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명동촌 윤동주*전 시집-윤동주 100주년 기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달이선생 2026. 2. 5. 13:15

서(序)

 

서(序)-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 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遺詩)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 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 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문을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 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서니 윤동주의 시(詩)가 바로 ‘시(詩)’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 그의 ‘시(詩)’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그의 유시 ‘병원’의 일절(一節).

 

그의 다음 동생 일주(一柱) 군과 나의 문답-

‘형님이 살았으면 몇 살인고?’

‘서른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아홉예요-.’

‘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내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하여 소지주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 부텀이었구나!" 나는 감상하였다.

..............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태초의 아침‘의 일절(一節).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

’연전(延專)을 마치고 도시샤(同志社)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셔츠나 거저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습데다.’

‘심술(心術)은?’

‘순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 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습니다.’

 

.............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원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간(肝)"의 일절(一節).

 

노자(老子) 오천언(伍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強其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 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의 일절(一節).

 

일제 헌병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 에 누워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어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겠느냐는 문제-

 

그의 친우 김삼불(金三不) 씨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1947년 12월 28일

지 용

윤동주, 윤동주100년포럼, 2017, 『윤동주*전 시집』-윤동주 100주년 기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 21~27쪽.

 

누구나 윤동주의 시는 익숙할 것이다. 그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이자 스승 정지용이 그의 유고에 바친 서는 아마도 거의 모를 것이다. 윤동주의 서정시는 서정시의 대가 정지용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그 정지용이 윤동주가 죽고 그의 유작을 모아온 손에게 넘겨 받고 보면서 서를 쓴 것이다. 그간 많은 시집을 보아왔다고 할 순 없으나 그 어떤 서보다 윤동주 시집다운 서고 정지용 다운 서라고 자부한다.

시대의 아픔을 아름답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지나치지 못하고 남긴다.

그리고 윤동주의 피붙이 동생 윤일주가 회고한 ‘선백의 생애’를 통해 보통 알려진 사전과 같은 연대력이 아닌 그의 삶의 이야기를 본다.

 

 

머리글

 

전 시집으로 만나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제까지 발간된 윤동주 시집 및 작품집은 많지만,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비롯해 발문 및 후기까지를 한 권에 담은 책은 없었다. 이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 전체뿐만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과 후기와 발문 등도 모두 취합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이 책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1948년 발간된 원본 그대로 정지용(鄭芝溶)의 서문과 유영(柳玲)의 추도시 및 강처중(姜處重)의 발문을 살렸다. 초판본의 서문과 발문 등은

1955년부터의 인쇄본에는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인 정지용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이후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는 1993년 4월 24일, 5월 1일, 5월 7일자 기사에서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자이던 강처중은 가족들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1950년 9월 4일 집을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강처중이 남로당 지하당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을 기다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하자 집에서 두 달 남짓 요양하다가 남한을 떠난 것이다. 전쟁 이후 남북한의 이념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를 겪으며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은 사라진 것이다.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에는 정병욱(鄭炳昱)의 후 기와 윤일주(尹一柱)가 쓴 '선백(先伯)의 생애'가 실려 있으며. 3 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에는 백철(白鐵), 박두진(朴斗鎭), 문익환(文益換)의 후기가 실려 있다. 윤동주 연보는 편의를 위해 4부 뒤에 실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 모두 살려 놓은 정지용, 유영, 강처중 등의 추모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운동주 전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1948년 초판본 전문을 실었고,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에는 1948년 본에 실려 있는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실었으며,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 에는 역시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수록된 작품 외의 시 작품을 담았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에는 미완성이거나 원고에서 삭제 표시한 시를 포함에서 기존 윤동주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 8편을 실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실었으며, 4부는 작품이 쓰인 해를 알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창작 연도에 따라 실었다.

표기는 가능한 현대어 표기법을 따르면서 읽기에 지장이 없는 한 당시의 표기법 그대로 표기해 원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으며, '얼골/얼굴' '코쓰모쓰/코스모스' 등 발간 연도에 따라 다르게 실린 몇몇 단어는 그 변화가 와 닿을 수 있도록 당시에 발간된 대로 표기하였다. 그 외 「윤동주 연보」에 쓴 작품 제목은 현대어를 따랐다.

2. 3부의 장 순서는 원본 그대로 하여 ‘3' ’4' ‘5' 및 ’5' 장으 로 되어 있으며, ‘1'장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은 오기가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6~9쪽.

