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달이선생 2026. 3. 22. 12:57

육십오 번째, 우리 조선시대 명신으로서 시호를 가지고서 널리 행세할 수 있는 이는 세 분을 들 수 있다. 익성공하면 즉 방촌 황희 임을 알고 문익공하면 즉 정광필이 임을 알고, 충무공하면 즉 이순신 임을 알 수 있다. 봉증으로써 행세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 있는데 요동백하면 즉 김응하 임을 알게 된다.(六五, 我朝名臣, 有以諡而行于世者三人, 曰翼成公則知其爲黃喜(厖村), 曰文翼公則知其爲鄭光弼, 曰忠武公則知其爲李舜臣, 有以封贈者一人, 曰遼東伯則知其爲金應河也。)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권일상(卷一上) 갑오이전(甲午以前)

2011년 개관한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은 이순신을 대표하는 기념관이다. 현충사에 위치한 시설로서 오랜 세월 충무공가에서 전해내려온 가보들을 중심으로 소장하고 전시한다. 다만 충무공의 중요한 유물 중에서 국가적 위상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이나 독립기념관 등에 전시되어 있는 것도 있고 국사편찬위원회나 규장각 같은 연구기관에서 연구와 소장을 목적으로 도처에 있으므로 진본이 아닌 모본 등이 있다. 대표적인 의장용 장검도 모본이다. 그리고 올 초까지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기획전 등을 할 때도 유물이 옮겨가기 때문에 진본, 모본이 섞여 있다. 많은 부분 진본인지 모본인지 구별은 어렵다. 설명과 안내에 표시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전시 중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가문 소장 거북선도 등이다.

조선에서 충무공의 위상은 역대 군왕의 추앙으로 조선 제일의 충신이자 문반 대가 송시열과 함께 무반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육십칠 번째, 선대 유학자로는 우암 송시열을 추대하고 충의를 다하여 공을 세운사람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추대하는데 조정에서 그 후손들을 대접함이 심악(깊고 두텁)하여 다른 명신가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단 두가문의 후대자손들은 벼슬을 하면서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워 청렴결백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六七, 先儒推尤庵(宋時列), 忠勳推忠武公(李舜臣), 朝家所以待其後者甚渥, 他名臣家無與爲比, 但兩家雲仍,居官貪汚, 無以廉白聞者。)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권일상(卷一上) 갑오이전(甲午以前)

이러한 충무공의 빛과 다르게 그림자도 분명히 있었다. 조상의 위상으로 자신의 위신을 추켜세우는 잘못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순신은 시대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서도 그 출중한 능력은 다시금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어서 실제로 충무공가의 후손들도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 조상 덕에 살지만 조상을 넘어설 수 없는 능력의 차이는 겸손을 넘어 부족함, 무능으로 보여지기도 하였다.

육십육 번째, 충무공의 사손 이문영은 됨됨이가 활발하지 못하고 기개도 시원치 않았다. 병자년(고종 13년, 서기 1876) 봄에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이 강화도에 내박하여 조야가 공포를 느꼈다. 이문영이 대원군을 알현하여 만났는데 대원군이 희롱하여 이르기를 “자네가 충무공의 후손인데 왜놈을 격파할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는가?” 했다. 이문영이 힘주어 말하길 “대감은 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막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했다. “계책이 어떠한 것인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충무공의 팔대손이 못났는데 청정의 팔세손인들 어찌 영특하고 용감하겠습니까?” 하여 듣는 사람들이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고 한다. 그때의 청륭은 청정의 팔대손이라 전하여졌으며 문영 역시 충무공의 팔대손이었다.(六六, 忠武公祀孫文榮, 貌寢氣不揚, 丙子(高宗十三年)春, 黑田淸隆泊江華, 朝野震懼, 文榮適謁雲峴, 雲峴戲之曰, 君乃祖孫也, 破倭有何良策, 文榮應聲曰, 大監勿急, 此易禦爾, 計將安出, 曰忠武公八世孫, 乃爾孱劣, 淸正八世孫, 有何莫勇, 聞者絶倒, 時傳淸隆爲淸正八世孫, 而文榮距忠武亦八世孫也。)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권일상(卷一上) 갑오이전(甲午以前)

