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관, 김승(정)현 등은 5천군을 거느리고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 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 싸우다가 마침내 패하였고 ......
오지영의 「동학사」 에 나오는 기록이다. 1894년(고종 31) 1월 10일 새벽 고부읍 마항장(馬項場)에 모인 농민군 1,000여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고부읍의 삼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이 달아났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本意)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中)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호강(豪强)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호남 창의 대장소(大將所) 백산(白山)에서 '백산격문'
1894년 음력 3월 하순 백산에서 포고된 격문 내용이다. 이날 모인 농민군이 흰 옷을 입고 있어서 백산을 불린다는 설도 있고
'않으면 죽산, 서면 백산'
이라는 말이 유명하다. 백산에서의 봉기는 고부라는 한 고을의 문제가 아닌 농민과 나라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한 것을 천명한 것으로 다른 지역 농민들이 속속 모여들어 대규모 봉기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중앙정부와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 때부터 농민봉기가 아닌 농민전쟁이었다.
이러한 급박한 정세 속에서 무능한 고종은 민씨 척족과 중전 민씨와 함께 또 다시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속국이 되어 개화당의 갑신정변 등 많은 국가위란을 자처하고도 또 다시 악수를 두었다. 문제는 청의 구원 요청은 곧 일제의 조선출병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톈진조약, 1885)
1894년 1월 10일 정읍 고부에서 첫 기포한 동학농민혁명은 3월 20일 고창군 무장기포, 3월 25일경 백산대회를 거치면서 호남지역과 호서지역뿐만 아니라 경기도 지역까지 영향을 주었다. 우선 고종이 광주에 있는 헌릉(獻陵)을 참배하고자 하였으나 ‘동학군의 기승’을 우려하여 연기할 정도였다. 경기지역에서 동학군의 본격적인 활동은 8월 중순 이후부터 보이고 있다. 특히 왕궁과 가까운 송파 부근에 ‘동학군이 모인다’는 설이 돌 정도로 동학군에 대해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송파 부근의 동학군의 동향은 현장조사 결과 군사적 활동을 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1월 25일경에는 송파에는 5백여 명의 동학군이 집결하였다. 이는 송파에는 일본병참 송파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병참기지는 일제의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 따라서 동학군 역시 이를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원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어떠했을까. 우선 수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용인과 진위지역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이는 수원의 동학군 지도자들의 포교지역이 진위와 용인, 죽산 일대에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순사 마츠모도 소호이치(宋本惣市) ․ 사메지마 미이리(鮫島彌入) ․ 쿠라카와 노부유키(倉川信行_의 보고에 의하면 “죽산(竹山) 기타 각군에서 동학군의 행패가 심해져서 무기를 탈취하려는 낌새가 보인다”라든가, “벌써부터 이 지방에 동학당이 다시 발동하여 극심하게 휘졌고 돌아다닌 것이 사실입니다”라고 하여 동학군의 활동이 점차 구체적으로 조직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 동학군의 지도자는 김형식(金瀅植) ․ 김용희(金鏞喜) ․ 김구섭(金九燮) ․ 안치서(安致西) ․ 홍승업(洪承業) 등인데, 김형식은 평택, 김용희과 김구섭은 목천(木川), 안치서는 온양, 홍승업은 천안 출신이었다. 이들의 활동지역은 직산 ․ 평택 ․ 천안 ․ 목천 등지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수원 주변의 동학군의 활동에 대해 중앙정부에서도 “요즘 비도들이 경기도 내의 죽산과 안성 양 읍으로까지 침범한다”고 하여 그 대책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군국기무처에서도 “근일 동학도들이 창궐하여 경기지방까지 침범하였다. 이때에 지방관이 게으르면 걱정이다. (중략) 죽산과 안성은 동학도 중 핵심인물들이 모여 있다. 잠시라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수령을 교체하되 능력 있는 자를 차출하여 병력을 이끌고 가서 포착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할 정도로 동학군의 활동이 관아를 위협하였다. 당시 진위 소사에는 동학군이 1만여 명이 될 정도였다. 이와 관련하여 수원 유수의 보고에 의하면 수원 인근지역의 동학군 동향은 다음과 같다.
"도동(匪徒, 동학군)들이 호남(湖南)에서 공주(公州) 등지까지 가득 차 있어 서로 연락(連絡)을 취하고 있고, 소사(素沙)에 있는 적(賊)들도 그 수(數)가 만명(萬名)이나 됩니다. 그러나 수원(水原)에 있는 우리 병사(兵士)는 2백 명뿐이고 귀병(貴兵:일본군)들도 70명에 불과하여 그 중과가 너무 차이가 있음으로 감히 전진(前進)할 수가 없습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134면.
