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희가 나아가 아뢰기를,
"노산(魯山, 훗날 '단종')의 묘(장릉)가 영월(寧越)에 있는데 전에 조종 때에는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으나 이제는 오래 폐기하였습니다. 구전(舊典)을 거행하면 재앙을 없애고 비내리기를 구하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해조를 시켜 거행하게 하였다.( 益熙進曰: "魯山墓在寧越, 往在祖宗朝遣邊官致祭, 今則久廢。 若擧舊典, 則其於消沴求雨, 不爲無助。" 上令該曹擧行。)
효종실록11권, 효종 4년(1653) 7월 3일 병인
[오늘] 현충일(顯忠日)이다.
국가와 영토, 민족을 지키기 위해 숨져간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날로 보통 6.25한국전쟁을 떠올리기는 하나 이 땅의 모든 선열을 기리는 날이다.
조선시대에도 현충일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귀신에 제사하는 나라고 그 귀신을 기리는 전통과 예법은 유학이며, 그 뿌리는 고대 중국 주나라의 주례를 따른다. 따라서 동방의 유학자는 제사와 예법을 체득하여 국가질서를 지켰으며, 조선에 와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가의 근본을 이루었다.
이때 중앙과 지방 관아에 문묘(공자와 유교 성현 제사, 대성전)와 향교와 함께 사직단(토지와 곡신신 제사)을 세우고 아울러 고을신인 성황단과 함께 현충일과 관련된 여단(厲壇)을 세워 국가제례로 봉행하였다. 다만 여단은 단순히 전몰장병만을 위하는 곳은 아니고 기본적으로 집에서 편안하게 죽은 사람이 아닌 이른바 ‘객사’한 원혼(여귀[厲鬼])에 대해 그 혼을 달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제도적으로는 태종 때 권근에 의해 시행되어 일년에 봄 청명일, 가을 7월 보름, 겨울 10월 초하루 세 번을 지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한 곳은 소사(小祀)로 하여 수시로 제사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유교윤리의 제도화를 이루는 것이 예법, 예학이고 이를 세운 사람이 바로 사림 서인의 거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다. 그리고 그 손자가 바로 창주(滄洲) 김익희(滄洲 金益熙, 1610∼1656)다.
사계의 예학은 임진왜란과 병장호란을 거듭한 조선이 명을 다하지 않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조선의 태평성대가 조선왕통의 적통이 끊어지는 명종을 기점으로 하고 있는데 이때 이르러 양난도 일어났으니 나라는 망하지 않더라도 왕조의 바뀜은 필요했다. 그러나 왕조의 생명영장을 통한 변곡이 바로 예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종 대 극심한 예송을 겪었다.
기호학파의 산실 돈암서원 명재고택 노성궐리사 그리고 충장사
연산에 가서는 제사 자랑 말고, 회덕에 가면 집자랑 말며, 노성에서는 묘자랑 말라 노성(魯城)은 원래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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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희는 병자호란을 당해서 독전어사(督戰御使)로 명받아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청음 김상헌과 더불어 청과의 일전을 주장하며 독전한 주전파였다. 특히 계모 서씨와 아우 김익겸이 강도(강화)에서 순절하면서 그의 숭명반청 의식은 더욱 고양되었는데 매양 이들과 더불어 죽지 못해 원통해했다고 한다.
조선 조야는 물론 만백성이 60만 피로인이 되었던 세상, 그 세상을 산 이들을 추념하는 곳이 여단이고 그 여단의 제삿날이 현대의 현충일이다.
창주 선생은 유명한 역사의 현장의 주인공이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역사를 공부하였지만 최근 답사를 통해 기억된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의 친우로 일찍이 할아버지 김장생의 애제자로 서실 양성당에서 공부한 신풍부원군 장유(효종의 국구 인선왕후의 부)와 정철(서인의 영수)의 아들 정홍명 선생을 사사한 문도이다.
그리고 17세에 진사시, 23살에 문과급제한 소년 급제자로 사계를 잇는 천재였다. 그는 병자호란을 당해 독전어사로서 인조와 남한산성 수호라는 공을 세웠다. 아울러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유명한 단종과의 관계도 깊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아뢴 바 노산(魯山)의 묘에 치제한 전례(典禮)를 고사에서 상고하건대, 정덕(正德)085) 병자년086) 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燕山)의 묘에 제사하고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어 노산의 묘에 제사하였습니다. 그 뒤에 강원 감사 정철(鄭澈)의 장계(狀啓)에 따라 노산의 묘를 개수하고 치제한 일이 있었다 합니다. 이제 이에 따라 거행해야 하겠는데, 사관(祀官)은 승지나 예관(禮官)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관을 보내어 가서 제사하게 하라."
하였다.(禮曹啓曰: "以副提學金益熙所啓魯山墓致祭之典, 考諸故事, 則正德丙子, 遣都承旨李自華, 祭燕山墓; 右承旨申鏛, 祭魯山墓。 其後因江原監司鄭澈狀啓, 聞有魯山墓改修致祭之擧。 今當依此擧行, 而祀官則當遣承旨或禮官矣。" 答曰: "遣禮官往祭。")
효종실록11권, 효종 4년 7월 4일 정묘 3/3 기사 / 1653년 청 순치(順治) 10년
이는 가계와 학문이 뛰어난 조정 중신인 창주 선생이 단종, 즉 노산군을 기리는 제사를 받들자고 주장하였고 이를 효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조야에서 단종을 받들면서 결국 효종의 손자 숙종에 와서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될 수 있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왕위에서 쫓겨난 비운의 왕, 단종이 후세에 이르러 다시금 복위될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조선 조야의 선비들의 노력이 쌓이고 쌓여 이룬 결과였던 것이다.
덥지만 모처럼 쾌적한 날씨 두 아해와 함께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을 찾았다.(5.30.) 두 아해는 공룡 덕후라 공룡체험을 하라고 하고는 나홀로 길을 재촉한다. 사실 과학관 주변으로 어떤 문화유산이 있나 찾아보던 차에 창주 김익희 묘를 알게되었고 별 기대없이 찾은 길이다. 과학관 북문을 나와 바로 탄동천 위 새터교를 건너니 맞은편 너른 뜰 가운데 대전교육과학연구원이 보인다. 대전엑스포의 상징 꿈돌이를 지나쳐 뒤로 나아가니 창주 김익희 묘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전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 북쪽 매봉산에 위치한 묘역은 선생과 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그 일가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

묘역은 가정동 회화나무 뒤로 신도비와 재실, 긍사재(肯思齋)를 세워 잘 단장된 묘역이었다. 사실 큰 기대없이 간차에 비각을 세웠지만 개방형태로 지붕을 씌운 신도비각에서 만난 창주 선생 신도비와 묘갈은 여느 사람이 보더라도 보물 중에 보물이다. 조형미며 서체며, 게다가 백대리석의 밝은 광채는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궁극을 이루는 명품 중에 명품이다.
