흣트려진 갈기
후주군한 눈
밤송이 가튼 털
오! 먼길에 지친말
채죽에 지친 말이여 !
수굿한 목통
축처-진 교(꼬)리
서리에 번쩍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햇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힌말이여!
-‘말’ 이활(李活 필명)-이육사 조선일보 1930.1.3. 첫 시 <말> 발표(26살)
병오년(丙午年) 두 아해와 첫 답사를 시작하였다. 새해가 되고 이틀은 얌전히 집에 있고 3일 부모님께 인사차 나섰다.
병오년은 붉은 말띠의 해이다. '적토마의 해'라고도 하는데 이는 천간인 ‘병’자가 음양오행에 따라 10간 중 양이자 화(火)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색으로는 붉은색을 띠기 때문이다. 12간지 중 ‘오’에 해당하는 띠인 말이 붙어 붉은 말띠의 해라고 한다.

화성에서 말과 관련한 것이 건달산(해발 335.5m)에 있다. 과거 수원지역에서 남양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삼천병마(三千兵馬)고개 즉, 삼천병마골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수천의 군사와 군마를 매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곳에 삼괴(우정읍 원안리) 출신으로 수원에서 세계일류기업을 일군 SK그룹의 선영이 자리한다. 그리고 일찍이 서해의 관문으로 중국과 세계와 교류하던 당성(당항성)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흙으로 빚은 말인형인 토제마가 출토되어 화성시역사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이밖에 가까운 오산 독산성 세마대지는 삼천병마를 매복시킨 권율장군이 왜군이 독산성을 포위하자 식수가 풍부함을 말을 씻기는 행동으로 기지를 발휘한 세마대(洗馬臺)지가 있다. 이렇듯 병오년 말의 해 말과 관련된 화성지역의 자취이다.

화성시에서 유서 깊은 건달산은 세종때 국가의례에 필요한 음악을 연주할 때 격을 높인 ‘편경’을 제작한 경석이 채석된 곳이다.(1425년)
박연이 또 말하기를,
‘경석(磬石)을 얻기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 나라에서 질로 경을 만든 것은 역시 부득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 소리는 건방(乾方)에 속하니 입동(立冬)의 소리요, 흙 소리는 곤방(坤方)에 속하니 입추(立秋)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질로써 돌을 대신하게 되니, 이는 곧 팔음(八音)023) 의 제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지금 남양(南陽:건달산, 1425년)의 돌을 얻으니 그 소리가 매우 맑고 화평하여 당경(唐磬)보다 못하지 않사온즉, 이는 곧 성조(聖朝)의 시절에 응하여 나온 물건으로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진심(盡心)으로 쪼고 갈아서 크게 갖추어지기를 바라옵니다마는, 이를 갈고 다듬기가 쉽지 않으므로 반드시 오랜 시일이 걸려야만 비로소 갖추어지게 될 것이오니, 그것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반드시 전일에 쓰던 질로 만든 경을 쓰게 하소서. (堧又云: "磬石之得, 自古爲難, 我朝瓦磬, 亦不得已也。 然石聲則爲乾方立冬之音, 土聲則爲坤方立秋之音也。 以瓦代石, 殊失八音之制矣, 今得南陽之石, 聲甚淸和, 不下唐磬, 此乃聖朝應時之物, 非偶然也。 庶幾盡心磨琢, 期於大備, 然攻治未易, 必經久乃備, 其未備之際, 應以前日之瓦磬用之)
세종실록47권, 세종 12년(1430) 2월 19일 경인 5/6 기사
예조에서 의례 상정소와 함께 의논한 박연이 상서한 조건에 대해 아뢰다
이러한 세종대 국악 진흥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자 2009년 국립국악원에서 편경을 복원을 결정하고 실록에 나오는 세종대 남양 경석인 건달산경석을 채석하여 복원 사업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은거한 곳이자 한강 이남 첫 성당이라는 왕림 갓등이성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삼괴에서 천주교 신자들인 장안리 사람들이 신앙을 깊이 하였고 나중에 장안리에 예배처인 공소도 마련한 역사가 있다. 특히 이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삼괴의 4.3항쟁(화수리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1908년 순종의 융건릉 행행에 맞춰 안중근 의사가 갓등이 성당을 찾은 정황이 발견된다.


