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병오년 독서 시작 다산을 보다

달이선생 2026. 1. 9. 12:50

위선자라는 소리를 피하려 했다면,

정주程朱)도 그 학문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명예를 좇는다"는 비난을 두려워했다면.

백이와 숙제도 그 절개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곧은 체한다"는 말을 피하려 했다면,

급암과 주운도 간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했던 것조차도,

천박한 사람들은

"다 명예를 노리는 짓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니.

그들 때문에 도리어 악을 따라야 하겠는가?

- 다산 정약용 -

이근오, 2025,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다산 정약용』, 세계철학전집 정약용편, 모티브.

  자리끼라는 순 우리말이 있다. 머리맡에 두던 물이다. 옛날 염전집에서 살 때, 요즈음 같이 추운 날이면 어무니가 머리맡에 두던 자리끼가 꽁꽁 얼어 있던 것이 생각난다. 연탄불에 의지해서 단칸방에 어무니, 아부지, 동생과 한 이불 덮고 살던 시절, 늘 코는 흐르고, 손 트고 발가락에 동상이 붙었지만 그 시절이 그렇게 춥다고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되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이 있던 것인지 말이다.

화성 덕다리 수렁개 염전집. 집은 무너지고 염전창고만 남았다.
수렁개 염전집.

나에게 책이란 자리끼다. 보통 좌우명(座右銘)이라고 하는데 후한 때 학자 최원이 자기 자리 오른쪽에 글귀를 새긴 쇠붙이 놓았던 데서 유래하는 말이지만 요새는 통 거창한 좌우명 대신 자리끼가 더 붙는다. 사실 책보다는 핸드폰이 자리끼가 된지 오래긴 하지만 말이다.

지난해 평소보다 책을 가깝게 하였다. 보통 완독, 정독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완독도 정독도 않는다. 책을 보고 지은이와 목차, 프롤로그 등을 살피고 대충 어떤 내용인지 파악한다. 나름의 해제이다. 그리고 필요할 때 찾아 정독한다. 그 부분만을 말이다.

혈기방장하여 불같이 청년시절을 보내고 중년에 접어들어서 유하고 유하게 산다지만 때때로 공명심과 욕심이 나를 휘감을 때가 있다. 세상이 나를 안 알아준다고 서운함에 깊이 빠져들 때도 있다. 그런 차에 다산이 눈에 들어왔다.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다산 정약용』, 이근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人必自侮 然後人侮之(인필자모 연후인모지)'

사람은 스스로 모욕한 후에야 다른 이에게 모욕을 당한다.(『맹자』)

 

'能勝其私者 天下莫之能勝也(능승기사자 천하막지능승야)

스스로 이기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

『논어』와 『맹자』를 따른 다산의 좌우명.

 

평소에 행실을 잘해라

오랫동안 함께했던 친구나 연인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우리는 어떠한 잘못된 행동이나 실수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의 깊은 정은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관계가 끊어지는 진짜 이유는, 그동안 쌓이고 쌓인 작고 사소한 것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큰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는 데 있다.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자식들이 친척들의 무관심에 서운함을 토로하는 편지를 받고 이렇게 답했다.

 

'너희들의 편지를 읽어보니, 친척 중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다며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큰 잘못이다. 내가 예전에 벼슬할 때 몸이 아프거나 어려움을 겪었을 때는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었다. 약을 보내고, 안부를 묻고, 밥을 챙겨주는 사람도 있었다. 너희는 그것을 곁에서 보고 자랐기에, 남들도 당연히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겠지.

하지만 원래 가난한 처지에서는 도움을 받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 친척들도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살며 왕래도 드물다. 서로 친밀한 정을 나눌 기회조차 부족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 서로 다투지 않고 지내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어떻게 보살핌까지 기대할 수 있겠느냐? 생각해 보아라. 너희는 지금껏 친척 중 밥조차 제대로 못 먹는 이를 위해 쌀을 나눈 적이 있었느냐? 추운 날 얼어 죽을 것 같은 이에게 장작을 줬느냐? 병든 이를 찾아가 약을 챙겨주고, 늙고 병든 어른을 공경하며 도운 적이 있었느냐? 없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가 어려움에 처하자 남들이 먼저 나서주기를 바라는 건 오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으로는 예의를 다하되, 절대 보답을 기대하지 마라.