흔히 수도권 주변 공경대부가의 묘역에서만 볼 수 있는 멋드러진 신도비를 이곳 대전에 와서 만나니 오늘 나들이는 이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에 감탄에 감탄을 한다. 게다가 금관조복의 문석인과 세호를 조각한 망주석 한 쌍 또한 그 조형미가 매우 뛰어나다.










보통의 신도비가 피장자의 위세와 위엄을 드러내는 것이라 묘 아래 입구 등에 위치하는데 대던연구단지가 조성되면서 1989년 동북쪽 유성도서관 부근 도로변에 있던 신도비를 이건한 것이다.



신도비를 지은(찬) 사람은 친우 송시열이고 전액과 글씨는 종손 김진규라고 각자 되어있다. 김진규는 김익겸의 손자로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차남이다.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다. 사계를 사사한 송시열의 수제자로 출사하여 문형(文衡)에 올랐으며 노론의 중심 정객이었다.




송시열 찬 신도비명
창주(滄洲) 김공(金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효종대왕(孝宗大王) 8년(7년인데, 송시열이 즉위년을 원년으로 친 것) 병신(1656)에 휘(諱)는 익희(益煕), 자(字)가 중문(仲文)인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煕)) 김공(金公)을 발탁하여 이조 판서 겸 대제학(吏曹判書兼大提學)으로 삼았다. 상이 이에 앞서 이미 공에게 기밀(機密)을 전수(傳授)하고 장차 점차로 크게 쓰려 하였는데, 공이 12월 8일에 졸(卒)하니, 수(壽)가 47세에 그치고 말았다.
공은 광주인(光州人)으로서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황강공(黃岡公) 휘 계휘(繼輝)의 증손(曾孫)이요, 문원공(文元公) 노선생(老先生) 휘 장생(長生)의 손자요, 참판(參判)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휘 반(槃)의 아들이다. 공이 어렸을 때 노선생께서 공의 총명(聰明)이 뛰어남을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공은 이미 시(詩)와 예(禮)를 집에서 교육 받고, 또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을 좇아 고문(古文)을 배웠다.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는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옥당관(玉堂官)으로 수천 언(言)의 차자(箚子)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하였고, 또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할 때는 음향(音響)이 밝고 의리(義理)가 명백(明白)하였다. 인조가 공을 가상히 여겨 관서(關西 평안도) 지방에 사신(使臣)으로 보내었다. 관서는 본디 번화(繁華)하기로 유명한 곳으로 황강공(黃岡公)이 일찍이 그 도(道)를 안찰(按察)할 때에 노선생(老先生 김장생을 말함)이 거기에 따라가 조석(朝夕)으로 황강공의 안부(安否)를 물어 살피시어 끝내 정문(程門 정자(程子)의 문하(門下))의 금수(禽獸)의 경계를 잘 지키셨는데, 공의 나이는 더욱 젊었는데도 선인(先人)의 법을 잘 체득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매우 어렵게 여겼다. 이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인열왕후(仁烈王后 인조의 비(妃) 한씨(韓氏))가 승하하자, 사서(司書)로서 소(疏)를 올려 복제(服制)가 옛 제도가 아님을 논하였다.
병자년에 노인(虜人)이 제호(帝號)를 참칭(僭稱), 사신(使臣 용골대(龍骨大)를 가리킴)을 보내어 우리 조정을 협박하자, 공은 이때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동료(同僚)와 함께 그들을 척절(斥絶)하라고 청하였는데, 의리(義理)가 극히 엄절(嚴截)하여 당시 온 나라가 다투어 분발하므로 노(虜)의 사신이 지극히 두려워하여 도망가 버렸다.
공은 이에, 전쟁의 단서(端緖)가 벌써 열렸는데도 예전처럼 태연하게 직무를 게을리 하는 것을 염려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포빙(抱氷)ㆍ악화(握火)의 설(說)을 자세히 진술하여 신첩(臣妾)의 욕(辱)을 면하기를 기약하자고 하니, 상(上)이 원수(元帥)에게 명하여 군사를 점검(點檢)하게 했다. 공은 또 엄중하게 신칙하여 군법(軍法)을 요동할 수 없는 뜻을 보이기를 마치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가 서달(徐達)ㆍ상우춘(常遇春)에게 하듯이 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특별히 구언(求言)의 전교(傳敎)를 내리므로 공이 소(疏)를 올려 오늘날의 급무(急務)를 논하였는데, 마침내 대본(大本)에 돌려놓고 보면 모두가 천리(天理)ㆍ인욕(人欲)ㆍ공사(公私)ㆍ사정(邪正)의 사이를 부석(剖析)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또 현부(賢否)를 잘 식별(識別)하지 못한 것, 시비(是非)를 잘 밝히지 못한 것, 분치(忿懥 화를 내는 일)를 잘 징계하지 못한 것과 편벽된 성품을 버리지 못한 것의 이 네 가지를 근본적인 병통으로 삼아 정일(精一)ㆍ극복(克復)의 훈계에 정성을 다하였고, 끝에는 또 주자(朱子)가 이른바 ‘큰 공(功)을 세우기는 쉽지만 본심(本心)을 보전하기는 어렵고, 오랑캐를 몰아내기는 쉽지만 사의(私意)를 없애기는 어렵다.’는 설(說)에 뜻을 집중시켰으므로, 상이 매우 탄상(歎賞)하고 구마(廐馬)를 하사하여 포상(褒賞)하였다.
이윽고 노(虜)에게 사신(使臣)을 보낸다는 의논이 있자 공은 분개하게 여겨 그렇게 못하도록 쟁론(爭論)하였는데, 겨울에 노(虜)가 과연 침구(侵寇)해 오자 조정의 의논은 오히려 강화(講和)하는 것을 책략(策略)으로 삼으므로 공이 탄식하기를,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저들에게 꺾이고 말 것이니, 차라리 바른 도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
하고는, 드디어 동료(同僚)와 함께 입대(入對)하여 이르기를,
“지금 화(和) 자를 가지고 상문(上聞 임금에게 아뢰는 일)하는 자를 반드시 벌(罰)을 준 뒤에야 적(賊)을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었다.
