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별들의 고향 삼괴의 두 장군 이야기

달이선생 2026. 1. 12. 15:42

옛날부터 화성엔 귀인들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연줄이 더많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해방 후 우리고장에서 제가 제일 먼저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후 제연줄로 해서 입대한 친구들이 많았어요

동아일보 1978.9.14. 신팔도기 100 화성 1, ‘장군 많이 배출한 무인의 고장’ 김형일 인터뷰

 

삼괴(三槐) 지역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삼괴는 삼귀, 상귀 또는 쌍부(雙阜)로도 불렸는데, 쌍부는 지역의 쌍부산(쌍봉산)에서 유래한 고려의 속현 쌍부현에서 이어진 오랜 이름이다. 삼괴는 예로부터 수원에 속하며, 무향으로 무반이 성하였다. 대표적인 무반명문가는 해풍김씨 남양쌍부파가 유명하고 근대에 종손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삼괴 4.3항쟁을 이끈 김연방 지사가 선전관의 후신인 시종원 시어를 지냈다. 또한 장안면에는 무반으로만 가계를 이은 사곡리 흥천마을 가평간씨가 있다. 가까운 독정리에는 원독정 한천마을의 수성최씨는 수원을 대표하는 무장으로 유명한 진무공신 한풍군 최응일을 배출하였다. 이렇듯 현대에 들어서도 삼괴 출신으로 군출신으로 현달한 유명 인사가 바로 김형일(金炯一),김종환(金鍾煥) 장군이다.

역사에서 종종 같은 시기, 같은 활동에서 라이벌처럼 비교되는 인물들이 있는데 이들이 그렇다. 특히 김종환은 김형일에 앞서 삼괴, 장안면에서는 신화적 존재로서 장군보다는 장관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가 내무부장관을 역임하면서 지역의 읍내 조암에서 수원에 이르는 길이 도로포장도 되기 전에 조암에서 본가 장안2리(장안면)까지 도로포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정2리(버섭말, 장안면) 출신 김형일 장군 역시 박정희 대통령과의 악연으로 군복을 벗고 야당국회의원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장군보다는 국회의원으로 기억되고 있다.

두 장군이 라이벌로 보이는 것은 둘이 1923년 동갑이다. 또한 삼괴지역 장안면 출신으로 김형일의 버섭말과 김종환의 장안리는 지척이다. 그리고 장군이라고 이야기되듯 두 사람 모두 한국 현대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육군장성 출신이다.

화성군 불의에 맞선 저항의 고을

김형일 씨등 장군출신 많아 별들의 고향으로 불리기도

내고장 인물

경기도 화성군의 전신은 수원군. 문헌상에 등장한 것은 삼한시대부터다. 고구려시대에는 매홀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수성으로 바뀌었다. 조손조 정조 13년(1789)에 부왕인 사도세자의 유해를 화선 현륭원(현 태안읍 안녕리)으로 옮기면서 수도를 수원시와 화성일대로 천도하려다 실패한 역사적 궤적을 갖고 있다. 서울시와 엇비슷한 6백 86㎢에 1백 91㎢의 해안선을 끼고 있으며 쌀 소금 해산물 목축업이 유명하다. 일제치하에서는 제암리학살사건, 자유당시절에는 야당텃밭으로 인식되는 등 ‘저항의 고을’이미지를 갖고 있다.

정계인사로는 예비역중장으로 민주당사무총장을 지낸 고 김형일의원, 권오석 이태섭 유용근 전의원 등이 있고 이호정 정창현의원 등이 현역에서 활동중이다.

관계인사로는 김종환 전 내무장관(예비역대장) 이용훈 전 칠레대사 이정용 전 치안본부경비부장 홍인화 이태섭 전 군수 김일수 현 군수 등이 있다.

학계에는 김운태(서울대) 이필상(고려대) 왕기항(고려대) 남기환(경기대) 김인준 교수(서울대) 등이 활동하고 있다.

언론인으로 홍두표 한국방송공사 사장 강성구 문화방송사장 이제훈 전 중앙일보편집국장 등이 있다.