 

증보판에 부쳐

『윤동주 전 시집』이 2년 만에 증보판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동안 독자들이 궁금해 하던 일본 교과서에 윤동주 시 3편이 실린 이바리기 노리코의 수필 전문을 번역해 수록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 윤동주를 재외동포 시인으로 표기하면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고, 말을 빼앗고, 이름까지 빼앗았던 일본도 지금은 교과서에 한국 시인으로 표기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한국 시인을 ‘재외동포 시인'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중국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일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윤동주 시인은 광명중학교 학적부과 연희전문 학적부에도 ’함경북도 청진'으로 기록돼 있으며, 특히 윤동주가 죽게 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에도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 76번지'로 나와 있다. 따라서 윤동주는 한 번도 한국인이 아닌 이름으로 살았던 적이 없으며 한글을 가장 사랑했던 시인으로 첫 시집을 발간할 때 윤동주의 친지들은 그의 뜻을 살려 가로쓰기 시집으로 출간했다.

4~5쪽.

 

인간 윤동주

장덕순(張德順)

 

동주는 깊은 애정과 폭 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자기는 회의(懷疑)와 일종의 혐오로 자신을 부정하는 괴벽한 휴머니스트이다. 남에 대한 애정은 곧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시작(詩作)에도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우물 속에 비친 《자화상》을 보고 독백하는 말이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면서도, 자기가 인류의 한 멤버라는 것을 인식할 때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숭고한 인간애가 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자화상)

전자의 ‘그 사나이’는 외톨로 된 동주 자신이고 후자의 ‘그 사나이’는 인류의 일원인 동주였었던 것이다.

「이제 네게는 삼림(森林)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한 산맥이 있다.」 (사랑의 전당[殿堂])

자기 이외의 모든 동포의 행복을 기원하면서도 자기를 준험한 산맥임을 자학하는 그의 희생의 휴머니티가 나타나 있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여기에서 그의 자아 부정의 인류애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처럼 전 인류의 구세주를 의식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의 포근한 인간미와 우애가 생리(生理)처럼 그를 지배하여 결국은 자학에 가까운 옥사(獄死)를 감수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 가 생각한다. <인간 동주(東柱)>는 인간이기에 인간애를 알았 고, 동주는 또 영원히 외로운 〈동주(童舟)〉였기에 외롭게 희생 되고 말았던 것이다.

× ×

내가 C전문학교에 입학시험 보러 상경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 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동주는 나를 위해 하숙방을 얻어 놓고 역까지 마중 나왔다. 저녁 늦게까지 내 하숙방에서 이야기하다가 동주는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나갔다. 아마 자정도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가는 여독을 풀자고 자리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 밖에서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깼다.

동주가 다시 온 것이다.

방에서 냇내가 나니 창을 좀 열고 자라고 이르는 것이다. 내가 들창문을 좀 열어 놓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자정이 넘은 어두운 신촌 길을 타박거리고 더듬어 갔다. 뒤에 들으니 동주는 가깝지 않은 기숙사까지 다 갔다가 걱정이 되어서 다시 왔더라는 것이다. 그 방에서 학생 하나가 냇내에 중독이 되어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주가 「너는 아늑한 호수에」, 「나는 준한 산맥」에 있겠다는 그 시심(詩心)과도 같은 일화이다.

동주는 항상 시와 생활이 일치된 경지에서 살았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이 있지만, 동주는 외미내미(外美內美)의 인간이다. 그의 시가 아름답듯이 그의 인간도 아름답고, 그의 용모가 단정우미(端正優美) 하듯이 그의 마음도 지극히 아름답다. 나는 언젠가 동주의 추억기에서 희랍의 대리석 조각을 연상하리만큼 훤출 미끈한 미남자라고 쓴 일이 있다. 어렸을 적에 나에게 영상(映像)된 동주는 미남 그대로였고, 마음씨는 다정한 누나 그대로였다.

동주와 나는 세교(世交) 집안의 사이였다. 동주의 조부와 나의 조부가 이역 북간도에서 함께 살았다. 동주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같은 교회의 일꾼이었다. 나의 형(요한)과 동주는 은진중학의 동기동창이다. 나는 형을 줄줄 따리서 동주와도 농을 했다. 형은 왕왕이 나를 귀찮아했으나, 동주는 어느 때나 다정히 나를 감싸 주었다. 우애 있는 휴머니스트였다

1930 몇 년의 일이었던지-「어린이(?)」 잡지에 『지도』라는 동요를 발표하고 나에게 읽어 주었다. 오즘 싼 이야기이다. 나도 웃고 저도 웃었다.

「오줌을 싸고도 부끄럽지 않아서 글까지 쓰고 또 자랑까지 한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의 동주의 웃음은 오줌 싼 어린이답지 않게 의젓했고, 티 없는 호수의 잔잔한 무늬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그러나 동주에게는 짓궂은 자기 학대가 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비운(悲運)의 최후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서울에서 나는 얼마 동안을 동주와 함께 하숙생활을 한 일이 있다. 그는 유별나게 간지럼을 많이 탔었다. 그의 친구들은 심심하면 그의 발을 건드린다. 그러면 동주는 대굴대굴 뒹군다. 얼굴이 빨개져서.••••. 그러는 것이 재미있어서 친구들은 더 극성이다. 하루는 동주가 친구들에게 자청해서 발을 내놓고 간질이라고 명했다. 친구들은 영문도 모르고 발에 손을 댔다. 동주는 이를 악물고, 다리를 들면서 참았다. 한참 만에 친구들은 장난할 의욕을 잃었다. 동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기(克己)에서 자학(自虐)으로 넘어선 경지이다.

