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연천 신라 경순왕릉과 고려 종묘 숭의전

달이선생 2025. 2. 28. 11:39

한반도 중부에서 중요한 강은 한강이지만 그 한강 못지 않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강이 있는데 바로 한탄강이다. 한반도 중부이자 경기도 북부의 젖줄인 한탄강은 너른 화성암 현무암 퇴적대지를 관통하는 강으로 예전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맷돌을 최고급으로 쳤다. 이렇듯 지질적인 특성은 물론, 고고학적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주먹도끼(아슐리안 형, 1978년 미군 그렉 보웬)가 발견된 역사적 현장이다.

연천은 이 한탄강이 흐른다. 강원도 평강군 지금의 휴전선 너머에서 발원하여 철원을 지나 도감포 합수머리에 임진강과 만나 조강(한강하구)에 이르러 서해와 만난다. 지리적으로 철원과 개성이 가까워 지금은 휴전선 부근의 벽지, 오지로 생각되지만 전쟁으로 막히기 전까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궁예의 후고구려인 마진, 태봉 왕국의 수도가 철원이고 개성의 지척이라 신라를 바치고 고려에 상수리, 사심관 등으로 붙들려 있던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릉이 한탄강 고랑포리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려의 사우인 종묘라고 할 수 있는 숭의전이 한탄강변에 자리잡고 있다.(2016.5.6.)

2024년 12월 3일 22시 23분 윤석렬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이다. 정국 주도권이 야당에 의해 침해되고 특히 역대 행정부와 대립각이 가장 극렬하여 많은 법률거부권과 공직자 탄핵, 급기야 새 예산안의 대거 삭감 후 야당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선포된 친위쿠데타였다. 문제는 비상계엄 요건이 맞냐는 것인데 우리 헌법상 국회를 무력화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계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87년 헌법개정에서 삼권분립을 철저하게 유지시키는 것으로 대통령 계엄에 대한 제약을 두면서 국회해산권을 없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련의 행위는 내란에 해당하는 위헌에 따른 탄행심판이 진행중이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계엄사태는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5공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자행되었다. 이는 권력유지와 공고화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왕조시대 친위쿠데타는 역모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자행되었다. 그나마 그 시대를 변호하는 것은 헌법이 없었고 인권이 없었기에 최소한 왕권이 민심과 민생을 좀 더 가깝다라는 의미가 있을 수는 있다.

2024년 12월 3일 22시 23분 윤석렬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이다. 정국 주도권이 야당에 의해 침해되고 특히 역대 행정부와 대립각이 가장 극렬하여 많은 법률거부권과 공직자 탄핵, 급기야 새 예산안의 대거 삭감 후 야당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선포된 친위쿠데타였다. 문제는 비상계엄 요건이 맞냐는 것인데 우리 헌법상 국회를 무력화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계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87년 헌법개정에서 삼권분립을 철저하게 유지시키는 것으로 대통령 계엄에 대한 제약을 두면서 국회해산권을 없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련의 행위는 내란에 해당하는 위헌에 따른 탄행심판이 진행중이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계엄사태는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5공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자행되었다. 이는 권력유지와 공고화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왕조시대 친위쿠데타는 역모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자행되었다. 그나마 그 시대를 변호하는 것은 헌법이 없었고 인권이 없었기에 최소한 왕권이 민심과 민생을 좀 더 가깝다라는 의미가 있을 수는 있다.

어느 시대나 급격한 정국의 변동과 정권에 변환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당위성, 즉 명분이다.

 

「공자가어」「예운」편에는

대도大道가 행하여 질 때에는 사람들이 천하를 공公으로 삼지만 (大道之行, 天下爲公)

대도가 은폐되게 되면 사람들이 천하를 사가私家로 삼는다

(大道旣隱, 天下爲家)

이러한 천하위가의 세상은

"세상사람들이 각기 지 애비에미만 애비에미로 여기고,

지 자식만 자식으로 여긴다.

