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원에서 태어났고 수원에서 줄곧 성장해 왔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고향을 아끼지만 큰 도시로 변해감에 따라 문화는 도리어 점차 사라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적은 힘이나마 수원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수원시민이 하나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 가장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수원시민 전체가 수원문화를 아끼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놀이든 행사든 시민 속에 파고들어 그들과 절실하게 동화돼야 합니다. 가령 성곽 걷기대회' 등을 만들어 수원(화성)성을 돌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또한 향토자료를 전시하는 향토문화관의 설립도 구상하고 있으며 장안공원에서 야외음악회도 실현시켜 보고 싶습니다.
1987년 9월 수원문화원장에 취임한 심재덕 원장 인터뷰: 수원문화원, 2018, 『수원문화원 60년사(1956~2016)2, 48쪽.
2003년 10월 9일 화성행궁 개관식에서 민선 3기 김용서 수원시장의 축사이다. 오늘날 행궁동은 서울의 북촌, 전주 한옥마을 못지 않은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이 우리의 전통과 현대문화를 만끽하는 문화의 장이다. 이러한 수원이 있기까지 수원문화원과 문화원장 심재덕이 있었다. 심재덕하면 보통 '화장실'과 '수원시장', 혹은 '국회의원'이라고 말을 한다. 어쩌면 그가 그리 원했던 직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사와 문화를 업으로 하는 입장에서 나는 그를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한때 정조학의 권위자 유사부님께서 '뒤깐이나 신경쓰는 문외한'이라는 비판이 너무도 익숙했지만 오늘 그가 이룬 문화도시 수원은 그의 청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밑그림을 그리던 시작은 수원문화원이 있었다.
심재덕은 수원사람으로 수원의 명문가 청송심씨로 서울 농대를 나와 수원의 향토기업을 일군 사람이다. 1987년 9월 8일 현재 수원시여성회관 별관인 구수원문화원에서 제12대 수원문화원장이 추대되었다. 바로 동서철강 회장 심재덕이다. 수원문화원과 지역의 인사들 모두가 그의 문화원장 취임을 원했다. 고사 끝에 수원문화원장이 되면서 그는
“똥 젓는 막대기가 되겠습니다.”
라고 포부를 밝힌다. 이어 수원문화원의 운영 목표를 ‘시민들에게 친근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랑방’이라는 슬로건으로 문화도시 수원의 첫발을 내딛었다.
수원문화원 창립 내력
‘지역사회의 문화 발전과 건전한 시민 육성을 통한 참다운 민주주의의 선양을 목적’
1956년 8월 창립총회, 10월 28일 개원
설립 초기 수원시장이 문화원장 겸임 따라서 1960년 초까지 문화원은 시청 공무원이 근무하고 시정홍보가 주 업무
1962년 김승제 원장 취임으로 민간 기관(원장) 체제로 전환 1980년대부터 비약적인 문화기관으로서의 역할 문화재단 출범 이전까지 지역문화기관 대표
얼마전 작고한 명배우 이순재도 배우 이전에 정치도 했지만 중랑문화원 원장으로 지역 문화사업을 일구는데 공헌을 하였다. 심재덕 문화원장과 차이가 있다면 정치를 먼저했다는 것이다. 심원장은 수원문화원에서 지핀 문화의 불씨를 정치, 즉 행정(수원시장)을 통해 불태우고자 하였다.





심재덕 문화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밝힌 일을 바로 추진한다. 1988년 1월 초 문화원 소식지 ‘수원사랑’(창간호)을 출간하였다. 수필가 이재영, 강용구, 시인 김우영 등이 심재덕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수원의 역사, 심재덕의 역사가 바뀌는 수원 화성의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되었다. 수원 화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2억 5천 만원 들여 5년간 수원 성곽 복원(1975~1979)을 하였다. 그러나 당대 재현성 부족과 팔달문 일대 상인의 반대로 팔달문 남측 성벽(400m), 남수문 등 미복원 등 한계가 있었다. 특히 결정적인 것은 화성행궁이 빠진 '미완의 완성'이었다.
