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일, 폭민 약 천명이 장안 우정양면사무소를 파괴해 서류 전부를 소각, 폐기해 면장을 데리고 갔다. 한층 더 그 수가 증가해 약2천명이 되어 화수경찰관 주재소(내지인 순경 1명, 조선인 순경보 3명)(수원 서남쪽 8리)를 덮쳐, 가와바타 순경이 발포해 항거 했지만, 총알이 떨어져 마지막에는 참살되어 그 순경의 시체는 51개소의 흉터를 남겨, 이비(귀와 코)를 깎아 음구(陰具)를 절단 하는 등, 잔혹을 가해 게다가 주재소에 방화 병기를 탈취해 그 지역을 떠났다.
「경기도 수원 안성지방 특별검거반의 행동」, 『독립운동가자료 기타보고서』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꽃피는 4월 누군가에게는 가슴 시린 날이다. 그간 제주 4.3이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3.1절 당시인 3월 1일의 중요성보다 4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만세시위로 인해 제주 4.3 이전 우리 민족에 있어서 가장 참담하고 가슴 아픈 시기가 3월 말에서 4월이었다. 이 날은 전국 방방 골골 어디나 제삿날이었다. 제주도가 그러하듯 말이다.
3월 1일 경성에서 기미독립선언이 있고 가장 치열하게 싸운 시기의 대표적인 곳이 바로 ‘삼괴(三槐)’ 지금의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이었다. 이 글에서는 1919년 3.1운동 와중에 수원지역 현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지역에서 있었던 일제에 맞서 대규모 항쟁을 벌였던 3.1운동을 이 지역의 옛 명칭이자 고유한 '삼괴'라는 지명을 붙여 항쟁이 발발한 역사적 시점인 1919년 4월 3일을 기념하여 '삼괴 4.3'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당시 역사를 처음 학술적 검토를 했던 것은 독립운동기념관 연구원 이정은이 처음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이라고 한 이래 그 배경사적 연구를 한신대 서굉일 명예교수가 밝혔고, 수원시 학예사 이동근이 천도교의 주도성을 밝혔다. 특히 수원대 박환 교수는 당시 주민들이 보다 철저하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운동성을 파악, 주목하여 '화수리 항쟁'이라고 하여 이날의 역사를 더욱 선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오늘 수원시 중심인 팔달산 위에 우뚝 솟은 대한민국기념비 역사성을 짚어보고 '삼괴 4.3'을 더욱 명확히 하고자 한다.
팔달산에 위치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원래 자리는 수원지역에 있었던 3.1운동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으로 타살된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노구치 히로조(野口廣三, 화성시 등 학술서적은 이름을 '고조'라고 함)와 화수리 경찰관주재소 순사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추념비가 있던 자리에 건립한 것이다. 일제는 이들 타살된 순사를 추념하고자 충혼비를 1926년 세워 해방 전까지 초혼제를 거행했다.

『경성일보(京城日報)』 1926년 6월 30일자, 「순직경관 기념비, 27일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
[수원] 전부터 화홍문(華虹門)의 고대(高臺)에 건설중이던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기념비(招魂記念碑)가 준공되어 27일 오전 10시부터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렬자는 지원(地元, 그 지방) 수원(水原) 및 경성의 관민 수백 명으로 순직자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유족(遺族, 모당, 누이, 딸)이 제막의 거적을 당겼고, 남성적인 여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기념비는 영원히 빛나는 순직자의 영예 그것과도 같으며, 식후 비전(碑前)에서는 무도대회(武道大會)를 거행, 도내 각서(各署)에서 30조(組)가 출장하여 장렬한 시합을 벌였고, 본사 기증의 특제메달을 받은 고점시합(高點試合)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념비)
이들 사인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1937)도 함께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
일제는 이들에 대한 추모 행사를 해방 전까지 지속
『매일신보』 1933년 4월 28일자, 「수원서(水原署)에서도 순직경관 초혼(招魂)」
『매일신보』 1934년 4월 26일자, 「순직경관 초혼제 거행, 수원읍(水原邑)에서」.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4월 29일자, 「수원경찰관(水原警察官) 초혼제(招魂祭) 집행」
『매일신보』 1943년 4월 25일자, 「순직경찰관(殉職警察官) 수원서 초혼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굴 2020.2.18.


