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아산 현충사 이충무공 유허

달이선생 2026. 3. 18. 14:54

충청도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顯忠)’이란 호(號)를 내리다

(賜忠淸道 牙山 忠武公 李舜臣祠宇號顯忠)

숙종실록45권, 숙종 33년(1707년) 2월 6일 기축

현충(顯忠)이라는 말은 친숙하다. 쉽게는 6월 6일 현충일이 그것이고 현충하면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곳, 현충사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충사는 유생들이 일어나 서후경 선생이 상소하여 충무공 사당이 세워졌다.

충청도 유생 서후경(徐後慶)이 소(疏)를 올려, 고(故)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위하여 아산(牙山) 땅에 사당을 세우기를 청했으니, 이는 이순신이 생장(生長)한 고향이고, 구묘(丘墓)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忠淸道儒生徐後慶, 疏請爲故忠武公 李舜臣, 立祠于牙山地。 以其生長之鄕, 而丘墓所在也。 上令該曹稟處。)

숙종실록39권, 숙종 30년(1704) 5월 16일 갑인

이어 숙종은 현충사라고 사액(현충 : 충무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리고 나타낸다)하였다. 일반 사당에서 국가 공인 사당이 된 것이다. 정조가 충무공을 매우 존경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정조의 증조인 숙종대왕 역시 장수로서 충성을 다한 충무공에 대한 생각이 깊었다. 그래서 우리가 널리 아는 현충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현충사가 있기 전까지 아산에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이른 시기 장인 방진에게 물려 받은 고택 뒤편에 가묘를 세워 선무공신이 된 이순신(증 우의정)에 대하여 불천위 제사를 시작하였다.(1604년)

또한 인근 온양 정퇴서원(1632,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등 배향) 별당에 임진왜란의 충신 충무공과 창암 강봉수를 향사하였지만 정작 충무공의 터전인 아산지역의 국가사묘로 온전히 충무공만 모시는 사당이 없었는데 숙종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흔히 서원이아 사당(사우)이 주변에 많아 보여 이를 세우는 것이 쉽게만 느껴질 줄 모르나 실은 사우를 건립하는 것은 상당한 명분과 비용의 문제로 쉽지않다. 더욱이 건립된 사우를 유지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 임금과 국가로부터 공인되는 절차인 ‘사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조 때 송시열의 뜻을 받든 기세등등한 노론 조차도 노성 궐리사의 사액을 받지 못했다.

그 어려운 일을 충무공이 살며 무과 급제했으며, 그 유택이 있는 것을 인정한 숙종이 감압한 것이다. 충무공에 대한 흠모가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충무공에 대한 국가 공인 서원은 도처에 있었으며 정조 때에는 11곳, 지금까지 파악된 곳이 무려 23곳이다.

특히 아산 현충사가 대표성을 갖기에는 1606년 충무공 휘하 장수였던 통제사 이운룡이 통영에 건립하여 1663년에 사액된 충렬사가 있었다. 통영 충렬사는 이순신 단독 배향이고 통제영의 수장이자 조선 수군 총사령인 역대 통제사들이 제향을 주관하는 대표적인 충무공 사당이었다. 따라서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은 ‘신미존치 47서원’의 사당이다. 다만 일반명칭으로 통영은 행정단위가 아닌 수군군영을 말하므로 행정적으로 고성현에 속한 곳이라 예부터 ‘고성 충렬사’였다. 지금은 병영인 통영이 혁파되고 이곳이 행정적으로 용남군이 설치되고 통영군을 거쳐 충무시와 합해 통영시가 되었으므로 통영 충렬사가 된다.

또한 이 사당과 더불어 남해 충렬사도 건립 연원이 올라가고 이순신 시신을 제일 먼저 모신 곳으로 가묘가 세워져 있는 유일한 이순신 사당이다. 특히 이곳에 충민공비(忠愍公碑)가 있다.

충민은 시호 충무를 받기 전 이순신을 기리는 것이었고 이러한 사적을 남해현령 이정건(李廷楗)이 1633년(인조 11년)에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 충령묘비각 뒤편 본당(本堂) 앞에 세운 비이다. 이 비석은 이후 1793년(정조 17년) 충무공의 5대손 호남절도사 이명상(李命祥)에 의해 이충무공비(李忠武公碑)로 고쳐 세워지고 충민공비는 묻쳤다. 그러다 1973년 7월 매몰되었던 충민공비를 후일 참고하기 위해 다시 복원하여 본당 좌우에 충무공비와 나란히 세워졌다.