전통적으로 삼괴는 수성최씨가 번성한 땅이다. 봉담읍 상리 삼천병마골에 SK선영이 자리한다. 묘역에 이르는 길은 차단된 상태로 묘역에 오르면 가장 위쪽부터 선대인 최원섭, 아들 최학배, 최종건, 최종현, 장손 최윤원崔胤源 묘의 묘가 자리한다. 이들 조상은 원안리 즉 삼괴에서 살았다. 이후 최원섭(崔元燮), 최학배 부자가 해창에 이주하였다가 아들 최학배가 다시 수원 평동으로 이거하여 가산을 일궜다.

이곳은 선뜻 자유롭게 관람하기는 어렵다. 단순 순례 및 관광지가 아닌 신앙을 정진하는 곳으로 가톨릭대학교와 수녀회 등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앙의 못자리라는 역사성으로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2020년 11월 29일 왕림성당을 ‘제1호 천주교 수원교구 순례 사적지’로 선포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한옥 사제관(한자로 쓴 현판 달림) 앞에는 묘비 2 기가 위치한다. 1890년 4월 13일 선종한 초대 주임 안학고(앙드레[André]) 신부(‘탁덕안학고야고버지묘‘비)와 1914년 5월 26일에 선종한 제5대 주임 곽원량(르각[Charles Joseph Le Gac])신부(‘탁덕곽원량가오로지묘’비)의 비다. 이는 왕림공동묘지에서 옮겨왔다. 두 사제의 유해는 현재 교구 안성공원묘역 성직자 묘역에 안장돼 있다.
묘비에는 사제를 뜻하는 어휘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탁덕’(鐸德)과 우리식 이름과 묘, 출생과 사제서품, 입국과 선종 날짜의 기록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특기할 것은 세례명은 한글로 새겼다. 갓등이 가톨릭 130여 년의 역사를 증명하는 종교유산이다.






곽원량 신부와 안의사는 특별하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영향을 준 선교사로 안의사가 고향 황해도에서 만난 인연으로 후일 1905년 12월 상해에서 만나
“자네는 빨리 귀국하여 자네 일에 힘쓰게. 첫째는 교육을 발달시키는 것이네. 둘째는 사회를 확장하는 것이네. 셋째는 민심을 단합하는 것이네. 넷째는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네.”
라는 당부의 말을 들을 다음 귀국하여 가산을 정리해 다음 해에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곽원량의 가르침을 안의사가 생애 끝에서 세상에 보인 것이 바로 1910년 3월에 여순감옥 경수계장(驚守係長) 나카무라(中村)에게 써준 유묵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이다. 안중근의사의 교육철학을 실천한 내용으로 본문과 방서(傍書)의 내용은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 황금 백만 냥은 하나의 아들을 가르침만 못하다.는 내용이고 경술년(1910)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이다. 이 문구는 『명심보감(明心寶鑑)』에 “황금이 가득한 바구니는 아들에게 하나의 경서를 가르침만 못하고, 아들에게 천금을 줌은 아들에게 하나의 기예를 가르침만 못하다(黃金滿籯, 不如教子一經, 賜子千金, 不如教子一藝).”라고 한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 유묵의 구절이 르각 신부의 말을 듣고 평생 안의사가 교육과 계몽에 힘써 실력을 양성시키려한 교육가로서 그의 철학을 실천한 내용이다. 이처럼 르각 곽원량 신부는 빌렘 홍석구 신부와 더불어 그의 신앙을 공고히한 중요한 인연이었다.





갓등이 지역은 외부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된 곳이면서도 인근 지역과의 교통이 편했기 때문에, 기존 주민 외에 여러 곳에서 신자들이 들어와 적어도 1820년대 중반까지는 교우촌이 세워지고 1839년 이전에 공소가 설정되었다. 이후 병인박해를 거쳐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갓등이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면면히 이어졌으며, 1880년대 초에 다시 교우촌(공소)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갓등이 지역에는 농촌마을인 왕림과 옹기점 마을인 독정이, 가마리가 병존했고 이 교우촌들이 각각 공소로 성장하면서 1888년 수원교구 지역에 최초로 설정된 갓등이(왕림)본당의 모태가 되었다. 박해시기 갓등이 지역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6~7년간 갓등이에 거주하면서 교리교사로 활동했던 민극가 회장은 교육과 전교에 앞장섰던 순교성인이었다. 1839년 1월 앵베르 주교의 사목방문을 받을 정도로 갓등이 공소는 경기 남부 지역의 주요한 신앙공동체였고, 병인박해기의 순교성인 정의배 마르코 회장과 순교자 최 야고보는 갓등이 지역 출신이었다. 순교자 한 안드레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갓등이는 병인박해기 피신지로서 역할도 수행했다. 필자는 갓등이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무명순교자 묘 2기의 실체를 조사하여, 그 무덤의 주인공들이 1867년 1월 해미에서 38세의 나이로 친척인 최 야고보와 동시에 순교한 ‘최 요왕’과 병인박해 때 갓등이 현지에서 포졸들에게 공개 처형을 당한 ‘방치룡’이라는 가전 전승과 증언을 채취할 수 있었다.
