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행록
을사년 2월 9일부터 12일까지 일본 큐슈를 다녀왔다. 큐슈는 이번까지 두 번째로 첫 번째 일본 큐슈행은 2014년 후쿠오카와 큐슈 서부 사세보 지역이었다. 이번에는 큐슈 동부 지역으로 후쿠오카를 들어가서 구마모토와 오이타, 미야자키현에 걸쳐있는 구주산국립공원을 갔다. 둘째 날은 오이타현의 유휴인과 벳부시를 탐방하고 셋째 날은 분고타카다시를 거쳐 후쿠오카현 키타큐슈시 탐방하고 마지막날 후쿠오카시를 둘러보는 일정을 하였다.
이번 길은 창원의 부모님과 처남, 아내와 두 아해가 함께한 첫 해외 나들이다. 가족여행이라서 역사탐방이 주가 되지 못하였다. 아쉬운 것은 다음으로 미룬다.
후쿠오카현 키타큐슈시(모지코항, 고쿠라성), 후쿠오카시(캐널시키 하카타, 라라포트), 다자이후시(다자이후텐만구)
큐슈행록(九州行錄)이라는 제목은 앞서서 조선의 여러 기행문을 쓴 선례를 따랐다. 다만 박지원의 열하일기보다는 낯선 곳에 정보도 없이 다녔던 기록이라 정약전의 표해시말이나 표해록, 이지항의 표주록과 같은 의미의 기록으로 삼았다.
3박 4일의 일정이나 대체적으로 큐슈의 자연경관을 돌아본 일정과 큐슈의 온천에서 휴양, 그리고 후쿠오카에서의 답사가 큰 줄거리다.
큐슈를 오면서 몰랐던 대자연에 눈이 트이고 기대했던 역사 탐방지는 후쿠오카 다자이후이다. 그러나 가족여행으로 어른들과 동행하고 나같은 역사쟁이가 아닌 이상 이러한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었다. 아주 조금만 채웠던 일정이다. 또 다시 온다면 일본 교두보 다자이후 역사의 유래가 되는 정청과 외부세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근 흔적이 되었던 미즈키 유적과 오노죠를 꼭 들리고 싶다. 모두가 한반도 도래인 즉 백제도래인과 관련된 곳이다. 일본을 열었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그 역시 백제계 유민 혹은 부여풍, 즉 풍왕으로 알려지는 듯 미스테리한 인물인데 그가 덴노와 함께 물리친 가문 역시 신라사람 소가씨였다. 이렇듯 이곳은 우리의 과거가 있는 곳이다.
미즈키 유적은 664년 일본의 왜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병을 이끌고 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전멸한 백강구 전투 이후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규모로 방어시설을 축조한 것으로 우리 백제유민들이 동원되었다. 또한 오노죠는 성으로 이곳 다자이후를 방어하는 산성으로 백제산성을 모방하여 축조된 관방유적이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이후 도래인들이 다자이후에 들어와 세계를 이룬 흔적이다. 이후 산성의 흔적과 역사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산성은 한민족 고유의 유산이니까 도래인 후손인 그들은 더 이상 한반도를 따르지 않는다. 일본 고유성을 모색하는데 바로 헤이안시대이고 국풍문화가 그것이다. 우리의 과거이자 우리의 모습이었던 그들이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큐슈행록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일정... 그 일정을 따라가 본다.
모지항은 메이지 22년(1889) 개항 이래 중국과의 정기항로를 개설하고 큐슈의 관문 역할을 한 근대 개항장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풍경은 우리나라 제물포, 군산, 목포와 많이 닮아 있다. 세관이며 상선 등 다양한 근대 건축물 등은 우리나라 개항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이렇게 보건데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경영은 진심이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진심은 일본이 우리를 완전한 복속국을 만들고자 열심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국의 중요 기관 건물과 식민지 조선의 건물이 전혀 차이가 없다. 이를 반증한다고 본다. 특히 조선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이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로 폭파하였지만 당대 건축물로 띵작으로 불렸던 건물이다. 아마도 현존했다면 일본 관광객이 식민지 추억을 떠나 건축양식과 위용으로 가장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나만의 추론이 아니고 총독부를 철거할 때 국내외 전문과 일반인들의 평가였었다. 서울에서 정말 잘 지은 건축물었다.
