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顯忠)’이란 호(號)를 내리다
(賜忠淸道 牙山 忠武公 李舜臣祠宇號顯忠)
숙종실록45권, 숙종 33년(1707년) 2월 6일 기축
현충(顯忠)이라는 말은 친숙하다. 쉽게는 6월 6일 현충일이 그것이고 현충하면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곳, 현충사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충사는 유생들이 일어나 서후경 선생이 상소하여 충무공 사당이 세워졌다.
충청도 유생 서후경(徐後慶)이 소(疏)를 올려, 고(故)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위하여 아산(牙山) 땅에 사당을 세우기를 청했으니, 이는 이순신이 생장(生長)한 고향이고, 구묘(丘墓)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忠淸道儒生徐後慶, 疏請爲故忠武公 李舜臣, 立祠于牙山地。 以其生長之鄕, 而丘墓所在也。 上令該曹稟處。)
숙종실록39권, 숙종 30년(1704) 5월 16일 갑인
이어 숙종은 현충사라고 사액(현충 : 충무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리고 나타낸다)하였다. 일반 사당에서 국가 공인 사당이 된 것이다. 정조가 충무공을 매우 존경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정조의 증조인 숙종대왕 역시 장수로서 충성을 다한 충무공에 대한 생각이 깊었다. 그래서 우리가 널리 아는 현충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현충사가 있기 전까지 아산에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이른 시기 장인 방진에게 물려 받은 고택 뒤편에 가묘를 세워 선무공신이 된 이순신(증 우의정)에 대하여 불천위 제사를 시작하였다.(1604년)
또한 인근 온양 정퇴서원(1632,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등 배향) 별당에 임진왜란의 충신 충무공과 창암 강봉수를 향사하였지만 정작 충무공의 터전인 아산지역의 국가사묘로 온전히 충무공만 모시는 사당이 없었는데 숙종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흔히 서원이아 사당(사우)이 주변에 많아 보여 이를 세우는 것이 쉽게만 느껴질 줄 모르나 실은 사우를 건립하는 것은 상당한 명분과 비용의 문제로 쉽지않다. 더욱이 건립된 사우를 유지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 임금과 국가로부터 공인되는 절차인 ‘사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조 때 송시열의 뜻을 받든 기세등등한 노론 조차도 노성 궐리사의 사액을 받지 못했다.
그 어려운 일을 충무공이 살며 무과 급제했으며, 그 유택이 있는 것을 인정한 숙종이 감압한 것이다. 충무공에 대한 흠모가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충무공에 대한 국가 공인 서원은 도처에 있었으며 정조 때에는 11곳, 지금까지 파악된 곳이 무려 23곳이다.
특히 아산 현충사가 대표성을 갖기에는 1606년 충무공 휘하 장수였던 통제사 이운룡이 통영에 건립하여 1663년에 사액된 충렬사가 있었다. 통영 충렬사는 이순신 단독 배향이고 통제영의 수장이자 조선 수군 총사령인 역대 통제사들이 제향을 주관하는 대표적인 충무공 사당이었다. 따라서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은 ‘신미존치 47서원’의 사당이다. 다만 일반명칭으로 통영은 행정단위가 아닌 수군군영을 말하므로 행정적으로 고성현에 속한 곳이라 예부터 ‘고성 충렬사’였다. 지금은 병영인 통영이 혁파되고 이곳이 행정적으로 용남군이 설치되고 통영군을 거쳐 충무시와 합해 통영시가 되었으므로 통영 충렬사가 된다.
또한 이 사당과 더불어 남해 충렬사도 건립 연원이 올라가고 이순신 시신을 제일 먼저 모신 곳으로 가묘가 세워져 있는 유일한 이순신 사당이다. 특히 이곳에 충민공비(忠愍公碑)가 있다.
충민은 시호 충무를 받기 전 이순신을 기리는 것이었고 이러한 사적을 남해현령 이정건(李廷楗)이 1633년(인조 11년)에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 충령묘비각 뒤편 본당(本堂) 앞에 세운 비이다. 이 비석은 이후 1793년(정조 17년) 충무공의 5대손 호남절도사 이명상(李命祥)에 의해 이충무공비(李忠武公碑)로 고쳐 세워지고 충민공비는 묻쳤다. 그러다 1973년 7월 매몰되었던 충민공비를 후일 참고하기 위해 다시 복원하여 본당 좌우에 충무공비와 나란히 세워졌다.
현충사가 충무공을 모신 대표적인 곳이 된 것은 충무공가의 불행에서 기인한다. 충무공가는 나라에 충성했던 충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충절은 집안의 가장 큰 가치다. 충무공 휘하에서 종군했던 조카 이완이 의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정묘호란을 당해 속절없이 무너졌지만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고(충무공 휘하에서 종군했다면 충분히 군사적 역량을 키웠겠지만 장수 역량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5대손 이봉상은 이인좌의 난을 맞아 충청병마사로 청주성에 있을 때 청주성이 함락되고도 이인좌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이렇듯 무능은 할지라도 충절을 버리지 않는 것이 충무공가의 전통 그것이다.
따라서 13대 종손 이종옥도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알게 모르게 가산을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마침내 아산 고택과 유택, 위토(제수 비용 마련 토지) 모두 빚으로 경매에 넘어가는 불행이 일어난다. 이때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하였다.(1931.5.23.)