이러한 일에 심재덕 1988년에 ‘수원성 축성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1996년 축성 2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자 하였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1997년 12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은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오늘날 문화도시 수원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대역사인 본격적인 화성 복원에 앞서 수원시민들의 여론 진작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수원성 축성 192주년 기념 시민 성 밟기(성답놀이[순성)]’ 행사(1988.5.5.)을 하였다. 이후 1991년 5월 5일 축성 195주년 ‘효의 성곽 순례’로 명칭을 변경하고 1만 5천 명의 시민이 참가하는 대축제가 되었다. 이 자리에 문화부장관인 이어령이 ‘효의 성곽 순례 메시지’라는 축전을 보내온다. 이같은 노력이 더욱 더 커져 1994년 제7회 효의 성곽 순례에서는 화성봉돈이1894년(고종 31년)을 소거를 끝으로 꺼진 것을 다시 봉수거화하는 행사까지 이어졌다. 이는 모두가 수원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염원이 함께한 결과였다.
'원장님! 드디어 찾았습니다. 제가 규장각에서 화성행궁도를 찾았습니다.'
1989년 5월 말, 수원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향토사학자 이승언(필명, 본명 이한기)이 수원문화원장실로 심재덕을 찾아왔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을 보고 심재덕은 앞으로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직감했다.
'드디어 찾아왔구나!'
가슴이 뭉클해진 심재덕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이승언과 함께 화성행궁도를 보기 시작했다. 원본이 아닌 사진으로 보는 것이기에 정확한 그림의 크기나 재질은 알 수 없었지만, 누런 바탕에 화성행궁이 채색되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화성행궁도'라고 쓰여 있었다. 심재덕은 자신도 모르게 이승언을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신풍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화성행궁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있는 화성행궁 목판본 그림을 본 적은 있지만, 이처럼 확연하게 화성행궁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사진을 눈앞에서 보니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심재덕은 곧바로 이승언과 수원문화원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원의 효맥(孝脈)은 이것이다. 행궁 복원만이 효원의 전통을 살리는 길이다.'
1989년 5월 말 이승언이 화성행궁도 사진(규장각) 찾아와 기쁜 심재덕이 수원문화원에서 수원문화원 가족들에게 한 말.
(김준혁, 2019,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평전』, (사)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도서출판 아이콘), 137~138쪽.)
정조가 짓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황폐해진 행궁인 화성행궁 복원에 큰 역할을 한 두 주인공의 일화이다. 마침내 화성행궁 복원의 첫 단추가 꿰어진 것이다. 향토사료가 이승언의 노력이 심재덕의 소원성취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1987년 심재덕은 4월 한문과 일어에 능통한 이승언(후일 시흥향토사료실 상임위원 역임, 이승언은 필명이고 본명은 이한기)에게 화성과 행궁에 대한 자료 조사를 부탁하였다. 이승언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화성행궁도 사진과 필름을 찾아(1989년 5월 말, 구 수원문화원사[현 수원시여성가족회관] 원장실 방문)들고 심재덕을 찾아왔다.


이 역사적 순간이 있고나서 바로 1989년 6월 17일 수원문화원 2층 회의실에서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위원장에 김동휘(보구산부인과 원장), 부위원장 홍의선, 안익승, 심재덕, 추진본부장 이홍구, 기획부장 임병호, 총무부장 송철호, 사료편찬부장 이승언, 섭외부장 김상용, 홍보부장 김우영을 임원으로 선출하고 이종학, 김동욱, 김학두, 리제재, 송태옥, 이상봉, 이완선, 이호정, 조웅호, 최홍규 이사 10명, 이근환, 정규호 감사 등 81명의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1989년 10월 6일 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 출범하였다. 관이 아닌 민간에서 그것도 수원문화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위원회는 1993년 민간 합동으로 다시금 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가 출범하여 위원장에 심재덕, 부위원장에 김동욱, 안익승, 위원에 조정환, 김용 규, 유재언, 최봉수, 송후석, 남우철, 김주태, 김동휘, 이상해, 박연관, 유구섭, 이제재, 임택명, 이종학으로 출범하였다.