동주는 또 영원한 향수(鄕愁)를 그리다가 그대로 죽어간 시인이다. 그가 이역에서 태어났고, 또 뼈가 굵을 때까지 이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국 땅에 대한 향수는 남달리 대단했다. 그러나 조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조국 아닌 일제의 식민지였었다. 그는 이 조국 아닌 조국 땅에서 또 다른 조국을 향수 했던 것이다. <또다른 고향>은 이때 쓴 것이다. C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에는 그대로 빼앗긴 땅에 대한 향수를 안은 채 일제 감옥 속에서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다고 전해지니. 그것은 향수의 절규가 아니었을지.

동주는 이렇게 향수를 안고 자랐고, 살았고, 또 죽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는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였다. 심심할 때 홀로 하숙방 툇마루에 앉아서 이 노래를 불렀다. 또 그 좋아하는 휘파람으로 이 곡조를 먼 하늘에 날려 보내기도 했다. 또 다른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애소(哀訴) 하던 시 인 동주는 정녕 그 원대로 일찍이 그 곳으로 가 버린 것이다.

동포애와 인류애로 자신을 짓밟은 동주, 일제에 항거한 반항 시인 동주는 이제 가 버렸으나, 인간 동주의 시(詩)와 시심(詩心)과 휴머니티는 영원히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필자 서울대 문리대 교수〉

233~237쪽.

추기 (追記).

 

추기(追記). 고인 별세 후 세상에 빛을 보이게 된 작품 원고의 출처는 이러합니다.

제1부와 제3, 제4부의 더러 및 제5부는 고인이 연전(延專)을 졸업하고 도일(渡日)할 때 동문인 정병욱(鄭炳昱) 선생에게 맡긴 것을 정 선생의 자당(慈堂)께서 향리인 경남 하동에 깊이 간수하였던 것이며, 제2부는 고인이 도쿄(東京)에서 서울의 한 글벗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던 것인데, 편지는 소각하고 작품은 땅 속에 묻어서 일제 말의 엄한 감시를 피했던 것이며, 제3, 제4부 중주(中主)로 중학 시절에 쓰인 것은 고인의 누이 혜원(惠媛)이 1948년에 고향 용정에서 마(魔)의 삼팔선을 넘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분들의 고인에 대한 따뜻한 정성이 아니었더라면 이 작품 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기록해 두는 바입니다.

1967,2,16 윤일주 기(記)

 

*윤일주 추기는 1979년 중판 발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후기 중 「선백(先伯)의 생애, 바로 뒤를 잇는 글이다. 원문에는 별도의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이 책에서는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 후기 편에 윤일주의 「선백의 생애」를 실어 놓았으므로 중복 해 싣지 않았다. 238~239쪽.

 

3판을 내면서

동주 형의 10주기가 지나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절판되었던 시집을 다시 찍어 내고, 그의 모교 뜰에 시비를 세우려던 20주기는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이제 민족 시인으로서 움직이지 못한 자리를 차지한 그의 광망(光芒)은 기어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시집을 찾게 하고 있다. 판(版) 이 거듭될수록 이 땅의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처음부터 그의 시집 엮는 일에 관여해 온 한 사람으로서 적이 보람을 느낀다.

동주의 감각과 지조와 인간을 흠모하여 그의 시를 찾는 이를 위하여, 무엇이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끼지 않으려는 몇 분의 수고를 이 3판에서 끼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 다. 주로 문학사상(文學史上)의 위치를 중심으로 동주를 이해하려고 한 백철(白鐵) 선생의 글은, 동주 시의 역사적 의의를 정착시켰다. 같은 시인인 박두진(朴斗鎭) 선생은 시를 통하여 시인 윤동주의 예술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셨다. 그리고 동주와 생전에 교분이 두터웠던 장덕순(張德順), 문익환(文益換) 두 분의 글은 앞으로 윤동주 연구의 산 자료로서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바쁘신 중에도 좋은 글을 덧붙여 주신 네 분 선생들께 깊이 고마운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하여, 이번에는 그의 연보를 책미(冊尾)에 붙이기 로 하였다. 많은 참고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1967. 2, 16

정병욱

* 『3판을 내면서」는 1979년 중판 발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후기 중 정병욱의 『후기」 마지막에 덧붙여진 글이다.

정병욱의 『후기」는 이 책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 에 실려 있으므로 역시 중복해 싣지 않는다. 240~241쪽.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

2009. 6.