그럴 때 마음이 평온해지고 원망도 사라질 것이다. 남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아, 여유가 없었겠지' 하고 너그럽게 생각하라. '내가 이렇게 해줬는데 왜 저 사람은 이렇게 하나'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그간 쌓은 공덕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너희가 친척을 섬기고 부모님을 모시는 예절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것을 탓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핑계가 되어선 안 된다. 옛 조상 중에는 칠십이 넘은 나이에 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매일 지팡이를 짚고 종손을 찾아가 예를 다한 이가 있었다. 예는 그렇게 배우는 것이다. 너희도 아침마다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백부님 댁에 들러 문안을 드린 뒤 공부를 시작하라. 숙모님께는 짬이 날 때마다 찾아뵙고, 아픈 형이 계시면 약을 달이고 곁을 지키는 것이 도리다. 그런 정성도 없이 남의 돌봄을 기대해서야 되겠느냐? 그동안 너희가 예의 없이 행동했기에 어른들 마음에 불만이 쌓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지금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실까?' 하고만 있으니, 문제는 지금의 행동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쌓여온 태도에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진심을 다해 예의를 지킨다면, 한 달도 안 되어 어른들의 마음도 누그러질 것이다. 진심으로 힘쓰도록 하여라.'

 

정약용의 이 말처럼, 관계는 단 한 번의 일로 깨지지 않는다. 오랜 인연이 끊어지는 건 결국 그동안의 무심함, 무례함, 혹은 기대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쌓인 결과다. 만약 오랜 친구나 연인이 어느 날 갑자기 멀어졌다면, 그 사람을 탓하고 화내기에 앞서 내 지난 태도를 돌아보아야 한다.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서운해하거나, 내가 베푼 것을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가 바르게 행동해 왔다면 상대는 어떻게든 표현하려 하거나, 고맙다고 말했을 것이고, 정말 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라도 건넸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무례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그 누구도 나에게 선행을 베풀려고 하거나 돕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그래서 결혼식장에서 친구가 갈린다는 말도 이와 같은 경우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나의 결혼을 진심을 담아 축하 해주거나, 모른 척 넘어가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친족이라는 이유로, 혹은 오래 함께했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받고 나를 도와줄 거라 기대하지 말자. 인연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쌓아 온 행동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랜 관계는 단 한 순간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업보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행동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쌓여온 태도에 있다.'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그 맛을 모른다

정약용은 말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안에서 맛이 느껴진다.' 맹자가 말한 '단순히 형식만 갖추고 사람을 기계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진심이 담긴 예절이나 도리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 느낌은 해가 갈수록 더 깊어졌다. 그래서 공부를 멈출 수 없었다.

이근오, 2025,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다산 정약용』, 세계철학전집 정약용편, 모티브, 192~197쪽.

 
 

  모든 것은 한순간(찰나)이 아니다. 불가에서 말한 고차원의 업보를 논하기를 떠나 다산의 삶을 통해 그가 생각했던, 경험했던 삶이 오늘 교훈을 준다. 다산이야말로 청년기 그 누구보다도 천재성을 인정 받아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일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주군 정조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고 떨어졌을 때 마음 속 한가닥의 희망을 놓지 않고 유배 18년 해배 후 18년 숱한 노년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저술과 제자, 공부를 하였다.

  행불행이라고 한다. 정반합이기도 한데 행복이 다르지 않고 불행이 다르지 않다. 다산이 유배를 간 것은 불행이나 유배를 갔기에 그의 학문적 성취를 우리가 알 수 있었다. 세종 대 황희처럼 87세 고령까지도 주군 곁에서 일만 하였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주옥같은 그의 저작과 제자들은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청장년기의 입신을 죽는 그날까지도 소원하였지만 이름 아침 의관정제한 그에게는 끝끝내 다시는 부름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다산을 읽는다.

 

 

『다산시문집』 원전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너희들은 편지에서 항상 일가친척 중에 한 사람도 돌봐주고 긍휼히 여겨 주는 이가 없다고 이르면서, 신세가 기구하여 구당(瞿唐)의 염예(灩澦)라 하기도 하고 태행(太行)의 양장(羊膓)이라 하기도 하며 한탄하는데, 모두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말이니, 이것이 큰 병통이다. 내가 벼슬할 때에 약간의 우환과 질병이 있을 적마다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크게 입었다. 날마다 찾아와서 안부를 묻는 이도 있었고 다독거리며 부축해 주는 이도 있었고 약을 보내오는 이도 있었으며 양식을 대어 주는 이도 있었는데, 너희들은 이러한 일들을 눈에 익숙히 보아서 남의 은혜를 희망하는 마음이 있으니, 빈천한 자의 본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본디 남의 보살핌을 받는 법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더구나 여러 일가들이 오래 전부터 모두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살아서 서로 은혜로운 정이 없으니, 요즘 같은 세상에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만도 후(厚)하다 할 것인데 어떻게 그들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하물며 너희들이 오늘날 이와 같이 잔패(殘敗)하기는 하였으나, 여러 일가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부호하다. 다만 저들에게까지 미칠 힘이 없을 뿐이다. 매우 가난하지도 않고 또 남에게 미칠 힘이 없으니, 진실로 남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모든 일을 규문 안의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두어 계획 조치하고 심중에 남의 은혜를 희망하는 의사를 완전히 끊어 버린다면 자연히 심기가 화평해져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병통이 없어질 것이다.