특히 김형일 김종환 씨를 비롯, 최영식(전 농어촌개발공사사장) 정광호(해병대사령관 유정회의원) 공국진 홍사영 김진섭 이재흥 배성순 씨 등 전현직 장성이 많아 한때 ‘별들의 고향’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현직 경제계 인사로는 고원호 대한보일러사장 오문환 경주코오롱관광호테사장 유덕희 경동제약회장 최승우 쌍방울사장 최병민 대한펄프사장 김진각 삼성건설사장 등을 배출했다.

차범근 조용필 씨 등 체육연예계 인사도 다수

연예 체육계 인사로는 가수 조용필 김학래 탤런트 여운계 개그맨 엄용수 씨 등이 있으며 축구감독 차범근 씨도 이고장 출신이다.

<화성 박종희>

동아일보 1995. 12. 12.

화성시 장안면 독정2리 버섭말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김형일이다. 버섭말 금녕김씨 충의공파로 소지주 김인권(金仁權)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법관이나 행정관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서울법대 전신인 경성법전을 졸업하고나서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임관하였다.

강원도 춘천 8연대 창설요원,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전신) 교관, 미 육군대학 등을 거치며 연합참모본부장, 2군단장, 육군참모차장, 국방부장관특별보좌관을 지내고 196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특히 군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군복을 벗은 것은 남로당의 숙군에서 살아남은 박정희를 좌익으로 여겨 경계했으며 4.19 이후 장면 내각에서 정군운동을 주도하던 그와 대립하였다.

민주당 시절 이종찬 장군이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 장군의 중용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장 총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매그루더 사령관과 논의했는데 얼마 후 매그루더가 육본으로 박 장군의 신원조회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형일 참모차장이 '박정희는 레프트(좌익)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매그루더 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 당시 박 장군은 육본 작전참모부장이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됐습니다

육본 정보국에서 박정희 휘하에서 근무헌 한무협(육사 6기, 육군소장 예편)의 1997년 서울 북창동 소재 자신의 사무실에서 증언. 오마이뉴스, '박정희 리스트'로 고구마 캐듯 수사 김창룡이 '구명'제안, 백선엽이 결심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 3] 누가 살려줬나

정운현(jwh59) 등록 2004.08.10 20:58수정 2004.08.13 19:50

결국 박정희 소장이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강제 예편된 것이다. 이러한 악연으로 그는 야당의 주요 포섭 인물이 되었고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화성군 선거구에서 처음 지역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줄곧 야당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야당정치인의 길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의 악연이 그의 정치관록을 탄탄히 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지역구 의원이 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지만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비준 반대투쟁을 하면서 ‘군일부반정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체포, 구금되면서 역설적이게도 그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졌다. 따라서 지역선거구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1974년 김영삼 총재 체제 출범과 함께 신민당 원내총무가 되는 등 승승장구 하였다.

그러나 1978년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김형일 의원 별세 7일에 국회장. 조선일보 1978.6.4.

 

고향집은 지역유지인 큰형 김형기가 스물여덟에 청상과부가된 홀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에서 살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고향집이 비자 몇 해 전 철거하고 빈 터만 남았다. 장수한 홀어머니가 홀로 기거할 때 장안면에서 복지 일환으로 농가주택 수리지원사업을 지원하였었다.

김형일 생가터
김형일 생가와 유사한 이 마을 고택. 김형일 생가 아래 위치.
독정2리 마을회관 및 경로당

 

