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논산 명재 고택

달이선생 2019. 4. 9. 12:00

논산 명재 고택

2019. 4. 9.(화)

 

  한 시대를 살펴볼 때 그 시대의 인물이 시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어떻게 규정되야 하는가?

조선후기 개국 초부터 있었던 정치세력의 양상은 논산 명재 고택의 주인공이 시대를 아우를 때 첨예한 대립을 넘어 충역을

다투는 피비린내를 겪어야 했다. 그 시대가 있기까지 흐름을 '우리 궁궐 이야기'의 주인공 홍순민 교수의 페이스북 글을 통

해 살펴본다.

 

시비인가, 정사인가, 충역인가?

 

2017. 3. 12. 지금 조선정치사를 개관하는 까닭

조선왕조를 개창한 세력은 당연히 권력집단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 싸워서 결국 권력이 임금과 임금을 옹위하는 소수 인물들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을 훈구파라고 한다.

임금과 훈구파의 독단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 대두하는 집단이 생겼다.
이들을 사림파라고 한다.
(혹자는 그런 집단은 실체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사림파는 훈구파를 비판하며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사림파에 대해서 훈구파가 정치적 반격을 가하여 이들을 숙청하였다.
이것을 사화(士禍)라고 한다.

사화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사림파는 꾸준히 진출하여 드디어 중앙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이 이루어낸 정치 운영 형태가 붕당정치다.

붕당정치를 주도하던 인물들은 자신들을 군자, 자신들이 비판하며 축출의 대상으로 삼던 훈구파를 소인으로 규정하였다.
소인은 더불어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존재, 군자는 생각과 처신이 다르더라도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군자라고 인정되는 사람들끼리 학통과 지연과 혈연에 따라 집단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붕당이다.
복수의 붕당이 공존을 유지하면서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며 균형을 이룬 것이 붕당정치다.

붕당정치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의 존립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데까지 갔다.
정국은 임금의 개입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비판 견제하는 붕당의 위치가 급격하게 뒤바끼기를 거듭했다.
숙종대에서 영조 초년까지 거급된 이러한 정국의 급변을 가리켜 환국(換局)이라고 한다.
환국이 거듭되면서 붕당 사이에 극단적인 숙청과 피바람을 불러 왔다.

그러한 환국 상황에서 후궁 소생으로서 왕세제라는 불안정한 후계자 지위를 거쳐서 임금이 된 이가 영조다.
영조는 이러한 상황을 뒤집어 붕당을 부정하면서 임금이 정국을 주도하는 논리를 만들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탕평정치라 한다.

탕평정치는 그 손자 정조가 즉위하면서 더욱 정국 운영의 주도권이 임금 중심으로 집중되었다.
임금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때는 나름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정조 다음으로 순조라는 어리고 나약한 임금이 즉위하면서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그 주도권이

서울에 근거를 둔 소수 문중(門中)으로 넘어갔다.
소수 문중의 핵심 인물들은 공적인 권력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행사하였다.
이를 세도정치라 한다.

세도정치는 수구적인 행태를 보이면서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이에 대해서 이전에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던 피지배층의 일부가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민란이라 한다.
민란은 점점 증폭되어 전국적인 봉기로까지 이어졌으나 새 시대, 새 체제를 만들어 내는 혁명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일본이라는 외세의 침탈로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되돌리겠다는 임금이라는 사람도 죽어 없어지자 비로소 공화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민주공화국!
비록 망명 임시 정부이지만,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천명한 그 틀은 부정할 수 있을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현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에 그것을 잇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무엇을 다투는가?

"조선후기 숙종대 붕당 사이의 대립의 쟁점으로서 복제 논쟁같은 것은 시비是非를 따지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옳고 그름,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그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서 견해가 달라질 수 있었다.
이 차원의 논쟁은 학술적 사상적 영역에서 이루어졌고, 서로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열려 있었다.

