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시흥시 안산군 송덕비 등

달이선생 2019. 4. 11. 10:30

  시흥시 안산군 송덕비

시흥시청 송덕비군, 남계술 선정비


  역사가 오래된 고장에는 도처에 많은 비들이 존재한다. 보통은 무덤에 쓰이는 묘비들을 많이 떠올리는데, 일반적인 비들도 많다. 이를테면 그 고을 원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세운 송덕비나 공덕비가 그러하고 또는 부호 등이 백성들을 구휼하여 보답하는 차원에서 세워진 비석도 많다. 선정비보다는 투박하지만 자선비의 내용과 그 의미는 송덕비보다도 지역적 가치가 크다. 일반적인 권력자들의 송덕비들은 정말 그 사람이 선정을 베푼 것인지 의문도 들고 실제 선정을 한 사람이라면 송덕비도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선지 몰라도 선정비의 모습은 상당히 모자라다. 볼 품 없고 크기만 컸지 잘 만들지 않았다.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그렇긴해도 시흥시청 정문 앞에 있는 안산군수 선정비 중 '군수권후용정영세불망비'는 조형적 비율과 크기 등 잘 다듬어진 것이 여는 송덕비와는 대조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권용정은 현재 시흥시 향토유적 8호인 관곡지를 보존하고 정비하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관곡지를 소유한 안동권씨 화천군파 권만형의 후손이기도 해서 그의 비석을 세운 내막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같은 족문에서 역할을 많이 했으리라 짐작된다. 군수 권용정이 힘쓴 것도 다 자신의 조상과 집안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송덕비군은 이전에 물왕동 버스정류장(산현동 방향) 한켠에 있었다. 이름도 그 위치를 따서 '물왕동 선정비군'이었다. 동서로(397번 지방도로) 공사로 인해 옮겨진 것으로 원래는 조선후기 광석장(방축두장) 입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시흥시청 입구로 옮겨져 시흥시청 선정비군으로 명명되었다.





















군수남후계술애민선정비

  안산군수를 역임한 남계술은 비교적 그의 자취가 잘 남아있다. 본래 남왕마을 우물터(현재 시흥시 목감동)에 있던 것을 개발로 현재 목감동주민센터 앞으로 옮겼다. 지난해 시흥시에서 안산군수 송덕비군을 모아 하나로 정비하는 가운데 남계술선정비도 같이 옮기려던 것을 주민들이 그대로 남기게 하였다. 주민센터를 다시 지을 계획인데, 이 때 비를 옮겨 잘 세우고자 한다는 후문이다.

  남계술의 애민선정비가 건립된 것을 추정하는 근거는 안산군수로 있을 때, 안산소학교를 세워(1899) 교육입국에 공이 있다는 것과 안산군읍지(1898) 편찬 등의 공헌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남왕마을에 선정비가 있는 것은 이러한 공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상황은 현재는 모른다.

  다만 남계술에 대한 여러 기록 중 주목되는 것은 


"공주 관찰사 이건하 씨가 군부에 한 보고에 양성 군수 남계술의 보고를 보니 이달 닷새 날 포군 육십여 명이 급히 관청에 들어와 원과 관하인들을 결박하여 때리고 군기 곧 집 문을 부수고 군기를 탈취하여 갈 제 상납 전도 도적하여 갔다고 하였다더라."-1896년 5월 21일 독립신문(서재필)

 

"안산 군수 남계술씨는 그골 포주 하는 사람들에게 찬육을 그저 들이라고 날마다 포주 주인 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악형으로 무리 하게 한다고 말이 있으니 이런 일은 내부에서 알아 볼 듣 하다더라."-1898년 4월 2일 독립신문(서재필)


  라는 기록이 확인되어 남계술이 어진 목민관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특히 양지현감 송덕비(현 양지면사무소 주차장) 중에 1902년 3월에 건립된 양지군수 남계술 애민선정비가 있는데, 남계술이 양지군수에 부임한 것이 1902년(고종 39) 3월 8일로 부임과 함께 선정비부터 세웠다는 얘기가 된다. 남계술은 1903년 2월 4일까지 임기를 했다.

*남계술 내용 참고 자료 :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고신문 검색'(https://www.kinds.or.kr/v2/news/oldNews.do)

  

 이러한 남계술의 선정비를 통해서 조선후기에서 말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쥔자들이 백성들을 짜내어 얼마나 많은 송덕비를 강제로 남설을 했는지 유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