재물이란 재물은 모두 자기 한 몸만을 위해서 저축하고,

힘든 일은 자기가 하지 않고 남에게 넘겨버린다.

(各親其親, 各子其子, 貨則爲己, 力則爲人.)

대인(大人=사회의 지도자)이라는 사람들이

대대로 녹을 후하게 타먹는 것을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성곽만 높이 쌓고 도랑만 깊게 하는짓만 일삼아 쓸데없는 일만 버린다.

(大人世及以爲常, 城郭溝池爲固)

따라서

합리적인 예禮에 근본하지 아니 하는 자가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회를 "앙殃"이라고 불렀다.

(如有不由禮而在位者, 則以爲殃).

"재앙의 사회" 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적인 가치를 실현하며 서로 돕고 서로 나누며

서로 인정하고 서로 감시하지 않으며,

균등한 기회를 향유하는"대동사회大同社會"의 반대되는 개념이 "재앙사회" 이다.

도올, 2011,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15~16쪽

 

명분을 잃은 명분 없는 권력의 반동은 재앙을 초래한다. 따라서 재앙의 사회를 끝내는 것을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령(政令)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이를 면하려고만 하여 이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선행에 이르는 마음인 이른바 격심(格心)을 갖게될 것이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논어 위정 제3장(신동준, 2015, 인으로 세상을 경영하라, 미다스북스)

 

궁예의 태봉을 고려로 왕건의 고려를 조선으로 역성혁명을 통한 왕조교체는 쿠데타였고 왕조가 진행되는 동안 권력자의 교체에 있어서 왕권이 이를 이용한 것이 친위쿠데타이다. 쉽게 생각해서 왕조 시대 임금에 의해 자행된 역모사건들이 대부분 친위쿠데타이고 우리가 잘 아는 숙종의 환국정치 등도 대표적인 친위쿠데타이다. 조선의 태조 이래 자행된 개성 왕씨에 대한 축출도 이에 해당한다.