정종득 신부, 2012, 개항기 이전 천주교 갓등이 공소와 순교자들(Gatdeung'i gongso(Catholic Mission Station) and its Martyrs before the opening of ports in Korea), 수원교회사연구소교회사학제9호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에 두루 들러 권업 모범장(勸業模範場)을 순람(巡覽)하였다.(詣隆陵、健陵, 親祭, 歷臨西湖, 巡覽勸業模範場。)
순종실록2권, 순종 1년 10월 1일 양력 2/2 기사 / 1908년 대한 융희(隆熙) 2년
융릉과 건릉에 가서 친제하고 서호의 권업 모범장을 돌아보다
1908년 10월 1일 대한제국이라고 허울만 내세운 조선이 망하기 전 순종이 융건릉을 찾았다. 현릉원이 1899년 융릉으로 추승된 이후 융릉이 중요해졌다.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융릉에 대한 참배는 고종황제를 이어 등극한 순종황제이다. 순종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기차를 타고 왔다 간 하루 만의 능행을 단행하였다. 순종황제는 1908년 10월 2일 새벽 6시 궁궐을 출발하여 7시 남대문역에서 기차에 승차하였다. 배종한 문무 관헌들과 함께 1시간 가량 운행한 기차는 8시 대황교(大皇橋)에 임시 정거장에 내렸다. 대황교에서부터 원래의 능행로를 따라 융릉과 건릉을 참배한 뒤 오후에 서호(축만제) 뚝방을 따라 항미정을 거쳐 권업모범장을 시찰하고 5시 50분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하여 6시 30분에 환궁하는 일정이었다.
기차로 대황교 임시정거장 도착, 가마를 타고 오전 9시 30분 융통 도착, 건릉 재실에 들어가 잠시 휴식 후 수라, 정자각에 올라 전알레(展謁禮)를 행하고 능상(陵上)을 봉심하였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에 다시 정자각 위에서 사릉(辭陵)의 예(禮)를 마치고 건릉에 가서 전알레 등은 융릉 때와 같이 했다. 이후 휴게소에서 점심 수라를 들고 오후 1시 40분 휴게소에서 가마를 타고 오후 2시 30분에 대황교에 도착하였다. 열차(列車)로 서호역으로 출발하였다.
한동민, 2025, 화성지역의 역사문화적 유산과 현대적 가치, 화성학총서 제6집 학술대회, 화성문화원, 39쪽.
당시 순종의 능행차에 맞춰 수원을 찾은 인물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이다. 1908년 10월 2가 수원우편국 소인이 찍힌 안중근 의사의 우편엽서가 이를 증명한다. 이 엽서는 순종황제의 수원 방문을 기념하는 소인이 찍힌 것으로 권업모범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엽서인데, 평안도 진남포의 돈의학교 홍석구 신부에게 보낸 것이다. 도마 안중근과 홍석구(빌렘) 신부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안중근 홍석구 신부 엽서 내용
平安道 鎭南浦 평안도 진남포
敦義學校 內 돈의학교 내
洪錫九 神父 座下 홍석구 신부 좌하
安道嗎 應七 再拜 안도마 응칠 재배
戊申 十月 一日 무신 시월 일일
평안도 진남포 돈의학교 내
홍석구 신부님께
안도마 응칠 두 손 모아
무신(1908)년 10월 1일
有火急用事 目下 유화급용사 목하
水原留宿 前途 수원유숙 전도
漢城替過 各他 한성찬과 각타
向發爲詐 敵知 향발위사 적지
諸率等 下傳于 제솔등 하전우
呲旨韋 基似董 자지휘 기사동
各他着治 上慶 착타착치 상경
謙如 安心之地 겸여 안심지지
千萬伏望 천만복망
화급(빨리)하게 쓸(전할) 일(내용)이 눈 앞(아래)있습니다.