수원 인근지역에서 동학군의 활동은 수원지역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마츠이케 이시로(宋井慶四郞)에 의하면 9월 10일경 “수원부(水原府)에 수감(囚監) 중인 동학비괴(東學匪魁)를 그 비당(匪黨)이 탈취(奪取)”할 것이라 하여, 동학군의 수원관아 공격이 임박하였음을 보고하면서 급히 일본군의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수원 부근에 동학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도 없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남부병참부 이토 유오유시(伊藤祐義) 병참감은 다음과 같이 명령서를 내렸다.
1. 파견(派遣)하는 수비병(守備兵)은 1개 소대(小隊)이고, 육군보병소위(陸軍 步兵 少尉) 히라다 츠네이리(原田常入)가 이를 지휘한다.
2. 파견하는 우리 수비병(守備兵)은 금일 제물포(濟物浦)를 출발하여 인천(仁川)을 경유 과천현(果川縣) 남쪽 약 30리에 있는 군포장 십자로(軍浦場 十字路)로 진출한다. 내일 26일 오후에는 그 곳에 도달할 것이다.
3. 군포장(軍浦場)에서 조선군(朝鮮軍)이 오는 것을 기다린다. 따라서 조선군은 행군속도(行軍速度)를 배가(倍加)해서 그 곳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4. 조선관리(朝鮮官吏)는 우리 군사(軍士)의 병량(兵糧)과 말먹이의 구매(購買)와 숙사(宿舍)의 설치(設置) 등을 주선하도록 힘서야 할 것이다. 단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우리 군(軍)에서 지불할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42면.
이 명령서에 의하면, 수원지역 동학군을 토멸하기 위해 일본군은 히라다(原田) 소위가 지휘하는 1개 소대 49명을 파견, 군포장에서 조선군과 연합을 기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0월 25일(양) 새벽 5시, 조선군은 오후 4시에 각각 출동하였다. 일본군은 수원 부근에서 오산동(烏山洞)에 거주하는 접주 홍경운(洪敬雲)을 잡아 수원부로 압송하였다. 이후 수원지역 동학군의 활동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있었지만 11월 11일 스기무라(杉村) 서기관(書記官)에 의하면 “동학군의 세력이 다시 회복하여 관아를 밀어 닥칠 것이다”하여, 동학군이 재기하여 수원부를 위협하였다. 이에 수원유수는 일본군의 주둔을 강격하게 요청하였다.
이러한 수원지역 동학군의 활동을 수원유수 조병직(趙秉稷, 1834~1901)의 장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병직의 장계에 의하면, “동학의 괴수를 잡아 바친 본영 집사 엄태영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적합한 지”를 묻고 있는데, 엄태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어 동학군 지도자를 잡았다.(『계초존안』 1894년 11월 11일.) 또한 일본군 서기관 스기무라(杉村)에 따르면, “지난번 우리 군대가 수원을 지날 때 그 지방의 동학당 두목을 체포하였기 때문에 한때 조용해졌었지만, 요사이 또 그 잔당이 세력을 회복하여 많은 인원이 수원부로 밀어 닥칠 것”이라고 하였던 바, 수원지역 동학군은 9월 18일 청산기포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원지역 동학군 역시 충청 內浦지역 동학군과 연합하여 활동한 사례도 있다. 11월 17일 내포의 대접주 이창구(李昌九)는 자신이 지휘하는 동학군과 수원의 동학군과 함께 수원과 내포간의 경계를 이루는 송학산(松鶴山) 민보(民堡) 즉 송학보(松鶴堡)를 점령하여 군량미를 확보하는 한편 조운(漕運)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이들 동학군은 11월 27일 일본군의 내습을 피해 해미( 海美:서산 해미)지역으로 피신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41~181면)
1894년 9월 들어 국내의 정치상황은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기 위해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 임기 1893.7.26. 전임 오토리 게이스케) 특명전권공사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 임기1894.10.15~1895.8.17. 후임이 을미사변의 주범 미우라 고로) 로 교체하였다. 그는 9월 27일(양, 10월 25일)에 조선에 부임하면서 일제의 저항세력을 무자비하게 말살시킬 방침을 세웠다. 우선 조선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후 동학군 토벌에 나섰다. 이에 따라 정부는 관군 약 3백 명씩을 안성과 죽산에 각각 파견하였다. 이어 9월 21일에는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하고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였다.(선봉진일기 갑오 9월 21조.) 그리고 9월 26일에는 장위영 정령 이규태(李圭泰)를 순무선봉장으로 임명함으로써 동학군 진압을 본격화화였다.