정축년 2월에 맹약(盟約 청(淸)과의 강화(講和))이 이루어지고 나서 비로소 모부인(母夫人) 서씨(徐氏)와 아우 익겸(益兼)이 강도(江都 강화도(江華島))에서 순절(殉節)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공이 적(賊)과 함께 한 하늘 밑에 살고 있음을 통분하게 여기고 또 국가(國家)의 치욕(恥辱)을 생각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머니 상(喪)을 마치고 나서는 비록 조정에서 벼슬은 하면서도 마음에 즐거움이 없었다.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가 의정공(議政公 김반(金槃))이 병환(病患)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상(喪)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장례(葬禮)를 치르고는 궤연(几筵)을 받들어 숙부(叔父)인 문경공 선생(文敬公先生 김집(金集))에게 가 있으면서 또한 사우(士友)들과 함께 의리(義理)를 강마(講磨)하니, 문경공이 그의 투철한 견해(見解)를 자주 칭찬하였다.
임오년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일에 따라 진언(進言)하여, 의리(義理)를 밝히고 기강(紀綱)을 정돈하여 점차 자강(自强 스스로 힘씀)의 계책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으나, 시국(時局)이 상란(喪亂 상사(喪事)와 화란(禍亂))을 겪음으로써 인심(人心)이 부패하여 진작(振作)시킬 수 없었다. 또한 공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승지(承旨)에 올랐다가 파직되고, 다시 서용(叙用)되어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가 되었으나, 공은 이때에 더욱 관직에서 은퇴할 것을 생각하여 태안 군수(泰安郡守)를 자청하여 나갔다가 이내 향리(鄕里)로 돌아와 송죽(松竹) 사이에 집을 짓고서 경사(經史)를 보며 스스로 즐겼다.
기축년에 인조가 승하하자 호서(湖西)로부터 대궐에 들어가 임곡(臨哭)하였는데 효종이 즉시 승지(承旨)로 삼았다. 이는 대체로 공이 오랫동안 효종의 궁료(宮僚)였으므로 이미 그의 포부(抱負)를 알았기 때문에 공을 끌어서 스스로 가까이하여, 무릇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위탁(委託)하려는 것이었다. 때에 문정공(文正公) 김 선생 상헌(金先生尙憲)과 문경공(文敬公)이 입조(入朝)하여 모두 높은 예우(禮遇)를 받고 있는 터라, 때마침 청(淸)ㆍ탁(濁)을 변별(辨別)하는 논의가 있자, 배척을 당한 자가 의심하여 공에게 분노(憤怒)하여 마지않았다.
경인년에 노(虜)가 군대를 이끌고 와 우리 변경(邊境)을 압박하면서 사자(使者)가 공갈(恐喝)로 명(明) 나라를 치겠다고 협박하며 국사(國事)가 매우 어수선하자, 공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음을 알고 드디어 물러나 돌아와 버렸다. 이윽고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자,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천변 만화(千變萬化)하는 천하(天下)의 일이 모두가 인주(人主)의 한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성음(聲音)과 외모(外貌)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지금 밖에 드러난 징험(徵驗)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전하(殿下)의 일심(一心) 가운데 천리(天理)가 순수하지 못함이 있고, 인욕(人欲)이 다 없어지지 못함이 있는 듯합니다.”
하고, 또 《주역(周易)》의 설(說)을 인용하여 ‘나의 생(生)을 관찰함이니, 군자이면 허물이 없다.[觀我生君子無咎]’라는 도(道)와 ‘천지가 서로 만나서 만물이 다 밝다.[天地相遇品物咸章]’라는 뜻을 논(論)하였으므로, 상이 비답(批答)하기를,
“가상히 여겨 두 번 세 번 감탄하고 보느라 땅에 놓지 않았노라.”
하고는, 이어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으로 임명하자 공이 마지못하여 부임하니, 상은 다시 사서(史書)를 작성하는 일에 열심하라고 권장하며 총석(寵錫 총애하여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있었다. 공은 특히 구획(區劃)을 짜서 맡은 바의 일을 재촉하여 끝냈으니, 대개 주자(朱子)의 유법(遺法)을 본받은 것이다. 때에 항상 혼예(昏曀 구름이 끼어 날씨가 어두움)의 기운이 있자, 공이 마음속으로 매우 걱정하여 또 말하기를,
“선정(先正) 신(臣) 조헌(趙憲)의 봉사(封事)에 이르기를 ‘완악한 구름이 걷히지 않아서 하늘이 항상 흐립니다.’ 하였으니, 대개 이때가 선묘(宣廟) 신묘년(1591)입니다.”
하고, 또 하후 승(夏侯勝)이 말한 《홍범오행전(弘範五行傳)》의 말을 인용하여 상을 경계하니 비답하기를,
“타관 객지 썰렁한 방에 묵고 있자니 그 고생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로되, 차마 떠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시사(時事)의 위태로움을 근심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그 위태로움을 보고도 그냥 떠나 버린 자와는 한가지로 비교하여 논할 수 없다.”
하고는 승지(承旨)에 옮겨 제수하였다. 때에 포저(浦渚) 조공 익(趙公翼)이 떠난 데 대해 상(上)의 예모(禮貌)가 자못 박절하였으니, 이는 대개 조공(趙公)이,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도덕(道德)이 소인배(小人輩)들의 모질(媢嫉 시기하여 미워함)을 당하는 상황을 창언(倡言)하매 상이 그를 자기의 좋아한 이에게 아첨하는가 의심했기 때문이었는데, 공은 이에 대해 조공의 심사(心事)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노(虜)의 사신(使臣)이 오자 공은 휴가를 청하여 남쪽으로 돌아와 버렸는데, 소지(召旨 소명(召命)의 전지(傳旨))가 있자, 사양하고 인하여 몸소 먼저 절검(節儉)하는 방도를 진술하였다. 더욱 간절히 재촉하여 부르므로 드디어 조정에 돌아왔는데, 공이 진설(陳說)한 것은 상이 모두 윤허하여 따랐으니, 권문 호족(權門豪族)들이 나무하는 땅까지 점유(占有)하는 일 같은 것은 상의 마음에도 금(禁)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어 외직(外職)을 청하여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가서는, 착한 이를 권장하고 악한 무리를 처치하되 크고 작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하였고,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의 강봉(降封)된 봉호(封號))의 묘(墓)를 개수(改修)하고 율곡(栗谷)의 사당을 신축하였으며,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군졸(軍卒)을 훈련시켜 많은 성과를 올렸다. 다시 체직되어 부제학(副提學)ㆍ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을 때, 상이 대신(臺臣 사헌부(司憲府)의 관원을 일컬음)을 욕설(辱說)로 꾸짖자 공이 옳지 않다는 뜻을 매우 간절히 개진(開陳)하고, 또 아뢰기를,
“고명(高明)한 이에게는 유(柔)로 다스리고, 침잠(沈潛)한 이에게는 강(剛)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아무리 슬기로운 자품(資稟)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학문(學問)을 힘입어야 합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오랫동안 국외(國外)에서 노고(勞苦)하셨기에 이미 학문을 강론한 날이 적은 데다가 즉위(卽位)하시자마자 또 다사(多事)한 때를 만나서 공리(功利 공명(功名)과 이욕(利欲))의 설(說)만 어지러이 진달되고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므로, 항상 지력(智力)은 꼭 쥐고 내놓지 않고서 혈기(血氣 혈기지용(血氣之勇))가 용사(用事)를 하도록 하려 하십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성심껏 학문(學問)에 종사하시어 기질(氣質)의 쓰임이 적어지고 학문의 공효가 많아지도록 하신다면 기거 동작(起居動作)과 언행(言行)이 저절로 순수해져서 흠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인하여 노산군의 묘에 치제(致祭)할 것을 청하니, 상이 아주 좋게 여겨 시행하였다.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을 때, 말미를 받아 고향에 돌아와서는 표문(表文)을 올려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징분(懲忿 사분(私忿)을 참고 억제하는 일)의 방도를 진계(陳啓)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품계(品階)를 올려 도승지(都承旨)에 옮겨 제수하므로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그후 병(病)으로 말미암아 체직(遞職)되었다가 다시 성균관대사성 겸 동지경연사(成均館大司成兼同知經筵事)가 되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김익희(金益煕)는 비록 다른 직책에 옮겨진다 할지라도 대사성의 직책은 그대로 띠게 하겠다.”