수원군민의 갸륵한지성결정 독립기념비건립
수원군민의 갸륵한지성결정
독립기념비건립
기미년학살터우에빛나는제막식
수원지국전화. 빛나는 대한민국정부를수립한 오늘의 영광은 저 기미년 독립운동에서 왜적의 총칼앞에 만세를 부르고 쓰러진 수많은 선렬지사들의 거룩한피의 결정이거니와 왜정사십년동안이강산에는 가는곳마다왜적의 공비(功碑)만이침략의 발자국을색여놓았 든것이다. 해방이되자 도처에서 이치욕의기록을 지우기에 겨레들은 바뻣으나 그발자국에 우리새역사의 기념탑을 세우는쾌사는 있기드므럿든 참에 이제 기미년 혈투의 기억도새로운 수원한구석에군민들 지성의 결정으로 독립기념비를 건립케된 것이다.
이비는 삼일운동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학살하였든 왜놈 야구광삼(野口光三)과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의 가증무쌍한 추념비(追念碑)를 8.15해방과함께부셔버린 수원 방화수류정의 자리에세우게된것인데 작년10월 22일에 착공하야 준공까지 연공사일 80일간 그리고 52만원의공사비로 민수원군수를위시한 실로26만명의군민과 어린학도3만명의 갸륵한지성으로이룩한 것이다.
이뜻깊은기념비의제막식을 축학하기 위하야군민학생다수와 내무장관신성모씨 문교장관안호상씨 신국회의장을 비롯하야구경기도지사등 래빈참석하에 민군수의 의의깊을식사가있은다음 하야케 드리웟든기념비의막을 서서히올려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였다 번쩍이는화강암에 먹자리도 선명하게 대한민국독립기념비라고 색인비문이뜻있는 사람의 감회를할갓도꾸는바있었다. 이여서신내무장관 신국회의장 이부통령의축사 대독과 구지사의축사가 있은다음 만세삼창으로 12시반뜻깊은 제막식을 끝마치였다(사지은독립기념비)
조선일보 1949.1.18.


수원에서 제막식성대거행
수원에서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제막식성대거행
수원. 잔악무도한 왜적을 이땅에서 몰아내고 또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 왜적들로말미아마쓰러진 수많은 선렬들의 거룩하신 유업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땅의 독립을 영구히 빛내일독립기념비의거사는 수원읍내에 세우기로 결정되어 민군수를 비롯한 26만에 달하는 군민들의 끈임없는 지성으로 지난해 10월 22일부터 착공하여오던바연공사일 80일만에 오십이만여원에 달하는 거액을 던진 공사는 드디어 준공되었든 것이다.(사진은 동 독립기념비)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군민들의 기뿜은 더한충크련만 지하에잠든투사들의 영령좋아이비우에감돌아춤출 것이다. 이뜻깊은 기념비의 제막식은 드디어 지난 16일 상오 11시부터 이대통령대리인 신성모 안호상 신중희 국회의장을비롯하여 구 경기도지사와 당지유지다수참석하 먼저 국민의례에이어 민군수의 열렬한 식사가 있고 제막이 있은 후 신내무장관으로부터 뜻깊은 독립기념비제막에 당하여
여러 학생과 군민들에게 말하고저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열강이 승인한 독립국가이며 이 기뿜이란바로여기세운기념비와같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만치우리는마음으로부터 단단한결의와각오로자손만대에 잘살도록꾸며야하겟다
라는 축사와 신국회의장의
이제우리가 오랫동안원하고바라던독립이오고야 만 것이다.
수원이아니고 방방곡곡이독립을기념하는비가 세워져야할 것이다. 특별히 수원은3.1독립선언자가 제일많었던것이며 우리의독립사상의 깊으니만큼 기념비가제일먼저 세워지는 것이 당연사이다
독립은 남의간섭을버서나 우니나라를 우리의 손과힘과피로써 바꾸고찻는 것이다.
우리는사십년동안 피로힘으로 싸웠다는것을기억하며우리대한민국은 우리의힘으로되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러고 많은선열의피와 힘을자랑하는동시에아직도완전한독립이 달성치못한것을기억하고 삼천만이마자손만대억천만대로 보존하기위하여 힘써야할거이다
라는 훈사가 있고 만세삼창으로 12시반경 성대한식을 맞추었다.
동아일보 1949.1.18.