일제는 동학군을 초멸하기 위해 이른바 ‘동학군토벌대’라 불리는 후비보병 제19대대를 파견하였다.(강효숙, 「제2차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역사학연구 762, 청목서림, 2002, 26면.) 원래 후비보병은 두 개 중대로 나누어 1개 중대는 수원․천안․공주 등지를 경유하여 전주부 가도로, 다른 1개 중대는 용인․죽산․청주․성주 등지를 경유하여 대구부로 이어지는 가도의 동학군을 토벌할 예정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47-148면 및 151면.) 그러나 동학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하기 위해 세 개 중대로 확대 편성함에 따라 서로․중로․동로 3개 노선으로 재조정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154-156면 및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국사편찬위원회, 1991, 63-68면.) 3개 노선 중 서로는 과천 ․ 수원 ․ 진위 ․ 양성 ․ 평택, 중로는 신원 ․ 용인 ․ 양지 ․ 죽산, 동로는 광주 ․ 이천 ․ 장호원으로 이어졌는데, 수원은 서로에 속하였다.
한편 조선정부는 동학군은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에게 우수한 무기를 공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군 혼성여단장은 조선군을 손쉽게 지휘할 수 있도록 村田式(무라타식) 소총을 지급해 주자고 주장하였지만 일본 대사관측은 경복궁 점령 때 몰수했던 모젤 소총 1,000정 중 400정을 반환해 주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331면.)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이 토벌에 나서자 경기지역의 많은 동학군은 무기의 열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9월 하순부터 정부는 유생층을 비롯하여 보부상 등 반동학 세력을 규합하여 민보군을 만들도록 권장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민보군에게 학살당하거나 재산까지 빼앗기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하하는 이두황 부대는 수원의 동학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근지역 동학군을 진압하였는데,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9월 21일, 용인에 이르러 (중략) 삼경(三更)에 1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직곡(直谷)에 있는 접주 이용익(李用翊, 用益)의 집에 가서 동학도 14명을 잡았고 또한 금량(금량장金良場, 수여면水餘面 : 용인)에 사는 이삼준(李三俊)의 집에 가서 6명의 동학도를 잡아 양지읍(陽智邑)으로 압행(押行)했다.
9월 22일, 양지읍에서 어제 잡은 20명을 일일이 조사한 후 16명은 석방하고 이용익과 이삼준 그리고 양지읍에서 잡은 정용전(鄭用全, 龍全)과 이주영(李周英) 등 4인은 읍 앞 대로상에서 포살하였다.
9월 27일, 이참의(李叅議)가 보낸 글에 이천 일본 병참소(兵站所)에서 잡은 동학도와 적당 30인을 구속하였다. 5명은 일찍이 놓쳐버렸고 나머지 20여 명 중 괴수 10명은 포살하고 나머지는 석방하였다. 안성군수 성하영이 도임하던 날인 24일에 비도 3인(魁首 서구서兪九西, 접주接主 김학여金學汝, 진천동도鎭川東徒 김금용金今用)을 잡았는데 27일에 참살하였다.
10월 3일, 용인군 서이면(西二面) 장항(獐項)에 사는 우성칠(禹成七)을 잡아 가두었다. 4일 조사해보니 동도의 거괴이므로 처형했다.
10월 5일, 용인군 남일면 주천(注川) 등지에서 동학도 5명을 잡아 가두었다.
-「양호우선봉일기」, 동학란기록 상, 259-266면.
이밖에도 수원 관할의 진위에서는 민공익(閔孔益), 한홍유(韓弘儒), 김명수(金命壽) 등 3명의 동학군이 피체되었다. 이들은 모두 수원의 대접주인 김래현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고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동학교인들이었다.(「순무선봉진등록」, 393, 395, 411~413면, )
성주현(청암대), 수원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지도자 처형 후 처리과정. #역사적 사실 착오 기재 및 오기 등을 정정함.


수원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880년경이었다. 이 시기는 국내외의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때로, 내적으로는 동학의 중심지가 영남지역을 벗어나 강원도 영서지역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1880년과 1881년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간행될 정도로 교단의 조직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1880년 고종이 개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개화파인사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미국과 수교를 함으로써 이후 서양 열국과의 외교수립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은 동학이 그 동안 영남과 충청을 벗어나 경기도와 호남지역까지 포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수원지역에 동학을 전래한 주요인물은 서인주(徐仁周)와 안교선(安敎善)이다. 서인주는 수원출신으로 1883년 3월 김연국•손병희• 손천민•박인호 등과 함께 최시형을 방문할 정도로 교단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 30여 년간 불도를 닦았으나 동학의 ‘포덕천하 광제창생(布德天下廣濟蒼生)'의 이념에 공감하여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서병학과 함께 동학의 의식과 제도를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신체와 용모가 매우 작고 특이하였으나 재주가 많아 당시 사람들이 이인(異人)또는 진인(眞人)라 불렀다. 1885년 9월에는 상주 왕실촌에 머무르고 있던 최시형과 그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으며, 최시형은 1889년 서인주가 금갑도(金甲島: 전라남도 진도군 금갑리)에 유배되었을 때 그의 석방을 위해 기도를 하는 한편 5백금을 주고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안교선은 호남인으로 1870년대 후반에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1879년 최시형이 강원도 인제 방시학의 집에 수단소(修單所)를 설치할 때 안교상이 서유사, 안교일이 감유사, 안교백이 책자유사, 안교필이 륜통유사로 각각 참여한 바 있다. 안교선은 이들과 형제 또는 친인척으로 보인다.