수원에서 유숙(머물고 있음)하고 있는 길(실제의 도로) 앞(일)으로 보낸다.
(수원에 지원군이 유숙하였는데, 무리지어 이동하지 말 것을 지시한 내용으로 추정)
한성(남한산성)을 통과할 때, 길(종전 경로)을 바꿉니다. 각자 (남처럼) 통과하세요.
출발하여 향할 때, 적이 알고 있기에 (그들을) 속이기 위함입니다.
통솔하는 모두에게 아래와 같이 전합니다.
뜻(하늘의 교지)을 물리치거나 꺼려할 것인가? 이와 같이 바로잡습니다.
각자 남처럼 (행동하지만) 붙어서 다스려 올라오면 경사가 있을 것이다.
겸손함은 안심할 수 있는 땅과 같은 것이다.
천만(만백성)이 엎드려서 바라는 것이다.
엽서의 내용은 화급한 용무가 있어서 현재 수원에 유숙하고 있다는 것과 서울을 거쳐 평안도 진남포로 갈 것임을 알리는 내용이다. 기존의 공식적인 연대기에서 안중근 의사는 1908년 10월 당시 러시아에 있었다. 함경도를 통해 국내로 진공작전을 펼쳤던 안중근 의병부대는 일본군 포로를 살려 준 대가로 행적이 알려져 신아산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러시아로 돌아가 다시금 의병을 모집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분명 1908년 10월 1~2일 수원에 있었음에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10월 1일 쓴 엽서는 10월 2일자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1908년 10월 2일, 그날은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융건릉과 권업모범장을 방문했던 날이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가 연고도 없는 수원을 찾아왔던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수원지역의 천주교 세력 및 천주교 신부를 만나려 했을 가능성이다. 당시 수원에는 왕림 갓등이공소가 있었고 주재 신부는 요셉 알릭스(Joseph Alix, 韓若瑟, 1861~1948) 였다. 둘째, 순종황제의 능행에 이토 히로부미가 배종하여 따라올 것으로 예상했을 수도 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가 아니라 '수원 의거'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다는 역사적 상상을 해볼 수 있다.(한동민, 2025, 화성지역의 역사문화적 유산과 현대적 가치, 화성학총서 제6집 학술대회, 화성문화원, 43쪽.)
이러한 안중근의사의 수원 방문에서 분명한 사실은 그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프랑스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교우가 돈독하였고 특히 이들과 관계가 깊은 곳이 갓등이라는 것이다. 당시 곽원량 신부의 행적을 단언하긴 어려우나 안의사는 르각과 더불어 빌렘, 뮈텔 등과의 관계를 볼때 갓등이를 염두했던 수원행이었을 것이다. 물론 르각, 빌렘 등 안의사를 심정적으로 동조했던 이들도 있지만 조선교구를 담당했던 뮈텔 등은 양대인자세를 견지하며 안의사의 행동을 가톨릭에 있어 매우 불온한 것으로 여긴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주의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로서 동방전교가 목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전교가 안정되게 진행해야는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일제에 반항하여 틀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과오였다. 실제로 뮈텔은 빌렘과 달리 안의사의 하얼빈에서의 이토 사살 의거를 신앙인으로 정당화 할수 없다고 파문하였다. 이는 조선교구를 지키려했던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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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안중근
위국헌신군인본분 (安重根義士 遺墨 -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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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앙이 깃들고 은신한 전통으로 이곳에는 이러한 영성을 바탕으로 사제를 양성하는 가톨릭대학교가 위치한다. 자유로이 넘어다닐 수 없는 이유가 이때문이다.