왕조 국가의 전통으로 비록 멸망시킨 전 왕조이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 중요한 예이기에 조선은 건국 초기 공양왕의 동생 왕우를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하지만 1차 왕자의 난 당시 그의 딸이 무안대군 이방번의 부인이었기에 연좌되어 아들 왕조, 왕관이 죽임을 당하면서 후사가 끊겼고 이를 세종이 다시 후사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바로 문종이 이를 왕미의 아들 왕순례를 찾아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숭의전감 왕순례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김승경(金升卿)이 아뢰기를,
"문종(文宗) 때에 왕씨(王氏)의 후손(後孫)을 수소문하여 공주(公州)에서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노비(奴婢) 30명을 하사(下賜)하였는데, 그 후 지난 무술년056) 에 왕순례가 왕휴(王休)의 후실(後室) 자손이라 하고, 이영상(李永常)의 노비를 얻기 위하여 상언(上言)하였는데, 이영상은 곧 왕휴의 외손(外孫)이고 왕순례는 곧 왕휴의 손자입니다. 그 때에 결정하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또 상언하여 본부(本府)에 이첩되었습니다. 신(臣)이 참고하니, 왕휴의 초취(初娶)는 권씨(權氏)로서 이영상의 어미를 낳았고, 또 오씨(吳氏)에게 장가들어 왕순례의 아비인 왕미(王美)를 낳았습니다. 오씨의 족파(族派)는 처음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전일에 장례원(掌隷院)에서 이영상과 왕순례의 첩자(妾子)를 취조하여 계본(啓本)을 작성하였고, 그 뒤에 이균(李鈞)이 사평(司評)으로 있을 때에 왕순례의 첩자(妾子)의 초사(招辭)와 계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왕순례의 초사는 찢어져 파손되었고 계본은 아직 있습니다. 정원(政院)의 관리(官吏)에게 물으면 대답하기를, ‘왕순례가 첩자임은 초사에 명백합니다.’ 하고, 지금 왕순례는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모두 두 처(妻)를 거느렸는데, 나도 왕휴의 후실(後室)의 손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순례의 첩(妾)의 손자라는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예조(禮曹)나 《실록(實錄)》을 참고하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호적(戶籍)을 참고하기 위하여 살던 고향의 옛 늙은이에게 물었으나 1백 년 이상의 일이어서 모두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의 일은 자세히 알기가 어려우나 왕순례 집안은 아마 양반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왕순례의 송사(訟事)는 신이 승지(承旨)와 참찬(參贊)으로 있을 때에 보았는데, 조종(祖宗)께서 선대(先代)의 후손을 찾는 목적은 후사(後嗣)를 계승시키고자 함이었지 애당초 적(嫡)과 첩(妾)을 헤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의 처치에 대해서는 주상(主上)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첩을 가리지 말고 조종조(祖宗朝)의 공사(公事)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御經筵。 講訖, 大司憲金升卿啓曰: "文宗朝, 求王氏後, 得王循禮於公州, 賜奴婢三十口。 其後去戊戌年, 循禮稱王休後室子孫, 謀得李永常奴婢上言, 永常乃王休外孫, 而循禮卽王休孫也。 其時未決, 今又上言, 移於本府。 臣參考王休初娶權氏, 生永常母。 又娶吳氏, 生循禮父王美。 吳氏族派, 初未詳知, 前日掌隷院取招永常及循禮妾子, 而寫啓本, 其後李鈞爲司評, 受循禮妾子招辭及啓本。 今則循禮招辭裂破, 而啓本則尙在。 刑問院吏, 則答曰: ‘循禮妾子招辭明白。’ 今循禮則曰: ‘祖宗朝皆畜二妻, 吾亦王休後室孫也。’ 然其循禮之妾孫眞僞, 考於禮曹與《實錄》, 而不得。 欲考其戶籍, 而問於所居鄕故老, 則百年以上事, 皆不知之。 喪亂之餘事, 難詳知, 循禮之族, 則疑非兩班也。" 上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循禮訟事, 臣爲承旨及參贊時見之, 祖宗求先代後者, 爲其繼嗣也, 初不計嫡妾也。 今之處置, 在於上裁。" 上曰: "勿分嫡妾, 依祖宗朝公事施行。")
 
성종실록137권, 성종 13년 1월 18일 정해 2번째기사 1482년(자료열람 | 조선왕조실록)
 

실록에 따라 개성왕씨의 후손으로 인정받아 숭의전의 처음 제향을 담당하는 자는 공주의 왕순례이고 그는 끊어진 왕씨에 대한 제향을 잇는 후손이지 적첩의 판단이 필요가 없다고 한 것에서 문종 대 고려왕실에 대한 보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특히나 왕순례가 왕미의 아들로 그가 적자인지 첩의 자손인지도 중요하지 않으며 더욱이 왕조가 망하고 최소 반가의 신분 조차 유지하지 못하다 이곳 숭의전으로 오게 되어 숭의전사에 임명되어 제사를 받들 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왕순례의 원래 이름은 왕우지(王牛知)로 고려 현종의 후손인 왕휴(王休)의 손자이고, 왕미(王美)의 아들이다.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최초 거주지는 충청도 공주목이고. 친모는 1463년(세조 9)에 상을 당해 기년복을 입었으며 또 양모가 따로 있었다. 1467년(세조 13) 행 숭의전사(行崇義殿使)에 임명된다. 1485년(성종 16) 왕순례가 죽자 종2품 실직의 예에 맞춰 부의를 내렸다.

