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계획일 뿐, 아침부터 봄비가 추적추적하니 온천탕에서 나서기가 싫다. 어제 떠나온 아산가족여행에서 아해들과 충무공 이순신 사적을 두루 둘러보고 온양읍으로 나가 민속박물관을 보고 주변에서 점심을 하려고 했는데 온양읍으로 가지 않았다.
다만 이리저러 생각하다 39번 국도로 곧장 수원으로 가자고 마음 먹고 이리저리 가다가 들른 곳에서 생각지 않은 점심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길로 나가 아산만방조제에 다다르니 길 안내판에 ‘공세리성당’이라고 보인다. 그 길로 바로 좌회전하여 공세리로 갔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마산에서 대통령이 직접 기념식을 참석하는 모양이다. 국민 주권 정부를 표방한 정부이니 3월 15일은 첫해로 매우 각별하겠다. 뒤이어 4.11 임시정부수립, 4.19 등 국민 주권이 명징화되는 역사적 귀결이 차례차례 다가온다.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는 천주교 공세리성당이 위치하여 유명세를 탄 곳이다. 천주교 입장에서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의 성지이기도 했다. 일찍이 공세리는 서해로 나가는 내포지역 관문으로서 공세곶창(貢稅串倉)이 위치한 곳이다. 내포에 해당하는 지역은 내포의 중심지 가야산 앞뒤의 열 고을을 내포라 하여 서쪽에 보령, 결성, 해미, 북쪽 태안, 서산, 면천, 당진, 동쪽 홍주, 덕산, 예산, 신창이다.
『擇里志』 내포(內浦)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제일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편으로 이백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伽倻山)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大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했는데, 곧 서해(西海)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 가운데 또 큰 개(浦) 하나가 있다. 개는 유궁진(由宮津, 삽교천 지역)이라 하며, 밀물이 가득 차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가 없다. 남쪽은 오서산(烏棲山)이 막아, 다만 산 동남편으로 공주와 통할 뿐인데,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온 산맥이다.
가야산의 앞뒤에 잇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 병자년 남북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기 때문에 부자(富者)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士大夫) 집이 많다.
그러나 바다 가가운 곳은 학질과 염병이 많으며,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넒으나 수려한 맛이 적고, 구릉(丘陵)과 원습(原隰)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천석(泉石)의 기이한 경치는 모자란다.
오직 보령(保寧)만은 그 중에서 산천이 가장 훌륭하다. 고을의 서편에 수군(234쪽)
절도사(水軍節度使)의 군영이 있고 영 안에 영보정(永保亭)이 있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서 명승지라 부른다.
(보령의)북쪽에는 결성(結城)과 해미(海美)가 있고, 서족으로 큰 개 하나를 건너면 안면도(安眠島)가 있다. 이 세 고을은 가야산 서쪽에 있다. 또 북쪽에는 태안(泰安)과 서산(瑞山)이 있는데, 강화도와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다. 서산 동편은 면천(沔川)과 당진(唐津)이고, 당진 동쪽으로 큰 개를 건너면 아산(牙山)이다. 북쪽으로 엇비슷하게 경기도 남양(南陽)의 화량(花梁)과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이 네 고을은 가야산 북쪽에 있다. 가야산 동쪽은 홍주(洪州)와 덕산(德山)인데, 두 고을은 모두 유궁진 서쪽에 있다. 개 동쪽에 있는 예산(禮山)․신창(新昌)과 함께 뱃길로 한양과 통하며 매우 빠르다. 홍주의 동남쪽은 대흥(大興)과 청양(靑陽)인데, 대흥은 곧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다. 이 열 한 고을은 모두 오서산 북쪽에 있다.
이문종, 『이중환과 택리지』(도서출판 아라), 2014, 234~235쪽.