모지항은 부산 영도다리와 마찬가지로 도개식 가동교가 있다. 이 하네하시는 건국절을 맞아 많은 인파가 몰려 정기적으로 다리가 연결되는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건너고 있다.
키타큐슈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고쿠라성으로 간다. 고쿠라성은 평지성으로 현존하는 천수각은 일본성 6위에 해당하는 위용을 자랑한다. 평지에 축조하다보니 높은 기단 위에 건축한 다른 천수각들과 달리 높은 위용치고는 작아보인다. 성내 천수각 말고는 특기할 건축물은 없다. 일본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여느 일본 유적처럼 벗꽃 피는 풍경이 절경으로 유명하다.
1602년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7년동안 고쿠라성을 쌓았다. 인근의 구마모토성 등과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이후 축성된 것이다. 1632년에는 호소카와가문이 구마모토로 전봉되고, 하리마국 아카시로부터 호소카와가문과는 사돈 관계에 있는 보다이 다이묘의 오가사와라 타다자네가 규슈 여러 다이묘를 감시하라는 에도 막부의 특명을 받고 고쿠라성으로 옮겨왔다.
만화 조각상처럼 성내에는 미나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동상이 있다. 검을 들고 서로를 응시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최고 검객 무사시에게 코지로의 간류지마 결투를 묘사한 것으로 코지로를 지치게 하여 무사시가 이겼다는 이야기다. 무사시는 고쿠로번의 사무라이다. 날렵하게 묘사된 동상과 달리 무사시의 모습은 삼국지 장비와 닮았다. 지나치게 미화된 측면이 있는 인물이고 코지로는 실존여부도 불투명한 신화적 인물들이다.
고쿠라성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일본 육군 제12사단의 사령부였다는 것이다. 표지석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사단은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전쟁을 수행하고자 창설한 사단으로 러일전쟁 당시 한반도로 출병하여 전황에 따라 북진하여 여순공방전에 참가하여 만세작전까지 수행한 대표적인 침략군이다.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창덕군 후원에 주둔하였다. 이렇듯 일본 곳곳에는 모지항처럼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이 번영한 다양한 문화적 자취가 도처에 남아도 있지만 그 영광에는 항상 전쟁과 침략에 따른 암흑의 역사 또한 같이 있다. 12사단의 무용은 결국 러시아를 제압한 일제가 한반도 종주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을사늑약 이후 한반도는 경술년 병탈되어 국치를 입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우리의 조선, 군왕 고종은 무엇을 했나? 을사오적이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는 을사오적이 아니라 고종을 포함한 을사육적이 되어야 한다. 보호국화를 명분으로 일제가 제시한 은사금 중 반 이상이 고종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그 일부가 오적들이 나눠 받았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관련 사무비 6만 2천엔 중 2만엔 고종 수령. 4만 1천엔 오적들이 나눠 받음. 일본외무성 기밀 119호)이러한 사실은 이미 다양한 자료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린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을 미화하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우리 군인을 죽이라고 청군을 끌어들이고 1884년 또다시 청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척살하고 더 나아가 1894년 동학농민군을 청군과 일제로 하여금 전멸시킨 혼군 고종, 그 곁에는 중전 민씨와 척족이 있었다.
후쿠오카 중심부 하카타는 상업 중심지다. 많은 인파가 거닐고 밤에도 개널시티에서는 유명한 분수쇼가 펼쳐진다. 후쿠오카 공항 근처 라라포트는 신세계 대형쇼핑몰과 같은 곳으로 거대한 건담이 정각에 맞춰 깨어나는 볼거리가 유명한 곳이다.
사실 다자이후에 대한 생각이 이번 여행 내내 있었다. 과거 영광을 추억하며 우리 한반도의 빛이 왜에 전해졌다는 국뽕에 대한 환상이 아니다. 우리와 관련 있는 곳이고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인 점에서 그랬다.