특히 안교선은 호남 출신으로 1883년 최시형이 경주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 윤상오와 같이 유사로 참여하였다. 그는 1884년 2월경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안승관과 김정현(김내현)이 그에게 입도하였다. 이들은 수원지역 동학 포교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수원지역의 중심인물은 안승관과 김내현이었다. 안승관은 1884년 2월경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연원주는 안교선이다. 안교선은 동학 초기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단을 후원하였고, 동학경전을 간행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안교선은 수원지역에 동학을 포교한 핵심 인물 중의 하나였다.
안승관은 1880년대 중반 경호대접주로 임명되었는데, 여기서 ‘경호’는 수원을 포함한 경기지역과 호서지역이다. 수원지역의 동학조직은 수원뿐만 아니라 경기 일원과 충남지역까지 연계되었다. 안승관은 동학농민혁명 초기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9월 동학교단 총기포 이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일본 측 정보나 관의 기록에 의하면 안승관은 수원뿐만 아니라 경기지역의 ‘괴수’로 알려질 정도로 핵심 인물이었다. 김내현(金來鉉은 김정현[金鼎鉉]으로 기록되기도 함) 역시 수원지역 동학의 중심인물로 안승관과 같은 시기인 1884년 2월경 동학에 입도하였다. 1880년대 중반 경호대접사로 선임되었다. 김내현 역시 안승관과 마찬가지로 수원을 포함한 경기지역과 충남지역의 동학 조직을 관리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김내현 역시 알려진 바가 없지만 『피난록』에 의하면
“김내현과 서병학(徐丙學)은 모두 명문거족으로 여기에 물이 들어 동학의 거괴(巨魁)가 되었으니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피난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4, 301쪽.
라고, ‘명문거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동학에는 ‘삼불입(三不入은 班不入, 富不入, 士不入으로 이들 계층은 동학에 입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이돈화, 「 天道敎의 功過論 李敦化」, 『개벽』 신간 제1호, 1934.1, 40쪽)’이라고 하여, 명문거족은 동학에 입도하지 않는 것이 당시 사회분위기였지만 김내현은 동학에 입도할 정도로 시대의 모순을 극복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김내현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그가 포교한 지역이 진위로 오늘날 평택에 해당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한 바 있는 민공익・재명 형제, 한홍유・칠성 부자, 김명수・화덕 부자 등은 김내현의 포교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상황이 불리하자 귀화하였지만 ‘김내현의 강압’에 의하여 동학에 입도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은 비록 김내현에게 불리한 측면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지만 적어도 김내현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민공익은 “저의 형제는 본래 무식한 촌백성으로서 단지 농업으로 생활할 줄만 알고, 동학이 무슨 학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난 8월께 저의 형 재명(在明)이 불행히도 수원접주(水原接主) 김내현(金來鉉)이 창궐할 때에 잠깐 억지로 입도(入道)하였으나 아예 행패한 일은 없었습니다”라고 진술하였으며, 한홍유는 “저의 부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둔하여 농사만을 힘쓰면서 분수를 지키며 생활해 왔는데, 지난 8월께 저의 아들 칠성(七成)이 김내현의 협박을 받아 잠시 억지로 잘못 입도하였다”, 김명수는 “저의 부자는 곧 농민입니다. 농사를 업으로 삼고 분수를 지키며 살아왔는데, 지난 8월께 김내현 접중(接中)의 백난수(白蘭洙)가 무리를 모아 패악을 자행할 즘에 저의 아들 인덕(仁德)이가 협박을 입고 입도하였다”
라고 진술한 바 있다. 민공익 등은 진위군에서 활동하여, 김내현은 수원뿐만 아니라 진위를 무대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80년 서병학, 장만수, 이규식, 김영근, 나천강, 신규식이 육임으로 안승관은 경호대접주, 김정현은 경호대접사로 임병승, 백련주, 나천강, 신용구, 나정완, 이민도는 각각 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으로 수원지역의 동학교인 수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로써 수원지역의 동학은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대접주, 대접사, 접주, 육임 등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2년과 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893년 3월 10일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서 척왜양창의운동을 전개하자 신용구와 이민도의 주선으로 수천 명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관변측 기록인 「聚語(취어)」에는 수원과 용인의 동학교인 3백여 명, 수원접이라는 자들과 그 밖의 무리들 1천여 명, 수원 840여 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단의 측과 관측의 기록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수원지역의 동학교인이 보은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한 것은 대략 청주영장이 보고한 840여 명으로 보인다.
