 또한 기를 탔네. 조정에 노성이 없다면 국가를 그 어이하리. 또 어버이에게 효도한다고 소문이 나니 경 같은 이는 극히 드무네. 이제는 그만 두어야지, 병이 있어 한결같이 씻어 버렸다. 절구를 찧으며 격양가를 부르고 궤장을 하사하였다. 남과 더불어 잊혀지지 않으며, 시렁에는 아축이 가득 찼네. 의궐에 증부하여 길이길이 전하리라. 친히 뇌문을 지으니 500여 마디 말이 되도다. 평소의 일들을 기록하노니, 내 붓이 부끄럼 없어라. 부친 말이 멀고 커서 더함도 덜함도 없도다.
기미년(정조 23, 1799년) 3월 25일
(御製誄文
議政府領議政 奎章閣提學華城府留守壯勇外使賜諡文肅公蔡濟恭𦵏日遣閣臣替訣于其靈若曰 松喬上竦山嶻脚牢卿式似之判不桔槹挺然獨任義三秉一木天編史手握弗律斧鉞狐䑕日星忠藎蜀訛易驚 巴賨不贐洞辨廓闢返我鄒魯知申膝席血涕如雨自持寸丹質諸天神萬育莫奪百劫無磷盖卿禀賦俊𠁊英特 寧驥櫪伏不駒轅促薄雲氣槩呑潮局量發之於文忼慨瀏𠅙莊精列液馬髓班筋燕南歌𥬑抗隊新翻篋𨿽魏盈 杼不曽投予匪懸鏡卿實虛舟萬籟歸竅三品出鑪起来樊巖坦履康衢嗟卿巷遇 寧考則哲特置經幄知自簮 筆若龍於虞出納 王命若僑於鄭潤色辭令口甞 御藥手綴 天章魚魚雅雅赤芾蒼珩知卿用卿予篤自信 有謨必采取卿抱蘊有牘必詡嘉卿秉執有事必咨喜卿諧洽有唱必醻愛卿風韻一号負荊舉世廉藺太阿如水 疇敢弧車筞名立朝五十年餘淸華要膴奚適不冝度支中權藝苑樞司延登奎閣接武江漢煌煌六節藩留及閫 乃立之相不卜不夢捍𣴑屹石支厦巨棟澤漉羣黎祿仁九族桃門韋布槐庭襏襫西樓七分上應壽星鶴髮象笏 尚有典型爰宅于華靑䋲路臨采采春露手指松隂大耋元朝聽漏起居渥顔炯眸端拱稳趨卿期八齡予謂百歲 西来一氣敢肆乖沴間起人物卿亦乗箕朝無老成國其何為且聞孝親罕如卿者今焉已矣有涙一灑舂杵遽撤 几杖未錫不與人亡滿架牙軸徵付剞劂將壽其傳親製誄文五百餘言歷鋪平素予筆無愧寄語弘遠毋忝毋貳 己未三月二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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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죽었다. 상이 친히 제문을 지어 사제(賜祭)하고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채제공은 고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의 방손(傍孫)이다. 영종(英宗) 계해년에 급제하여 특별히 발탁되어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벼슬이 숭질(崇秩)에 이르렀다. 상이 즉위했을 때 채제공의 이름이 환옥(宦獄)에 나왔으나 상은 차치하고 묻지 않았다. 경자년 이후에는 정신(廷臣)이 삼대 역안(三大逆案)을 가지고 공격하여 온 나라가 일제히 그를 성토하였으나, 상이 즉위한 지 이미 오래인지라 더욱 탕평의 정사에 힘써 무신년에는 어필(御筆)로 친히 그에게 정승을 제수하고 인하여 윤음(綸音)을 내려 제신들을 밝게 하유함으로써 감히 다시는 다투지 않았다. 이로부터 은우(恩遇)가 날로 융숭하여졌고, 그 사이에 또 독상(獨相)도 수년을 지냈으니, 대체로 백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을 짓는 데는 소(疏)·차(箚)에 뛰어났고, 일을 만나서는 권모 술수 쓰기를 좋아하였다. 외모는 거칠게 보였으나 속마음은 실상 비밀스럽고 기만적이었다. 매양 연석(筵席)에 올라서는 웃고 말하고 누구를 헐뜯거나 찬양하는 데 있어 교묘하게 상의 뜻을 엿보았고, 물러가서는 상의 총권(寵眷)을 빙자하여 은밀히 자기의 사적인 일을 성취시키곤 하였다. 상은 매양 그를 능란하게 부리면서 위로하여 돌보아주고 누차 널리 포용해주었다. 