병원이나 경찰서를 지을 땅이 다른 곳에 얼마든지 있는데, 행궁 터에 공공 기관을 세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제가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계획적으로 행궁을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이 끝난 지 46년이 지나도록 행궁을 되살리지 못한 것은 문화 국민의 수치로 하루빨리 행궁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당시 심재덕 수원문화원장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김준혁, 2019,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평전』, (사)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도서출판 아이콘) 146쪽.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는 듯 하였는데 호사다마라고 화성행궁 복원의 복병을 만난다. 당시 화성행궁 터에 있던 수원의료이의 증개축에 대한 설계 공사가 끝난 상태로 초현대식 병원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영원히 화성행궁은 복원할 수 없다. 심재덕은 김동휘 선생, 이종학 서지학자, 안익승 경기도 유네스코회장, 이승언 향토사학자 등과 함께 무작정 경기도지사실을 사전 약속 없이 불쑥 찾아갔다. 심재덕 수원문화원장과 일행은 임사빈(1935~1999) 도지사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간악한 책동으로 파괴된 화성행궁 터에 있는 수원의료원을 증축하면 영원히 화성행궁을 복원할 수 없습니다. 수원의료원 증축 계획을 철회해 주십시오.
김준혁, 2019,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평전』, (사)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도서출판 아이콘) 144쪽.
라고 요청했다.
임사빈 경기도지사는 수원의료원 증축 담당 국장을 불러 경위를 듣고 계획을 유보시켰고, 차후 수원 의료원을 지금의 스타필드가 있는 연초제조창 옆으로 이전하도록 지시했다.
1990. 12. 22. 화성행궁에 있던 수원의료원이 이전
심재덕과 문화원 사람들의 쾌거이기도 했지만 이를 흔쾌이 받아들인 도지사도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화성행궁이 복원이 되기 했겠지만 청와대가 용산으로 다시 청와대로 부침을 겪으며 시간, 재화 소모가 컸듯이 화성 행궁 복원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렇게 수원의료원 이전 확답을 받은 심재덕과 추진위원회는 1989년 12월 7일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학술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원의 '사신도(四神圖)를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추진위원회의 학술 업무와 사료편찬부장 맡고 있던 이승언은 규장각 『현륭원원소도감의궤(顯隆園園所都監儀軌)』에서 사신도를 발견하고 대회에서 이를 발표했다. 사신도는 죽은 사람을 수호하기 위해 무덤의 벽이나 관 내부에 주작, 현무, 백호, 청룡 등을 그린 것으로 평안도 강서지 방의 대묘(大墓)와 용강군의 쌍용총 등 고구려 고분군에서 발견된 적은 있으나, 조선 시대 왕릉이나 세자의 묘소에서 발견된 것은 당시로선 처음이 었다. 한양대학교 박물관 관계자들은
"사신도의 원화 발견으로 조선 시대 역사 연구와 미술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됐다"
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학술대회의 마지막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의 건의 사항이 발표됐다.
수원 화성행궁지인 수원시 남창동 6의2(수원의료원 소재지), 신풍동 256(경기도 여성회관 소재지), 신풍동 257(수원경찰서 소재지) 일대를 사적지로 지정할 것
현재 행궁지에 소재한 공공 기관을 점차적으로 이전토록 조치해 행궁을 복원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것
행궁과 아름답게 조화된 수원천을 비롯한 자연경관이 옛 모습대로 보존 될 수 있도록 행정적인 시책을 수립할 것
이와 같은 건의는 결국 1993년 8월 10일 수원시정의 중점 시책으로 선정돼 화성 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 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다. 학술대회와 함께 12월 22일 화성 행궁 복원을 위한 시민 설명회가 개최됐다. 이와 더불어 위에서 이야기한 문화원 중심의 복원추진위가 관과 전문가까지 참여하는 복원추진위로 새롭게 결성되었다.