순직경찰관초혼비’는 해방 직후에 파괴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그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건립되어 1949년 1월 16일에 이승만 대통령의 대리(代理)로 신성모 내무부장관과 안호상 문교부장관을 비롯하여 신익희 국회의장과 구자옥 경기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제막식이 열렸다.(조선.동아일보 1949.1.18.)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1969년 10월 15일(수원시민의 날) 3·1동지회가 주관하여 3·1독립기념탑과 함께 수원 팔달산 중턱으로 이전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3·1운동 때 처단된 일제경찰 추모비 사진 발굴 2020.2.28. 16:00.
이렇게 건립된 대한독립기념비는 전체적인 형태가 일제 충혼비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념비 여러 곳에 총탄흔이 발견된다. 이는 건립 이듬해 6.25한국전쟁이 터지며 화성일대에서 전투(장안문 주둔 중공군에 대한 미공군 폭격이 이루어져 문루와 성곽이 파괴되고 중공군 사상자가 다수 발생-전 수원시장 심재덕 증언)와 군대 주둔이 이루어졌던 사실이 있기 때문에 기념비가 있던 방화수류정 일대가 장안문 일대와 가깝기에 입은 탄흔으로 보인다. 그리고 탄흔이 조준 사격이나 난사로 인한 의도적인 훼손은 아닌 유탄의 흔적이 아닌가 한다.

이렇듯 3.1운동에서 수원지역의 만세시위가 특별하고 보편적인 지역적 역사성을 가지는 것은 바로 당시 수원은 오늘의 수원시와 화성시, 오산시를 포함한 광역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제가 강점 후 행정구역 개편과정에서 나온 결과(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전국을 13도(道), 12부(府), 317군(郡)으로 나누어 지방의 행정을 관장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지방행정 정리조처를 시행하였으며 1917년에 이르러 이른바 조선 면제(面制)의 시행과 더불어 법제화에 들어갔다. )이지만 사실 오랫동안 이 지역은 사회경제적, 문화, 특히 역사적으로 한 지역이었다. 다만 지금 화성시 북부인 남양 지역(화성특례시청 소재지)은 수원과 더불어 때론 수원보다 높은 고을 격을 가진 남양부이다. 그렇지만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수원과 남양은 완전히 다른 지역은 아니었다. 결국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 등 근현대에 이르러 행정구역상 하나의 지역은 수원이 되었고 현재는 인구의 변동과 시의 성장에 따라 현재와 같이 나뉘어 있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도단위 광역화를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래 한국의 균형발전을 위한 초석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시군구 광역화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수원, 화성, 오산은 지금의 지방분권 체제에서 하나로 합쳐 미래로 나아가야 할 공간이다.
이러한 논의는 최근에 있는 것이 아닌 오랫동안 지역의 화두였다. 그러나 번번히 지역에서 작은 이권으로 분립하는 것에 매몰된 정치인, 공무원들로 인해 지금까지 하나의 지역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통합적 리더 역시 수원, 화성, 오산에 오늘까지도 기대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크고 인구도 많은 발전적인 지자체인 수원지역이 분립주의자 또는 그러한 통합에 대한 의미를 모르는 얼치기들로 인해 통합 수원의 길을 가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결국 역사적 단절도 야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여한 삼일운동의 수원의 가치가 지자체로 분립되어 분절되고 단절되었다. 수원에서 있었던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지식인, 청년학생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래 지역의 지도자들이 연대하여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는데 중요한 사건을 열거하면 3.26일 사강시위에서 노구치 처단, 3.29일 오산장 시위, 3.31일 발안장 시위로 개화유림 이정근 지사 등 순국, 4.3일 삼괴지역 대규모 시위로 장안, 우정면사무소, 화수리 주재소 파괴 및 순사 가와바타 처단, 그리고 4.15 제암리 학살만행까지 이르는 장장 두 여달에 이르는 3.1항쟁이었다. 특히 삼괴지역의 시위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철저한 진압과 토벌에 나서게 되었고 마침내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3.1운동 지도자와 주모자로 거론된 천도교 인사들을 주민들과 집단으로 학살하는 만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계책은 통하여 4.15 이후 더 이상 지역에서는 3.1독립시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이미 공식적인 일제의 3차례에 이르는 검거반의 토벌 과정에서 수백 명의 주민들이 체포되거나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원지역의 역사성으로 볼 때 이는 단순히 수원, 화성, 오산에서 따로따로 할 것이 아니라고 공통분모로서 연구되고 기념되어야 할 우리 지역의 유산이다. 분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진정한 수원으로 거듭나야되지만 아쉽다. 그래도 지역의 대표적 3.1독립관련 기념시설로 화성시에 제암리순국기념관을 확대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바람이 있다면 화성시에서 ‘시’를 빼로 이재명 대통령이 천명한 3.1독립혁명의 뜻을 모아 수원지역 3.1독립혁명의 전당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있지만 천안의 3.1운동을 기리는 장소가 아니듯 이곳은 수원지역의 독립의 열망을 담은 수원의 독립기념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뜻에서 수원지역의 3.1독립혁명을 더욱 명징하게 보여주는 당시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을 ‘삼괴 4.3’이라고 한다.