하였다. 공이 사간원(司諫院)의 장(長)이 되었을 때 조정에서 홍우원(洪宇遠)의 망언(妄言)에 대한 죄를 논하게 되자, 공이 ‘언사(言事)로 죄를 얻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고 즉시 그 논의를 정지시켰다.
때에 상(上)이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는 수년이 되었는데도 정치(政治)와 교화(敎化)가 크게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한 데다가 조신(朝臣)들은 모두가 무력하고 게을러서 상의 뜻을 조성(助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이 마침내 봉사(封事)를 올려 맨 으뜸으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대한 학문을 말하고 다음에는 시설(施設)의 방도를 언급하였는데, 대체로 성학(聖學)이 밝아지면 근본이 이미 세워진 것이니, 강유(綱維 나라의 법도)를 정돈하고 조목(條目)을 재단하여 처리해서 체(體)와 용(用)이 서로 잘 함양되고 크고 작은 일이 모두 다 빠짐없이 거행되도록 하여야만 거의 올바른 정사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으니, 노선생(老先生)의 규모(規模)에 공이 숙습(熟習)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상은 그 봉사(封事)의 내용을 열람하고 크게 기뻐하여 공을 인견(引見)하고는 조용히 헤아려 생각하면서 상은 거의 전석(前席)을 하고, 인하여 탄식하기를,
“사업(事業)은 성취하지 못하였는데 세월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니, 이것이 매우 탄식할 일이다.”
하였다. 이로부터는 친분(親分)이 더욱 두터워졌다.
국가(國家)의 공천(公賤)은 한갓 헛문서에 불과하고 군수품(軍需品)은 날로 줄어들므로, 상이 추쇄(推刷)하라는 명을 내리자 조정의 의논이 서로 엇갈렸는데, 공이 도감대신(都監大臣)을 설치하여 구관(句管 맡아 다스림)하게 하되,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착실하게 거행(擧行)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은 매우 남의 마음을 유쾌하게 한다.”
하였다. 공이 새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몸소 풍재(風裁)를 담당하고 있으니, 백사(百司)가 두려워서 숨을 죽이고 교활(狡猾)한 무리들이 종적을 감추니 상이 애써 봉직(奉職)했다는 것으로 포사(褒賜 칭찬하여 물건을 하사함)하자, 공이 사례하기를,
“애써 봉직하는 것은 곧 유사(有司)로서 당연히 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사로서 당연히 할 일을 그대로 잘 거행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하였다. 동료(同僚) 중에 조율(條律)에 걸린 자가 있자, 공이 고집하여 용서하지 않아 마침내 서로 말다툼이 있었는데, 상은 공을 강직하게 여겨 위유(慰諭 위로하고 타이름)하였다. 부제학(副提學)에 이임(移任)되어서는, 모든 궁가(宮家 대군(大君)ㆍ왕자군(王子君)ㆍ공주(公主) 등 왕족)에서 백성들의 토지(土地)를 강제로 점유하는 폐단을 자세히 논하였다. 호남(湖南)의 유생(儒生)이 무장(武將)과 서로 다툰 일이 있어 상의 뜻에 몹시 괴롭게 여겨 그를 편배(編配 이름을 도류안(徒流案)에 기록함)시키기에 이르자, 공이 간(諫)하기를,
“성인(聖人)이 허명(虛明)한 마음으로 사물(事物)을 접(接)하는 데 있어, 사(私)에 얽매여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누(累)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전지(傳旨)에 응하여 매우 간절하게 진언(進言)하되, 경명(景命 대명(大命) 즉 하늘의 큰 명령)을 맞아 이을 것을 청하였다. 휴가를 얻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환조(還朝)하자 상이 묻기를,
“송시열(宋時烈)과 서로 만나 보았는가?”
하였으니, 대개 공의 주도(周到)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병신년(1656, 효종7) 1월에 양관(兩館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고, 2월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라 노중(虜中)에 보내는 문서(文書)를 작성하는 일 때문에 대제학을 사퇴하자, 상이 특별히 회피(回避)할 것을 허락하고 문서에 관한 일을 차관(次官)에게 명하였다. 공은 형조에 있는 몇 달 동안에 오로지 죄수(罪囚)를 너그럽게 처결하고 억울함을 씻어 주는 일에 역점을 두어 적체(積滯)된 것이 거의 다 해결되었는데, 병으로 사직하자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다. 5월에는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상이 바야흐로 공에게 인재(人才)를 천진(薦進)하도록 하여 함께 국사(國事)를 성취하려 했었는데 갑자기 병이 위독함을 보고는 놀라 이르기를,
“이 직임(職任)에 발탁하여 제수한 것은 크게 쓰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거듭 병에 걸린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체직을 윤허하고 의약(醫藥)을 계속하여 내렸으며, 또한 궁인(宮人)을 보내어 문병(問病)하기도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은 몹시 슬퍼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총명(聰明)하고 재덕(才德)이 뛰어났으며 문견(聞見)이 넓고 사리(事理)에 통달하였다. 일찍이 가정 교훈을 이어받아, 미세한 일에는 구애하지 않았고 대체(大體)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공은 《송조명신록(宋朝名臣錄)》을 가장 좋아하여 항상 본조(本朝)의 풍속(風俗)이 당시(當時)와 흡사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중에 가장 순수한 말을 뽑아 가지고 마치 자기의 말을 외듯이 외어서 사법(師法)으로 삼았다. 강도(江都)의 화변(禍變)이 있은 이후로 남이 말하기를,
“예의상 벼슬을 해서는 안 된다.”