기념관은 특별기획전으로 충무공 사당을 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현존하는 것까지 전국에 걸쳐 무려 23곳이나 있었다. 충무공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남해 통영 충렬사가 충무공의 대표 사당으로 인정되었는데 그곳을 대표하는 충무공 유물은 명나라 황제 만력제가 하사한 팔사품이고 이곳 현충사에는 충무공가가 보관해온 세 유품으로 명나라 장수로부터 받은 요대 등이다. 이 사당과 더불어 남해 충렬사는 이순신 시신을 제일 먼저 모신 곳으로 가묘가 세워져 있는 유일한 이순신 사당이다. 특히 이곳에 충민공비(忠愍公碑)가 있다.

충민은 시호 충무를 받기 전 이순신을 기리는 것이었고 이러한 사적을 남해현령 이정건(李廷楗)이 1633년(인조 11년)에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 충령묘비각 뒤편 본당(本堂) 앞에 세운 비이다. 이 비석은 이후 1793년(정조 17년) 충무공의 5대손 호남절도사 이명상(李命祥)에 의해 이충무공비(李忠武公碑)로 고쳐 세워지고 충민공비는 묻쳤다. 그러다 1973년 7월 매몰되었던 충민공비를 후일 참고하기 위해 다시 복원하여 본당 좌우에 충무공비와 나란히 세워졌다.

숙종 사액 현충사 현판 진본
숙종 사액 현충사 현판이 걸린 구현충사, 현재 모본이 걸려있고 진본은 전시관에 있다.

선조의 가장 잘한 것 중 하나인 이순신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것으로 이를 명령한 유서(1591년)
'충무' 시호 교지 계미년(1643년 인조 21) 3월 28일
정조의 영의정 증직 교지(1793년 정조 17, 7월)
정조가 유득공을 시켜 편찬한 이충무공전서
전라수군절도사에 오르기 전에 장수로서 능력을 보여준 녹둔도 만호시절 업적을 기록한 도첩이다. 수군 장수로 알려진 이순신이지만 육전에도 능한 명장임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승첩에도 불구하고 상관 북병사 이일의 무고로 투옥되고 동료 무장 선거이 장군이 병조판서 정언신에게 무고함을 편지하여 풀려났다.

 

특별기획전

충민공비(忠愍公碑)

충민공비

장군(將軍)은 국가의 충성스러운 열사(烈士)였다. 통제사(統制使)로서 만력(萬曆) 정유년의 재난(災難)을 당하여 국가의 위태로움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국난(國難)을 막고 노량(露梁)에서 운명(殞命)하셨다. 청산(靑山)도 그대로이고 벽해(碧海)도 예전처럼 흐르는데, 불초(不肖)한 내가 욕되게 이 고을의 수령(首領)으로 부임(赴任)하여 오장(五丈)의 언덕에서 조제(弔祭)하여 고(告)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감추지를 못하였다. 봉록(俸祿)을 내어 장인(匠人)을 모으고 이 언덕에 사우(祠宇)를 세우니, 영원히 향화(香火)를 의지하여 오래도록 안녕(安寧)하소서. 장군의 일월(日月)을 꿰뚫는 충성은 세상천지에 알려졌으며, 위대한 업적은 국사(國史)와 오성(鰲城) 이상국(李相國 이항복)이 지은 바 행장(行狀)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후세(後世)에 장군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은 나의 변변치 못한 글로 대략 쓴 것에 기대를 갖지는 말 일이다. 장군의 본관(本貫)은 덕수(德水)요, 성(姓)은 이씨(李氏)며, 휘(諱)는 순신(舜臣)이다. 숭정(崇禎) 계유년 7월 경술일에 행 남해현령(行南海縣令) 이정건(李廷楗)이 기록하다.

(忠愍公碑 將軍國忠烈人也以統制當萬曆丁酉之難王事未整星殞於 露梁之上靑山不改碧海長流余不肖辱守是邦弔告於五丈之原不覺潛然出涕卽捐俸鳩工立祠是原永屬香火依歸良有以也將軍之軒天地貫日月忠偉續祥在國史及鰲城李相國僎行狀後欲知之者不待余之陋說畧擧其槪其德水人姓李諱舜臣也 崇禎癸酉七月庚戌行南海縣令李廷楗 記)

국가유산 지식이음

팔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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