현충사가 충무공을 모신 대표적인 곳이 된 것은 충무공가의 불행에서 기인한다. 충무공가는 나라에 충성했던 충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충절은 집안의 가장 큰 가치다. 충무공 휘하에서 종군했던 조카 이완이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정묘호란을 당해 속절없이 무너졌지만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고(충무공 휘하에서 종군했다면 충분히 군사적 역량을 키웠겠지만 장수 역량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5대손 이봉상은 이인좌의 난을 맞아 충청병마사로 청주성에 있을 때 청주성이 함락되고도 이인좌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이렇듯 무능은 할지라도 충절을 버리지 않는 것이 충무공가의 전통 그것이다.

따라서 13대 종손 이종옥도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알게 모르게 가산을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마침내 아산 고택과 유택, 위토(제수 비용 마련 토지) 모두 빚으로 경매에 넘어가는 불행이 일어난다. 이때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하였다.(1931.5.23.)

이충무공유적보존회 창립 1931.5.23.(장소 수표정 조선교육협회, 동 사무소설치, 위원장 윤치호 선출) 동아일보 기사 5.25. 각방면의 유지회합 유적보존회창립각방면의 유지회합유적보존회창립작일, 조선교육협회안에서 모이어리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햇다소생된 충무공숭배열보존회위원십오인선거지방대표도수씨가 참석묘소, 위토, 유물영구보존을 목적유적에 대한 각항보고 리충무공 묘소, 위토, 사당, 유물 등을 영구하게 보존할 방침을 강구하자는 회의는예정과가티 23일 오후 2시시내수표정 조선교육협회에서 개최되엇다 정각 남궁훈씨로부터 개회를선언한후 의사진행에드러가 림시의장남궁훈 서긔신명균량씨를 선거하고회명칭은 리충무공유적보존회로하기로 만장일치 가결했다. 다음위원을 선거한결과 알에와가티 15인이당선되고 회무전반에 대하야서는 위원들에게 일임하기로 동네시경 폐회햇다.위원 윤치호 남궁훈 유진태 박승빈 유억겸 최규동 안재홍 조만식 정광조 김정우 김병로 정인보 한용운 윤현태 송진우회를마친후 위원들은 별실에서 림시위원회를열고 위원장윤치호씨를 선거한후 즉시폐회했는데수일후또사시 위원회를열터이라고한다별항 보존회의 석상에서 유진태씨로부터 충무공위토, 묘소문제에대하야 알에와가튼 보고와 주장이잇섯다충무공 위토수입은 일년간 195원인데 그중 세금과산림조합비 등 110원을 제하면 나머지 85원이다 이것으로써 그유물,묘서등을 보준하기는 절대로불가능한일이며 더욱이 그 위토는은행에 저당이되어잇으며 묘산도 어떠한곳에 잡혀잇다고한다이와가튼 형편이니 우리보존회에서는 적어도 이만원가량을드러가지고 공을 긔넘할여러가지사업을 하지안흐면 안되겟다고햇다사무소설치창립된리충무공유적보존회의 림시사무소는 수표정42번지 조선교육협회안에 설치하얏다한다 동아일보와 대대적인 민족(충무공추모)성금운동을 벌여 모금된 성금(2만여 명 참여)으로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7일 현충사를 다시 건립(6.5. 음력 5.2.)하여 낙성하였다.(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

이충무공영정봉안식화보 동아일보 1932.6.7. 사진 설명 현충사 낙성식, 영정봉안식, 충무공영정, 요여에 영정 광경, 현충사 비석, 종손 이종옥, 일반참배광경. 보존회위원 일동 남궁훈, 윤치호, 송진우, 유억겸, 이상범, 백관수, 정인보, 박승빈, 김병로, 김철중

 