『화성지』에 장안면 관할 동으로 장내리(場內里)가 제일 먼저 나온다. 이 장내리는 예전에 말을 사고파는 마장(馬場)이 서서, 마장리로 부르다가 마장 안쪽이라는 뜻으로 장내리(場內里)가 되었고, 또 다시 장안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원군 장안면(長安面)과 초장면(草長面)을 통합하여 장안면으로 하였는데 이 장안면의 유래가 된 마을이다. 장안면에 대한 기록은 『화성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옛 마정면(磨井面)과 화방면(禾方面)의 일부를 장안면에 합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도둑도 못 들어오는 편안한 마을이라고 해서 장안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장안리는 경주와 김해김씨가 대성으로 한 집성촌(1960년 조사에서 경주 36, 김해 27가구-『수원시사』 중 1997, 310쪽.)이다. 여기에 영광, 안동 김씨, 경주정씨, 단양우씨, 달성서씨, 안씨, 최씨 등이 입향하여 장안면에서 큰 마을을 이루었다. 이곳은 삼괴 지역을 대표 하는 천주교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1919년 당시 장안리 김선문(안드레이), 김여춘(요셉), 안경덕(가별), 김삼만(배드로), 김광옥(베드로), 최경팔(도마) 등 천주교 신자들이 주도적으로 삼괴의 4.3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중 김선문은 3대 전부터 천주교를 신앙해 온 독실한 집안이다. 당시 장안리 천주교인은 장안리에서 50리 떨어진 봉담의 왕림리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보았는데 이를 김선문은 집근처에 교당을 세워 미사를 보고자 하였고 김여춘, 안경덕, 최경팔, 김삼만 등이 출연하여 예배소를 건립하였다.(장안1리 폐쇄된 농협 수매창고 옆) 또한 당시 김선문의 일제 심문조서에서 갓등이왕림성당 천주교의 신부는 신자들이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고 <표 6>에서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중 염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확인 된다.
<표 6> 장안리의 3․1운동 주요 참여자
|
인명
|
나이
|
주소(직업)
|
종교
|
학력
|
출생지 및 비고
|
|
金善文
|
45
|
1177(농업)
|
천주교/3대전부터 신앙
|
|
경성부 桂洞
|
|
金汝春
|
52
|
1271(농업)
|
천주교7~8년전부터
|
|
미상
|
|
安敬德
|
32
|
1776
|
천주교
|
|
미상
|
|
朴景模
|
41
|
1104(염업)
|
기독교
|
|
주소와 동일
|
|
金正杓
|
50
|
1152(농업)
|
천도교(2~3년전부터)
|
|
주소와 동일
|
|
崔敬八
|
44
|
127(염업)
|
천주교 2년전부터
|
|
南谷面 蘆於
|
|
金致培
|
35
|
75(농업)
|
무
|
|
주소와 동일
|
|
鄭殷山
|
33
|
1120(농업)
|
무
|
|
주소와 동일
|
|
鄭順業
|
22
|
농업, 염업
|
무
|
|
주소와 동일
|
|
宋善良(宋壽萬)
|
29
|
1180(농업 및 목수)
|
무
|
|
우정 화수리
|
|
趙敎舜
|
34
|
1208
|
천도교
|
|
백낙렬이 함께 의논한 인물, 천도교전도사
|
|
金三萬
|
26
|
농업, 염업
|
천주교, 부모때
|
|
주소와 동일
|
|
金寬植
|
26
|
1205(농업)
|
무
|
|
우정 석수리
|
|
朴福龍
|
29
|
농업
|
성결교
|
|
경성부 장안리소사
|
*박환, 2004「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정신문화연구』제27권 제 1호 p. 130 참조하여 국사편찬위원회,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21 참고로 내용수정.
2024년 화성시는 3.1운동인 삼괴 4.3항쟁에 적극 가담하였던 이들 장안리 천주교인 김선문, 김삼만, 김여춘, 안경덕 등 4명에 대해 국가보훈부에 서훈신청을 하였다.
조암 읍내에서 장안리 중심에 이르는 옛길에 관련된 이야기다. 장안리는 개발독재 시절에 삼괴지역 중심인 조암에서 수원에 이르는 길보다 먼저 아스팔트 도로가 포장된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이는 이 마을에서 가장 출세한 김종환 장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육사를 나온 김장군은 12.12이후 내무부장관이 되었고 이 당시 김장관이 고향을 찾을 때 서울에서 헬기를 타고 조암에서 내려 고향집 장안리까지 자동차로 들어오기 위해 도로를 포장했다는 말이 전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김해김씨로 현달했던 그위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현재 조카며느리가 마을 생가지에 살고 있다. 이처럼 장안리는 여느 동네 이상으로 현달한 출신자들이 여럿 배출되었다.(국회의원 서태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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