1994. 3. 시비 2억 4800만 원을 들여 화성행궁 터에 대한 유구 및 지표 조사가 실시
1994. 5. 13. 수원의료원 건물이 완전히 철거
1995. 4. 24. 화성행궁 터가 경기도기념물 제65호로 지정
1996. 이종학과 화성 제 이름 찾기 운동
1월
1996. 7. 18. 화성행궁 복원 기공식
1997. 6. 28. 화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결정
3월 문화재청 창덕궁과 화성 등재 신청 결정. 심의위원 사이 남한산성, 삼년산성 등과 첨예 건축 역사학자 경기대 건축학과 김동욱 교수 화성 강력 추천(문화적 가치와 우수성) 최종 선택. 화성의 세계유산 등록은 심재덕, 이종학, 김동욱의 공로
화홍문화제에서 화성문화제로 변경
1998. 3. 25. 화성행궁 봉수당 복원 완료. 325억 원 추가 장락당, 유여택, 경룡관, 신풍루 복원
2002. 7. 26. 1단계 공사 구간 총 482칸, 면적 3,261.23㎡ 복원
2003. 10. 9. 화성행궁 개관식 개최
민선 3기 수원시장 김용서 축사 202쪽 심재덕 낙선 신임 김용서 수원시장은 행궁 개관식 축사를 통해 심재덕과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의 공로를 언급했다.
"화성행궁은 정조대왕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참배하기 위해 묵었던 궁(宮)으로, 조선 시대 행궁 중 최대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화성행궁의 여러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병원, 군청, 경찰서 등이 들어서면서 낙남헌만 남고 모두 파괴됐습니다. 1980년대 후반 수원의료원 증축 계획이 수립돼 화성행궁은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심재덕 전 수원시장과 뜻있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의료원 증축 반대 및 화성행궁 복원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개관식이 끝나고 일주일 뒤 홀로 화성행궁을 찾은 심재덕은
"누가 주목을 받으면 어떤가? 후손들을 위해서 내가 떳떳한 일을 했으면 됐지...."
라고 소회를 밝혔다고 전한다.
2003. 10 ‘수원시 화성행궁 관람 등에 관한 규칙’ 제정
2004. 심재덕 국회의원 ‘화성(華城) 복원 및 보존에 관한 특별법안’ 상정(2005년 끝내 무산)
2019 신풍초교 자리 우화관(객사), 별주, 분봉상시 복원 시작 완료
화성 행궁 복원과 함께 중요한 발자취가 있다. 이는 심재덕 문화원장의 업적보다는 행정가인 심재덕의 역할이 빛나는 일이었다. 오랜 동지 이종학이 건의한 수원성의 이름 되찾기 운동의 결실을 수원시장 심재덕이 함께했던 것이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 수원 문화계에서는 '화성 제 이름 찾기 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을 벌인 사람은 이종학(초대 독도박물관장)으로 그는 서지학자로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이종학은 자비 1억 원을 들여 《화성성역의궤》를 영인했고, 자신이 영인한 『화성성역의궤』를 국내의 주요 도서관뿐만 아니라 해외의 주요 대학과 연구 기관에도 보냈던 인물이다.
이런 이종학이 1996년 10월 '수원성 축성 200주년'을 기념하는 정보통신부의 우표 발행을 막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수원성'이란 이름은 잘못된 것이며 원래 이름이 '화성(華城)'이니 화성으로 변경해서 우표를 발행해야 한다는 것이 취지였다.