이후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4년 9월 18일 반외세의 봉기령에 따라 즉각 기포하였으며, 일본군이 이들 동학지도자를 체포하려 하자 동학군은 잠시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처럼 수원이 크게 위협받자 조선 조정은 일본군을 긴급히 증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일본군이 즉시 투입 되었다. 이러한 수원지역의 동학군의 활동에 대해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승관, 김승(정)현 등은 5천군을 거느리고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 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 싸우다가 마침내 패하였고 ......


이로 미루어 보아 기호대접주 안승관과 기호대접사 김정현 등이 지휘한 수원지역의 동학조직은 5천여 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원부를 점령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7월 1일. 점심 때 발안리 40리에 이르렀는데 길에는 피난하는 사녀(士女)가 그치지 않았다. 모두 당진 면천에 간다고 하였다. 대개 일본군이 아산에서 공파(攻破:성환전투)하여 청국군은 군대를 돌려 서울로 가려고 해서 수원대로(水原大路)는 연락부절이었고 작폐가 매우 많아 행인들은 대로를 피하였다.
당시 외무대신을 역임한 김윤식이 유배가 풀려서 서울로 가는 길에 성환전투의 피난민을 만난 상황. 『속음청사』 1894년 7월 1일.
그러나 당시 수원지역은 청일전쟁 와중에 성환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본군 혼성9여단 병력이 통과하는 곳이었고 때마침 수원유수 조병직과 함께 중군 서형순은 유능한 무관으로 수원유수영을 잘 방어하였다. 이때 수원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안승관과 김정현을 유수영 집사 엄태영이 이끄는 아병(牙兵)이 일시에 급습하여 이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들은 신설된 경무청(좌우포도청 통합)에서 서울로 급히 압송하여 순무영 중군 허진이 남벌원(南伐院)에서 효수하였다. 당시 의정부에서는
"경무청에 갇혀 있는 동학의 괴수 김내현, 안승관을 곧바로 압송하여 순무영으로 올려 보내되, 중군이 강가에 나아가서 먼저 참수하고 나중에 아뢰도록 하라"(『갑오군정실기』 1894년 10월 3일 :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1894년 10월 4일,
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도순무영 종사관 정인표가 '중군에게 전령하여 내일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남벌원에서 먼저 참수하고 나중에 아뢰도록 할 것'이라고 보고하엿다. 경무사 겸 도순무영 중군 허진이 그 명에 따라 이들을 참하고 효수하였다.
양호 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수원(水原) 비적(匪賊)의 괴수 김내현(金鼐鉉)과 안승관(安承寬)을 효경(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兩湖都巡撫營以"水原匪魁金鼐鉉、安承寬梟警"啓。)
고종실록32권, 고종 31년 10월 4일 정미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도순무영의 편제가 정해지고 각 직임이 임명된 후 중군으로서 첫 번째 임무이자 도순무영이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직접 처형한 첫 사례였다. 수원성에서 체포된 김원팔(金元八)도 화성에서 참수되어 효수되었다.( 『갑오실기』 1894년 10월 1일조(음)
남벌원은 금위영 남별영의 별칭(誤記일 가능성도 있다)이다. 남별영은 금위영 군병을 조련하던 곳으로 수구문(시구문) 밖에 있었으며, 지금의 중구 필동에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군사주둔지였으며, 한때 수도방위사령부가 이곳에 있었다. 현재 한옥마을 옆의 충정사가 있던 일대이다.(성주현, 수원지역의 3.1운동과 천도교인의 역할, 2003, 수원지역 민족운동의 역사적 위상(3.1운동 84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수원문화원. 20~22쪽.)
이처럼 수원은 한양과 가까운 곳으로 옛부터 무향이라고 불리는 군세가 강한 지역이라는 인식하에 대규모 농민군이 집결하는 등 그 위험수위가 올라가자 조정이 신속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원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수원포 김내현과 안승관이 죽은 후에도 기세는 꺽기지 않아 목천 서근야미촌 비류 백난수를 중심으로 수원을 비롯한 작산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3개 군현을 넘나들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경군 도순무영 선봉 이규태가 이끄는 통위영 병대 327명이 10월 12~18일까지 주둔하고 사태를 진정시켰고, 일제 후비보병 제19대대가 경기 남부 일대를 초토화 하면서 남하하여 더이상 농민군의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과정에서 경군과 일제의 병참을 떠맡은 수원지역 백성의 피해는 말이 아니었다. 급기야 성내 상인 송만석이 일본군에 살해 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등 민심이 흉흉하였다.(신영우, 2017, 「1894년 경기도 지역의 변란 상황과 동학농민군 진압과정」, 『경기도 수원 동학농민혁명』 동학총서 009, 동학학회,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141~142쪽.)