하자, 공은 말하기를,
“원수가 적국(敵國)에 있으면 반드시 국위(國威)를 힘입어야 하기 때문에 유자우(劉子羽)가 송(宋) 나라에 벼슬하였고, 옛날에 오운(伍員)과 장자방(張子房)은 오(吳)와 한(漢)의 힘을 빌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였는데, 효묘(孝廟 효종(孝宗))의 경우는 상(上)의 뜻이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처럼 확고하였고, 공은 더욱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사력(死力)을 다하면서 말하기를,
“불행하여 실패하면 나라 사람이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적(賊)을 베 죽이기 위해서는 인명 피해를 돌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은 정자(程子)의 말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진항(陳恒)을 토벌(討伐)하라 고(告)하였으니, 어찌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보장하였던가. 하물며 한때의 번거롭고 소란함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송(宋) 나라가 남도(南渡)하였을 때, 주자(朱子)가 남헌(南軒 송의 학자 장식(張栻))에게 이르기를 ‘임금의 영토(領土)에서 먹고 살며 임금의 백성이 된 처지로서 평생 동안 편안히 앉아 한푼도 바치지 않을 이치는 없다.’ 하였고, 또 주자가 전정(田政) 한 가지 일에 마음을 다하여 경리(經理)하면서, 소흥(紹興 송 고종(宋高宗)) 연간에 있었던 진회(秦檜)의 일을 칭찬하기까지 했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비방(誹謗)이 일어날 것도 돌아보지 않고 외로움도 걱정하지 않고서 한결같이 스스로 담당(擔當)하여 말하기를,
“대승기탕(大承氣湯)을 쓸 증세에 어찌 이중탕(理中湯)을 쓰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한 마음의 위미(危微)에 귀착(歸着)될 것이지, 어찌 한갓 사위(事爲)의 말단에만 전념하겠는가.”
하였으니, 대체로 효묘(孝廟)께서 장차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루는 도로써 법칙을 세우려 하매 공이 일심으로 그를 조성(助成)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공에게 임금의 훌륭한 뜻을 받들어 순종했다고 이르지 않고, 도리어 공에게 영합(迎合)했다고 이르는 자가 있다면 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망녕된 자이다. 공의 큰 행적은 대략 이와 같은데 그 자잘한 일은 생략하겠다.
부인(夫人) 이씨(李氏)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인 대사간(大司諫) 덕수(德洙)의 딸로서 유순하고 인자하여 서출(庶出 첩(妾)에게서 낳은 자식)을 사랑하기를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하였다. 아들 만균(萬均)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에 이르렀고, 만증(萬增)과 만준(萬埈)은 모두 음보(蔭補)로 벼슬하였다. 딸은 정랑(正郞) 이세장(李世長)의 아내가 되었다. 진옥(鎭玉)ㆍ진망(鎭望)ㆍ진태(鎭泰)는 세 소실(小室)에게서 낳은 아들들이다.
내가 일찍이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 유학(遊學)할 적에 공과 매우 좋게 지냈었는데, 지난 을미년에 공이 정성스레 나를 찾아와 안부를 묻고 상의 뜻을 전달해 주더니, 공이 환조(還朝)하자, 상이 또한 천신(賤臣 송시열 자신)을 물으므로, 공이 아뢰기를,
“장차 동심 협력(同心協力)하여 성지(聖志)의 만분의 하나라도 도울 것입니다.”
하였다. 그후 내가 소명을 받고 진언(進言)하니, 상께서 한숨지으며 탄식하기를,
“김익희의 말이 매양 이러했는데, 무슨 일로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
하였다. 나는 눈물을 가리고 나왔다. 나는 고독하여 함께 일할 사람이 없어 외롭고 허전하게 되었는데, 성상(聖上)께서 또한 승하(昇遐)하셨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나라에만 만세(萬世)의 끼친 아픔이 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의 학문은 / 惟公所學
가정에서 근본하여 / 本乎家庭
두루 백가에 통하였고 / 傍通百氏
걸림없이 종횡무진 / 出入縱橫
가장 높이 숭상한 바는 / 其所尊尙
송조의 여러 어진 이였는데 / 宋朝諸賢
그 한 몸 종신토록 / 在身本末
여기에만 힘썼네 / 惟是俛焉
병자 정축년 변란으로 / 丙丁之變
