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옛 육군본부 전쟁기념관

달이선생 2026. 1. 26. 13:50

윤(성민)차장(중장)은 다시 물었다.

‘지휘관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습니까’

‘1공수여단장 박희도와 3공수여단장 최세창이가 행방이 묘연합니다. 9공수의 윤흥기 준장은 자리에 있는데...’

윤차장은 점점 불안감이 더 커졌다.

‘박, 최는 평소 전두환계 아닌가. 전이 총장공관에 병력을 보냈고 총격전까지 벌였다면 다음 표적은 육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육본을 지켜줄 직할병력은 없다. 10.26직후 9공수소속 1개대대가 육본 옆에 천막치고 배속돼 왔다가 정국이 안정화로 간다고 판단, 원대복귀 시킨지 10여일이 지난뒤다.

육본 지휘부는 당장 신변위협이 있다는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돌발적인 테러나 모반군(신군부)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줄 실병력은 수경사밖에 없다.

그때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벙커종합상황실에 나타났다. 노장관은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에게 지시했다.

‘육본 장성들과 함께 실병력이 있는 수경사로 가서 대처하시오’

쿠데타군 공격대비 수경사로 이동, 「군 어제와 오늘 15. 청와대 근위부대 9. 전두환의 장난인 것 같아... 윤성민, 모반음모 파악」(기획/연재), 『동아일보』 1993.5.27. 김재홍.

 

 

1979년 12월 12일 오후 7시 이후의 당시 육군본부의 상황이다. 이미 전두환 장군을 위시한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계엄사령관이자 육본의 수장인 정승화 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군을 동원한 상황에서 육본의 2인자 윤성민 차장은 육본을 버리고 수도방위사령부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명적인 결정을 하는데 바로 장태완 사령관의 진압을 위한 출동을 막고 신군부와 신사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신군부는 군철수를 약속했지만 기만이었고 윤차장이 생각대로 한국군 간의 유혈참극은 피했지만 쿠데타를 막지는 못했다. 이렇게 서울의 봄은 끝났다.

사실 서울의 봄은 10.26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육군본부에서 정승화 참모총장의 명령으로 헌병감 김진기에 의해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가 정승화와 육본에 온 것이 패착 중에 패착이었다. 1979년 유신종식과 12.12를 거쳐 5공의 시작에 육군본부가 있었다. 그리고 5.18과 6월항쟁을 거쳐 5공이 끝나고 그 현장인 육본은 서울 용산 주둔을 끝내고 충남 계룡대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전쟁기념관을 세운다.(1989, 노태우)

1989년 육본 전경. 가운데 연병장 우측 세로 E형태의 건물이 육군본부이다. 현재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으로 육군본부 자리 정초석이 남아있다.

 

2024년 12.3 계엄으로 모두가 어리둥절 할때 국회의사당으로 많은 시민들이 너나 할것없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계엄이 사실인지 의문이었고 그렇다면 이를 막아야한다는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 무려 40년이 지난 시기 더이상 계엄과 쿠데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현재. 과거가 무섭게 되풀이 되고 있었다. 너무나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으나 많은 시민들이 모여든 이때, 이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깨워준 것이 바로 큰 흥행을 한 영화 '서울의 봄'(2023)이었다.

그날을 경험한 세대도 있고 그날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도 있고 그날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영화로 경험한 세대가 한마음이 되어 모인 것이다.

2026년 1월 21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이진관 부장판사의 역사적 판결이 내려졌다. 12.3 불법 비상계엄 당시 내란 중요임무에 종사한 혐의를 받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 대해서 1심 선고에서 77살의 한덕수에게 사실상 무기징역과 다름없는 징역 23년을 선고하였다. 중형의 선고와 함께 이진관 부장판사의 선고는 위로부터의 친위쿠데타에 대한 정의와 함께 그러한 권력 공고히에 따른 헌법질서에 대한 불법성을 확인하였고 더욱이 이러한 반헌법적 민주주의 위기에서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계엄을 막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중한 확인이었다.

어쩌면 서울의 겨울이 될 뻔한 그날. 그날의 이정표가 되었던 역사적 현장(12.12군사반란)이 바로 전쟁기념관이 서있는 옛 육군본부 자리이다.