드디어 1886년(고종 23)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의 체결로 1770년대에 전래되어 100년 동안 박해받던 천주교가 선교의 자유를 얻었다. 따라서 공진창이 폐설된 공세리 이곳에 1895년(고종 32) 5월 5일 성당이 이전되어 공세리성당 시대를 열었다. 일찍이 천주교 세가 높았던 내포 공세리 일대는 아산만 간척으로 부를 쌓은 밀양박씨가에서 신앙을 지키고 이들 일가가 병인박해 당시 수원의 유수부 중영 토포청에 끌려가 순교(삼십이위 순교자 현양비)하는 등 가까운 김대건 신부의 고향, 솔뫼와 더불어 천주교 순교 성지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조불수교와 더불어 1890년(고종 27) 내포의 중심지인 예산 고덕 양촌과 교우촌이 있었던 간양골에 즉시 성당이 설립되어 퀴를리에(L.Curlier, 레오)신부와 파스키에(P. Pasquier, 베드로) 신부가 각각 파견되어 왔다. 이렇게 ‘양촌본당’과 ‘간양골본당’이 섰다. 양촌성당의 퀴를리에 신부는 덕산과 홍주 지역을 포함한 충청도의 서쪽과 남쪽 지역을 관할하였고, 간양골성당의 파스키에 신부는 예산과 아산을 포함한 충청도의 북쪽과 경기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휘몰아치며 내포 동학군이 이들 성당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훼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성당 구역을 모두 퀴를리에 신부가 맡게 되었고, 관할 지역이 너무 넓어서 어려움을 겪자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여앞서 파스키에 신부가 건의했었던 간양골성당을 공세리로 옮기자는 것을 실현한 것이다.
이렇게 성당이 이전한 이유에는 공세리가 아산만을 끼고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에 있고 수로 교통이 편리하여 파스키에 신부가 일찍부터 성당 터로 점찍었고, 천주교 조선교구도 공세리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된 공세리성당은 초대 드비즈(E. Devise, 1871~1933) 신부로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그는 10칸의 기와집을 개조한 성당에서 성당 지주소작제를 통한 재정을 잘 충당하여 1920년대 중국인 벽돌공과 기술자를 동원하여 본인이 고안한 설계를 바탕으로고딕양식의 현 성당을 건립하였다.(1922.9.) 이는 대전교구의 첫 서양식 건축 근대성당이었고 이후 교구내 성당 건축에 표본이 되었다.
이밖에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 신자들을 위해 당시 피부 종기(腫氣)가 골치 아픈 병이었기에 프랑스에서 익힌 방법으로 1906년에 고약(膏藥)을 만들어 신자들을 치료하였다. 종기질환은 조선의 임금들도 골치 썩은 흔한 질병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약을 드비즈 신부의 한국식 이름을 따 ‘성일론 고약(成一論膏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고약의 제조법이 인천에서 온 가난한 신자 이명래가 만든 것이 유명한 ‘이명래 고약’이다. 이명래가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언덕에서 종기 치료를 하고 특히 일본군 육군 대좌 사사키를 치료하여 그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그 약효를 기고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해방 후 명래제약을 세워서 계속 발전하였지만, 항생제의 발달과 의료기술과 의료보험의 확대로 1980년대 이후 고약 제조 산업이 쇠퇴하였다.
지난 이틀의 아산 나들이를 마친다.



























이것이 내 생명의 마즈막 순간입니다. 내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외국인과 교제한 것은 오로지참다운 종교와 우리 천주를 위하야 하였을 뿐입니다. 이 주검도 천주를 위하야 당합니다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에진복을 누리시려 하거든 반드시 천주교를 봉행하십시오. 천주를 알아 공경하지않는이에게는무진한 벌이 있을것입니다
1846년9월16일 서울 남대문 밖 새남터형장에서 사형선공안이 공포되자 동포에게 마즈막결별이오 유언이오부락의 말슴였다
‘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가 좋으냐 이제 나도 예비가 다 되었으니 치라’
그리스도 사랑에 가득찬 안드레아 김대건신부의최후는 태연하고도 장엄하다






삼십이위 순교자 현양비
신유~병인박해순교자
(측면)
봉헌된 순교자 현양탑에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삼십이위의 순교자가 모셔져 있는 바, 신유박해 때 아산지역 최초의 순교자인 하 발바라와 병인박해 때의 박씨 삼형제 박의서 사바,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를 비롯하여 열분의 박씨 순교자가 있다. 밀양박씨 가문으로는 의암공 승근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상황, 조부는 종학, 증조는 만선공이다. 그의 증조부인 만선공이 백성들을 구휼하고자 유민들을 모아 시작한 아산만 방조제 공사는 그 아들 종학에 이르러 완성 되었고 이로 인해 모원리, 신성리, 신밀두리, 서강리, 신원리, 걸매리 등 여섯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유민들이 이때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병인치명사적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그리고 치명일기에 의하면 이분들은 본디 걸매리(아산시 인주면)에 살고 있었으며 박의서 사바는 삼형제 중 장형이며 회장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계명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한 마을의 회장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영혼 구령에도 온 힘을 기울여 존경을 받았다. 그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잠