이렇게 아산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대표하는 민족의 현충사, 아산을 대표하는 충절의 대표 사당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존경하여 대대적인 성역화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충사를 그저 사당 하나로 생각하고 왔다가 놀란 것은 상당히 넓은 경내에 이순신가 고택과 충무공이 무예를 익힌 마당과 활터, 이순신을 대신해 왜군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다 순절한 막내 아들 이면의 묘와 여러 후손들의 묘, 이 마을이 있게 한 아산의 대부호이자 충무공의 장인인 보성군수 방진과 남양홍씨 묘 등 경내가 엄청났다. 사실 이곳은 충무공 이후 덕수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후손이 대대로 살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를 대대적으로 성역화하면서 현충사 경내 마을을 빼내 그 옆 이주민단지를 만들어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현충사에 가면 현충사가 아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바로 잡으면 그렇다. 본래 숙종이 세우라 하고 사액한 현충사 현판이 걸린 현충사의 자리는 지금의 현충사 맞은편 충무교육원 뒤편 구릉에 위치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헐리자 사당의 건축부재가 모두 땅에 묻혀 지금도 그 잔해를 볼 수 있는데, 이곳에 1906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아산 유림들이 충무공의 충절로 국난 극복을 다짐하는 의미로 ‘현충사유허비’를 세워 놓고 있다. 이순신 묘를 보고자 왔던 이들이 현충사 너른 경내를 한참 돌아보고 나서 이곳을 찾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정인보 선생 등이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중건한 현충사는 지금의 현충사 내이지만 이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하면서 지금의 녹기와로 격을 높인 현충사를 세우면서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숙종이 내린 현판도 기념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정무문
정려각
충신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겸 령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충청 전라 경상 삼도통제사 시 충무공 이순신지려 - 선묘 갑진 시월 일 명정 (忠臣有明 水軍都督 朝鮮國 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德豊府院君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忠淸 全羅 慶尙三道統制使諡忠武公李舜臣之閭-宣廟甲辰十月日命旌)
충신 충민공 이봉상 정려
활터 앞으로 고택이 있다. 그 앞 은행나무는 충무공과 그 후손들을 지켜본 이 자리의 가장 큰 어른이다.

 

새벽 2시쯤 꿈에서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물에는 빠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 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측면

선조 31년 서기 1597년 정유년 9월 16일 명량해전 뒤에 충무공은 서해를 거슬러 칠산바다를 거쳐 고군산도에까지 갔다가 우수영으로 돌아 내려온 것은 20여일 뒤인 4월 초9일이었다.

다시 몇 날 뒤 10월 14일 새벽 충무공이 꿈에 말을 달려가다가 길 아래 넘어지자 세째 아들 면이 와 안는 형상을 보고 깨었는데 저녁에 둘째 아들 열의 편지를 받으니 겉봉에 통곡 두 자를 썼고 안에는 면이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놀라운 소식이 적혀 있었다.

 

후면

면은 1577는 정축 충무공이 33세 되던 해 정월에 났는데 어려서부터 인물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지혜와 용맹을 갖추었으며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므로 공을 그가 가장 자기를 닮았다 하여 가장 믿고 사랑하던 아들인데 뜻밖에도 이런 소식을 들은 것이라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분하고 애통한 마음을 하소할 길이 없었다.

이 때 왜적들은 저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분풀이를 하려고 공의 고향 아산으로 올라와 마을 안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었는데 면은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집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뛰쳐나가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니 애석도하다 때에 나이는 21세이었다. 충무공은 아들의 슬픈 소식을 듣던 그날의 일기에 이같이 적었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친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남달리 영특하므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천치가 캄캄하다”

 

충무공은 밤새도록 울었다 밤마다 울었다 흰 띠를 띠고 통곡했다.

공은 10여일이 지나 그달 29일에 목포 고하도로 진을 옮기고 또 다음해 2월 17일 멀리 고금도로 옮겨 가 마지막 진을 쳤다.

 

측면

어느 날이었다 공은 어슴푸레 낮잠이 들었는데 면이 꿈에 나타나 자기를 죽인 왜적이 공의 진 속에 사로잡혀 와 있음을 알려주어 포로들 중에서 그 놈을 찾아내어 아들의 원수를 갚아 주었거니와 면은 이같이 어린 나이로 조국을 위해 생명을 의롭게 바쳤으므로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로서 이름이 천추에 전할 것이다