이후 왕순례를 이어 서얼 왕천계(王千繼)가 그리고 손자 왕적이 잇고 후사가 끊긴다. 따라서 1540년(중종35) 왕적이 죽자 왕씨 중에서 숭의전감을 다시 뽑았다. 특히 숭의전감은 문관직을 겸하여 특별히 신분적 문제가 없고 전력인 왕순례가가 손이 적어 아들이 있고 연천과 가까운 한양 거주자일 것을 조건으로 예조에서 봉사자를 찾았다. 이때 모두 다섯명이 거론 되는데

갑사(甲士) 왕순(王順), 정로위(定虜衛) 왕희(王希), 교생(校生) 왕징(王澄), 한량(閑良) 왕인위(王仁偉), (幼學) 왕긍중(王兢中)이다. 이중 정로위 왕희를 낙점하는데 그는 충청도 신창현에 거주하면서 유향소에 소속된 선비집안이었고 아들 5형제를 둔 사람이기에 한양에 거주하지 않았으나 숭의점감이 되어 고려조 봉사자가 되었다. 연천의 왕씨들이 그의 후손이다. 왕순례의 예에서 보듯 현재 개성왕씨는 왕순례의 아비 왕미를 중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쿠데타와는 무관하다. 후삼국의 격돌에서 고려와 백제의 권력자들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이 교체되는 등 혼란이 있었지만 본인은 927년 백제 견훤에 의해 옹립된 군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삼국 항쟁 속에서 더이상 백성의 피를 보지 않도록 신라 왕권을 고려 왕건에 평화적으로 바친 인물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가치에 손을 들어줬던 인물이다.

신라 왕으로는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조성된 것으로 조성 주체도 고려이고 경순왕이 훙하자 이를 경주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던 고려 왕조의 조치라고 생각된다. 전하는 것은 경주 사심관이었던 경순왕의 장지를 경주로 하려고 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시신이 경주에 맞게 될 경우 초래될 정치적 혼란이 더욱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렇게 경기도 연천에 묻힌 왕은 오랫동안 잊혀지다가 영조 23년(1747) 다시 경주김씨가 득세(계비 정순왕후 등)하면서 다시금 재정비가 이루어지고 왕릉의 격을 세우도록 조처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등 부침을 겪다 지금에 이른다.

무덤의 내부 양식은 고려이고 전체적인 묘제석물 등을 갖춤은 영조 때 사대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릉 정면으로 경순왕릉임을 알려주는 비문에는

 

앞면에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 쓰고

뒷면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송태평흥국) 무인년 고려 경
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고부(고랑포)
남쪽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丁卯: 1747)에 다시 세웠다.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 왕신라제오십육왕후당천성이년무자대경애왕)
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 (이립청태을미손국우고려송태평흥국무인려경)
宗三年四月四日薨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 (종삼년사월사일훙시경순이왕례장우장단고부)
南八里癸坐之原 (남팔리계좌지원)
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 月 日改立 (지행순덕모의열성상이십삼년정묘 월 일개립)

 

영조 대 경순왕릉을 찾고 비를 다시 세운 것으로 비에 쓰인 시기로 후당 천성 2년 927년은 무자(戊子)년이 아니라 정해(丁亥)년의 오기이고 마지막 행의 二十三의 三자는 탁본에서는 五자처럼 보이지만, 약간 흘려쓴 三자를 그대로 새겨서 보이는 착시로 1747년은 영조 23년 정묘년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행순덕영모의열>이라는 존호가 영조의 존호로 『영조실록』16년 윤6월 8일조에 좌의정 김재로, 우의정 송인명 등을 인솔하고 빈청(賓廳)에 모여 앉아서 존호(尊號)를 의논하여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경순왕릉의 능표는 그로부터 7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송태평흥국) 무인년 고려 경
종 3년(戊寅. 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고부(고랑포)
남쪽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丁卯: 1747)에 다시 세웠다.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 왕신라제오십육왕후당천성이년무자대경애왕)
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 (이립청태을미손국우고려송태평흥국무인려경)
宗三年四月四日薨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 (종삼년사월사일훙시경순이왕례장우장단고부)
南八里癸坐之原 (남팔리계좌지원)
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 月 日改立 (지행순덕모의열성상이십삼년정묘 월 일개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