『화성지』에 장안면 관할 동으로 장내리(場內里)가 제일 먼저 나온다. 이 장내리는 예전에 말을 사고파는 마장(馬場)이 서서, 마장리로 부르다가 마장 안쪽이라는 뜻으로 장내리(場內里)가 되었고, 또 다시 장안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원군 장안면(長安面)과 초장면(草長面)을 통합하여 장안면으로 하였는데 이 장안면의 유래가 된 마을이다. 장안면에 대한 기록은 『화성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옛 마정면(磨井面)과 화방면(禾方面)의 일부를 장안면에 합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도둑도 못 들어오는 편안한 마을이라고 해서 장안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장안리는 경주와 김해김씨가 대성으로 한 집성촌(1960년 조사에서 경주 36, 김해 27가구-『수원시사』 중 1997, 310쪽.)이다. 여기에 영광, 안동 김씨, 경주정씨, 단양우씨, 달성서씨, 안씨, 최씨 등이 입향하여 장안면에서 큰 마을을 이루었다. 이곳은 삼괴 지역을 대표 하는 천주교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1919년 당시 장안리 김선문(안드레이), 김여춘(요셉), 안경덕(가별), 김삼만(배드로), 김광옥(베드로), 최경팔(도마) 등 천주교 신자들이 주도적으로 삼괴의 4.3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중 김선문은 3대 전부터 천주교를 신앙해 온 독실한 집안이다. 당시 장안리 천주교인은 장안리에서 50리 떨어진 봉담의 왕림리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보았는데 이를 김선문은 집근처에 교당을 세워 미사를 보고자 하였고 김여춘, 안경덕, 최경팔, 김삼만 등이 출연하여 예배소를 건립하였다.(장안1리 폐쇄된 농협 수매창고 옆)

 

군대는 국민교육의 도장이 되어야한다

평소 신념. 동아일보. 김종환 합참의장, 1977. 12. 24.

김종환은 장안리 김해김씨 집성촌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한학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군인이 되고서도 않은 자리에서 한시를 줄줄이 읊을 정도로 조예가 깊었다. 농촌 출신으로 민속에도 관심이 많았다.

총명하여 집안의 기대를 한껏 받으며 당시 최고 엘리트 코스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4기(1947년)로 졸업하여 임관하였다. 지장(智將)으로 한국전쟁에서 야전연대장으로 많은 무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 등 수훈하였다.(국내외 훈장 15개) 성품이 순박하고 깔끔하며, 통계에 밝았다. 테니스를 취미로 하였다. 이후 육군보안사령관, 제3야전군사령관, 합동참모의장을 지내며 4성 장군(대장, 1976.12.19.)까지 이르렀다. 군의 전략 정보통으로 알려져 있고 수도권 방위망 구축에 공을 세웠다. 예편과 함께 내무부장관에 발탁(1979.12.14.)되며 출세하였다.

김종환 내무부장관 산림청 및 임업시험장 이용부 초도순시(1979년)

 

전두환, 노태우 등 12.12군사쿠데타 당시 합참의장으로 박희도 1공수의 합참 접수에 맞섰다. 이후 신군부에 협조적이어서 최규하 대통령 아래서 신군부로 정권이양 전에 내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55세로 명을 달리한 김형일과 달리 98세로 장수하였다.(2022년 작고)

보수적 육군 장성 출신이지만 윤석렬 정부 대통령 집무실 용산이전 계획 반대 성명에 나서는 등 합리적 의사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합참의장 출신으로 용산이 가지는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했던 장성출신자였다.

손정자 여사와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3남 1녀를 둔 김형일과 반대로 유사하여 김종환은 장수하였지만 1966년 12월 3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선산에 묻은(동아일보 부음) 이후로는 장안리에 별 인연을 두지 않았다. 현재 장안리 고향집은 조카며느리가 지키고 있다.

장안리 최초 천주교 장안리 공소 자리이자 농협수매창고지

 

조암 읍내에서 장안리 중심에 이르는 옛길에 관련된 이야기다. 장안리는 개발독재 시절에 삼괴지역 중심인 조암에서 수원에 이르는 길보다 먼저 아스팔트 도로가 포장된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이는 이 마을에서 가장 출세한 김종환 장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육사를 나온 김장군은 12.12이후 내무부장관이 되었고 이 당시 김장관이 고향을 찾을 때 서울에서 헬기를 타고 조암에서 내려 고향집 장안리까지 자동차로 들어오기 위해 도로를 포장했다는 말이 전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김해김씨로 현달했던 그위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이처럼 장안리는 여느 동네 이상으로 현달한 출신자들이 여럿 배출되었다.(국회의원 서태원 등)

김종환 생가터
김해김씨 세장지
12대 종환이 보인다. 김종환 장군인지는 확인 못함
장안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