 

명동촌의 산야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산천을 많이 닮아있다. 아니 똑같았다.우리 산천이 백두산에서 뻗어나와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이루듯 이곳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도 백두산에서 뻗은 산세와 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 뿌리내린 옛사람들 역시 우리 고향과 똑같은 곳을 찾아서 정착했다고 했는데 역시 빈말은 아니었다.
윤동주 생가 윤동주의 고향 마을 명동은 '밝아오는 동이(東夷)마을'이라는 뜻으로 선각자 김약연 義士(목사-윤동주의 외조부)가 명동 교회와 함께 세운 터전이다. 지금의 윤동주 생가는 9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생가는 전형적인 우리 북방지역의 가옥의 형태인 난방과 생활의 공간인 정주간(세 번째)이 있고 고유의 팔작지붕으로 멋을 한껏 냈다. 그리고 이 지방의 우리 동포들에 가옥에서만 보이는 특징인 처마 밑 기와를 여러 장 겹쳐 쌓는 특징도 있다. 생가 왼쪽 끝 방에는 윤동주 시인의 서거 64주년을 기리는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다. 시인이 떠난 그 자리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들고 나지만 시인의 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이어가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쓸쓸함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선백(仙伯)의 생애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 주고 29년간을 시(詩)와 고국(故國)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사형(舍兄) 윤동주를 일제는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 전 일이었습니다.

 

1910년대의 북간도 명동(明東)-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志士)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熱)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동주 형은 이곳에서 교원(敎員)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가는 할아버지가 손수 벌재(伐材)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북(咸北) 회령(會寧)이요. 어려서 간도(間島)에 건너가시어 손수 황무지를 개척하시고, 기독교가 도래하자 그 신자가 되시어 맏손주를 볼 즈음에는 장로로 계시었습니다.

동주 형의 근실(勤實)하고 관유(寬裕)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아명(兒名)은 해환(海煥)이었고, 그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얌전한 소학생 해환은 아동지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931년에 명동소학을 마치고 대랍자(大拉子)라는 꽃에서 중국인관립학교에 1년간 수학하였으니, 시 『별 헤는 밤』의 패(佩), 경(鏡), 옥(玉)이란 묘한 이국 소녀들의 이름은 이때의 추억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32년 그가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자, 저의 집은 용정에 이사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습니다. 축구 선수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 입었습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초저녁에는 산책, 밤늦게까지 독서하거나 교내 잡지를 만드노라고 등사 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산책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운동복이나 문학 서적만 들고 다니는 그의 성적에 뜻밖에도 수학이 으뜸가는 것에는 다들 놀래었습니다. 특히 기하학을 좋아함은 그의 치밀한 성품에서였다고 짐작됩니다.

1935년 봄 3학년을 마칠 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의 유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기었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 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 의 의욕이 고조된 듯합니다. 이 즈음 백석 시집 『사슴』이 출간 되었으나, 백 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正字)로 베껴 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평양 유학도 끝을 맞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용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닉네임으로 동요 몇 편 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비운은 중학교 졸업반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는 진학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 벌써 많은 동요와 시고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문학 이 외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문학에 뜻을 두어 베이징(北京)과 도쿄(東京)에 유학 하고 교원까지 지내셨건만, 자기의 생활상의 실패를 아들에게 까지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퇴근 전부터 산이고 강가이고 헤매다가 밤중에야 자기 방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뚜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년을 두고 아버지와의 대립이 계속 되다가 졸업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의 권고로 아버지가 양보하신 것입니다. 소학과 은진중학 동창이며 고종사촌이며 또 동갑인 송몽규(宋夢奎) 형과 동행하여 서울에 온 것은 1938년 봄이었습니다.

상경하자 두 분 다 연전(延專)에 입학하고 그 후부터 집에 오기는 1942년까지 매년 2회, 여름과 겨울 방학 때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절의 나의 추억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정답던 모습은 사각모에 교복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 있는 형님입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날로 양복은 벗어 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습니다. 소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맷돌도 갈며 과묵하던 그도 유모어를 섞어 가며 서울 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일로 상함을 입는 끓어오르는 시흥(詩興)과 독서 시간의 아쉬움에서였을 것입니다.