 

1호선 용산역을 나와 삼각지 전쟁기념관으로 가다보면 일제강점기 일제 적산 건물이나 잔존하는 미군부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한국근현대사의 비극은 한강변의 용산이 너를 나대지로 인해 우리의 국권이 유린되는 발판이 되었다는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이다. 그때문에 이곳에는 대대손손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지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개국하고 한강변은 조운체계에 따른 국가 중심의 물류 유통망에 현장이었다. 이러한 한강의 이점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경강상인이다. 용산에 속한 양화진, 노량진, 한강진 등에는 이들의 나룻배와 군선이 빼곡히 들어찬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예전 최인훈 소설 '상도'를 사극화 한 이병훈 피디의 '상도' 드라마에서 경강상인과 임상옥(배우 이재룡)이 펼치는 상재 대결이 극적으로 그려지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 의주 만상 임상옥과 개성의 송상(박주명 , 이순재 분), 동래의 내상, 평양 유상 등 조선 후기 사상과 보부상 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이곳 용산 한강나루가 그들의 터전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성을 일시에 점령한 왜군이 한때 병참을 위해 용산에 주둔하였고 이후 구한말 고종과 민씨척족에 의해 불러들여진 청군이 주둔한 곳이 용산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청나라를 물리친 일본군이 상시 주둔하면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침략군인 조선주차일본군사령부가 위치한다. 마침내 1945년 해방이 되지만 일제에 이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양도받은 미군이 주둔하면서 용산은 미군부대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서울의 중심이 되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 미군부대를 확장하여 이전하였지만 여전히 이곳에 미군부대가 남아있다.

육군본부 위병소 자리에 건립된 형제의 상.

 

전쟁을 기억하는 것은 참화, 고통, 슬픔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념이라는 긍정적 단어에 대한 어감은 반감을 사기도 한다. 본래적 기념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 가지는 비인간적 사실들은 이를 용납하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사실 비인간이라고 했지만 전쟁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 것이라고 본다. 지구상에서 전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역사를 이어가는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하다.

전쟁기념관의 이름을 바꾸자는 논의가 많았지만 기념관의 명칭이 유지되고 있다. 한때 기념관의 명칭에 반감이 컸지만 지금에야 돌이켜 보지만 제일 합당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1950년 한국전쟁의 참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거의 가 사라졌다. 이들의 기억을 남기고 기억하는 일, 그것이 기념이고 이를 남기는 공간이 기념관이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를 잡는다

Three Balhae Men Can Capture a Tiger

발해인들은 활쏘기, 타구, 격구 등을 통해 용맹성을 길렀다. 이는 고구려 벽화의 앞으로, 옆으로, 뒤로 활을 쏘는 다양한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용맹성은 발해인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발해 유적에서 화살촉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발해는 사냥이나 군사훈련이 성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체력을 단련했던 발해인들은 '발해인 세 사람이 모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는 말이 주변국에 퍼질 정도로 큰 용맹성을 자랑하엿다.

작가: 이광호(李光浩)

전쟁기념관.

1894년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당시 일본군의 개틀링기관총.

개틀링 기관총과 우금치 전투

The Cating Gun in the Batle of Ugeumchi

1894년 죽창이나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에 의해 그 희생이 매우 컸다. 전투 이전 1만 여명에 달했던 동학농민군은 실제 전투 후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동학농민군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시 관군의 순무선봉장이었던 이규태(李圭泰, 1841~1895)의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중

'전투 후 우금치 골짜기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屍山血海시산혈해)'

라는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개틀링 기관총은 미국의 남북전쟁기인 1862년 리처드 J 개틀링(1818~1903)이 개발한 무기이다. 여러 개의 총신이 돌아가면서 분당 600발의 탄환 발사가 가능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화기였다. 조선은 1883년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으로부터 개분링 기관총 6문을 도입하여 운용하였다.

In 1894, the Donghak Peasant Army was completely defeated by the combined Joscon-Japanese troops at the Battle of Ugrumchi. It was the Gatling Gun that enabled the alliances to easily crush the nobellion armed only with bamboo spears and outdated matchlocks. The Gatling Gun offered a rapid and continuous rate of fire without having to be manually reloaded by opening the breech: approximately 600 rounds per minute. In 1883, the Korean Empire introduced six of the guns from the Us in order to modemize its army

전쟁기념관.

 

한민족의 호국정신에 따라 고조선 이래 역사적 전쟁유산을 전시하고 있지만 이 자리는 무엇보다 가장 큰 의미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다. 북한의 남침과 낙동강방어선으로의 후퇴, 인천상륙작전으로의 반격,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3.8선 부근 전쟁의 교착과 고지전, 그리고 2년 후 휴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의 한국전쟁이다.