삼괴 4.3은 수원지역 지도자들의 독립운동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 대규모 독립항쟁이다. 따라서 수촌리 구장이자 동학군과 천도교 지도자로 이른 백낙렬, 특히 정서송 지사(용인 출신으로 장안면 사랑리 거주)는 서울의 3.1독립선언을 직접 참여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지역에서 동지들과 돌려 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삼괴 4.3은 특히 천도교인 구장(현재의 이장) 백낙렬(수촌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차희식, 수촌․제암교회의 담임 전도사 김교철 등이 이웃한 제암리 안종환, 유학자 이정근 선생 등과 교류하며 대규모 시위를 모색하였다.
마침내 1919년 수촌리 마을 뒷편에 위치한 개죽산에서 3.1운동 당시 최초로 봉화를 올려 진다. 따라서 3월 말 4월 1일을 전후하여 산상횃불시위가 이루어진다. 특히 당시 심문자료와 김선진의 조사 기록에 의하면 4월 1일 밤 7시 수촌리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쌍봉산, 팔탄 천덕산, 향남 가재리 당재봉, 석포리 무봉산, 어은리 남산, 이화리 보금산, 장자터 봉화산(흥천산) 운평리 성신재, 매향리 망원대에서 시작되어 각각 봉화가 올라 4월 2일 밤 전지역으로 봉화횃불이 올랐다.

새벽 5시 수촌리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독정리를 거쳐 200여명으로 불어나고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오전 10시가 넘어 차희식 등 200여 군중이 몽둥이를 들고 장안면사무소를 에워쌌다. 차병한과 차병혁이 안에 들어가 장안면장 김현묵을 끌고나왔다. 차병한 등의 요구로 시위에 가담한 김현묵은 만세를 불렀고 주민들이 환호하였다.
시위대는 김현묵과 면직원들을 앞세워 서쪽으로 우뚝 솟은 조암리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이어 주민들이 돌과 몽둥이로 일제히 장안면사무소를 때려 부수고 불을 놓았다. 이 때 불탄 장안면사무소의 피해액은 630원 이른 다고 한다.
불타는 장안면사무소를 뒤로 하고 나아가는 주민들은 쌍봉산에 앞산인 주봉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 항쟁지인 우정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소식을 듣고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이미 천오백여명이 훨씬 넘어있었다. 이때 김문명이 면장과 면서기들을 향하여
간척지 매립 때문에 너희들은 일제통치 기구편에 선 조선인이요 친일 조선인으로 벌써 맞아 죽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도망치면 때려죽인다."고 엄포를 하였다.
이날 면장 김현묵은 하루종일 주민들과 함께하다 저녁무렵 사람들 몰래 빠져나가 다음날 새벽 1시경에 수원군청으로 가서 이사실을 보고하였다.
1919년 4워 3일 장안면사무소 시위 중..
오전 11시가 넘어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운 주민들이 쌍봉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내려와 면장 김현묵과 면서기들을 앞세우고 사기말(화산리)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주민들이 우정면장 최중환을 찾아 혈안이 되었지만 면장과 서기들은 이미 도망하고 보이지 않았다. 우정면사무소마저 때려부수고 불을 놓았다. 그리고나서 주민들이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쌍봉산 길로 화수리에 넘어가고 나머지는 곧장 한각리 솔밭으로 가서 잠시 숨고르기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들이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에 다다르니 4월 한낮에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오후 5시경, 이미 2,000여명이 넘어있었다.