노여움도 아까움도 미소로써 흘려보낼 수 있었던 그는, 차마 집안 어른들의 일을 돕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관유(寬裕) 함이 그의 의지를 지탱케 못하였을지나 결코 우유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용정은 인구 십만에 가까운 작지 않은 도시였으나, 대학생인 그는 아무 쑥스러움 없이 베옷을 입은 채 거리로 소를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릴케나 발레리의 시집, 또는 지 이드의 책을 옆에 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으스름 때면 으레이 하는 산책에, 동생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거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로수가에서 기타 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고노미찌(この道, 이 길)』를 콧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숲속에 앉아 새로 뜨는 별과 먼 강물을 바라보며 손깍지를 낀 채 묵묵히 앉았을 때에는 그의 얼굴에 무슨 동경 (憧憬)과 감정이 끓어오름을 연소(年少)한 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작로를 걷다가도 부역하는 시골 아낙네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 하고,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귀여워서 함께 씨름도 하며, 한 포기의 들꽃도 차마 못 지나치겠다는 듯. 따서 가슴에 꽂거나 책짬에 꽂아 놓곤 하였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는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의 표백(表白)은 그의 천품(天稟)의 기록이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집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 십 권의 책으로 한 학기의 독서의 경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 에게 오가와 미메이(小川未明) 동화집을 주며 픽 좋다고 하던 일과 수필과 판화지(版畫誌) 『백과 흑』 7. 8권을 보이며 판화가 좋아 구득하였으며, 기회가 있으면 자기도 목판화를 배우겠 다고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이리하여 집에는 근 8백 권의 책이 모여졌고 그중에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앙드레•지이드 전집 기간분(旣刊分) 전부, 또스토예프스키 연구 서적, 발레리 시 전집, 불란서 각 시집과 키에르케고르의 것 몇 권, 그 밖에 원서 다수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것은 연전 졸업할 즈음 무척 애독하던 것입니다.

1941년 12월 연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졸업장과 함께 정성스러이 쓴 시고집(詩稿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들고 왔었습니다.

그것은 초판 77부로 출판할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소중히 지니고 다녔습니다.

더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942년에 『참회록(懺悔錄)』이란 시를 써 놓고 도일(渡日)하여 릿쿄(立敎)대학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7월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어머님의 침상에 걸터앉어 이야기 동무로 며칠을 보내다가 뜻밖에 속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호쿠(東北)대학에 있던 한 친우의 권유로 해교(該校-그 학교, 해당한 학교) 입학 수속 치르러 오라는 전보 까닭이였습니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자 눈물이 글썽하였습니다. 늘 정거장에서 맞고 바래던 그와 그렇게 헤어짐이 최후의 작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떠나면서도 어머님 걱정을 뇌이고 또 뇌이더랍니다. 아마 운명 시까지 눈앞에 어머님의 모습만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도호쿠대학에 간 줄 안 형에게서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도시샤(同志社) 영문과로 옮겼다는 전보가 오자 아버지는 좀 노여운 기색이었습니다.

도쿄과 교토에서의 그의 고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전화(戰火)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졌고- 하숙방에서 홀로인 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의 1절(一節). 1942. 6.3.작(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고독만으로 항거하기에는 현실의 물결은 너무 거센 것이었습니다.

 

1943년 7월 귀향 일자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 후에 온 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차표와, 그 차표로 찾은 약간의 수하 물뿐이었습니다. 차표를 사서 짐까지 부쳐 놓고 출발 직전에 경찰에 잡혔던 것입니다. 교토(京都)대학에 있던 몽규 형도 함께 잡혔습니다.

카모가와 서(鴨川署)에 미결(未決)로 있는 동안 당시 도쿄에 계시던 당숙 영춘(永春) 선생이 면회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형사의 담당으로 일기와 원고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매일 산책 이 허락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던 형사의 말은 결국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주와 몽규 두 형이 각 2년 언도를 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투옥된 1944년 6월 이후. 한 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로는 그의 자세한 옥중생활은 알 길이 없었으나, 영화(英和, 영어와 일본어) 대조 신약성서를 보내라고 하여 보내 드린 일과 『붓끝음 따라온 귀뜨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뜨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매달 초순이면 꼭 오던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다가서야 상기(上記)한 전보로 집안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유해나마 찾으러 갔던 아버지와 당숙님은 우선 살아 있는 몽규 형부터 면회하니 『동주!』 하며 눈물을 쏟고,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노라는 그는 피골이 상하였더랍니다.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간수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후쿠오카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 장의 인쇄물이 배달되었으니 그 내용인즉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 일 사망 시에는 시체는 가져가거나 불연(不然)이면 규슈제대(九州帝大)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하시압』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백골 물래 또 다른 고향에』 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 줌의 제가 된 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 땅 간도에 돌아왔습니다. 약 20일 후에 몽규 형도 같은 절차로 옥사하였으니 그 유해도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동주 형의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치는 날이었습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메마른 그의 무덤 위에 지금도 흰 눈이 나리는지-

10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상재(上梓)함에 있어 사제(舍弟)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 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無名)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어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 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사제(舍弟) 일주(一柱) 근지(謹識)

180~189쪽.

 

 

투르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 그 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루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 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 끼리 소근소근 이야 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1939. 9)

 

153~154.

 

 

 

발문(跋文)

 

동주(東柱)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모런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들이를 부즈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으로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延專)을 마치고 교토(京都)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東柱) 몽규(夢奎)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東柱)! 몽규(夢奎)!

 

(강처중)

77~79.