큰아이가 전쟁과 전쟁무기에 대한 관심이 많아 들른 곳이나 이번에 전쟁기념관에서 중요하게 본 것은 무능하고 유약했던 국군이 아닌 개전 초기 그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북한군을 저지하여 적화되는 것을 막았던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보통 한국전 시작 국군이 너무도 쉽게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결과였다. 북한은 해방 후 주구장창 전쟁 준비를 했고 남한은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미군정의 무능과 혼란에 따라 국가체제 정비가 늦어지면서 국방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없었던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거의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낙동강방어선 구축과 방어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국군의 반격이 단순히 유엔군, 즉 미군의 즉각적 참전을 통한 역전이라는 상식이 있지만 이러한 상식적 전황이 가능하게 했던 우리 국군의 희생을 주목한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파죽지세 공격 속에서 우리 국군이 보유한 장비는 전투기, 탱크, 장갑차는 몰론 실질적인 무력수단이 전무하였다. 물론 해상에도 전함다운 전함 1척도 없이 전함으로 부른 백두산함 1척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이러한 불가능의 상황에서 북한군을 막아선 영웅들이 있다. 특히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고 3일간 머무른 것을 가장 미스테리한 일로 여기는데 이는 북한군이 신속하게 남하했다면 전황이 더욱 불리하여 우리에게 반격의 기회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북한군과 김일성을 저지한 것이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우리 국군의 놀라운 활약 덕분이었다. 바로 6사단의 춘천방어성 구축과 춘천전투였다. 개성지구에서 삽시간에 몰아친 북한군이 서울에 육박할 때 의외의 전황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춘천전투였다. 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육탄방어를 통해 북한군 전력의 우익날개를 꺾어버린 것이다. 이 일로 북한군이 사태를 파악하고 전략을 짜는데 무려 3일이 걸렸다. 국군과 유엔군, 대한민국 장래에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6사단 김용배 준장, 장세풍 중령, 김풍익 소령, 심일 소령과 대원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남하를 시작한 북한군을 저지한 것이 시흥지구 김홍일 소장과 국군이 있었다. 이들이 6일간의 사투를 통해서 군군과 유엔군이 방어전 구축을 하는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울러 해상에서도 부산으로 침투하던 북한군 600명을 수장시킨 백두산함의 대한해협 해전도 역사의 중요한 전개였다. 만약 북한군의 상륙을 막지 못하였다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려던 국군과 유엔군에게는 큰 타격은 물론 인천상륙작전의 반경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악재 속에서도 만약, 설마라는 상황에서 자칫 하나만 어그러져도 끝날 수밖에 없는 전황에서 춘천과 시흥, 대한해협에서 국군이 이룬 희생은 엄청난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다.

육본작전명령 38호국군방어계획

Operation Order No.38 of ROK Army Headquarters

북한군의 전면 공격에 대비하여 1950년 1월말 경 수립한 작전계획.

1단계에는 38선 경계진지에서 적의 남하를 지연하고, 2단계에는 주진지선에 전 화력을 집중해 적을 격멸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방어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전방사단들은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의 만행으로 보여지는 사진이다. 사진 속 여인들은 일반 평범한 여성으로 보이진 않는다. 블라우스와 치마며 당시 어느 정도 재산과 지식을 소유한 계층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이나 남자들의 복장이 남루한 것을 보면 더욱 대조적으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들이 북한 점령시 살해당한 것이라면 분명히 '반동분자'로 몰려 인민재판을 받았을 것이다. 학살은 총살로 자행되어 가슴팍에 사살로 이루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신의 가슴쪽에 천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의 아비규환에서 자행된 일이었겠지만 의외로 얼굴들은 평안하다. 그것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특히 가운데 입에 천을 물리고 있는 여인은 손을 뻗쳐 살짝 불룩한 아랫배를 감싸고 있다. 유독 여인이 절규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임산부인듯 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모성은 자신보다 뱃속의 아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광기의 시대 이념을 들이대어 자행된 잔혹한 학살. 이러한 비통함이 결국 사람들 저마다 분노와 한을 만들었고 급기야 국군이 수복하고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보복이 똑같이 자행되었다. 민족끼리의 전쟁은 비극 중 가장 큰 비극이다. 인륜을 저버린 만행이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자행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친일부호의 그 자식들이 '살부계(殺父契 : 아비를 죽이는 모임)'라는 막연한 공포와 자조가 있었다. 이밖에도 공습에 의한 피난민 부부가 지게를 지고 봇짐을 이고 가다 처참히 죽은 사진을 봤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짐과 함께 널부러져 있는 이들 부부에게 그 곁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어느 하나 눈길하나 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흔한 광경이었을까 아니면 내 신변이 더 다급하니 다른 이의 불행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인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결단코

 

 

 

왜 그렇게 많이 죽였을까?