감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옥이다. …옥중의 온갖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그중의 큰 것을 들면 모두 다섯 가지 고통이 있다. 첫째가 칼, 수갑의 고통이요, 둘째가 토색질 당하는 고통이요, 셋째가 병들어 아픈 고통이요, 넷째가 추위와 주린 고통이요, 다섯째가 오래 머무는 고통인데, 다섯 가지가 줄기가 되어, 천 가지 만 잎의 고통이 여기서 갈려 나오는 것이다. 사형수는 장차 죽을 것인데 먼저 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니, 그 정상이 슬픈 것이요, 경범자는 그 죄가 중하지 않은 데도 같이 이 고통을 받고, 원통한 죄수는 잘못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니, 세 가지가 모두 슬픈 일인데 백성의 목민관이 된 사람으로서 어찌 살펴보지 않을 것인가? …
목민심서 10권 형조육조 휼인


안승관과 김내현의 효수 사진으로 알려지기도 하나 안교선의 효수 사진과 삽화이다. 수원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핵심인물이었던 안교선은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고 관군에 체포되어 1895년 1월 19일 남벌원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大阪每日新聞」 1895년 2월 1일.)
양호 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비적(匪賊)의 괴수인 성재식(成在植)과 안교선(安敎善)은 그날로 남벌원(南筏院)에서 효수(梟首)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고, 김개남(金介男)의 머리는 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에 매달았다가 3일 후에 김개남과 성재식의 머리를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 소란을 일으킨 지방에 조리를 돌리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兩湖都巡撫營以"匪魁成在植、安敎善, 當日南筏院梟警, 金介男査馘, 西小門外懸街三日後, 介男、在植首級, 令畿營傳示於作擾地方"啓。)
고종실록32권, 고종 31년 12월 25일 정묘 1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비적의 두목인 김개남과 성재식을 효수하고 사람들을 경계시켰다고 보고하다
효수된 안교선의 모습은 사진으로도 남았고 일본 『메사마시신문(めさまし新聞)』에 삽화로 게재되었다. 이 삽화에 ‘동학당 거괴 효수의 도(東學黨 巨魁 梟首の圖)’라는 제목으로 위쪽은 최재호, 아래쪽은 안교선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부터 소문에 있었던 동학당 영수 최재호, 안교선 두 명은 지난 (1월) 19일 법무아문에서 범죄의 형에 처해져 20일부터 3일간 소의문 밖 통행이 가장 빈번한 광마장 중앙에 5척 정도의 나무 세 그루를 교차하여 그 위에 효수되었습니다. 수생이 이 일을 들어 안 것은 23일 오전으로써 즉 3일간의 기한이 이미 경과한 뒤였습니다. 전날 밤부터 큰 눈이 내려 만일 치우지 않았다면 그대로 버려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진기를 휴대하고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더니, 벌써 수급은 내려져 멍석으로 싸서 새끼로 묶여 있었고, 돌을 던지는 풍습은 방만한 조선인들의 일로써 망보는 사람이 없이 눈 속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소생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감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현장에 모여 있는 5,6명의 한인을 향해 어제처럼 나무를 교차해서 수급을 걸면 금전을 주겠다고 했지만 돈벌이를 하려고 분발하지 않은 채 모두가 전율할 따름이어서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행이 망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소생 스스로 멍석으로 싼 것을 풀고 세개의 나무를 교차해서 최의 머리를 위쪽에, 안의 머리를 아래에 놓고 그림과 같이 촬영하였습니다. 현장에는 따로 효수의 뜻을 알리는 것도 없이 오직 수건 한 촌 정도의 종이조각에 못을 구부려 친 것 같은 필법으로 각자의 이름을 썼고 그 두발은 묶여 있었습니다. 참수할 당시에 저항을 했는지 아니면 고의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최의 목 주변에는 몇 군데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어느 조선통에게 물었더니, 조선은 사형을 집행하는데 아직도 녹 투성이의 둔한 칼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10여 차례가 아니면 머리와 몸을 따로 나누지 못한다고 하여, 실로 듣자니 피부에 전율이 생겼습니다. 최와 안의 용모는 확실히 동학당 중의 영수다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메사마시신문』 1985년 2월 8일
안교선과 최재호의 또 다른 처형 기사(일본 『지지신보』)
먼저 체포된 동학당의 거괴 최재호 안교선 두 사람은 지난 (1월) 19일(양력) 참형에 처하여 3일 간 효시됐다. 효수 장소는 서소문 밖 반석방(盤石坊, 염천교 근처)으로 인가가 조밀하고 통행이 빈번한 시가에 있는데 지키는 사람도 없고 표말도 없이 방치된 채로 세 개의 작은 나뭇가지에 동여매어 두발을 모시끈으로 매어 아래로 늘어졌다.