 

 

 

동주 형의 추억

문익환(文益換)

 

 

원통하기 그지 없지만 나는 동주 형의 추억을 써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무엇인가 동주 형에 대해서 내가 아는 대로 써야 할 것만 같은 심정이다. 그와 나는 콧물 흘리는 어린 시절의 6년 동안을 함께 소학교에 다니며 민족주의ㅇㅘ 기독교신앙으로 뼈가 굵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평양으로. 거기서 또 만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가장 민감한 10대에 세 중학교를 우리는 함께 편력하였다. 동주 형에 대해서 무엇인가 쓰고 싶은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나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서로 길이 갈렸다. 그는 문학 공부하러 서울로, 나는 신학을 공부하러 동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으레이 서로 만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속을 털어 이야기 를 주고 받았다. 물론 문학에 관해서는 언제나 내가 듣는 편이었다. 아무튼 나는 인생의 민감한 형성기에 그와 함께 유랑하면서 인생과 시를 배웠다.

그가 우리의 추억 속에 남겨 놓고 간 그 귀중한 것들은 그렇게 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 와서는, 풍파는 잠을 잤고 다들 양같이 유순하고 호수같이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넋 속에는 남 모르는 깊은 격동이 있었다. 호수같이 잔잔한 해면 밑 깊은 데는 아무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해류의 흐름이 있듯이!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 사이에 말 없는 사람으로 통했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를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 말 없는 동주와 사귀고 싶어 했다. 그의 눈은 언제나 순수(純粹)를 찾아 하늘을 더듬었건만 그의 체온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과장 없이 고백할 수 있다. 그의 깊은 데서 풍겨 나 오던 인간적인 따뜻함을 나는 아직 아무에게서도 느껴본 일이 없다고. 그러기에 그가 차지하고 있던 나의 마음 한구석은 다른 아무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국 땅 만주에서도 신경(新京)의 거리를 헤매다가 해방의 종소리를 듣던 그 정오에 내 마음을 견딜 수 없이 쓰리게 한 것은 동주 형의 환상이었다.

동주야, 네가 살았더라면••••.

동주 형은 참으로 멋진 사내였다. 그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은 모두 자연스러웠고 서로 어울려서 동주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지성은 모던이었다. 그러나 그가 베적삼 베 고의에 고무신을 끌고 저녁 산책을 하는 것은 수수한 아저씨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촌스러우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동주 형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양복은 언제나 구김살이 없었고 머리가 형 클어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래도 다 동주다웠다. 그렇다. 동주다운 것-그것이 그리 좋았고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한국 민족의 자연스러운 풍모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아무튼 동주 형은 소위 멋을 낸다는 청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멋-그의 성품에서 풍겨 나오는 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나는 그의 멋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한국적인 향 기가 풍기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극히 멋지게 국적이었기에 그의 마음은 넓고도 넓은 한 울과 같았다.

 

그의 저항 정신은 불멸의 전형이다라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얼른 수긍하지 못한다. 그에게 와서는 모든 대립은 해소되었었다. 그의 미소에서 풍기는 따뜻함에 녹지 않을 얼음이 없었다. 그에게는 다들 골육의 형제였다. 나는 확언할 수 있다. 그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면서도 일본 사람을 생각하고는 눈물지었을 것이라고. 그는 인간성의 깊이를 파헤치고 그 비밀을 알 수 있었기에 아무도 미워할 수 없었으리라. 그는 민족의 새 아침을 바라고 그리워하는 점에서 아무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것을 그의 저항정신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동주 형은 그렇게 느낄 수 없었으리라.

나는 동주 형이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쓴다고 야단스레 설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그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면 최근작을 보여 달라곤 했다. 그러면 그는 아무 말 없이 공책이나 종이 조박지에 쓴 시들을 보여 주곤 했다. 조금도 뽐내거나 자랑하는 기색이 없어 좋았다. 그렇다고 그는 애써 겸손하지도 않았다. 다만 타고난 동주다움을 가지고 살고 생각하고 쓸 뿐이었다. 나는 그의 시를 퍽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알기 쉬워서 좋았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였다. 방학 때마다 사 가지고 돌아와서 벽장 속에 쌓아 둔 그의 장서를 나는 못내 부러워했었다. 그의 장서 중에는 문학에 관한 책도 있었지만 많은 철학 서적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한 번 나는 그와 켈케골(키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켈케골에 관한 이해가 신학생인 나보다 훨씬 깊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도 쉬지 않고 공부하고 넓게 읽는 그의 시가 어쩌면 그렇게 쉬웠느냐는 것을 그때 나는 미처 몰랐었다. 그의 시가 그렇게도 쉬웠기 때문에 나는 그의 시는 그다지 훌륭한 것이 못 되거니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것이 그렇게도 값진 것으로 우리 문학사상 찬연히 빛나는 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에 나타난 신앙적인 깊이가 별로 논의되지 않는 것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곤 했었다. 그의 시는 곧 그의 인생이었고, 그의 인생은 극히 자연스럽게 종교적이기도 했다. 그에게도 신앙의 회의기가 있었다. 연전(延專) 시대가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존재를 깊이 뒤흔드는 신앙의 회의기에도 그의 마음은 겉으로는 여전히 잔잔한 호수 같았다. 시도 억지로 익히지 않았듯이 신앙도 성급히 따서 익히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 곧 난 대로 익어가는 시요 신앙이었던 것 같다.