그런데 사술(邪術)003) 이 널리 퍼짐에 미쳐서는, 상이 사교도들의 마음을 고쳐 귀화시킬 책임을 일체 그에게 위임했으나, 그는 사교에 연연하여 흐리멍덩한 태도로 은근히 사당(邪黨)을 비호하다가 끝내 하늘에 넘치는 큰 변이 있게 만들었으니, 《춘추》의 의리로 논한다면 먼저 치죄하는[先治]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교하기를,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 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004) 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양 주대(奏對)할 적마다 선왕의 웃음이 새로웠는데, 그때는 그의 수염이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005) 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죽은 판부사 채제공 집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의당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승지가 치조(致吊)하는 일은 홍 영부사(洪領府事)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고, 내각의 속관을 보내어 상제(喪制)를 돌봐주는 일과 호상(護喪)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각신(閣臣)과 대신(大臣)의 전례에 의거해서 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의 치제(致祭)는 승지가 스스로 의당 거행할 것이나, 내각의 치제에 대해서는 또한 김 봉조하(金奉朝賀)의 전례에 의거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기를 기다려서 각신을 보내 거행하도록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보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사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丁丑/判中樞府事蔡濟恭卒。 親製文賜祭, 贈諡曰文肅。 濟恭, 故大提學蔡𥙿後傍孫。 英宗癸亥登第, 特被簡拔, 歷敭內外, 官至崇秩。 上御極, 濟恭名出宦獄, 而置勿問。 庚子以後, 廷臣以三大逆案, 擧國齊討, 上臨御旣久, 益懋恢蕩之政, 戊申以御筆拜相, 仍下綸音, 洞諭諸臣, 不敢復爭。 自是恩遇日隆, 間又獨相數載, 蓋百年來初有也。 爲文長於疏箚, 遇事好用權數。 外則麤厲, 內實秘詭。 每登筵, 笑語抑揚, 巧伺上旨, 退則憑恃寵眷, 陰濟其私。 上, 每駕馭慰藉, 屢加涵容。 及邪術熾張, 上以革心歸化之責, 一以委之, 而濟恭顧戀漫漶, 庇護邪黨, 竟致滔天之變, 論以《春秋》之義, 難乎免於先治之律矣。 敎曰: "憂民一念, 乙夜明發際, 聞長逝之報, 展也之人, 何斯至斯? 予於此大臣, 實有人所不知, 而己所獨知之奧契。 此大臣, 間氣人物也。 其稟賦也傑然有氣力, 遇事直前, 不懾不撓。 發之爲詩, 悲壯忼慨, 人云有燕、趙之遺風。 妙歲策名, 受知寧考, 綰金穀而掌邱甲, 潤色乎雲(章)〔漢〕 之章, 竭誠於嘗藥之地。 每一奏對, 天笑爲新, 而其鬚猶未及星矣。 及予嗣服以後, 市虎交騰, 櫪驥靡挫, 拔之俎刀之中, 躋之鍾鼎之上。 由內閣入耆社, 壽至八耋, 擬賜鳩杖。 其位高而職親, 眷厚而寵盛, 使一世之人, 關口而奪氣, 可謂得如彼其專, 而古亦罕聞焉。 且況五十餘年立朝, 所秉之固, 卽尤所歎服者, 今也己巳焉已矣。 卒判府事蔡濟恭家, 凡百擧行, 自可按例, 而承旨致弔, 依洪領府事例, 遣閣屬官恤孤, 及護喪等節, 依閣臣大臣前例, 成服日致祭, 承旨自當擧行, 內閣致祭, 則亦依金奉朝賀例, 待祭文製下遣閣臣, 而祿俸限三年輸送。 葬前議謚。")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1799) 1월 18일 정축
판중추부사 채제공의 졸기


묘역은 단분이다. 봉분, 상석, 망주석, 석양 한 쌍이 배열되어 있고 봉분 앞에 묘표가 있다. 원래는 묘표가 없었다. 채제공 묘의 큰 특징인 봉분 앞에 묘표가 없는 것이었는데, 이는 정조가 내린 뇌문비 때문이었다. 그후 관작이 삭탈되고 복구되는 1823년 후로 새롭게 세운 것으로 본다.