이때 차인범, 이영쇠, 백순익, 김덕근 등이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주민들도 만세를 외쳤다. 이때 석포리 구장 차병한은 주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김흥식, 장소진, 장제덕, 백순익, 김종학, 인수만, 김명우, 김응오, 김교철, 김여근, 김황운, 윤영선 등이 앞장서서 돌과 몽둥이로 주재소를 부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급박한 사태에 주재소에 근무하고 있던 순사보 오인영과 이용상, 박재옥은 주재소를 황급히 빠져나와 도망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순사 가와바타 토요타로(川端豊太郞)는 앞마당으로 달려나와 주재소에 들어온 사람들을 향해서 총을 쐈다. 연달아 3발에서 4발의 총성이 울렸고 주민 세명이 그자리에 쓰러졌다. 잠시 적막이 드리워지고 이틈을 타 가와바타는 쏜살같이 화수사거리 쪽으로 도망쳤다. 이 때 쓰러진 사곡리 이덕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화수리 기봉규는 다음날 죽었다. 같은 동네 김만우는 다행히 작은 부상만을 입었다.
주재소를 뛰쳐나온 가와바타는 혼자서 한 300m쯤 떨어진 주재소 북쪽 언덕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순사 가와바타가 도망치는 것을 본 주민들이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았다. 도망치던 가와바타는 결국 주민들에게 둘러쌓였고 이때 주곡리 차희식이 그의 동지들 장제덕, 장소진 등과 앞장서서 가와바타를 몽둥이로 내리치고 내동댕이 쳤다. 순식간에 몰려든 주민들은 가와바타를 향해 돌을 던지고 발로 밟고 한참동안 분노를 쏟아 냈다. 그렇게 가와바타는 처단되었다.
가와바타은 처음 검거반의 보고에서 귀와 코, 성기가 잘리는 등 주민들에게 심한 시신의 훼손이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나 실제 사인과 검안에서 마구잡이의 구타로 나타나는 전두부골이 파열과 두부, 면부, 경부, 흉부, 복부, 등 38개소에 창상, 그리고 뇌진탕과 두개골골절의 출혈이 확인되었다. 이는수원자혜의원(水原慈惠醫院) 의사 겸 수원경찰서 의무촉탁 기시다(岸田 徵)가 감정한 결과이다.


주재소마저 다 때려부수고 불태우고 나니 주민들에게는 불안이 엄습했다. 저마다. 어찌해야 될지 서성거렸고 탄식하였다. 이때 수촌리 구장 백낙렬은“이제 수비대가 오면 총으로 우리를 사살할 것이니 남산에 가서 웅거하여 대항하자”고 강건하게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의연한 그의 이야기에 주민들은 해산한 후 저녁을 먹고 쌍봉산 맞은편 남산에 모여 수비대와 회진을 하자고 결정을 하였고 더는 설왕설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 둘 씩 자리를 뜬 주민들은 그날 밤 남산에 모인 사람은 없었다. 일제 수비대의 보복이 두려웠다.
주재소를 뛰쳐나와 혼자 멱우리에 송만영의 집에 숨어있던 이용상은 겁에 질려있었다. 주민들이 순사보를 뒤쫓아 나서 집들을 찾아나서자 몰래 빠져나와 이웃한 송영석 집의 마루 밑에 숨었다. 그는 언제 어떻게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죽을 지 몰라 허둥지동 겁을 잔뜩 먹고 있었고 그날 밤 발안 주재소로 달려갔다. 당시 상황이 너무나 무서웠던 그는 멱우리에서 발안을 가는 사이 해창리에서 헛깨비를 보며 시간을 허비했다. 늦은 밤 11시 반에 발안주재소에 도착한 이용상은 순사부장 이노우에(井上龜雄)에게 삼괴지역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말하였다. 이노우에는 그런 극박한 상황을 왜 이제야 와서 이야기하냐고 다그치자 너무 무서워 숨어있다. 밤사이 도망왔는데 도중에 괴물을 만나 혼비백산하여 늦었다고 하였다.
다음날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아쓰다(熱田 實)와 군인 5명이 화수리 주재소 사건 진상조사차 현지에 출장을 나왔다. 이때 가와바타의 주검도 수습하였다. 이들은 사건을 조사하고 담당 순사부장 아쓰다는 4월 4일 발안주재소에서 수원경찰서장 경부 후루야(古屋)에게 화수리 소요에 관련한 ‘폭도에 관한 상황 기타의 일 보고’를 작성하여 보고 하였다.