동주 형은 갔다. 못난 나는 지금 그의 추억을 쓴다. 그의 추억을 쓰는 것으로 나의 인생은 맑아진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깨끗했던 것이다. 필자 한국신학대 교수>

 

228~232.

 

 

윤동주 연보

 

19171230

만주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부 윤영석(尹永錫)과 모 김용(金龍)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남(호적상 생년이 1918년인 까닭은 출생 신고를 1년 늦음). 본관은 파평(坡平).

윤영석은 윤동주의 아명을 해환(海煥)이라 함. 둘째 아들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갓난아이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지어 주었다.

조부 윤하현(尹夏鉉)은 기독교 장로, 부친 윤영석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앞서 928일 고종사촌 송몽규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태어나 모두 기독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음.

 

1923

부친 윤영석은 이해 재차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91일 발생한 '관동 대지진'으로 조선인에 대한 살해 위협을 받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12월 누이동생 혜원(惠媛) 태어남. 아명은 귀녀(貴女).

 

192544

명동소학교 입학. 동급생으로 송몽규,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친구 문익환 등

 

1927

12월 동생 일주 태어남.

 

1928

명동소학교 4학년으로 서울에서 발행되던 <어린이> 잡지를 구해 탐독함.

<어린이>는 소파 방정환이 만든 잡지로 발행부수 10만부를 기록하는 등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나, 이 무렵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며 심한 고초를 겪음.

 

1929

송몽규 등을 비롯한 급우들과 함께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지 <새 명동>을 만들고 동요와 동시 등의 작품을 씀.

외삼촌 김약연(金躍淵, 1868~1942) 평양 장로교신학교 입학.

 

1930

외삼촌 김약연 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함.

 

1931320

명동소학교 졸업. 명동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대립자()의 중국인 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하여 1년간 공부함. 송몽규, 김정우도 함께 편입함.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4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 은진중학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 은진중학교에서 교내 잡지, 웅변,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 온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함. 부친은 용정에서 인쇄소 사업을 시작했으나 운영이 힘들었음.

 

19334

동생 광주(光柱) 태어남.

 

19341224

초 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을 창작.

 

193591

은진중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 문익환은 4학년으로 편입. 둘의 학년이 다른 것은 윤동주가 편입 시험에 실패했기 때문.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독서와 시작에 전력을 기울임.

10

공상<숭실활천(崇實活泉) 15호에 실림.

그외 작품 거리에서, 창공, 남쪽 하늘, 및 동시 조개껍질, 등을 씀.

11

송몽규는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아명 '송한범(宋韓範)'으로 응모한 콩트 술가락당선.

4

송몽규 낙양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

 

19363

숭실중학이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당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학. 문익환 5학년에 편입.

북간도 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1월 호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발표. 11월 호에 병아리, 12월 호에 빗자루라는 동시를 발표할 때는 동주(童舟)라는 필명 사용.

그외 동시 고향집」 「기왓장 내외」 「햇비」 「비행기, 굴뚝」 「무얼 먹 고사나(1937(카톨릭 소년3월호에 발표) 」 「참새」 「」 「편지」 「버선본」 「」 「사과』 「」 「겨울」 「호주머니, 그리고 시 비둘기 이별」 「식권」 「모란봉에서」 「황혼」 「가슴 1」 「종달새」 「산상」 「오후의 구장」 「이런 날」 「」 「가슴 2」 「꿈은 깨어지고」 「곡간」 「빨래」 「가을밤」 「아침등을 씀.

410

송몽규 고향으로 돌아오다 제남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문초를 당함.

914

송몽규 거주 제한 조건으로 풀려난 뒤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계속 일본 경찰의 주시를 받음.

 

1937

광명중학교 5학년으로 진급하며 농구 선수로 활약.

8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된 백석 시집 사슴을 구하지 못하자 필사함.

9

수학여행으로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등지를 가다. 이때 바다비로봉을 지음.

그 외 시」 「황혼이 바다가 되어」 「」 「달밤, 풍경」 「한산계」 「그 여자」 「소낙비」 「비매, 명상」 「산협의 오후, 」 「유연(1939123일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 그리고 동시 둘다」 「반다불」 「할아버지」 「만돌이」 「나무,

카톨릭 소년10월 호에 동시 거짓부리발표.

4

송몽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해 학업 재개.

 

1938217

광명학원 중학부 5년을 졸업함.

49

송몽규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연전 기숙사 3층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학교 생활을 시작.