집안에 상화(喪禍)가 닥쳐 / 家禍斯偏
어머니와 아우가 / 萱堂鴒原
모두 고종(考終)하지 못했네 / 竝定於鮮
공은 말하되 이 원수들과 / 公曰此讎
차마 한 세상에 같이 살 수 있으랴 / 忍戴一天
옛날 유 충현은 / 昔劉忠顯
그의 아들 자우가 / 有子子羽
슬피 울며 하늘에 호소하고 / 血泣呼天
국력 기르자고 임금께 청하며 / 願君生聚
세월로 연마하되 / 磨以歲月
와신상담 잊지 않아 / 毋忘膽薪
국가의 대의가 / 國家大義
거의 펴지려다가 / 庶幾以伸
이미 진 시황에게 망하고 / 旣却于秦
재차 항량에 의해 잿더미 되었건만 / 再燬于梁
패한 것도 징계하지 않고 / 不懲其敗
망한 것도 잊지 않았다네 / 不忘其亡
오직 공의 뜻은 / 惟公所志
한결같이 이것으로 법을 삼았는데 / 一此爲準
효종은 명성하여 / 孝廟明聖
자세히 살펴 윤허하였지 / 密察而允
상은 일찍이 말하기를 / 蓋上嘗言
무릇 우리 조정에서는 / 凡我在庭
오직 노가 원수이니 / 惟虜是仇
나의 정성을 도와 달라며 / 可相予誠
공을 가까이 앉혀 놓으니 / 置公近密
지기가 서로 부합하였네 / 志氣相孚
공은 말하되 이 일을 / 公曰此事
감히 과장해서야 되리까 / 敢以夸誣
성급하게도 게을리도 말아서 / 勿亟勿怠
명실이 상부해야 합니다 / 名實相須
천 리로써 남을 두려워함은 / 千里畏人
맹자가 기롱한 바이니 / 鄒聖所譏
우리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면 / 子惠吾民
백성들은 부모처럼 떠받들어 / 民戴母慈
근본이 튼튼하고 나라가 편안해져서 / 本固邦寧
성지에 보답할 수 있으리다 하였네 / 聖志可酬
그가 강론한 것은 / 伊其所講
큰 법이며 큰 꾀였다 / 大經大猷
공은 말하되 기강은 / 惟曰紀綱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거니와 / 爲國先務
군사와 백성이며 곡식 / 兵民米粟
이것이 바로 주가 되는 것이요 / 繄此爲主
헛된 명성과 실지로 받는 앙화 / 虛名實禍
이것이 또한 두려운 것이라 하였네 / 斯亦可懼
큰 꾀와 넓고 조용한 성품에 / 訏謨宥密
권애(眷愛)의 정 더욱 깊었는데 / 眷契益親
하늘이 갑자기 빼앗아 가니 / 天奪之遽
아 어질지 못하도다 / 嗚呼不仁
오직 그의 한 마음은 / 惟其一心
환히 빛나서 죽지 않을 것이며 / 炯炯不死
이 언덕의 분묘(墳墓)는 / 宰如斯丘
천백 년 영원히 전하리라 / 惟千百祀
(滄洲金公神道碑銘 幷序
孝宗大王八年丙申。擢滄洲金公諱益煕字仲文。爲吏曹判書兼大提學。上先是已授以機密。將次第大用。而公以十二月八日卒。壽止四十七。公光州人。大司憲黃岡公諱繼輝之曾孫。文元公老先生諱長生之孫。參判贈領議政諱槃之子。幼時。老先生見其聰明俊發。期以遠大。公旣聞詩禮敎。又從張谿谷維,鄭畸翁弘溟學古文。十八中進士。二十四及第。由 a1槐院入翰林。以玉堂官。箚論時務累數千言。又經席進講。音韻響亮義理明白。仁祖嘉之。奉使關西。關西素稱繁華。黃岡公按道時。老先生奉晨昏。終守程門禽獸之戒。公年益少。克體先法而歸。人甚難之。兼知製敎。仁烈王后上賓。以司書疏論服制非古。丙子。虜人僭號。遣使脅我。公時在玉堂。與同僚請斥絶。義極嚴截。時擧國爭奮。虜使至懼而跳去。公念兵釁已啓。而恬嬉如舊。上箚極陳抱氷握火之說。期免臣妾之辱。上命元帥視師。又請嚴飭以示不撓軍法之意。如高皇帝之於徐達,常遇春也。上特下求 言之敎。公上疏論今日急務。而卒歸之於大本。則剖析天理人欲公私邪正之際。且以不能識賢否。不能明是非。不能懲忿懥。不能去偏係四者。爲本源之病。而眷眷於精一克復之訓。末又致意於朱子所謂大功易立而本心難保。戎虜易逐而私意難除之說。 上極加歎賞。賜廏馬以褒之。俄有遣使之議。公慨然爭之。冬。虜果入寇。朝議猶以乞憐爲策。公歎曰。今日必折入於彼矣。毋寧得正而斃。遂與同僚入對曰。今以和字上聞者。必罪之然後可以擊賊也。扈駕入南漢城。爲督戰御史。丁丑二月盟約成。始聞母夫人 徐氏與仲子益兼殉節江都。公痛與賊戴天。又念國家羞辱。如不欲生。服除。雖黽勉於朝。而不樂於心。出爲靈光郡守。聞議政公有疾。棄歸侍側。丁憂旣葬。奉几筵。往依叔父文敬公先生。亦與士友講磨義理。文敬公亟稱其見解之透。壬午。還舊踐。隨事進言。要以明義理整紀綱。漸爲自強之圖。而時經喪亂。人心斁敗。不可振作。亦有齮齕者。陞承旨罷。敍爲承文副提調。公是時益思斂退。求爲泰安守。仍歸鄕里。闢室松竹間。經史自娛。己丑。仁廟昇遐。自湖入臨。孝廟以爲承旨。蓋公久爲宮僚。已知其抱負。故引以自近。 凡有事在。必以委屬焉。時文正公金先生尙憲及文敬公入朝。俱承尊禮。時有辨別淸濁之論被斥者。疑怒公不已。庚寅。虜以兵壓境。使者恐喝脅持。幾禍宗國。國事靡有止屆。公知不可有爲。遂退歸。拜大司諫。上疏辭。因言曰。天下之事。千變萬化。無一不本於人主之一心。不可以聲音外貌而已。今以其符驗於外者言之。竊恐殿下一心之中。天理有未純而人欲有未盡。又引易說論觀我生。君子無咎之道。天地相遇。品物咸章之義。批曰。嘉歎再三。觀覽不置。仍差實錄堂上。公不得已赴召。上復奬以勤於史事。有 寵錫。公別爲區畫。催畢所事。蓋倣朱子遺法也。時常有昏曀之氣。公心甚憂之。又言曰。先正臣趙憲封事有曰。頑雲不解。天日常陰。是蓋宣廟辛卯年間也。又引夏侯所言洪範傳語。以警上聽。批曰爾寒齋旅宿。苦況難堪。不忍去者。亶由時事憂危也。與其見危而去者。不可同日道也。移承旨。浦渚趙公翼之去。禮貌殊薄。蓋趙公倡言栗谷,牛溪道德爲群小媢疾之狀。而上疑其阿好也。公極明趙公心事。虜使來。乞暇南歸。有召旨辭。因陳躬先節儉之道。促召愈懇。遂還朝有所陳說。上皆允從。如豪貴冒占樵採 之地。尤上心之所欲禁者。求外拜江原監司。勸善癉惡。細大不遺。修魯山墓。新栗谷祠。興學鍊卒。綽有成效。遞爲副提學,吏曹參議。