정조는 1789년 팔달산 일대로 수원 고을을 옮기고, 4년 뒤인 1793년 1월 에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이때 처음으로 '화성'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정조는 요즘으로 치면 기초 자치단체인 수원을 광역자치단체급인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고을 이름도 화성으로 변경한 것이다. 초대 화성유수로 좌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내려왔다. 채제공이 좌의정을 한 3년 동안 영의정도 공석이고, 우의정도 공석이었다. 그러니 혼자 정승을 한 것이다. 당시 독상(獨相)이었던 채제공이 화성유수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수원의 위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정조가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한 것은 이곳에 성곽을 축조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마침내 정조는 1794년 1월 도시 화성에 성곽 축성을 명령하고, 팔달산 아래 고을에 새로 쌓는 성곽 이름을 화성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종학은 법원에서 왜 화성의 이름을 되찾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면서 특히 문화재청에서 '사적 제3호 수원성곽(1963년)'이라고 쓰고 있어서 이 명칭을 지방자치 단체가 임의로 바꾸기는 어렵다는 주장을 논리 정연하게 펼쳤다. 그의 주장은 역사서를 근거로 했기 때문에 매우 설득력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법원은 우표에 대한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수원시 역시 수원성 축성 20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면서 '수원성 축성 200주년 기념'이라는 거대한 현수막을 시내 곳곳에 걸었다. 수원성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한 이종학은 반드시 이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한 뒤 심재덕 수원시장을 만났다. 이종학은 수원성이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원래 이름인 화성으로 바꿔야 한다고 다시 한번 주장했다. 이 제안을 심재덕은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사실 본인이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 때부터 그와 같이 활동했던 심재덕은 이종학의 말이 백번 옳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심재덕은 곧바로 문화재청에 연락해 '화성'의 제 이름 찾기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했다. 또 시민들과 함께 화성 제 이름 찾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다행히도 그 당시는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뒤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김 대통령은 1996년 1월 연두 국정 연설에 서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 미래를 바로 세우는 역사바로잡기가 곧 나라 바로 세우기"
라고 강조했다. 결국 이러한 대통령의 국정 지침이 반영됐는지 문화재청은 '수원성'의 명칭을 화성'으로 변경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김준혁, 2019,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평전』, (사)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도서출판 아이콘), 205~207쪽.
심재덕 원장은 전통 외에도 일반 문화행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바로 1988년 '한 여름 밤의 음악 축제'의 대성공 그것이다.




심재덕은 이천 마장면 도드람산(저명산) 정기 아래 외가 뒤간에서 출생하였다. 아명은 개똥이로 아버지 심창섭이 마흔에 본 것으로 아들 명이 길어 지라는 의미였다. 옛날에 특별한 아이 보려면 외가에서 출생해야 한다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본명은 재덕 항렬 '재'에 맹자와 시경에 나오는 '덕'을 사용 평생 덕을 베풀며 살기 바라며 지은 이름이다. 본가는 성안의 기와집을 소유한 유복한 집안으로 북성자내(성 안 마을)에 거주하였다. 심재덕의 할아버지는 독립군 군자금 지원하고 아내에게 한문 가르쳤던 개화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심재덕 일가는 조선 개국과 함께 수원에 뿌리내린 심덕부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에서 민족주의자이자 합리적인 인물로 묘사된1948년 여수순천사건 보성벌교 지구의 계엄 사령관 심재모 일가[수원 영동시장 상인 아들]의 모델이라고 전한다 )
수원(水原)은 조선 건국 당시 큰 도시 중 하나로서, 많은 관료들이 수원의 수령을 원할 만큼 비중이 있는 지역이었다. 수원 지역 수령을 둘러싼 관리들의 욕심은 구한말까지 이어졌다. 실제로 영조 대 화완옹주의 아들로서 최고 권력을 누렸던 정후겸이나 정조 대 홍국영도 수원부사를 하고 싶어 했지만, 영조도 정조도 끝내 이들을 수원부사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수원은 명망 있는 도시였다.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국구 심온(沈溫, 1375~1418) 부 심덕부(沈德符, 1328~1401는 이성계의 부장으로 무예가 특출조선 건국 공신으로 수원부사와 인근 사패하여 지역 기반 마련하였다.
심온 선생 묘(영통구 이의동 산13-10)는 현재 광교산 아래 수원광교박물관 인근에 있고 수원에 기반을 마련했던 심덕부의 묘는 사당(청성재)과 함께 연천 미산면 아미리 산110에 있다. 심덕부는 아들 7명을 두었는데 심온은 다섯째이다.
김준혁, 2019,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평전』, (사)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도서출판 아이콘), 27쪽.