다자이후시는 후쿠오카현의 시로 옛 다자이후에서 유래하였다. 다자이후는 대재부라는 한자를 쓰는 일본 왜의 중요 지방 거점 기관으로 한반도와 중국과의 교류를 대행하는 기관이다. 이는 혼슈 내륙 깊숙히 위치한 수도인 오사카 일대를 보완하는 조처였다. 특히 이 다자이후가 중요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리 한반도 도래인의 과거가 함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 멸망의 그날 왜 대군이 원병으로 참가하여 군산 앞바다 백강구에서 패패하고 많은 수의 백제 유민이 이들 왜 수군과 돌아온 곳이 다자이후였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로 다이카 개신을 통해 왜에서 일본을 열었떤 실권자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 鎌足, 614~669)가 백제인 혹은 부여풍으로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곳곳에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대비한 미즈노 유적 등이 만들어졌다. 다행히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전쟁을 끝으로 번영하면서 관계가 좋아져 견당, 신라사를 파견하는 등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물론 발해도 이 시기 매우 밀접했고 일본은 그들을 고구려, 즉 고려로 대우했다. 신라의 북방이 막히자 반대급부로 해상교역이 발달했는데 산라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당 여가저기 해안지방우로 신라인들이 진출하고 신라방 등이 조성되었다.
한편으론 신라와 당의 혼란을 틈타 신라구(新羅寇, 한구, 신라해적)가 일어나 노략을 일삼았다. 일종의 해적으로 그 세는 여말선초 왜구와 같이 대단하였다. 고려 초까지 활발했으며 한때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들을 잠재워 신라 당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도 하며 평화와 번영도 있었다. 일본도 813년 나가사키현 고토시 오지카시마에 신라구가 난입한 이래 866년 대마도 침공계획과 급기야 869년에는 이곳 다자이후가 약탈 당했다. 이러한 신라구는 큐슈의 호족과 연결되어 후일 왜구 형성과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대보름 우리는 본격적인 농사를 앞두고 오는 비를 복비라고 하는데 다자이후에 복비가 내린다. 세차게 내리지 않고 살포시 온다. 다자이후 정청은 그저 차안에서 여기군 하고 지나치고 다자이후 텐만구 즉 천만궁 신사를 찾았다. 학문의 신으로 추앙된 헤이안시대 대표적인 문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를 모신 곳이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국조를 포함한 위인들을 신격화하는 전통이 있고 이를 신사에 모신다. 우리가 유교에 따라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과는 다른 일본 정토 신앙인 신토를 바탕으로 하는 차이가 있다.
재밌는 사실은 헤이안시대부터 본격적인 일본이 국풍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종의 쇄국이 시작되는데 그 시초가 바로 당대 견당사를 중지시킨 미치자네였다. 당대 견당사, 견신라사는 왜나라 일본이 고대 정권을 일신하고 일본 문화를 진작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시대 통신사 및 감합무역과 같은 것이다. 그가 재상인 우대신으로 있다가 이곳에 유배되어 만년을 보내고 성역화 된 곳이다. 무가의 나라 사무라이를 추앙하는 일본에 문사, 문신을 모신 공간이 이채롭다. 때문에 곳곳에 무가적 특징보다는 문인적 소탈함과 오래된 고목 등 살기가 풍기지 않는다. 더욱이 신사에 들어서는 연못은 동양의 전통사상인 천원지방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꾸미고 있어 일본에서 보기 힘든 연못이다.
학문의 신답게 일본의 교육열과 고시에 영험하다면 전국각지에서 찾는다. 이날도 복비가 내리지만 엄청난 인파가 함께한다. 특히 미치자네의 시신을 운구하던 소가 머물자 자리하게 된 신사였던만큼 소상이 곳곳에 있는데 이를 쓰다듬으면 복이 깃든다는 생각에 반질반질하다. 사실 소보다 1천 5백년이 넘었다고 보여지는 고목이 눈에 더 들어온다. 목례로 가볍게 예를 표한다. 이곳의 가장 어른 아닌가. 이 고목 말고도 이곳이 정말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라고 알 수 있는 수령이 올라가는 고목이 즐비하다. 부부나무로 알려진 연리지가 보이는데 실은 세그루였지만 한그루가 없어지면서 된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보토 회나무는 삼조, 삼정승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니라라 관아와 향교에도 이러한 유형이 보인다. 여느 곳이 아니고 학문의 신을 모신 곳이기에 이 짐작이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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