(후면)
시 여사물로 피했으나 포졸들에게 붙잡혀 두 동생과 제수 이마리아와 함께 수원 감영으로 끌려갔다. 중 교우였던 그의 둘째 아우 원서는 신앙생활이 충실치 못하였지만 잡혀갈때, 그는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천주께서 나를 이같이 부르셨다.’ 나를 이번에 올려가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 가서 살겠다.‘ 고 하며 그의 형과 아우를 권면하여 함께 순교하였다. 그의 막내아우 익서는 천성이 곱고, 신실하여 오로지 한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함께 끌려간 이마리아도 일천팔백육십칠년 삼월 팔일 함께 순교하니, 그때 의서는 육십제, 원서는 오십일세, 익서는 사십오세였다. 이처럼 박씨 집안에는 네 분 이외에도 사촌 박인서, 박제환 베드로, 사바의 아들 박흥갑,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할때 그 배 물길을 안내하며 함께 중국까지 다녀온 박덕여의 부인 조모니카와 그 아들 박화진 알렉산델 사바의 제수 이씨부인이 있다. 이들 순교자의 후손 가운데에는 박상래, 박노헌, 박중신, 박성팔, 박상운, 박지곤 여섯 분의 사제가 나와 그 순교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중백, 지 글라라, 박제환 베드로, 부부 순교자 김필립보와 박 마리아, 김흥서 토마스, 이학습, 김지득, 김장복, 김씨, 장원심, 장팔보, 오인악, 최사도 요한, 유만여 요셉, 함요한, 함 베드로, 이 요한 ,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 장 요한, 김 바오로가 공세리 출신의 순교자 들이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박씨 삼형제 시신은 그의 당질 박웅진 바오로와 양성우 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에 안장 하였다가• 일천구백팔십팔년에 공세리 성당 주임 변갑철 신부의 주선으로 경내에 이장되었다. 이후 주임 오남한 신부가 이천육년 시월 삼십일에 맹고개 선영에서 순교자의 묘 일곱기를 더 발굴하였고 그 중 다섯 분 박인서, 이마리아, 이씨 부인, 박흥갑의 유해와 조 모니카의 묘 표석을 이장 하였다. 이천칠년 십일월 이십오일에 경내에 모셔져 있는 박씨 삼형제 순교자 무덤 위에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 봉헌 순교자 일곱 분의 유해와 한분의 묘표석과 스무 분의 묘석을 순교자 현양탑에 납골식으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 공세리 성지• 성당의 신자 공동체는 서른 두 분의 순교자들의 삶과 열을 이어 받음은 물론, 순교자들 모두가 하루빨리 시복시성을 통해 성인반열에 오르기를 염원하고 있다.


가까운 해미읍성도 천주교 박해의 현장인데 특이하게 공세리 천주교 신자들이 추포되어 수원 관아에서 처벌된 것이 주목된다. 당시 수원부는 정조의 신성인 화성축조 이후 유수부로서 군사적 중요성이 높은 곳이었다. 신유박해(1801), 기유박해(1839)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박해에 의한 순교자가 없다가 병인박해(1866) 이후로 순교자가 나와 수원 출신자 및 연고자를 포함하여 77명에 이른다. 공세리 박의사 사바도 이때 수원관아로 압송되어 순교했다. 특히 병인박해 때 수원은 경기남부 지역의 천주교도를 재판하고 처형하는 곳이었다. 가까운 내포 일대 중 아산만 일대도 포함된 것이다.
중부지역 병인박해 중심지 수원 
「수원부계록」에 따라 수원지역 병인박해를 살펴보면 1866~1873년까지의 희생자는 모두 77명이다. 당시 책임자는 수원유수 이경하(1811~1891)로 흥선대원군의 측근으로 왕실과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인척이었다. 조대비는 종계상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다. 병인박해 당시 이경하는 포도대장으로서 천주교 신자 학살에 적극적이어서 서울 낙동에 살아 ‘낙동의 염라대왕’으로 불렸다. 수원유수로는 1866. 10.~1869.9. 재임하며, 서울과 달리 선참후계령(먼저 참하고 뒤에 계하라)에 따라 조용히 천주교 박해를 처리하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로는 판관 류승근과 정기명이 있다. 그중 정기명은 천두교인을 상대로 1차 신문을 하는 위치로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판별하는 추죄자로서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는 하는 짓)질을 잘하였다. 특히 천주교 신자인 지다두가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 유명하였다.