신풍초등학교 다녔던 심재덕은 6학년 때 6.25한국전쟁 발발하였다. 당시 중공군이 장안문에서 휴식하고 있는데, 미공군의 폭격으로 장안문 누각이 같이 파괴되는 것을 친구들과 놀다 목격하였다. 그 일을 매우 슬펐다고 기억한다. 1953년 수원농고(수원농림고등학교) 축산과 진학하였다. 당시 수원농고는 천안농고, 정읍농고와 함께 명문이었다. 졸업 후 1957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과에 들어갔다. 생과 사, 교육, 집안 모든 것이 수원, 수원 사람이 심재덕이다.
수원문화원장을 이어 이후 1995년 민선 1기 수원시장에 당선됐다. 1998년 재선에 성공했다. 1999년 한국화장실협회를 창립, 초대회장(세계화장실협회 창립과 초대 회장에도 선출)을 역임했다. 낙선을 거쳐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수행하는 동안 2007년 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 2009년 1월 14일 돌아갔다.
심재덕은 무조건 과거의 역사만을 지키려는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 에 발맞추며 과거, 현재, 미래의 조화를 이루려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다. 심재덕은 공자가 『주역(周易)』에서 강조한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 變卽通 通卽久)’ 즉, 궁하면 변하게 돼 있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는 구절을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며 살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수원농고의 변화를 만들어 냈고, 그 결과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는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농업·생명자원 전문가를 양성하는 학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심재덕의 신조.
김준혁, 2019,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평전』, (사)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도서출판 아이콘), 154쪽.






























수원 사람들을 가리켜 "깍쟁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그 뜻으로 "까다롭고 인색하며 자기 이익만 밝히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 라고 한다. 깍쟁이라는 표현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수원 사람들에게 이런 좋지 않은 별명이 붙은 이유는 수원 상인 유상(柳商)이 팔달문 주변 포목점을 하며 깍쟁이, 까다롭고 인색하며 자기 이익만 밝히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시전과 주변 상가에서 생겨난 말이다. 정조가 상가를 가가(假家)로 하면서 근면한 가가쟁이에서 유래되었다.
수원 깍쟁이 유래(수원 상인과 연관된 이야기)
정조는 수원 시장에 많은 상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상거래가 활발한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자 버드나무가 있는 마을에 상인들이 많이 모여들어 상권이 형성됐으며, 그곳에서 장사를 하 는 사람들을 "유상(柳商)"이라고 불렀다. 특히 팔달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에는 포목점이 많았는데, 어느 날 한 가게에서 외상 거래를 많이 하던 사람이 돈을 떼어먹고 도망갔다가 세월이 한참 흘러서 그 가게에 다시 찾아온 일이 발생했다. 자신이 외상값을 떼어먹고 도망갔던 가게인 줄 몰랐던 것이다. 당시 가게 주인은 날이 너무 더워서 속옷 차림으로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을 떼어먹은 자임을 알아본 주인은 속 옷 바람으로 방에서 뛰쳐나갔고, 주인의 얼굴을 본 사내는 자신이 돈을 떼어 먹고 도망갔던 가게였음을 알고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30리에 달하는 추격전 끝에 사내는 가게 주인에게 붙잡혔고, 끝내 외상값을 갚았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수원 사람이 발가벗고 30리 뛰었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
지금의 화성시 병점동과 수원 서호공원이다. 두 지역 간 거리가 약 30리이다. 병점(餠店)을 우리말로 풀면 '떡전거리'인데, 이곳에 양반집 자손인 젊은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조상의 묘를 잘 관리했고, 부모에게도 효성이 지극했다. 비록 그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고을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 는 칭찬을 받았다. 엄한 가풍 속에서 절제된 생활을 하던 그 선비는 어느 날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 기방 출입을 하게 됐다. 축만제, 지금의 서호공원) 근처의 행화촌(杏花村), 술집)에서 기생의 아리따운 자태에 취해 술을 마시다가 그는 깊이 잠들고 말았다. 그는 한참을 자다가 문득 그날이 선친의 제삿날인 것이 기억나 황급히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불효를 생각하니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의관도 갖추지 못한 채 뛰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30리를 달려간 끝에 그는 자정을 넘기지 않은 시간에 집에 도착하여, 아버지 제사를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선비 된 자가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뛰었으니 옛날 기준으로 보면 발가벗고 뛴 꼴인 것이다.