이후 일제는 순사가 처단되고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이 심상치 않음을 여기고 하세베(長谷部) 대위를 중심으로 특별검거반을 편성하여 대규모 체포 및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헌병 경찰관 9명과 보병 5명이 수촌리에 난입하여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불을 놓아 불길을 피해 뛰쳐나오는 주민들에게 총을 난사하였으며 이날 방화로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은 물론 민가 대부분이 방화되었고 주민 6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4월 9일 대규모 시위 첩보에 따라 츠무라(津村憲美)헌병특무조장(憲兵特務曹長)을 책임자로 하사 이하 6명, 경찰관 4명에 후루야(古屋) 수원경찰서장 이하 7명과 보병 15명 협력 아래 3개 반을 편성하여 오산과 우정․장안면이 있는 화수반도 일대에 대대적인 검거를 벌였다. 이때 우정면, 장안면 내 25개 마을(어은리, 주곡리, 석포리, 멱우리, 금의리, 사곡리, 독정리, 이화리, 고온리, 덕다리, 사랑리, 화산리, 호곡리, 운평리, 원안리 등)을 포위하고, 204명의 시위 주모자들이 체포되었다. 수촌리는 이때도 1차에 이어 2차로 검거반이 난입하여 방화되고 남은 나머지 가호를 불태우고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불태워졌다.



화성 수촌, 화수리 일제만행 자료발견
사료연구가 이종학씨 서울대도서관서
뉴욕서 간행된 영문판 '한국의 사례' 책
사진함께 잔학상 상세히 기록
수원근교에 있는 수촌리(경기도 화성군 장안면)와 화수리(화성군 우정면)는 근처의 제암리와 함게 3.1운동 당시 일본경찰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자행된 곳.
이곳 수촌리와 화수리의 일제만행현장을 담은 70년전의 사진이 최근 자세한 현장기록과 함께 학계에 공개됐다.이 사진은 3.1운동 2년 뒤인 1921년 미국 '뉴욕'에서 간행된 '한국의 사례(The Case OfKorea)'라는 책속에 실려있는 것으로 사료연구가 이종학씨가 서울대 도서관에서 관계자료를 살펴보던중 찾아냈다.
'헨리 정'이라는 저자가 영여로 쓴 이책은 주로 한국내 일본 식민지통치의 잔학상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필자 '헨리 정'은 한국인인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다.
사진 가운데 수촌리의 만행사진은 마을 전체가 불에 타 곳곳에 불탄 가옥의 잔해가 널려있는 모습을 담고있다.또한 저자가 쓴 사진 설명에는
'햄릿의 망령이 아름다운 수촌마을을 덮고있다. 전체 마을의 42채 가옥중에서 34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단지 8채의 가옥만이 남았다'
고 쓰여있어 당시 일제의 잔학상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한편 화수리 현장사진은 가옥들이 불에 타 흔적만 남아있고 장독대 위의 용기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다.마당옆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은 불에 타버려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있고 곳곳에 가재도구들이 널려있는 모습이다. 사진설명은 '화수리마을은 일본의 야만적인 군대들이 오기전까지 그림처럼 평온한 마을이었으나 일본군대들은 마을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적고 남아있는 것은 단지 몇개의 장독들이라고 소개했다.
이책의 저자인 '헨리 정'은 학살이 자행된 직후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들과 같이 이 두 곳을 방문, 목격한 현장기록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수촌리의 생존자 가운데 몇몇 나이 많은 여성들은 비탄에 빠져 넋을 잃은채 길가에 앉아있었으며 어린이들은 들판에 나가 풀속에서 무엇인가 뜯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먹을 것을 찾고 있는 듯했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마을 주민들은 우리에게 몰려들어 자신들이 당한 일들을 얘기하려고 애를 썼다.'
이 책을 학계에 공개한 이종학씨는
'책의 내용 중에는 수촌리 학살사건이 지금까지 알려진 4월 15일이 아닌 6일로 되어있으며 화수리 사건 역시 4월 4일이 아닌 4월 11일로 되어 있어 사건 발생의 정확한 날짜를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 밝히고 있다.
현재 수촌리에 있는 3.1운동기념비에는 학살 사건의 발생일자가 4월 5일로 적혀있으며 국내에 출판된 3.1운동 관련서적에도 같은 날짜로 알려져 왔다.당시 일제에 의한 학살사건은 3.1운동 과정에서 화성군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3천여 명이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고 화수지서를 습격, 순사부장을 살해한데 대한 일본경찰의 보복조치로 일어난 것.
