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수원 화성 홍난파 노래비

달이선생 2025. 2. 28. 14:06

한파가 몰아치고 눈보라가 일더니 눈이 많이 쌓였었는데 돌연 볕이 좋아 눈이 녹는다.(2025.2.1.) 햄버거가 먹고 싶다는 아해 둘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온화하니 모처럼 걷기 좋아 남문으로 불리는 웅장한 수원 화성 팔달문 옆 팔달산으로 올랐다. 성곽 중턱 남포루 아래에 홍난파 노래비가 보인다. 지역 출신 음악가를 기리고자 그의 탄생 70주년을 맞아 1968년 수원 시민의 날에 건립된 것이다.

당대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작곡가 홍난파, 본명 영후보다 난파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특히 그가 작곡한 동요 '고향의 봄'은 역작 중에 역작이다. 이원수가 작사(1926년 동시 발표)한 노랫말이 지금 세대는 아니지만 일제시대와 2000년대 이전 여느 농촌마을에서 볼 수 있는 풍광에 애련한 음율은 나라 잃은 백성들을 달래주고 고향을 떠난 이들의 시름을 달래준 곡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는 현재의 화성시 남양지역이 수원군에 편제되었으나 그곳은 엄연히 전통적으로 독립적인 행정구역이었다. 바로 남양이다. 남양은 화성에 속하기 오래전부터 대중교역로로써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였고 구한말 청군이 들어와 대원군을 납치했고 그 청군 갑오년 일제에 의해 격파되었던 역사가 면면히 흐르는 곳이다.

그 남양의 명문가 남양홍씨(토홍) 홍난파다.

3.1 운동의 고장에서 태어났지만 3.1 운동에 참가하지 못했다. 동경예술대학(우에노음악학교)에서 유학중이었기 때문이다.(1918.4.6~1919.6.9) 그리고 동경유학생들이 힘을 합친 2.8 독립선언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 예술잡지 삼광’(三光)을 창간(1919.2.10.)에 열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선은 깨는 때올시다.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때올시다. 할 때올시다. 남과 같이 남보다 더 낫게 할 것이올시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부자유에서 자유로 나가야 합니다. 퇴폐(頹敗)한 구습(舊習)과 고루한 사상을 타파하고, 새 정신 새 사상 훌륭한 욕망 위대한 야심을 집어넣어야 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력을 건전하고 충실하게 양성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 악우회(樂友會)의 출생된 동기(動機)이며, 삼광(三光)을 우리 손으로 쓰게 된 까닭이라 합니다…… <중략> …… 비오니, 우리 2천만의 형제여, 같이 힘쓰십시다."

삼광 창간사 중…(홍난파 지음) 출처 : 홍난파에 대한 오해와 진실(월간 리뷰-아래 링크 참조)

https://ireview.kr/15249

 

홍난파에 대한 오해와 진실(1) - 월간 리뷰

금년은 서양음악의 선구자 음악가 홍난파가 탄생 125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사회에서 홍난파만큼 민족음악가 또는 친일음악가의 논쟁이 그치지 않는 인물도 그리 흔하지 않다. 음악가 홍난파

ireview.kr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홍난파는 친일부역자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어려운 환경에 친일부역을 선택하였다. 가난한 식민지 조선에서 서양 음악을 공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도 유학이 쉽지 않은데 당시 유학을 하면서 겪었을 어려움을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이러한 홍난파를 후원한 사람 중에 재밌는 것은 친일파지만 이상한 친일파로 여겨지는 윤치호다. 윤치호는 선택적 친일을 한 인물이다. 대세적 흐름에서 일제를 무시할 수 없을 바에 편승하자는 주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일제에 눈치를 보지 않고 명망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홍난파를 평했는데

"공부하라고 돈을 보내줬더니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으면서, 돈을 더 보내주지 않는다고 나를 욕하는 천하의 개쌍놈"

이라고 한 것이다. 표현이 다소 거칠었지만 홍난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여간 유학길에서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도산 선생의 인품이야 다 아는 사실이고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실제 보지 못한 나도 흠모하는 분이니 조선의 청년인 홍난파가 그에게 닿는 것은 큰일이 아니다. 다만 그가 귀국하고 1937년 흥사단의 자매 단체인 수양 동우회 사건을 일제가 조작하면서 홍난파를 잡아 들였다. 이때도 그의 후원자였던 윤치호의 행적이 재밌는데 그가 동우회 사람들을 신원보증하면서 변호하였단 사실이다.

몸이 쇠약해져 죽을지 몰라 풀어줬던 안창호 선생이 피체되는 등 홍난파도 종로서에 검거되어 무려 72일의 옥고를 치룬다. 일제시대 감옥 수감은 좋아야 반병신, 보통은 죽음에 이르는 고행이었는데 홍난파도 이러한 고초를 겪었다.

결국 홍난파는 살기 위해 일제를 찬양하기에 이른다.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라는 일제 칭송 작곡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고 '사상 전향의 관한 논문',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글을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문제는 친일전향이라는데 있었다.

결국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수감에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이 겹쳐서 1941년 8월 30일 끝내 눈을 감는다.

어쩌면 그가 보인 행동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지옥 같은 감옥을 나올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하랴 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일제가 무도하게 그를 잡아들였고 그를 회유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독한 친일파가 되어 해방 후 반민특위에 서는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참으로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원 화성 성곽을 다녀가면서 무심결에 보았을 '홍난파 노래비', 3.1절을 맞아 그 노래비와 홍난파 개인의 불행을 이야기한다.

어쨌든 홍난파 친일했다.

3.1절 국기계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