묘제석물의 특징은 석양과 망주석 한쌍을 갖추고 있는데, 혹자는 문인석이 없는 것을 들어 박장으로 말을 하나 이는 잘못이다. 이러한 묘제는 영.정조 시기 유행한 사대부가 묘제 형식으로 비교적 위엄에 맞게 잘 갖춰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갖은 석물을 갖춘 무덤양식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그 앞시기나 혹은 후세가 갖춰놓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효심을 앞세워 조상의 무덤을 치장한 것이다.
고관대작이라도 이 당시 군왕인 영조가 검소를 몸소실천하고 있어서 그 자신의 묘도 병풍석(둘레돌) 하나 못 둘렀는데, 하물며 권신이 후장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치를 금하는 이유로 조선전기부터 사대부가의 아녀자에 가채를 없애고 쪽머리를 하게한 임금이다.
그래서 당대 영의정을 지내 권신인 청풍 김재로, 김치인, 김상로, 김취로, 김안로 등의 재신들의 묘에는 둘레돌까지는 설치하였다. 그러나 몽오 김종수의 묘처럼 채제공의 묘도 정승을 지낸 높은 신분이나 둘레돌을 세우지 못했다. 같은 시대 같은 신분이나 같은 예장의 묘제석물을 세우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조선은 유학을 근본으로 하는 사대부의 나라이고 채제공은 유학을 한 선비다. 퇴계학을 이은 종장의 묘인데, 이러한 묘가 박장이라고 흉일 수 없다. 청백리나 선비의 묘가 호사스런것은 조상을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이다.

방부개석의 묘표는 1823년 관작이 복구되면서 건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 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검수규장각제학증시문숙공번암채선생제공지묘(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 藝文館春秋官觀象監事撿授奎章閣提學贈諡文肅公樊巖蔡先生濟恭之墓)
채제공 선생이 생전에 수행했던 관직이다.

일호 불사(一毫不似)라고 한다. '초상화를 그리는 데 있어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이는 유가 정신의 표본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 초상화는 임금을 그린 어진이라고 해도 머리카락 한올 다르게 그리지 않았다. 따라서 채제공의 초상 역시 그가 어린 시절 앓은 천연두 로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으며, 특히 눈이 사시라는 것도 전혀 숨기지 않고 그려냈다. 서양의 미화된 합스부르크가의 초상화와 대조적이다. 이러한 사실주의로 유명한 것 또한 채제공의 초상화다.













퇴계학의 종장이자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퇴계 이황, 한강 정구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남인 계보가 미수 허목,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의 근기학파(경세치용)로 이어지는 계보를 정리하고 그가 이익을 이은 종장이 되었다. 이러한 계보를 확립한 그는 근기학파의 종장이자 남인의 영수로서 그의 앞선 종장 성호 이익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채제공은 퇴계학의 정통으로 퇴계 정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거유이다.
식성(食性)이라는 것은 태어남과 함께 생긴다. 그러나 천하 사람의 식성이 같지 않은 것은 마치 그들의 얼굴이 각기 다른 것과 같다. 단맛을 좋아하는 자가 있고, 신맛을 좋아하는 자가 있고, 짠맛을 좋아하는 자가 있고, 담박한 맛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 비록 성현일지라도 음식에는 치우침이 없을 수 없으니, 문왕(文王)의 창포 김치나 증석(曾晳)의 양조(羊棗)가 그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오행(五行)의 성(性)을 받고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는데, 그 받은 오행의 성의 후박(厚薄)이나 다과(多寡)에 따라 성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진실로 이치이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대저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윤택하던 얼굴이 변하여 마른 얼굴이 되고, 검던 머리카락이 변하여 흰머리카락이 될 뿐만이 아니라 성이 그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 밤낮이 상반되는 것과 같다. 소년기에 단맛을 좋아하던 자가 혹 짠맛을 좋아하고, 짠맛을 좋아하던 자가 혹 담박한 맛을 좋아하여, 전날에 좋아하던 것을 보면 이마를 찌푸리며 토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 자가 드물다. 한 사람의 성이 이와 같이 서로 현격하게 전후가 다른 까닭이 무엇인가?
