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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권업모범장, 농촌진흥청) 1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3차례 답사) 전근대 수원은 화성시, 오산시까지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수원(水原)이라는 한자 명을 보더라도 물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수원시와 화성시 등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즐비하다. 삼한시대 모수국(牟水國) '벌물'의 뜻으로 '수원'의 뜻인 '물벌'과 같다. '모수'도 물을 뜻하고 고구려의 '매홀(買忽)'도 물을 뜻하는 것처럼 고려 때 '수성(水城)', '수주(水州)'에서 현재의 수원으로 변천한 명실공히 물의 도시가 수원이다. 이런 수원이 근현대 농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조선후기 정조가 화성행행을 하며, 화산에 아버지 묘를 천봉하고, 이어 행궁과 화성을 연이어 축조하고 수원이 명실공히 대도회지로 자족적인 신도시가 되도록..

연성촌사.. 박동량

연성촌사(蓮城村舍) 연성촌사는 조선 선조대 중신 박동량(朴東亮,1569~1635)의 손자인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남긴 시에서 시흥시 군자동 가능골과 비앞골을 이르는 말이다. 박세채는 시흥시의 가래울마을에 연고가 있는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스승으로 이 마을 동쪽으로 가깝게 가래울이 위치한다. 그리고 박세채는 당대 소론의 영수였다. 노소분당과 갈등이 첨예하였으나 그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을 사위로 맞았을 정도로 평소 당론에 엄격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노소의 균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박세채 선생이 종손이자 사촌형인 박세교(朴世橋, 1611∼1663)가 있는 가능골과 비앞골의 연성촌사를 찾아서 시를 남겼다. 박세교는 금양위(禁陽尉) 박미(朴瀰)와 정안옹주(貞安翁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