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농업의 상징 수원의 국립농업박물관
일찌감치 일어나 두 아해들과 3.1절을 맞아 국기를 계양하고 큰 아이가 가고 싶다고 보챈 국립농업박물관을 갔다. 사실 특별기획전시를 보려고 간 거였는데 전시를 마쳤다. 일반 관람은 이번이 두 번째로 박물관 개관(22.12.15.)을 맞춰 재작년에 찾았었다. 개관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 수원에 생긴 국립박물관이라는 기대감이 컸는지 별 감응 없이 지나고 다시 찾았다.
다시 찾은 박물관은 우리 농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체험과 전시시설을 갖춘 곳으로 가족나들이로 제격이다. 작은 식물원에서 소설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바오밥나무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고 판매는 아니지만 중부지방에서 바나나가 재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제어형 식물공장이 옥상 주차장 입구에서 들어오면 눈길을 끈다. 상성전시관에는 농업관 1,2로 나눠 정조가 주목한 수원, 그리고 그곳에서 꽃 핀 근현대 농업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쉬원 것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사실에 대한 적시가 빠졌는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현대 농업근대화의 산신 역시 수원이라는 것이다.(권업모범장, 농촌진층청 설치 등) 그리고 어릴적 추억이 깃든 달구지와 정미소의 재현도 눈길을 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미소는 일명 '방앗간'이라고 불리며 농촌마을 부의 상징, 방앗간 주인은 지역의 유지였다. 달구지는 옆동네(덕다1리) 감나무집 할아버지가 능숙하게 소에 달아 거니는 것을 자주 봤고 국민학교 통학 때 자주 태워주신 기억이 선하다.
박물관 정문을 나오면 박물관 입구 커다란 장승으로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동편으로 야외 경작체험장으로 논과 밭을 실제로 운영하고 있어 매우 이채롭다. 조선시대 군왕이 농본주의를 실현하고자 창덕궁 후원에 초가지붕의 청의정을 짓고 그 앞에 논을 만들어 친경행사를 하였는데 현대에 이르니 국민이 주권자이니 그 주권자들의 친경체험을 위한 공간이리라
정문 앞 흰색의 건물은 현대 농업정책의 산실 옛 농촌진흥청이고 그 옆 너른 호수는 정조 임금이 만든 축만제와 서둔이다. 그 곁에 정자 항미정이 있고 다시 농업박물관 뒤를 보면 이곳이 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가 잠든 여기산이다. 볕이 좋은 날씨 박물관과 주변을 돌아보는 일정으로 하면 참 좋을 거 같다. 특히 축만제 주변으로는 벗꽃이 유명하여 해마다 행사도 열고 있다.(2025. 3. 1.)
사실 국립농업박물관이 수원에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전근대 수원은 화성시, 오산시까지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수원(水原)이라는 한자 명을 보더라도 물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수원시와 화성시 등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즐비하다. 삼한시대 모수국(牟水國) '벌물'의 뜻으로 '수원'의 뜻인 '물벌'과 같다. '모수'도 물을 뜻하고 고구려의 '매홀(買忽)'도 물을 뜻하는 것처럼 고려 때 '수성(水城)', '수주(水州)'에서 현재의 수원으로 변천한 명실공히 물의 도시가 수원이다.
이런 수원이 근현대 농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조선후기 정조가 화성행행을 하며, 화산에 아버지 묘를 천봉하고, 이어 행궁과 화성을 연이어 축조하고 수원이 명실공히 대도회지로 자족적인 신도시가 되도록 당시 농업의 근간이 되는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특히 화성 서쪽에 서호인 '축만제(祝萬堤)'를 축조(1799))하고 너른 농경지인 서둔을 경영하였다. 그래서 현재도 이곳은 서둔동이다. 서쪽의 둔전이란 뜻의 서둔은 병농일치의 전근대 사회에서 국가가 영농을 장려하는 한편, 직영으로 운영한 국가의 농장이다. 축만제임을 보여주는 표석이 서호 동쪽에 위치하고 화성팔경 중 서호낙조로 유명한 항미정이 복원되어 위치한다.