及爲大司諫。上詬罵臺臣。公開陳深切。又曰。高明柔克。沈潛剛克。雖有睿質。必資學問。殿下久勞於外。旣少講學之日作。其卽位又値多事之時。功利之說雜進。性理之談罕聞。常欲以智力把持。致令血氣用事。誠願誠心典學。使氣質之用少。學問之功多。則動靜云爲。自然純粹而無疵矣。因請致祭魯山墓。上稱善而施行焉。拜大司成。時受由歸。上章辭因陳懲忿之道。上嘉 之。命勿辭。旣還。陞秩遷都承旨。因辭不許。病遞復長成均兼同知經筵。上曰。金某雖他遷。大司成則仍帶。爲諫長時。朝廷方論洪宇遠妄言之罪。公以爲言事得罪非美事。卽停其論。時上臨御數載。政治敎化。未能大慰人心。而朝臣率委靡頹惰。無以助成 上志。公遂上封事。首言天德王道之學。次及施設之方。蓋聖學旣明。則本旣立矣。整頓綱維。裁制條目。使之體用相涵。巨細畢擧。可庶幾焉耳。老先生之規模。公之擩染可見矣。上覽之大喜。旣賜對。從容商量。上幾乎前席。因歎曰事業未就。而歲不吾與。甚可歎也。自是契遇益以昭融矣。國家公賤。徒擁虛簿。軍需日蹙。上下推刷之命。廷議携貳。公請設都監。大臣句管。別遣御史。著實擧行。上曰。卿言甚快人意。公新長臬司。身任風裁。百司悚息。群猾屛迹。上褒賜以恪勤乃職。公謝曰。奔走供職。乃有司之常。上曰。能擧有司之常者。有幾人乎。同僚有爲礙條事者。公執不饒。遂有違言。上直公而慰諭之。移副提學。極論諸宮家橫占民田之弊。湖南儒生與武將交爭。 上意激惱。至於編配。公諫曰。聖人虛明應物之地。不可有係私偏重之累也。又應旨進言。懇懇以迓續景 命爲請焉。賜暇南歸。旣還朝。上問曰。與宋時烈相見乎。蓋知公有所周爰也。丙申正月。拜兩館大提學。二月。陞刑曹判書。以虜中文書。辭大提學。上特許回避。命以次官。公在刑曹數月。專以疏決洗冤爲心。積滯殆盡。病辭。遣內醫治之。五月。由大司憲拜吏曹判書。上方使薦進人才。共成國事。忽見病單。驚曰。擢拜是任。欲爲大用。何其重嬰疾病。遂許遞。醫藥相屬。亦遣掖庭人以問。訃聞。上震悼不能已。公聰明俊爽。曠博通達。夙承庭訓。不切切於細微。而大體卓然。最好宋朝名臣錄。常以爲本朝風俗恰似當時。故常摭取其最醇者。如誦己言而以爲師法。江都禍變以來。人謂禮不當仕。公以爲讎在敵國。則必資國威。故劉子羽仕宋。古者伍員,子房。至借吳漢之力矣。至孝廟則上志如靑天白日。公益盡其死。以爲不幸蹉跌。國人盡死。然誅天下賊。有不得顧者。程子語也。又曰。孔子討陳恒。豈保不殺人耶。況一時煩撓。烏能免乎。宋之南渡。朱子謂南軒曰。食王土爲王民。亦無終歲安坐而不輸一錢之理。又朱子於田政一事。盡心經理。至稱秦檜紹興事。故公不顧謗興。不恤迹孤。一向擔當曰。大承氣症。寧用理中湯乎。然必歸宿於一 心之危微。豈徒馳騁於事爲之末哉。蓋孝廟將以明天理正人心之道。建極立則。而公一心助成。其不謂公將順。而顧謂公迎合者。非愚則妄也。公大者如此。其細可略也。夫人李氏。牧隱,穡之後。大司諫德洙之女。柔順慈惠。撫庶出如己子。男萬均。文科承旨。萬增,萬埈皆蔭仕。女爲正郞李世長妻。鎭玉,鎭望,鎭泰三房出。余早遊老先生門下。與公游好甚篤。歲乙未。公委來弔。余爲致上意。及公還朝。上亦問賤臣謂將同心協力。以助聖志之萬一矣。其後承召進言。則上喟然歎曰。金益煕之說每如此。何故遽死 耶。余掩淚而出。孑然無與同事。踽踽無聊。而聖上亦賓天矣。嗚呼。此豈獨東方萬世之遺痛哉。銘曰。
惟公所學。本乎家庭。傍通百氏。出入縱橫。其所尊尙。宋朝諸賢。在身本末。惟是俛焉。丙丁之變。家禍斯偏。萱堂鴒原。竝定於鮮。公曰此讎。忍戴一天。昔劉忠顯。有子子羽。血泣呼天。願君生聚。磨以歲月。毋忘膽薪。國家大義。庶幾以伸。旣却于秦。再燬于梁。不懲其敗。不忘其亡。惟公所志。一此爲準。孝廟明聖。密察而允。蓋上嘗言。凡我在庭。惟虜是仇。可相予誠。置公近密。志氣相孚。公曰此事。敢以夸誣。勿亟勿怠。名實 相須。千里畏人。鄒聖所譏。子惠吾民。民戴母慈。本固邦寧。聖志可酬。伊其所講。大經大猷。惟曰紀綱。爲國先務。兵民米粟。繄此爲主。虛名實禍。斯亦可懼。訏謨宥密。眷契益親。天奪之遽。嗚呼不仁。惟其一心。炯炯不死。宰如斯丘。惟千百祀。)
고전번역서 송자대전 선역본 제158권 신도비명

묘표
유명조선자헌대부이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동지 경연사 세자좌부빈객
창주김문정공익희중문지묘
정부인한산이씨 부좌




김만중 찬 묘갈 지
선중부창주선생묘문후지(先仲父滄洲先生墓文後識)
頃於甲寅。我從兄僉正公。以我先仲父滄洲先生行狀。謁銘于尤齋宋先生。先生尋有度嶺之行。不欲爲文字役。而以我仲父之墓不可無先生文。於是獨撮言行之大者若干言以復之。名曰碑陰記。及庚申賜環。從兄又申前請。遂得先生之銘。銘之豐碑。而顧前所爲文。不可不用。故刻於墓前之表。是以我仲父之墓。有先生之文二焉。司馬溫公有言曰。吾與范景仁兄弟也。但姓不同耳。遂相約後死者誌墓。今先生之 於我仲父。其交道豈異也。是以前後二文。如顧陸之傅神。徑尺盈丈。各盡其妙。無有毫髮遺恨。此無他。徒以知之之深也。說者謂韓退之作王仲舒碑。又作誌。其事同。其詞異。推而比之於聖人之易春秋。凡此皆後人之不可不知者。遂告于從兄而識之表左云。
한국문집총간 서포집 권9 (西浦先生集卷九) 지(識 )
묘비 묘갈명은 송시열, 후지는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이 짓고 청음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이 썼다. 김만중은 창주의 동생 익겸의 유복자로 익겸이 병자호란 당시 강화에서 순절(향년 24세)할 때 강화를 건너는 배에서 태어났다. 그의 후손이 현달하여 장남 김만기는 광성부원군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아비이다. 숙종과 사이 금슬이 좋았으나 요절했다. 그리고 차남이 유명한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이다.