여러 일가 중에 며칠째 밥을 짓지 못하는 자가 있을 때 너희는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느냐. 눈 속에 얼어서 쓰러진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땔나무 한 묶음을 나누어주어 따뜻하게 해 주었느냐. 병이 들어 약을 복용해야 할 자가 있으면 너희는 약간의 돈으로 약을 지어 주어 일어나게 하였느냐. 늙고 곤궁한 자가 있으면 너희는 때때로 찾아 뵙고 공손히 존경을 하였느냐. 우환(憂患)이 있는 자가 있으면 너희는 근심스러운 얼굴빛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환의 고통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잘 처리할 방도를 의논해 보았느냐. 이 몇 가지 일을 너희들은 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여러 집안에서 너희들의 급박하고 어려운 일에 서둘러 돌보아 주기를 바랄 수 있느냐.

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유념해서 평소 일이 없을 때에 공손하고 화목하며 근신하고 충성하여 여러 집안의 환심을 사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절대로 마음속에 보답을 바라는 근성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후로는 너희들에게 우환이 있는데도 저들이 돌보지 않더라도 너희들은 절대 마음에 한을 품지 말고 오로지 곧게 추서(推恕)하여 ‘저 사람이 마침 서로 방해되는 일이 있어서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고 절대로 입에 경솔한 말을 올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이렇게 해주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을 한번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너희들은 사고무친(四顧無親)한 곳에서 생장하고 봄바람처럼 온화한 가운데서 양육되었으므로, 자제로서 부형을 섬기는 도리와 종족(宗族)을 섬기는 도리를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으로서 궁약(窮約)에 처하는 도리를 익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다하는 충성은 알지 못하고 먼저 남이 나에게 베풀어 주는 은혜만을 기대하며, 규문의 행실은 닦지 아니하고 인리(隣里)의 칭찬만을 바라니, 그래서야 되겠느냐. 옛날 방고조(旁高祖)이신 동지공(同知公)께서는 칠십이 넘은 나이로 풍증마저 겹쳐 수족이 마비되어 불인증(不仁症)을 앓고 계셨는데도 매일 아침 식사 후에 반드시 지팡이를 짚고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선인(先人)을 만나셨는데, 이는 선인께서 종손(宗孫)이셨으므로 날마다 찾아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옛날 칠십 노인이 종증손(從曾孫)을 섬기던 도리로써 백부(伯父)를 섬기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앞으로는 항상 맑은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안에 들어가 너희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고, 다음에 동쪽으로 가서 백부를 찾아 뵌 뒤에 돌아와서 책을 읽도록 하여라. 여러 숙모(叔母)에 대해서는 한낮이나 저녁 때 틈나는 대로 찾아 뵈면 된다. 형님께서 팔을 앓고 계셨을 때에 너희는 촉시(蠋矢)를 줍고 초애(醋艾)를 잡으며, 약을 달이고 약탕관을 씻으면서 곁에서 주선하고 또 조석으로 떠나지 않고, 밤에는 모시고 자면서 연연히 차마 물러가지 않은 적이 있었느냐? 너희가 이렇게 하고서도 보살핌을 받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더욱 효도하고 공경하여 감히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일찍이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음에랴.

그동안 너희들의 멋대로 하는 행동으로 인하여 부형들은 노여움과 불평이 쌓여 있었으나, 다만 마음속에만 두고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너희들이 찾아와서 무엇을 요구하는 일이 있게 되자, 그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한 덩어리의 불평이 먼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다만 눈앞의 일만을 가지고 의심하여 ‘이 일을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어찌하여 이와 같이 처분하시는가.’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죄가 과거부터 있어 온 것이요, 당장 눈앞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다. 부디 생각하고 생각하여 행실을 돈독히 닦아서 부형의 마음을 기쁘게 하라. 백부를 섬기는 데에는 별다른 절목(節目)이 없고 오직 아비를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분발해서 진실한 마음으로 힘써 나간다면 한 달이 못 되어 백형(伯兄)의 마음이 환히 풀리실 것이다.