이러한 역사성에 따라 서둔이 위치한 이곳을 일제가 주목한다. 통감부는 1906년 권업모범장을 수원에 세운다. 이후 권업모범장은 농업시험장(1929)으로 바뀐다. 일제가 수원을 주목한 사실을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원은 땅과 기후가 순화한데다 지질까지 매우 좋고, 조선 특유의 큰 강의 범람과 재해도 없으며, 발길 닿는 데마다 작은 하천이 있어서 관개가 편하고, 오곡이 풍성한 반도 중앙부의 대보고(大寶庫)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같은 하늘이 내려준 이로움을 가진 농민은 권업모범장 설치로 인해 얻은 새로운 지식을 응용하게 되면서 농사가 놀랄 만큼 발달한 것은 모름지기 전도(全道)에서 으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척식박람회, 기타의 유수한 공진회 품평회 등에서 수상자의 과반수를 수원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1910년 조선에 이주하여 수원에 정착한 일본 니가타현 태생의 사카이 마사노스케(酒井政之助) 증언
『수원시사』5, 「수원의 토지 소유구조와 농업경영」, 300쪽.
따라서 농업시험장은 해방 후 미군정청 중앙농사시험장(1946), 1947년 농사개량원, 1949년 농업기술원, 1957년 농사원으로 변하여 마침내 1962년 농사원, 농림부 지역사회국, 농림부 훈련원을 통합하여 농촌진흥청으로 발족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0번지로 현재는 농업과학원과 함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농생명로 300으로 이전하였다. 수도권 집중을 막고 지방의 균형발전을 도모한 정책이지만 많은 부분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권업모범장이 위치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자료는 옛 농촌진흥청(현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의 정문 옆 오솔길에 농촌진흥청이 1990년대 공사를 하면서 '권업모범장' 표석 2기(경계석, 잠업시험소 여자잠업강습소)와 혼다 코스케 권업모범장장 흉상 좌대석 1기가 발굴된 것을 보존 전시하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이 흉상 제막식이 1924년 5월 4일 이루어졌는데 여기에 을사오적이자 친일원흉의 상징 이완용이 후작의 지위로 조선총독부 아리요시 주이치 정무총감과 더불어 친일 고관들과 함께 참석한 사실이다. 뭐 씁쓸한 기록이나 그만큼 이곳을 일제가 중요시 하였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농촌진흥청에 대한 흔적은 인근 탑동과 구운동의 경계로인 수인로의 삼거리가 '농진청삼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푯말로 서있다. 과거의 농촌진흥청에 이르는 입구는 그 아래래(수인로 수원역 방향) 농어촌공사 입구와 그 바로 아래 정문이 서호천 일대에 펼쳐진 농촌진흥청 시설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정문의 수인로 좌우로 과거 농촌진흥청의 산하기관들이 즐비하였는데, 현재는 대다수 기관들이 전라도 나주로 이전하면서 곳곳이 폐허로 남아있다가 일부는 수원시 더함파크라고 해서 산하기관들이 입주 시설로 쓰이고 있고 더러는 농업박물관을 지으면서 헐리고 또 일부는 리모델링되어 중앙선거관리원회 연수원이 들어서고 옛 농업진흥청사는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청사로 쓰이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각종 공공시설이 잘 남아서 리모델링이 가능한데 중앙선관위에서 새롭게 기록원을 짓는 것을 보니 예산 남용이라 생각이 든다. 새로운 터도 아니고 번듯한 건물들이 있었는데 다 헐고 새로 짓는 것은 세금 낭비가 아니면 무엇일까 요즘 선관위가 논란인데 인사문제부터 헌법기관으로서 도덕성, 청렴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에 반하여 경기도와 서울대는 서울 농대시설을 거의 유지하며 더러 리모델링하여 각종 문화시설로 탈바꿈하여 시민들이 애용하는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경기상상마당 등) 중앙기관인 선관위의 예산 사용의 처리 군림한 권력의 오만은 아닌지 자성이 필요하다. 국민의 세금과 역사성이 있는 공간을 지키는 것은 국민보다 공복들이 더 충실해야 한다. 공무원 아닌가
옛 농촌진흥청 청사는 농업기술역사관으로 사용하다. 중부작물부 청사로 사용한다. 바람직한 예이다. 혹시나 철거 될까 걱정이었는데 참으로 다행이다. 농촌진흥청 청사는 과거의 영광이 고스란히 있어선지 본관 앞 화단에는 각종 기념식수가 위치한다. 그 중 1993년 3월 31일 김영삼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눈에 띈다. 김영삼 대통령이 친히 방문하여 심은 것으로 표석에는 '신농운동점화 대통령 김영삼'으로 씌여있다. 식수는 금송이다.