새로운 길」 「비오는 밤」 「사랑의 전당」 「이적(異蹟)」 「아우의 인상화(1939년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 날짜 미상) 코스모스」 「슬픈 족속」 「고추밭및 동시 햇빛 바람」 「해바라기 얼굴」 「애기의 새 벽」 「귀뚜라미와 나와」 「산울림그리고 산문 달을 쏘다(19391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를 지음.

 

1939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 생활을 함. 북아현동에서 살던 때 이웃에 살던 정지용의 집을 여러 차례 방문함. 친구 라사행과 동행한 적도 있음.

문장』 『인문평론을 매달 사서 읽음.

동시 산울림소년지에 발표.

그 외 시 달같이」 「장미 병들어」 「투르게네프의 언덕」 「산골물」 「자화상(19416월 학우회지 문우에 발표) 소년등의 시를 씀,

 

1940

다시 기숙사로 돌아옴.

이해 정병욱 및 고향 후배 장덕순이 연전 문과에 입학.

12

팔복(八福)」 「위로」 「병원.

 

19415

후배 정병욱과 함께 누상동(소설가 김송 댁)에서 하숙.

9

요시찰인이던 소설가 김송에 대한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하숙집을 북아현동으로 옮김.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발표 그외 시무서운 시간」 「눈 오는 지도」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십자가」 「눈 감고 가다」 「못 자는 밤, 돌아 와 보는 밤」 「간판없는 거리」 「바람이 불어」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서시(序詩)」 「그리고 산문종시(終始).

1227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못함.

 

1942

연전 졸업 이후 한 달 정도 고향집에 머물다 부친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정함.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平沼)로 창씨. 키르케고르 탐독.

42

동경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함. 여름방학 때 마지막으로 용정 고향집에 다녀감.

방학 도중 도호쿠 제국대학 입학을 목표로 다시 도일하였으나, 101일 교토의 도시사(同志社)대학 영문과에 편입. 교토시 사쿄구 다나카 다카하라쵸 다케다아파트(京都市 左京區 田中 高原町 武田アパート)에서 하숙.

41

릿쿄대학에서 쓴 시 참회록」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및 산문 별똥 떨어진 데」 「화원에 꽃이 피다등이 마지막 작품이 됨.

41

송몽규는 성씨를 소오무라(松村)'로 창씨하고,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

 

1943710

송몽규 독립운동 혐의로 특고경찰에 붙잡혀 교토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갇힘.

714

윤동주도 귀국 직전 독립운동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됨. 이때 송몽규와 같은 하숙집에 살던 고희욱도 검거. 당숙 윤영춘이 도쿄에서 윤동주와 송몽규의 면회를 왔고, 이때 윤동주가 '고로키'란 형사와 대좌하여 우리말 작품과 일기를 일역(日譯)하는 것을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를 와 같은 장면을 목격.

126

윤동주, 송몽규, 고희욱 검찰국으로 송치.

 

1944222

윤동주와 송몽규 기소됨.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119일 석방.

331

교토 지방재판소 제2형사부에서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 형을 언도.

413

송몽규 교토 지방재판소 제2형사부에서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 형 언도.

윤동주, 송몽규 판결 확정 뒤 함께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945216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옥사함.

218

북간도의 고향집에 사망 통지 전보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후쿠오카 형무소로 향함. 이때 송몽규를 만나 일 제로부터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죽은 이유가 주사 때문이라는 증언을 듣다.

36

고향 용정 동산(東山)의 중앙교회 묘지에 묻힘.

37

송몽규 눈을 뜬 채 옥사함. 부친 송창희와 육촌 동생 송희규가 도일하여 유해를 찾아옴.

윤동주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

송몽규는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비 세움.

815

해방.

 

1946

동생 윤일주 남한으로 내려옴.

 

1947213

쉽게 씌어진 시가 당시 경향신문 주간이던 시인 정지용에 의해 그의 소개 글과 함께 경향신문에 발표됨.

216

서울 소공동 플라워 회관에서 첫 추도회를 거행.

 

19481

유고 30편과 서시정지용의 서문, 유영의 후기, 강처중의 발문으로 이뤄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에서 출간.

여동생 혜원과 남편 오형범도 월남함.

 

19552

10주기 기념으로 유고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증보판부터는 월북 인사 정지용의 서문과 좌익 인사 강처중의 발문이 제외.

 

1968112

연세대학교 구내에 동생 윤일주의 설계로 윤동주 시비를 세움.

 

1985514

윤동주 연구가로서 중국 용정의 연변대 교수로 부임하게 된 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윤동주의 묘소를 찾음. 당시 한국과 중국은 수교를 하지 않아 윤동주 가족이 방문할 수 없었으므로, 동생 윤일주 교수가 오무라 교수에게 약도를 자세히 그려 주며 형의 묘를 찾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음.

 

1990815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19929

중국 용정중학교 내에 시비 건립.

 

1995216

순절 50주년이 되던 그날 일본 도시샤대학 교정에 시비를 건립.

8

송몽규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