숙종 중반부터는 서로 상대 붕당의 영수領袖나 핵심 인물의 언행言行과 저작著作을 놓고 정사正邪를 다투게 되었다.
정사―바른가 어긋나는가의 문제는 용납의 여지가 크게 줄어든다.
바른 바는 따라야 하는 것이요, 어긋난 바는 배척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사邪’라고 비판하다보면 사교邪敎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숙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붕당 사이 대립의 쟁점이 충역忠逆의 문제로 한 번 더 전환되었다.
다시 말해서 왕위 승계 문제가 노론과 소론 사이의 쟁점이 되었다.
소론은 당시 왕위 승계자였던 세자―후일의 경종을 비호하는 반면, 노론은 은연중에 세자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후일의 영조를 지지하는 형세를 연출하였다.

왕위 승계가 노론과 소론이 다투는 주제가 되었고, 각 붕당은 자신들이 지지한 인물이 왕위를 승계하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서 충과 역이 갈릴 수 있었다.
충인가 역인가를 가르는 것은 시비를 따지고 정사를 다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효과를 드러냈다.
그것은 곧 생과 사, 영화와 몰락을 극명하게 갈랐다.
공존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붕당 사이의 쟁투는 양보가 없는 극한적인 쟁투를 불러왔다."

 
  윤증은 참으로 고단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러한 윤증과 시흥과의 관계가 있을까?

  먼저 그의 집안이 우리 시흥과 관련이 깊다. 시흥의 산현동에 안산윤씨로 불린 윤민헌 가문이 윤증과 연결된다. 윤민헌은 동생 윤민일과 파주의 우계서실에서 성혼을 사사한 사림이다. 특히 윤민일은 그의 둘째딸이 이장백에게 출가하여 사위를 맞는데 그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다. 윤선거는 성혼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윤민일이 죽고 그의 무덤이 초장지에서 지금의 장곡동 선영(산77-3)으로 이장하였는데 여기 묘표를 윤선거가 짓고 그 아들 윤추가 썼다. 윤민일의 아들 윤두가 청한 것이다. 

  그리고 정파적으로는 소론의 영수로 박세채와는 동지였다. 이 둘은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마을에 20년 간을 살며, 양명학을 밝힌 정제두의 스승이다. 정제두와 친하여 그를 쫓아 처가가 있는 이웃한 지포에 살았던 박심은 윤증의 애제자로 당시의 편지를 통해 이들과 상당히 교유하고 있었다. 박심은 윤민헌의 손자인 숙종대 명재상 윤지완의 사위이다. 박문수의 종조부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선조가 된다. 서인이자 소론인 그는 아끼는 제자 정제두가 양명학을 하는데 있어서 우려를 하였지만 북인이자 남인계열의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의 경세치용을 적극 받아 들여 그의 저작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고 83세에 발문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윤증의 제자인 양득중은 윤증에게 책을 빌려 보고 감탄하여 영조에게 책의 간행을 상소하였고  영조 46년(1770년) 간행되었다. 

 

  또한 박세채의 백부가 박미로 박미는 장곡동 안골 마을에서 살았던 조선한문대가 장유의 동문수학 친구이다. 이들이 논산의 사계

김장생을 찾아 양성당에서 정철의 아들 정홍명 등과 벗하였던 서인의 거두였다. 또한 박미는 그의 아버지 박동량과 함께 군자동 군자봉 아래묘(시흥시 향토유적 12호)를 쓰고 있는데 아들 박세교가 선묘 아래서 머물 때, 박세채가 찾아와 종형 박세교에게 남긴 연성촌사라는 시가  전한다. 

  이렇듯 논산에 우거한 윤증이지만 시흥시와는 상당히 가까운 위인이다. 