가서 보니 건조한 핏자국이 얼룩져 검푸른 얼굴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鈍刀로써 여러 번 내리친 형적은 양쪽 귀밑에 여러 개의 살 조각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두발 또는 안면에는 흙과 먼지가 묻어있어 참살할 때 땅 위에 놓고 짓밟은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데 왕래하는 남녀아동은 근처에서 며칠간 보아서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놀고 있다.
안교선은 평범한 상을 보이고 있으나 최재호는 코가 오뚝 솟고 눈썹이 일자로 올라간 인상으로 원한을 구천에 호소하는 얼굴을 나타내고 있었다.
『時事新報』 1895년 2월 9일자.

정황상 안교선과 최재형의 처형을 보고 남긴 조선을 여행 중이던 이사벨라 비숍의 목격담이다.
동학은 1월 초 전멸하여 교주의 머리가 충성스런 관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나는 그것을 가장 부산한 거리인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 거리에서 보았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 대처럼 나무기둥 세 개로 얼기설기 받쳐놓은 구조물에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가 그 아래로 늘어뜨려져 매달려 있었다. 그 두 얼굴 모두 고요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구조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 무너지게 되면 먼지 수북한 길바닥에 그냥 나뒹굴도록 내버려져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그곳에 고장 난 회중시계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비숍 지음, 신복룡 옮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집문당, 2000.

효수된 안교선은 20일부터 3일간 소의문 밖 통행이 빈번한 광마장(다른 기록에 의하면 ‘盤石坊’으로 되어 있다.[『時事申報』 1895년 2월 9일자] ‘반석방’은 현재의 염천교 근처)에 내걸렸다.(김문자, 「전봉준 사진과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 『한국사연구』 150, 201.9를 참조) 최재호 역시 수원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주요 인물이었다.(「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단」,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 남벌원에서는 안교선, 최재호 외에 성재식도 함께 교수형을 당하였는데, 성재식도 수원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백난수, 이민도 등도 수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주요인물로 활동하였다. 백난수는 김내현의 휘하에서 기포하였다.(「선봉진정보첩」, 1894년 10월 20일.) 이민도는 원래 한학을 공부한 유학자였지만 28세 되던 해 1879년 동학에 입도하였다.(「환원일속」, 『천도교회월보』 127, 1921.3, 18쪽.) 동학에 입도한 이민도는 진위와 수원 등지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고, 그 결과 1년 뒤인 1880년 접주로 임명되었으며, 1893년 척양척왜를 기치를 내세운 보은집회에 신용구와 함께 수원지역 동학교인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이민도(李敏道)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천도교 수원교구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수원교구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진위군 현덕면 종리사에 선임되는 한편 1912년 4월 15일부터 3년간 전개한 49일 특별기도에 참가하였다. 이민도는 수원교구장으로 활동하던 1913년에는 북수리에 40여 칸의 교당(팔부자거리, 2025년 12월 22일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안내 표지판 설치와 제막식)을 마련하였다. 당시 마련한 교당은 정조가 수원에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의 부호를 유치할 때 지은 유서 깊은 8부가 중의 하나였다. 이외에도 이민도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3월 2일 진위군 현덕면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이민도는 봉훈, 교훈, 교구장 등으로 활동한 후 1921년 2월 14일 71세로 생을 마쳤다.( 성주현, 2014, 「오암 이병헌의 생애와 민족운동」, 『일제하 민족운동 시선의 확대』, 아라. )
또한 이병헌(李炳憲)은 천도교 수원교구장을 역임한 이민도의 독자이다. 평택군 현덕면 출생으로 1911년 제544강습소를 수료하고 수원교구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독립운동자금 5,000원을 천도교총부로부터 인출하여 기독교계의 이승훈에게 전달하였다.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의 인쇄를 돕고 이를 비밀리에 천도교당으로 운반한 후 전국에 배부케 하고 보성 전문학교 학생 신분으로 탑골공원과 태화관의 상황을 연락하였으며 중앙총부와 수원교구의 연락을 맡았다. 1920년 천도교 청년회 수원지부회 초대 지회장을 역임하며 교단이 신구파로 분규 때 구파 중앙총부에서 활동한다. 신간회 결성시 경성지회의 핵심인물이었다.