본관 뒤편으로도 길가 서쪽으로 중요한 기념비가 보이는데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녹색혁명성취'라고 쓰인 기념탑이다. 1978년에 장덕진 농수산부장관과 김인환 농촌진흥청장이 농촌진흥청이 그간에 이룬 업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보릿고개의 국가를 쌀을 아껴 기아를 면하고자 한 혼분식장려정책을 넘어 통일벼를 통한 농업혁신 바로 그것이다.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농업, 농촌마을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명과 암을 떠나서 말이다.
박물관 뒤편 서호 서쪽 구릉은 여기산이다. 이곳은 청동기 원삼국기의 대단위 생활유적(집터, 부뚜막)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한국 농업사의 큰 스승인 우장춘 박사와 농업진흥청 초대 청장 정남규 박사, 그리고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벼의 혁명 '통일벼'의 아버지 김인환 박사의 묘가 있다. 입산이 통제되는 곳이라 쉽게 찾을 수는 없는 곳이다. 여기산 등산로 초입에 우장춘 박사와 김인환 박사 묘가 있고 그 뒤로 오르면 정상부에 정남규 박사의 묘가 자리한다.
이러한 국가기관인 농촌진흥청과 함께 농업기술과 학문의 발전을 이끈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1992)이 위치하기도 하였다. 전신인 농상공학교가 1904년 서울에서 개교하여 농림학교로 분리되어 1907년 수원으로 옮겼다.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교명이 바뀌다 해방후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정식 설치되면서 바야흐로 수원 농대의 역사를 열었던 학문의 전당이다. 그러나 2003년 9월 수원의 캠퍼스를 떠나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농업대학이 가지는 위상과 의미가 퇴색하였다. 옮겨간 이후도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여 여전히 캠퍼스 맞은편 서호천 건너에 시험농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서울 농대 캠퍼스는 상당기간 방치되다. 경기도에서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경기도 상상캠퍼스'로 일부 운영하고 있고 서울대에서도 농업대학의 실질적인 공간 활용을 이어가고자 창업지원센터를 새로이 열었다.
서호에서 남북으로는 경기학연구센터에서 주관한 삼남길 제5길 중복들길이 서호천변으로 길게 조성되어 길걷기가 좋다. 서울 농대 옆 서호중학교에서 서호천으로 건너 맞은편으로 한국전쟁 당시 터키 파병 보병여단이 주둔하면서 운영하였던 고아원터를 기념하는 앙카라공원이 자그마하게 만들어져 있다. 최근 터키에서 개봉해서 화제가 된 영화 '아일라'의 주무대로 현재의 모습은 주민들과 수원시의 무관심으로 방치되는 모습이다.
이곳을 벗어나지만 수원이 농업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기관으로 지금 화성시 봉담읍 수영사거리 부근에 위치하였단 농수산대학교가 있다. 위의 여러 기관과 같이 옮겨졌지만 1997년 개교한 농업전문학교이다. 농업의 상징 수원에서 농업 관련 흔적들이 한순간에 없어졌다. 이제는 농업 수원이라는 생각을 토박이 중장년들이나 할까 대부분은 반도체 클러스터 특례시 수원으로 기억할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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