한 설화는 잘못된 상거래를 바로잡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실수를 하긴 했지만 부친을 위해 최선을 다한 효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듯 수원에 대한 애착이 컸던 심재덕 문화원장은 이들 이야기를 들어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해 그간 수원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되었던 이야기의 발상에 전환을 시도하였다. '수원 사람이 발가벗고 30리 뛴다.', ‘수원 깍쟁이’에 대한 해석을 수원사람 폄하가 아닌 수원사람이 부지런하고 신용이 철저한 근면성 인식의 전환을 주창한 것이다.





심재덕 원장은 취임부터 서호살리기 및 서호 개방 운동을 벌였다. 문화사업 외에 수원환경운동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 시작이 서호를 살리는 것이었다. 농대시절부터 친근했던 곳이다.
정조는 영조의 친경 행사 60돌을 기념하는 1799년 특별한 농업 관련 기념물을 만들고 싶어 했다. 특히 수원은 농업 개혁의 기반 도시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정조는 수원에 그 특별한 기념 물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정조는 당시 화성 유수 서유린에게 화성 서쪽에 저수지 축조와 국영 농장인 둔전 건설을 지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축만제
일제 때 만든 『조선명승실기(朝鮮名勝實記)』에도 조선 땅 143곳의 명승 중 빼어난 경치로 서울과 금강산에 이어 세 번째로 수원이 아름다운 도시로 선정됐고, 그 중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 바로 서호였다. 화성 축성 당시 함께 만들어진 저수지 서호는 수원 팔경의 하나인 '서호낙조(西湖落照)'로 더욱 유명했고,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와 같은 여기산의 그림자가 수면에 잠겨 수원의 눈썹으로 상징되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수면에 비치는 노송 가지의 그림자를 따라 제방을 따라가면 높이 2장(약 6.5m)이나 되는 폭포의 물줄기가 흘러내렸고, 그 위에는 아담한 '항미정(杭眉亭)‘이 위치한, 그야말로 수원의 자랑이었다. 옛날 이곳에서 노닐던 잉어를 임금께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116쪽 서호 풍경
이어 수원천 살리기 운동과 수원천 복개 공사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수원의 혁신(뱀이 허물을 벗다)이었다. 1994년 수원환경운동센터 창립 및 연대하며 염태영(전 수원시장, 현 국회의원, 심원장과 서울 농대 동문)과 인연을 맺었다. 무소속으로 시장이 당선되자 1996년 5월 수원시의회에서 수원천 복개 철회를 선언하고 수원천을 생태하천으로 복원하였다. 이는 후일 청계천 복원 사업(배수 펌프를 통한 인공 하천)의 모델이 되어 이를 추진한 이명박 서울시장의 대통령 당선이 되는 큰 업적이 되었다.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기간에 뜻밖의 선거공약이 등장했다. 당시 여당 인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인 김영삼이 수원 유세 현장에서 팔달산 터널 개통 공약을 내세운 것이다. 화성을 중심으로 시내의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총 442억 원의 예산을 들여 중동사거리~경기도청 후문 사이, 수원경 찰서~경기도청 후문 사이에 두 개의 터널을 뚫겠다는 내용이었다. 팔달산 터널 추진은 1980년대 이후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나온 단골 공약이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예산에 비해 실효성이 거의 없는 공사였고, 수원 시민 도 팔달산에 터널을 뚫어 교통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에 찬성하지 않았다. 수원 시민들에게 팔달산은 고향의 언덕과도 같은 곳이었다.