특히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사건은 마을 교회안에 주민들을 가두고 불을 지른 후 총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수촌리와 화수리사건은 그 실상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사진설명 3.1운동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학살현장이었던 화수리(위편)와 수촌리의 피해현장.
홍찬식 기자
1989년 4월 13일 목요일 『동아일보』 제20779호.
4월 13일, 발안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거류민단장 사사카(추모비에는 발안주재소장으로 잘못 기록)가 향도(길잡이)가 되어 일제수비대를 앞세워 수원군 우정면 화산리에 들이닥쳐서 이 지역 만세운동의 배후자로 김연방 지사를 지목하였다, 일제는 김연방 지사를 엄호하던 문중 집사 김태원과 함께 잔혹하게 살해한다. 이 때 99칸 종가(수령 400년 느티나무 앞)도 불태워졌다. 그리고 20년 뒤 그의 묘를 이장할 때 그의 시신에서 탄환이 두 주먹이 나왔다고 전한다.
김선진, '제암 고주리의 3.1운동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다', 미래문화사, 1983, 132쪽.

수촌리, 화수리, 화산리 등 우정, 장안면이 일제에 의해 쑥대밭이 된 이후 4월 15일. 일제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두고 보지 않고 확실한 보복으로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를 파견한다. 그ㄱ는 분대 11명을 인솔하여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 주민 순사보 조희창, 발안 거류민 단장 사사카(佐板)를 앞세워 제암리에 갔다. 안면이 있는 조희창과 사사카는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기독교인 12명, 천도교인 25명이 무참히 학살하였다. 또한 이들이 이웃 마을 고주리로 이동하여 천도교인 김흥렬을 비롯한 김성렬, 김세렬, 김주업, 김주남, 김홍복 등 가족 6명도 학살하였다.



제암리 학살만행 이전 일제는 삼괴의 4.3을 철저히 진압, 토벌을 하여 수원경찰서 순사부장 아쓰다(熱田 實)와 순사 나가무라(長村淸三郞)에 의해 차희식 선생 등 34명 구속하고 수원경찰서장 경부 후루야(古屋淸威)에게 보고하였다.

일제가 수원지역 58개 마을에서 328채의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 47명을 살해했으며 17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442명을 검거하여 갖은 고문을 가하여 일제 만행의 잔혹성은 국제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제암리학살사건이 집중 조명을 받아서 나온 결과로 이때 수촌리 참화를 보고받은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가 수촌리를 방문하다가 제암리 현장을 찾았고 이를 계기로 각국의 선교사 및 특파원, 외교관인 R. Curtice(영국부영사), A.W. Taylor(재팬 어드버타이저 특파원), H.D. Underwood(장로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F. Schofield(장로교 선교사,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Royds(영국 대리영사), W.A Noble(선교사, 수원지방 감리사), E.M.Cable(감리교 선교사, 협성신학교 교수), S.A. Beck(감리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B.W. Billings(감리교 선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F. Heron Smith(감리교 선교사, 일본인교회 담당), 등이 이 지역을 직접 다녀가고 난민 구호에 힘쓰는 한편, 일제의 학살 만행을 해외에 알리고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공식적으로 그 책임을 물으며 국제여론을 진작시켰다.
당시 이 곳 사정을 알리는 글을 소개한다.
이 마을은 울창한 숲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름진 논들이 뻗어 있었다. 마을 가운데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지주의 좋은 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은 이제 깨진 기와장과 벽돌더미로 변하고 말았다.(중략) 약 40채가 넘는 가구 중에서 18가구만이 남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중략) 완전무결하게 황폐한 모습이었다. 다음은 이 마을이 불길에 싸여진 당일의 상황이다. 4월 11일 새벽 마을 사람들은 집이 불타는 소리와 연기 냄새로 단잠을 깨자 마당으로 달려 나온 사람들은 경찰과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뛰어나오자 그들은 총격을 가하고 매질을 했다. 사람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노소를 불문하고 산으로 도망쳤다. 부녀자들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남자들은 큰 아이를 끌고 걸음을 재촉해서 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난처를 구하기 전에 총에 맞아죽고 무기로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정한경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20년 간행한 『한국의 사정』
화수리 마을에서는 시골 부자의 큰 집이 불탔다. 그 집은 37칸 크기로 17칸 규모의 2층집이 달려 있었다. 대문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23 채의 건물이 불타고 3명이 살해되었다. 마을에서 언덕 넘어 반마일(800m)떨어져 있는 절도 소실되었으며 불상을 모신 작은 건물 하나가 남았다.