(汝輩書中。每云一家親戚。無人顧恤。或稱瞿唐灩澦。或稱太行羊腸。此都是怨天尤人底口氣。此大病痛。方吾從宦時。小有憂患疾苦。輒大被別人顧助。有日來問加減者。有保抱扶持者。有餽之藥餌者。有繼之糧𦁢者。汝輩習見此事。每有希望人恩者。不知貧賤人本分。自古及今。原無得人顧助之法。況諸族舊皆分居京鄕。未有恩情。如今不相攻亦厚矣。何可輒望其顧助乎。況汝輩今日雖敗殘如此。比之諸族。尙云豪富。但無力可及彼耳。旣不甚貧。又無及人之力。正是不得人顧助的處地。凡事悉從閨門之內。留心措畫。心中斷截了希望人恩之意。自然心平氣和。無怨天尤人底病痛。諸家有連日未炊者。汝能出些米粒以療之否。積雪凍僵。汝能分一條薪以溫之否。有病而須服藥者。汝能取一二錢方藥以起之否。有老而窮者。汝能時時往拜。斂膝侍坐。溫恭致敬否。有所憂患。汝能色勃然目瞿然。肯與之分其憂愁之苦。而議其所以善處否。於玆數者。汝不能焉。又何爲望諸家之遑遑然汲汲然趨汝之急而赴汝之難哉。我所不施。以望人之先施。是汝傲根猶未除也。玆後留心。於平居無事之日。恭睦愼忠。務得諸家之歡心。而心中絶不留望報底苗脈。日後汝有所憂患而彼不報。汝心中切勿懷恨。一直推恕之曰彼適有事相妨。不然力不及耳。口中切勿作輕儇語曰我曾若是若是。彼乃如此如此。此語一發。從前積功積德。一朝彼 他一句語吹了。作風中灰飛去耳。

汝輩生長於四顧無親之地。孳育於春風和氣之中。凡子弟之所以事父兄。及所以事宗族。未嘗聞見也。又人之所以處窮約者。未嘗習慣也。故不知盡己之忠。而先望施我之惠。不修閨門之行。而欲望鄰里之說。其可得 乎。昔旁高祖同知公旣七耋。兼有風痺不仁之疾。而每早食後。必扶杖而至吾家見吾先人者。爲宗孫不可不日見也。汝不以七耋老人之所以事從曾孫者。事伯父可乎。玆後每淸朝而起。先省汝慈于內。次省伯父于東。然後歸而讀書。若諸叔母。或午或夕。唯其隙也。伯氏之病臂也。汝曾收蠋矢執醋艾。吹爐火洗瓦罐。以周還左右。而朝夕不離。夜仍侍寢。戀戀而不忍退否。汝能爲此。而不蒙矜顧。猶宜益加孝敬。不敢疾怨。況未嘗爲是哉。方其自行而自止。父兄有積怒。積不平在中。特未及形諸外耳。及有所來干者。心中先有一塊不平物出以應之。汝則只將目下事疑之曰。此事我何所失乎。何處分若是乎。其實罪在向來。非緣目下有失也。思之思之。篤修行實。以悅父兄之心。事伯父無別般節目。唯與事父者一般。汝能感發興起。實心做去。不出期月。必渙然矣。)

고전번역서 『다산시문집』 제21권 서(書).

경기문화재단 앞 다산 정약용 흉상.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다산을 정체성으로 문화예술 펼치고 있다. 그의 고향 남양주 마재 마을은 18년 유배생활 내내 그리워한 동네이다. 늘 아침이면 상경하는 것을 기대하며 의관정재한 그다. 그곳에 그의 묘가 있다. 이곳에 경기도 실학박물관이 있다.

 

 

다산은 학문도야 20년 후 입신 18년, 유배 18년, 해배 후 초로에 18년을 살며 수양으로 거경(居敬) · 신독(愼獨) · 심심파적(心心派賊) 3축을 실천하였다. 그 중에 신독(愼獨)은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해야 것‘으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서 이르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가장 염두하고 실천하였다.