아아, 내가 그 까닭을 안다.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몸의 큰 변화이다. 몸도 변하는데, 성이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저 하늘은 이기(理氣)의 주인이다.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사이에서 남몰래 그것을 헤아리지는 못하나, 사람은 하늘이 낳았다. 무릇 자식 된 자는 성과 행동이 아버지를 닮으니, 사람을 보고도 유독 하늘을 알지 못하겠는가.(食性也。與生俱生。然天下之人。食性之不同。如其面之各異。有嗜甘者。有嗜酸者。有嗜醎者。有嗜淡者。雖聖賢。於食則不能無偏。文王之昌歜。曾晢之羊棗是也。人之生也。禀五行之性而氣以成形。則隨其禀之厚薄多寡。性亦以之。固理也。獨怪夫少而壯而老且 及焉。則不特顔之渥者變而爲枯。髮之漆者變而爲雪。其性之從以改遷。不啻若晝夜之相反。少之嗜甘者或嗜酸焉。嗜醎者或嗜淡焉。視前日之所嗜。不至於嚬蹙而哇之者幾希。以一人之性。前後之不同若是其相懸。其故何也。噫嘻。我知之矣。人生而死。身之大變也。身且變焉。性其可不變矣乎。今夫天。理氣之主也。雖不敢隱度於無聲無臭之際。人。天之生也。凡爲人子者其性其行。惟其父是似。觀於人。獨不可以知天乎)
번암집 제58권 설(說)
식성설〔食性說〕
그는 식성설을 통해서 성인의 성도 절대 불변이 아닌 바뀐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이는 살아생전 퇴계의 가름침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퇴계학을 잇는 정신은
"(유교가) 고집만 자꾸 부리면 안 됩니다.
퇴계 선생께서도
'시종(時從: 시류에 따르다)'을 따라라. 세상을 사는 대로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근필(89살) 퇴계 16대 종손
"성인도 세속을 따른다"
권헌조(현대 퇴계학 마지막 유자)
라고 하며, 성인 조차도 시류를 따르는 것으로 성이란 불변의 성이 아닌 변화의 성으로 이를 바로 보고 세태의 변화를 이해하여 적극적인 경세와 치용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퇴계의 가르침이었다.
또한 퇴계는 꼬장꼬장한 원리원칙에 얽매인 유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였기에 채제공도 당시 유자의 허례허식과 거드름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옷을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걸을 때는 천천히 걷고 앉을 때는 꼿꼿이 앉는데, 그 학식(學識)을 물어보면 꽉 막혀 있고 그 행동의 동기를 살펴보면 인욕(人慾)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사람을 유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네모난 가사를 입고 염주(念珠)를 걸치고 절을 하면 고두례(叩頭禮)를 하고 여름이면 결제(結制)를 하는데, 그 학업을 물어보면 《주역》을 손에서 떼지 않고 그 글을 읽어 보면 여러 문체(文體)를 다 구비한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사람을 승려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외면은 그러하면서 내면은 그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나는 그러하지 않은 점을 가지고 그를 그러하지 않다고 여기고, 외면은 그렇지 않으면서 내면은 그러한 사람에 대해 나는 그러한 점을 좇아 그러하다고 여기니, 그러한 점을 과연 귀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러하지 아니한 점을 과연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今有衣縫掖冠章甫。行則徐坐則危。叩其有。茅塞也。觀其由。慾坑也。若是者可謂之儒乎。衣方袍荷念珠。拜則膜夏則結。問其業。羲易不離手。讀其文。衆體無不具。若是者可謂之釋乎。然於外不然於內。吾以其不然而不然之。不然於外然於內。吾從其然而然之。然果可不重之乎。不然果可不恥之乎。
번암집 제33권 서(序)
《해봉집》 서문〔海峯集序 〕
사회개혁적 경세치용의 시작은 퇴계정신의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러한 퇴계의 가르침은 채제공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 경세치용이 확립되고 뻗어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유산을 집대성한자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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