1970년 12월 일

노산 이 은상 글 일중 김 충현 씀

충무공 세째 아들 이면의 무덤 묘비문 이은상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이순신은 10만에 무과 급제하였다. 방진은 일찍이 무관으로 보성군수를 역임하였고 활을 잘 쏜 명궁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을 사위로 맞아 들인 것은 가깝게 지내던 명재상 이준경의 중매였다.
통훈대부행 보성군수 상주방공 진 지묘. 비 숙인 남양홍씨 부좌. 위 구비와 같다.
삼문이 서고 고래등 같은 99칸의 대가집은 아니나 소박한 충무공가의 절제가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공경가가 아닌 무관으로 무반 명문가이긴 했지만 조선은 숭문주의의 사대부가 주인인 나라였다. 그래도 사대부들은 충무공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는 충열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고택 가묘
삼문을 들어서면 팔작지붕의 현충사 본전이 나온다. 여기에 충무공 영정을 모셨다. 그런데 우리나라 건축에서 보통 사우는 맞배지붕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 '현충사' 현판이다.
충무공 이순신 영정. 이 표준영정은 당대 이순신을 그린 영정이 전해오는 것은 아니고 장우성 화백인 14대 종손인 독립운동가 이응렬 지사를 종가에서 사흘간 보고 그린 것이다.
이응렬 지사(1942년 10월 17일) 국사편찬위원회.
맞배를 올린 삼칸의 현충사이다.
현충사기념비(이충무공유적보존회) 1932년 6월 5일

리충무공순신은 인종원년을사삼월팔일 건천동서나 선조구년에

무과하고 십륙년에 건원보권관이되고 전라좌도수군을 처음거느

리기는 이십사년이니 이듬해는 곧임진이라 계사에 삼도수군통

제사되고 무술십일월십구일 관음포에서전사하니라 아산어름목산

소를 비롯하야 뱀밭고택과 친히 쓴일긔와 편지와 환도 금대

옥로 다 조선의받들고 지킬바이라 간해비로소 공의유적보존을

구구히도모함이 실로 황송하도다 정성의모됨으로 먼저 산소의

향화를 받들도록하고 이어 고택이웃에 이집(현충사)을지어 공의화상을

그려뫼시고 유물을 이에 감초아두니라 집이이룬뒤 마당에 비

를 세울새 우에 공의생졸년월을 간략히적고 밑으로 이번일의 대

강을써 뒷사람으로보게하노라

공나신지삼백팔십팔년임신오월이일(양력 6.5.) 리충무공유적보존회

현충사기념비

 

 

숙종 어필 현충사 현판 모본이다. 진본은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현판에 ‘정해사월일 선사’라 하여 1707년 정해년 사월 임금이 하교하여 내렸다고 썼가. 현재 추가 영정을 모시진 않는다. 제향도 않는다.
현충사 현판 진본.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소장.
1932년 중건된 현충사에 봉안된 충무공 이순신 영정. 정천 이상범이 그렸다.

 

구 현충사의 백미는 위당 정인보의 작품, 주련에 있다.

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一誓海山立綱常於百代).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 천지를 구해냈으되 내세워 자랑이 없었네
성인취의정충광어단성(成仁取義精忠光於檀星).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 이래 빛나고
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補天浴日功德盖於槿邦).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타루비. 현충사를 나오면서 왼쪽 문 앞에 있는 타루비다. 여수 타루비의 복제본이다. 여수의 타루비는 1603년(선조 36) 이순신을 그리워한 통제영 장수와 병사들이 세운 것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의 ‘타루(墮淚)’라 한 것이다.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한 것으로 비문에​"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하였다. 이 비를 세운 사람들은 중국 양양 사람 양호의 덕화를 사모하여 세우게 된 고사를 이용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비를 바라볼 때 마다 은혜에 감탄하여 눈물이 흐르게 되었더라(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洋祐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라고 새겨 한산도 앞바다를 보면 이순신이 아른 거린 병장들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유산이다. 비 뒷면에 만력 31년 추립(萬歷三十一年秋立)이라고 각자했다.
현충사 앞 광장 주차장에서 본 구 현충사가 있는 충무교육원 모습이다.
숙종이 사액한 현충사는 본래 충무공을 배향한 곳인데 후에 조카 강민공 이완,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을 합사하였다. 그러한 자취를 유허비를 세우면서 그 위패를 묻은 자리에 유림들이 각자한 것이다.
현충사를 이룬 기단석들이다. 보통 훼철이 되면 모두 땅에 묻고 터를 다진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자력으로 중건하긴 어려워 각종 부재들을 발굴하여 드러내 놓은 흔적이다. 이 역시 역사다. 나라 잃은 죄인으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다.
현충사 본래 자리에서 바라 본 현충사 그곳은 이순신의 자취가 서린 유허지다.
현충사를 같이 찾아다닌 아해들과(2025 모지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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