그리고 수원 유수부 중군 겸 토포영장인 이승준, 원세정, 윤희수가 있다. 그중 윤희수(1867년 3~ 1869년 1)는 유수 이경하의 신임을 받아. 천주교 신자를 비공개 처형하며, 이전 공개 참수 2명, 장살 4명 외에 재임 중 순교자 77명 중 39명, 50.6%를 처형한 수원 병인박해의 핵심인물이다. 따라서 유수 이경하는 다음과 같이 윤희수를 평하였다.
(고종이) 수원중군 윤희수 …등에게 명하기를, ”현직의 기한이 한번 만료되었지만 그대로 잉임하라“고하였다. 병조에서 계언하기를, ”수원유수 이경하가 올린 장계를 보니, (그 장계) ‘중군 윤희수가 절도를 막자 도둑이 없어지고, 사류(천도교도)를 다스리자 천주교 신자의 자취가 거의 사라졌으므로 임기가 다 되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현직에 그대로 머물러있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이에 윤허하다.
『일성록』 고종5년(1868) 12월 4일조

이처럼 수원의 주요 순교 현장으로는 재판이 이루어진 수원관아의 판관의 집무처인 이아의 동헌 화청관이 있다. 판관은 박해를 조사 보고하였다. 관아 앞 북수동 성당과 종로교회의 자리가 당시 군 사령부에 해당하는 화성유수 중영(中營)으로 토포청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성당 표석에서 북수동 유적을 ‘포도청’으로 소개하는 이유가 병인박해를 주도했던 토포청을 이르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당시 수원유수 이경하가 병인박해가 한창인 한양에서 포도청의 포도대장으로 극렬하게 활동하였던 인물이기에 수원 사람들에게 이렇게 구전된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내포에서 끌려온 신자들은 화성 관아의 죄인들을 잡아 가둔 곳인 감옥 현초옥에 갇혔을 것이다. 이 감옥운 1790년대 축조된 화성유수부의 형옥을 이은 것으로 초가 6칸, 담장 40칸 규모였다.



이경하 막하에서 판관 정기명과 중군 윤희수는 토색질을 하며, 병인박해기 수원 형옥이 천주교 신자들의 원성과 고통, 신음과 탄식으로 가득찬 죽음의 장소로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이 말한 ‘현세에 존재하는 지옥’인 것이다.
감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옥이다. …옥중의 온갖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그중의 큰 것을 들면 모두 다섯 가지 고통이 있다. 첫째가 칼, 수갑의 고통이요, 둘째가 토색질 당하는 고통이요, 셋째가 병들어 아픈 고통이요, 넷째가 추위와 주린 고통이요, 다섯째가 오래 머무는 고통인데, 다섯 가지가 줄기가 되어, 천 가지 만 잎의 고통이 여기서 갈려 나오는 것이다. 사형수는 장차 죽을 것인데 먼저 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니, 그 정상이 슬픈 것이요, 경범자는 그 죄가 중하지 않은 데도 같이 이 고통을 받고, 원통한 죄수는 잘못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니, 세 가지가 모두 슬픈 일인데 백성의 목민관이 된 사람으로서 어찌 살펴보지 않을 것인가? …
『목민심서』 10권 형조육조 휼인

이들이 사형 집행된 곳은 중영과 더불어 동남각루가 있다. 화성성곽의 시설인 동남각루는 남수문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하며 천주교인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성문에 효수하고 몸뚱아리는 성벽 아래 언덕으로 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내포 공세곶을 떠나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한 이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현재 이곳은 지동시장 순대골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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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와 수원 북수동 성당 등
2024년 10월 13일 수원 종로사거리 일대를 찾았다. 보통 이곳은 화성행궁을 복원하여 화성행궁광장과 북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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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를 보여주는 북수동 성당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성당내 야외에 공개된 교수형 형구돌이 대표적이다. 이 형구돌은 성당 사무장이었던 이원규(시몬)의 집에서 행궁 복원 사업으로 집이 헐리자 나왔는데, 그 쓰임새는 구멍 가운데로 밧줄을 연결해서 천주교인들 목에 걸고 잡아당겨 처형하던 기구였다.(북수동 성당 정원석 회장 구술 : 양훈도 2019, 경기도 근현대 생활문화Ⅱ. 경기학센터 참조) 관련한 자료로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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