'수원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는 1대 교조 최제우가 포덕을 시작한 지 25년이 되는 1884년 2월경이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으로 수원의 동학군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06년 북문 밖 영화리에 십여 칸 초가를 사서 천도교 수원교구 간판을 내걸고 이종석이 교구장이 되었다. 그 후 몇 군데를 거쳐 1936년 북수동에 교당을 건축하고 11월 13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I960년 이후 신구파로 나누어져 1962년 월남한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별립하면서 수원교구 명칭을 사용하고 구파 측은 1982년경 수원 권선교구로 인준되어 사용하던 것을 2010년 2월 21일 교구장 김영선을 선출하고 대통합 대회를 함으로써 두 교구가 하나의 수원교구로 통합하였다. 2009년 3월 수원교구 식당이 화성사업소에 수용되면서 교당 신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10년 1월 10일 건축추진위 원장 장구갑을 선출하고 2012년 2월 24일 팔달구 남수동 11-133번지 현재 위치의 경매물건을 낙찰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2013년 11월 27일 준공하여 봉고식을 봉행하였다.'
이 내용은 수원교당 건축 앞에 세워 놓은 안내 글로 밑에는 수원교당을 건축할 때 성금을 내준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놓았었다.
앞의 내용을 볼 때 수원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1884년경이며 최제우 가 포덕을 시작한 지 25년이 되었을 무렵이다. 수원의 동학교도들도 갑오농민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06년 북문 밖의 영화리 초가집 에서 최초의 수원교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6년에는 북수동에 교당이 건축되었으며 I960년대 이후에는 신구파로 나누어졌다가 2010년 통합하고 2013년 현재의 교당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 때 온 나라를 진동시킬 만큼 큰 세력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손병희 선생이 있을 때만 해도 신도 수가 300만 명으로 당시 국내 최대의 종교단체였던 동학은 오늘날 신도가 줄어 수원에서도 몇 십 명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수원문화원, 2021 수원지역의 종교 문화, 천도교수원교 15~16쪽.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수원지역에서 동학에 입교한 인물로는 이필우, 송수, 임룡수, 김정담, 이정우, 장덕수, 이원선, 한세교 등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들 역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고 보여진다. 나아가 이들은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민족운동에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필우 1893년 2월에 입교, 수원군 남양교구 강도원, 전제원으로 활동
송수 1891년 5월 5일 입교
임용수 수원군 반월면 팔곡2리 출신 1893년에 입교
김정담 수원군 성호면 병삼미리 출신 1891년에 입교
이정우 1891년에 입교
장덕수 1890년 3월 3일 입교
이원선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 출신 1892년 3월 3일 입교
(수원지역 동학군의 주도세력| 작성자 성주현 / 경기 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 https://blog.naver.com/ggdhhm/222680198450)
수원과 달리한 지금의 화성시에 속한 남양지역의 동학군은 장안면 수촌리 백낙렬(白樂烈, 1865~1936.11.20.)과 팔탄면 고주리 김흥열(金興烈)의 지휘하에 수원의 고석주•김정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동학혁명 이후 한동안 동학 세력이 쇠퇴하였으나 수원지역은 안성출신의 김한식과 남양지역은 백낙렬의 노력으로 점차 회복되었다. 백낙렬은 삼괴지역(우정, 장안면), 김성렬은 팔탄면 고주리, 이병은 팔탄면 노하리의 포교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에는 수촌리를 비롯하여 독정리 • 어은리 • 장안리 • 화산리 • 이화리 • 덕목리 • 매향리 • 고주리 등 8개의 전교실을 설치할 정도로 교세가 회복되었다. 특히 남양교구는 1909년 8월 전국에서 성미납부 성적이 우수하여 1등에, 수원교구는 2등에 선정될 정도였다.
따라서 이들 조직이 1919년 수원군에서 대규모로 발발한 3.1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남양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이끈 백낙렬은 순사 가와바타 토요타로(우정면 화수리 주재소, 현 화수초등학교)를 처단하고 우정면,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운 삼괴 4.3항쟁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당시 수촌리 구장(이장)을 겸하였다. 팔탄면의 김흥렬은 3.31일 발안장날 유학자 이정근과 주도하고 이후 4월 5일 시위 모의자로 일제에 주목되어 4.15 제암리학살만행사건 당시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토벌대를 고주리 생가로 급습하여 일가붙이와 함께 참혹하게 학살되었다.



https://blog.naver.com/leelove97/224119856050
녹두꽃 수원 동학농민군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을 전후하여 불려진 가사로 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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