졸기
전 이조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졸하였다. 익희는 장생(長生)의 손자이고, 반(般)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여 일찍이 재능과 명망을 지녔으며 문사(文詞)를 잘하였는데 소장(疏章)에 더욱 능하여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고 주대(奏對)할 때마다 경전(經傳)과 사기(史記)를 인용하였으므로 상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그래서 1년 내에 차례를 뛰어넘어 총재(冢宰)에 임명되고 겸해서 문형(文衡)을 맡았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지나치게 준엄하고 성질 또한 급하고 편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47세였다.(前吏曹判書金益熙卒。 益熙, 長生之孫。 槃之子也。 爲人聰銳, 早負才望, 善文詞, 尤長於疏章, 操筆立成, 每於奏對, 動引經史, 上寵任之。 一歲中超拜冡宰, 兼典文衡。 然持論過峻, 性且狷狹, 人以是短之。 至是卒, 年四十七。)
효종실록17권, 효종 7년(1656) 12월 9일 임오
전 이조 판서 김익희의 졸기
할아버지 사계 선생, 중부 신독재 김집 등 일가가 장수하였지만 평소 병약하여 47세로 죽었다. 지금이야 일찍 죽은 것이나 조선시대 평균 수명은 넘겼다. 그러나 그의 재주에 비해 명이 짧았다.








유택 뒤로 사납지 않게 감싸는 산세와 아래로 볕이 잘 들고 탄동천이 아래 흐르는 앞산 역시 날카롭지 않고 유택 앞을 감싸 서듯 기운을 돌리니 지관 아닌 눈에도 명당이다.
창주 선생 유택은 효종 7년(1656) 사오촌(沙塢村)에 조성되었다. 배위(配位: 남편과 아내가 다 죽었을 때에 그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는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의 직경은 8m이고, 높이는 3m, 197㎝ ·119㎝ ·33㎝ 크기의 장석 좌우에 장대석을 4개씩 쌓아 묘역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왼쪽에는 묘비가 있는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매우 특이한 수법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최근 재현품을 오석으로 세우고 대리석 원 묘비는 아래 신도비각으로 옮겼다.
석물로는 문석인, 상석, 망주석 등이 있다. 문석인(169㎝, 폭 50㎝, 두께 40㎝)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한 모습이며, 망주석(높이는 215㎝, 폭 82㎝)은 8각의 기둥 상단에 연꽃 봉오리와 같은 장식을 했고, 받침돌과 기둥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기둥에는 다람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우측은 올라가는 모양이고, 좌측은 내려오는 모양이다. 망주석의 다람쥐 조각 때문에 일부에서는 촛대석이라고도 하는데, 우측의 다람쥐는 촛불을 붙이러 올라가고 좌측의 다람쥐는 촛불을 끄고 내려오는 모습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실록을 보다보면 문형으로 창주 선생이 인조와 효종에게 도학에 따른 군자의 마음 가짐으로 정사를 살피시라는 직언이 많이 보인다. 그런 김익희의 조정 중신으로서 돋보이는 만언소이다.
집의 김익희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상께서 뜻을 굳게 정하여 번쇄한 여러 가지 사무에 응하라는 것을 맨 먼저 말하고, 인하여 아홉 가지 일을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첫째는 훌륭한 인재를 얻어 어떤 일을 오로지 담당하도록 책임 지울 것,
둘째는 벼슬길을 맑게 하여 명기(名器)를 중히 할 것,
셋째는 장물(贓物)에 관한 법규를 엄하게 하여 염치를 면려할 것,
넷째는 수령을 잘 가려서 임명하여 나라의 근본을 중히 할 것,
다섯째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의 힘이 펴지게 할 것,
여섯째는 군대에 관한 제도를 잘 다스려서 국가의 방어를 튼튼히 할 것,
일곱째는 제사지내는 예전을 삼가 행해서 귀신과 사람을 감동시킬 것,
여덟째는 공평한 도리를 넓혀서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킬 것,
아홉째는 도학을 숭상해서 풍속을 바르게 할 것
등이었다. 말이 매우 자세하고 반복되었는데, 오로지 노력하여 행하고 근본을 힘쓰며 하늘을 공경하고 재변을 조심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너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니, 내가 의당 깊이 생각하여 채택해서 시행하겠다."
하고, 이어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김익희가 대각(臺閣)의 신분으로 나랏일을 마음으로 걱정하여 모든 일을 숨기지 않고 다 말하였는데, 모두가 당시의 폐단을 절실하게 지적한 것이니, 신들 또한 매우 부끄러움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본원(本原)의 입지에 특별히 주의하여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계책을 조속히 정하는 것이니, 오직 성상께서 깊이 체념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丁卯/執義金益熙上萬言疏, 先言上志之堅定, 以應庶務之叢脞, 因條陳九事。 一曰得賢才, 以責專任; 二曰淸仕路, 以重名器; 三曰嚴贓法, 以礪廉恥; 四曰擇守令, 以重邦本; 五曰行大同, 以寬民力; 六曰修兵制, 以壯藩衛; 七曰謹祀典, 以格神人; 八曰恢公道, 以振紀綱; 九曰崇道學, 以正風俗。 辭語縷縷反覆, 專以力行務本, 敬天謹災爲意。 上答曰: "嘉爾憂愛之誠, 予當體念而採施焉。" 仍下備局。 備局回啓曰: "金益熙身在臺閣, 心憂國事, 盡言不諱, 無非切中時病, 臣等亦不勝愧赧之至。 所謂加意本原之地, 早定自治之計, 唯在聖上深加體念。" 上然之。)
인조실록45권, 인조 22년(1644) 8월 12일 정묘
집의 김익희가 나랏일을 걱정하여 만언소를 올리다
1644년 당시는 병자호란 이후 조정과 민심이 정돈되지 못하던 차에 1등 공신이었고 인조의 막역했던 심기원이 역모를 일으키고 김자점에 의해 사지가 찢긴 해이다. 더욱이 심기원이 모반에 엮은 인물은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조야에 인심이 돈독했던 회은군 이덕인(李德仁, 1586~1644)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심양에 사은부사로 가서 인질로 잡힌 많은 종친들을 청과의 교섭을 통해 방면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뛰어난 인물로 그의 계비 초계 정씨와 사이에서 나은 막둥이 딸 역시 피로인으로 끌려갔는데 아비와 조선의 처지를 이해하고 청태종의 측근 피파이의 후실로 있으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박로 심득연 치계, 1639년) 회은군은 월산대군의 혈손이다.
이렇게 인조와 조야에 큰 파란을 일으킨 3월 이후 조정을 안정시키고 피폐한 인심을 회복하고자 창주 김익희가 인조에게 만언소를 올린 것이다. 만언소의 내용 역시 시의적절한 내용으로 특히 광해군 때 시행된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주목된다. 이밖에 도학을 바탕으로 예학을 통한 체제결속은 사계가 정립한 이후 조선이 나아간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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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 김익희 선생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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