민간인 사망자 200만 명.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서로 죽여야 했을까. 라종일은 그 중요한 이유를 당시 한국 사회의 미완성에서 찾는다.

이 작은 나라에서 민간인 학살이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났는가, 이 문제는 참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전쟁 중에 처음 대규모 학살을 시작한 건 남한이에요. 그렇지만 이것은 해 방 이후 일어난 살상극의 연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여수, 순천의 반란사건 때도 민간인 살상이 그 규모나 참혹함 면에서 엄청났어요. 남한이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사람들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는데, 그것이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이었어요. 건국

이후에도 남파된 빨치산 등이 일으키는 소요사태가 이어졌지요.

간신히 치안이 안정되었을 때 '스탈린 - 김일성'의 남침 전쟁으로 다시 살상의 상황이 빚어졌고요. 그런데 남침을 당하고 전쟁에서 밀리니까 정부는 전향한 사람들이 후방에서 교란을 일으킬까 두려 웠던 거죠. 그런데 전혀 근거가 없는 생각도 아닌게, 북한은 전쟁을 시작할 적에 남한의 30만, 40만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후방에서 유격전을 하고 파괴 활동, 사보타주를 해줄 거라고 기대했어요.

전쟁 계획의 일부였죠. 남한 정부는 후퇴하면서 후방의 그런 불안한 세력을 없애야 하니까 그 사람들을 다 죽이고 말았죠. 숫자가 30 만인지 40만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어요.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때 조사를 하려 했지만 세월이 오래 지나서 어렵더라고요. 대전 중 소련의 카틴 숲 학살 사건이 떠올라요.

그러고 나서 인민공화국 시대가 되니까 좌익들은 또 인민재판을 열고 반동분자 학살을 시작했죠. 국군이 다시 진주하면 똑같은 행동을 했고요. 영국군 참전 기록에 보면, 여자와 어린이들까지 경찰이 죽이려는 판에 영국군이 개입해 사형수들을 풀어주고 그랬대 요. 그렇게 풀려나긴 했지만 영국군이 떠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라종일, 김현진, 햔종희, 2021, 한국의 발견, 루아크, 30~31.

 

 

비목[碑木]. 단순한 목비를 뜻하는것이 아니라 흔히 전사한 전우의 무덤 앞에 그가 사용하던 소총에 착검을 하고 땅에 거꾸로 꽂아놓은것에 철모를 걸쳐놓은 것이다. 당시의 소총( M1 카빈, AK ) 대부분 쇠와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비목이라 하였다.

 

초연(硝煙)이[화약 연기]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樵童)[땔나무 구하는 아이]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비목. 한명희 작사·장일남 작곡(1967, 69)

 

 

그렇지만 1950년대 전쟁 직후 나온 소설들을 보면 깊은 허무감이 느껴져요. 어느 엄한 어머니가 피난을 가면서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해요. 말과 행동을 조심해라, 생각을 올바로 가져라•··. 그런데 그러고 나서 민간인 오폭에 바로 휩쓸립니다. 그동안 주고받았던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올바른 행동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인간 혼돈의 상황이었죠.

 

라종일, 28~28쪽.

 

계룡대 이전 육군본부자리 정초석.

 

 

定礎

檀紀4291年3月1日

陸軍參謀總長 大將 白善燁

工兵籃 少將 嚴鴻燮

第1201建設工兵團 施工

(정초

단기 4291년 3월 1일

육군참모총장 대장 백선엽

공병감 소장 엄홍섭

제1201건설공병단 시공)

이 초석은 육군본부가 서울 용산구 용산동 1기 8번지인 현위치에 1949년 6월 30일 주둔한 이래 1958년 3월 1일 준공한 본청 건물의 정초석(定礎石)으로써 육군 본부가 1989년 7월 5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계룡대로 이전하기까지 육군의 발전 역사를 지켜보던 육군 역사의 상징물로 그 자리에 놓아둔다

 

1994년 6월 10일

 

전쟁을 담고 있는 유물들이 너무나 많고 장대하다. 그러나 못내 아쉬운 것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흔이다. 물론 전쟁으로 기념하는 것은 승전과 고난을 극복한 전황에 대한 기억이 당연하다 그러나 전쟁은 더이상 우리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끼리 벌어져서는 안되는 비극이라는 사실이 기억될 수 있는 전시와 자료가 부족하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 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 번 살 수 있을 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 하나하나 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 번 서로 교차되 며, 다시 반복되는 일이 없는 하나의 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1997, 데미안, ()믿음사,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