경부선 철도 부설 항쟁
1900년대 초반 일본인들이 지지대고개와 팔달산을 훼손하려고 하자 수원 백성들은 이에 대대적으로 항거하며 지지대고개와 팔달산 지키기에 나섰다. 1901년 4월 조선에 대한 상당한 지배권을 갖게 된 일본인들은 안양을 지나 지지대고개를 뚫고 팔달산 뒤쪽을 관통해 상유천~대황교 동편을 지나는 경부철도 노선을 계획했다.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으로 들어오는 길은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곳으로, 왕실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특히 팔달산은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華寧殿)이 있는 곳인데, 일본인들이 이곳을 훼손하려고 하니 수원 백성들이 당연히 반대에 나선 것이다. 수원 백성들은 서울까지 올라가서 지지대고개와 노송 지대의 훼손 반대 시위를 지속했다. 결국 경부철도 노선은 수원 군민의 의지대로 수원 고을에서 서 북쪽으로 에돌아 군포~부곡~수원역~병점으로 확정됐다.
131~135쪽
사업비에 비해 효율성이 적다는 비판과 함께 시가 무리하게 대통령 공약사업을 추진하려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수원 시민들은 특히 수원시의 중심 상권이 팔달로에서 동수원 쪽으로 옮겨지고 있는 데다 시가 교통 체증 해소를 위해 수원천 복개, 수원역 팔달 문 간 중앙로 확장, 서부 우회도로 건설 등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팔달산 터널은 예산의 중복 투자라고 비판했다. 또한 수원성 등 팔달산에 위치 한 문화재 보존, 터널에 이어질 기존 도로 확장, 대형 신축 건물 철거 등 문 제점이 산적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시는
"팔달산 터널 건설은 수원시의 동서 간 교통 체증 해소와 지역의 균형 발전을 위한 대통령 공약 사항으로 채택된 것"
이라며
"터널 건설에 관련된 민원이 가능한 발생하지 않도록 신중히 추진하겠다.”
고 밝혔다.
더구나 1994년 7월이 되자 경기도는 하반기 사업으로 팔달산 터널을 포함해 대규모 공사 5건을 추진키로 했다. 하지만 수원 시민들과 지역 언론은 이에 대해 모두 부정적이었다.
1994년 11월 팔달산의 동서 간 터널 타당성 조사 결과,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의 연구 결과 472억 원의 예산을 들여 터널을 뚫을 경우, 터널로 인해 발생하는 편의 비용은 2000년에는 26억 원, 20년 뒤인 2014년에는 36억 원에 지나지 않아 투자의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팔달산 동서 간 터널 대신 수원시 권선구 고등동오거리 에서 팔달구 중동사거리로 통하는 우회도로나 우회 터널을 개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체 방안까지 제시했다.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의 경제성이 없다는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팔달 산 터널 공사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듬해 6월에 최초의 지방 자치단체장 선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관선 시장이었던 민주자유당 이호선은 팔달산 터널 공사를 찬성하고 있었고, 자신이 민선 시장으로 당선되면 팔달산 터널 공사를 밀어붙이려고 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가 시작되자 수원 시장 선거에 나선 무소속으로 출마한 심재덕 후보가 민선 초대 수원시장으로 당선되면서 팔달산에 터널을 뚫으려던 계획은 심재덕과 그를 지지한 수원 시민들의 힘으로 인해 마침표를 찍는다.
팔달산 터널은 김영삼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듯 지역의 오랜 정치인들의 단골 공약이었다. 이 팔달산 터널 공사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팔달산 터널 공사 철회를 한 것이 심재덕 시장이다. 그가 없었다면 문화도시 수원의 근간이 되는 수원 화성과 화성행궁이 온존하게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부침을 겪고 다시 터널을 폐쇄한다거나 등등의 불필요한 갈등과 소요가 야기되었을 것이다. 수원에 있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수원시장 심재덕이 수원시민에게 준 큰 혜택이기도 하다.















#이 글은 김준혁, 2019,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평전』, (사)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도서출판 아이콘)를 기본으로 여러 자료를 정리하여 작성하였다.
제11회 수원지역문화연구소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수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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