  윤증은 평생을 벼슬에 나서지 않은 산림으로 스승 송시열과 갈라선 배사의 전형으로 조선시대 떠들썩 했던 노소분당의 주인공이다. 원인은 아버지이자 송시열의 친구인 윤선거의 죽음으로 그의 묘갈문을 송시열에게 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와 상당히 친한 친구였으나 윤선거는 송시열 말고도 송시열과 대립했던 남인의 윤휴와 가까웠다. 이로인해 송시열은 매우 못마땅했던 차에 윤선거의 묘갈문을 지을 때 윤선거의 허물을 고스란히 남긴다. 윤선거의 허물이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처자식이 모두 강화로 피신했는데 윤선거 혼자 탈출하여 그의 부인 공주 이씨(윤민일 외손녀)는 강화의 사대부가 부녀자들을 독려하여 순절하였고, 어린 자녀를 가노에게 맡겼다. 바로 이러한 일을 평생의 한이자 부끄러움으로 여긴 윤선거였는데, 송시열은 이를 덮어줄 의사가 없었다.

  스승 송시열의 처사에 절망한 윤증은 재차 이를 바꿔줄 것을 청하였지만 문장만 바꾸고 내용은 변화가 없었다. 바로 이것으로 시작된 서인들의 사상논쟁인 회니시비이다. 회원의 송시열과 이산의 윤증의 시비 논쟁에 서인들이 모두가 들고 일어서 편당을 이루고 결국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된다.

  어쨌든 이 일이 없어도 윤증은 아버지의 처사로 인해 윤선거와 마찬가지로 벼슬길을 절대로 나가지 않는다. 그나마 학문이 높고 그가 온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열녀라는 것이 큰 뒷배가 되었다. 윤증의 높은 덕에 감복한 숙종은 한번도 보지 못한 윤증에게 우의정을 제수하나 끝끝내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백의정승'이라고 칭송했고 그로 인해 어머니도 열녀문이 내려졌다. 현재 명재 고택 입구(교촌리)에 정려각이 그것이다.

  소론에 속하게 된 그의 집안은 큰아버지 윤순거가 고택에서 가까운 곳에 가내 종학당(병사리)을 세워 윤증을 사장에 임명하며 족친들을 교육시켜 280년간 문과 42, 무과 31, 생진사 다수를 배출하며 지역의 대성으로 자리잡았다. 때문에 이 일대 대가를 지칭할 때 송시열이 지은 회덕향안 서문에 삼대족을 일컬었는데, 송준길을 포함한 자신의 회덕송씨(은진)와 김장생, 김집의 연산김씨(광산), 윤선거, 윤증의 노성윤씨(파평)를 들었다. 그래선지 지금도 그 지역 사람들은 예학의 대가 답게 제례준칙을 잘 세운 김장생 집안이 있는 연산에 가서는 제사 자랑 말고, 회덕에 가면 집자랑 말며, 노성에서는 묘자랑 말라는 이야기 전한다. 예학을 세운 김장생 집안이니 제사는 말해 못하고, 송시열 집안이 회덕에 으리으리한 저택이 많이 있는 것과 노성 파평윤씨 선산이 잘 조성되어 종학당까지 운영하였던 명성이 이러한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다. 본관이 아닌 사는 곳을 일컬어 노성윤씨 등으로 부른 것은 사는 곳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가문을 차별화 하는 것으로 조선후기 세도가문의 대명사 안동김씨가 서울 장동에서 산다고 하여 '장동김씨'로 부르는 것과 같다. 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은 노성윤씨로 윤증은 9대 종조부이다.(부 윤기중 이웃한 병사리 출신)

 

  노성을 나와 탑정호와 백제의 명장 계백의 허묘를 모신 충장사, 백제군사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현대에 논산 사람들이 추앙하는 인물인 계백인 이유가 이채롭다. 근처에 최후의 전투가 있었던 황산벌이 있어선지 모르겠다. 아무튼 현대 논산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계백장군으로부터 이어지는 자부심을 세운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묘소와 함께 들어서 잘 만들어진 백제군사박물관은 백제의 특성을 담기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향후 논산역사박물관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논산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시립박물관으로 개편을 하여 운영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