이렇게 아산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대표하는 민족의 현충사, 아산을 대표하는 충절의 대표 사당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존경하여 대대적인 성역화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충사를 그저 사당 하나로 생각하고 왔다가 놀란 것은 상당히 넓은 경내에 이순신가 고택과 충무공이 무예를 익힌 마당과 활터, 이순신을 대신해 왜군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다 순절한 막내 아들 이면의 묘와 여러 후손들의 묘, 이 마을이 있게 한 아산의 대부호이자 충무공의 장인인 보성군수 방진과 남양홍씨 묘 등 경내가 엄청났다. 사실 이곳은 충무공 이후 덕수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후손이 대대로 살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를 대대적으로 성역화하면서 현충사 경내 마을을 빼내 그 옆 이주민단지를 만들어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현충사에 가면 현충사가 아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바로 잡으면 그렇다. 본래 숙종이 세우라 하고 사액한 현충사 현판이 걸린 현충사의 자리는 지금의 현충사 맞은편 충무교육원 뒤편 구릉에 위치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헐리자 사당의 건축부재가 모두 땅에 묻혀 지금도 그 잔해를 볼 수 있는데, 이곳에 1906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아산 유림들이 충무공의 충절로 국난 극복을 다짐하는 의미로 ‘현충사유허비’를 세워 놓고 있다. 이순신 묘를 보고자 왔던 이들이 현충사 너른 경내를 한참 돌아보고 나서 이곳을 찾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정인보 선생 등이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중건한 현충사는 지금의 현충사 내이지만 이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하면서 지금의 녹기와로 격을 높인 현충사를 세우면서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숙종이 내린 현판도 기념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새벽 2시쯤 꿈에서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물에는 빠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 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측면
선조 31년 서기 1597년 정유년 9월 16일 명량해전 뒤에 충무공은 서해를 거슬러 칠산바다를 거쳐 고군산도에까지 갔다가 우수영으로 돌아 내려온 것은 20여일 뒤인 4월 초9일이었다.
다시 몇 날 뒤 10월 14일 새벽 충무공이 꿈에 말을 달려가다가 길 아래 넘어지자 세째 아들 면이 와 안는 형상을 보고 깨었는데 저녁에 둘째 아들 열의 편지를 받으니 겉봉에 통곡 두 자를 썼고 안에는 면이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놀라운 소식이 적혀 있었다.
후면
면은 1577는 정축 충무공이 33세 되던 해 정월에 났는데 어려서부터 인물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지혜와 용맹을 갖추었으며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므로 공을 그가 가장 자기를 닮았다 하여 가장 믿고 사랑하던 아들인데 뜻밖에도 이런 소식을 들은 것이라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분하고 애통한 마음을 하소할 길이 없었다.
이 때 왜적들은 저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분풀이를 하려고 공의 고향 아산으로 올라와 마을 안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었는데 면은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집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뛰쳐나가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니 애석도하다 때에 나이는 21세이었다. 충무공은 아들의 슬픈 소식을 듣던 그날의 일기에 이같이 적었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친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남달리 영특하므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천치가 캄캄하다”
충무공은 밤새도록 울었다 밤마다 울었다 흰 띠를 띠고 통곡했다.
공은 10여일이 지나 그달 29일에 목포 고하도로 진을 옮기고 또 다음해 2월 17일 멀리 고금도로 옮겨 가 마지막 진을 쳤다.
측면
어느 날이었다 공은 어슴푸레 낮잠이 들었는데 면이 꿈에 나타나 자기를 죽인 왜적이 공의 진 속에 사로잡혀 와 있음을 알려주어 포로들 중에서 그 놈을 찾아내어 아들의 원수를 갚아 주었거니와 면은 이같이 어린 나이로 조국을 위해 생명을 의롭게 바쳤으므로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로서 이름이 천추에 전할 것이다
1970년 12월 일
노산 이 은상 글 일중 김 충현 씀
충무공 세째 아들 이면의 무덤 묘비문 이은상






























리충무공순신은 인종원년을사삼월팔일 건천동서나 선조구년에
무과하고 십륙년에 건원보권관이되고 전라좌도수군을 처음거느
리기는 이십사년이니 이듬해는 곧임진이라 계사에 삼도수군통
제사되고 무술십일월십구일 관음포에서전사하니라 아산어름목산
소를 비롯하야 뱀밭고택과 친히 쓴일긔와 편지와 환도 금대
옥로 다 조선의받들고 지킬바이라 간해비로소 공의유적보존을
구구히도모함이 실로 황송하도다 정성의모됨으로 먼저 산소의
향화를 받들도록하고 이어 고택이웃에 이집(현충사)을지어 공의화상을
그려뫼시고 유물을 이에 감초아두니라 집이이룬뒤 마당에 비
를 세울새 우에 공의생졸년월을 간략히적고 밑으로 이번일의 대
강을써 뒷사람으로보게하노라
공나신지삼백팔십팔년임신오월이일(양력 6.5.) 리충무공유적보존회
현충사기념비






구 현충사의 백미는 위당 정인보의 작품, 주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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