제암리사건 매티 노블 기록(1919).
박환, 2004「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정신문화연구』제27권 제1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pp. 139~140 참조.
이렇게 국제여론이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위기가 크게 일자 조선총독 하세가와는 이들 피해지역의 구호자금을 집행하기로 하는 한편 검거토벌작전을 기획했던 경성헌병대장 겸 경기도 경무부장 시오자와(塩沢義夫)를 견책(譴責)하고 현장에서 총괄 지휘했던 경성헌병대 부관 겸 경기도 경무부 경시 하세베(長谷部 巖)를 중근신 15일, 수촌리 방화 책임자였던 경성헌병대장 쓰무라(津村 勇)을 중근신 5일(2차 검거반 활동), 제암리사건의 책임자 아리타(有田)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마무리 하였다. 특히 아리타는 이후 무죄판결을 받으므로써 일제의 이러한 조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이 분위기를 수그러 들게 하려고 했던 기만책에 불과했다는 것이 명백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군 헌병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내는 전문에 이와 같은 조치가 불과피하게 이루어졌고 정당하다고 밝히고 있어서 당시 검거토벌작전을 폈던 지휘관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날의 처참한 모습은 이제는 없다. 한적한 시골마을.. 낯선이의 방문에 개짖는 소리도 들리지만 평온한 지금의 화수리.. 역사적으로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의 절정에 다다랐던 역사적 장소였던 만큼 기념비석은 있지만 오늘 우리들이 느끼고 볼 수 있는 일제 화수리 경찰과주재소를 복원하여 건립하면 좋을 것 같다.
다 아쉬움이다. 숱한 이야기는 떠돌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으니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간다. 이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
라고 한다. 오늘 우리가 그날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세대와 시대에 맞는 기념과 추모.. 역사적 의미부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수원군 우정․장안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크게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당성(당항성=唐城)이라는 특수성으로 일찍부터 선진문물이 자유로이 드나들던 대중 교역로의 중심이었으며 12~13세기의 대몽항쟁과 16세기 임진왜란을 거치며 충(忠)의 정신이 고양되었다. 정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높은 진경시대 문화(眞景時代 文化)의 수혜자가 되었으며 이후 한말 활빈당(韓末 活貧黨),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의병활동, 애국계몽활동 등 반봉건, 반외세의 민중항쟁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애족애민(愛族愛民)의 충절을 가진 화성 정신이 있었다.
경제적인 배경으로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이 대거 토지를 불하 받고 많은 수의 일본인이 토지조사사업이 완성될 즈음 이주하여 이에 따라 당시 많은 농민들의 토지 이탈과 소작농화는 고질적인 식민지 농정의 모순이 되었고 당시 염업 중심의 주민생계는 일제 염업 정책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과도한 염세에 따른 수탈은 급기야 염세 저항운동을 야기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주민들 다수의 불만으로 내재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무단통치에 따른 그 하부조직인 면사무소, 당시 우정․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에 있던 헌병경찰제 말단 조직인 주재소의 설치에 따라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주재소의 횡포에 시달리게 된 것이 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석포리 등지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간사지의 간척사업 등으로 외부에서 들어온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그들이 처해있던 고공신분(雇工身分)의 한계를 적극적인 저항으로 표출하였던 폭넓은 민중항쟁의 성과였음을 주지한다.
때문에 ‘삼괴 4.3항쟁’은 적극적이고 폭넓은 대중과 각계각층의 신분이 참여하고 여러 종교집단이 연합한 항일독립운동이며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를 처단하는 일련의 사건은 만주와 노령 지방의 무장항일투쟁의 맥을 잇는 한민족해방운동사의 의의를 가진다.
한편 3․1운동 이후 진행된 일제의 보복과 탄압 과정에서 빚어진 당시의 참상이 이곳을 찾은 선교사의 증언을 토대로 조명되어 제암리나 고주리에 못지않게 그 실상이 참담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삼괴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항쟁의 결과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 만행의 빌미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출처(논문) - 이병권, 2006「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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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1 5 년을 참고참아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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