 

시대배경과 다산의 생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이조 후기의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교육학, 군사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500여 권에 달하는 이 저술들은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우리의 고전이 되고 있다. 다산의 저작들이 이토록 오늘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의 사고가 당시의 민족현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의 민족현실은 어떠했는가?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는 이조 봉건사회의 해체기로서 봉건적 병폐가 누적되어 그 말기적 현상들이 도처에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의 이조 사회는 전란(戰亂)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또한 국가에서는 고갈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온갖 협잡을 자행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과 이를 둘러싼 지방관들의 부정부패가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권층 내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그 권력투쟁을 통한 자체 분열의 결과 살아남은 소수의 특권층이 국가의 요직을 독점하게 된다. 이들을 벌열(閥閱)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자기네들의 특권을 이용하여 광대한 토지를 사유화하게 되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백성들은 무전농민(無田農民)으로 전락하고 만다.

학문의 경향도 권위주의화되고 경직된 주자학(朱子學) 일변도로 흘러 비생산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주자학 자체가 원래 강한 보수성과 체제유지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다, 이 시기에 이르면 주자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하고 있어서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용납하지를 않았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집권층의 자기방어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어 주자의 이름으로 정적(政敵)을 탄압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학문과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국과 민족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한 일군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실학자(實學者)들이다. 그리고 다산은 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학자였다.

다산의 생애는 대체로 수학기(修學期:1789년, 28세까지), 사환기(仕宦期:1800년, 39세까지), 유배기(流配期:1818년, 57세까지), 해배 이후(解配以後:1836년, 75세까지)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수학기(修學期)

다산은 1762년(영조38)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부친 정재원(丁載遠)과 모친 해남 윤씨(海南尹氏) 사이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압해 정씨(押海丁氏)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명관(名官)이며 학자였고,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다산은 자질이 영특하여 7세 때 오언시(五言詩)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지은 시 중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구절이 있다. 10세 이전의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6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고 평생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하게 되었다.

22세(정조7) 때 증광 감시(增廣監試)에서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이것이 정조(正祖)와 다산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후 5, 6년 동안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는 한편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보이는 시험인 반제(泮製)에 여러 번 뽑혀서 정조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28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첫 벼슬인 희릉 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었다.

사환기(仕宦期)

이후 다산은 정조의 총애 속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31세 때에는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지어 바쳐 활차(滑車)를 이용함으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케 했다. 33세에는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경기도 연천(漣川) 지방을 순찰한 후,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金養直)과 삭녕(朔寧)의 전 군수 강명길(康命吉)을 논죄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게 했다. 이 암행어사 길에서 그가 목격한 피폐한 농민들의 참상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 민중지향적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34세에 병조 참의(兵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나,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이 연루된 것을 트집잡아 반대파들의 공격이 심해지자, 정조는 다산을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5개월만에 다시 내직(內職)으로 불러들였다.

36세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노론(老論) 벽파(辟派)들의 모함이 심해져서 이른바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관직을 사퇴하려 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자신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정조도 하는 수 없이 그를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내보냈다. 곡산 부사로 재직한 2년여 동안 그는 명관(名官)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때 겪은 일선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이 후일 그가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에 커다란 자본이 되었다.

38세에 다시 내직으로 발령받아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형조 참의로 재직한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후일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집필하였다. 그 동안 천주교와 관련하여 그를 무고하는 상소가 잇따르자 39세 되는 해 봄에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처자와 함께 고향인 소내[苕川]로 낙향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1800년) 6월 28일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다산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유배기(流配期)

1801년(40세)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수많은 남인(南人) 시파(時派)들이 투옥되고 참형을 당했는데, 이때 다산의 셋째 형 약종(若鍾)은 옥사하고 둘째 형 약전(若銓)은 신지도(薪知島)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이른바 ‘황사영(黃詞永) 백서(帛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주막집과 보은산방(報恩山房) 등에서 거처하다가 1808년(47세) 다산(茶山)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18년 해배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강진에서 18년 동안 실로 정력적인 저술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환갑 때 지은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나는 해변가로 귀양을 가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옛날 어진 임금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대도(大道)를 알지 못했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야 흔연히 스스로 기뻐하였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사실상 다산의 주요한 저술들은 이 시기에 집필되었거나 구상된 것이다. 말하자면 다산은 어쩔 수 없는 유배지를 창조적 공간으로 활용한 셈이다. 특히 이 시기에, 경세학(經世學)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經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강진에서 이른바 18제자들을 길렀으며, 혜장(惠藏), 초의(草衣)와 같은 고승(高僧)들과도 귀중한 인연을 맺었다.

해배(解配) 이후

1818년(순조 18) 57세의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다산은 저술을 계속했다. 미완이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흠흠신서》, 《아언각비(雅言覺非)》, 《매씨서평(梅氏書平)》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인 1836년(헌종 2) 75세를 일기로 그는 이 세상을 하직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해제(解題)

송재소(宋載卲)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한국고전번역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