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노무라 하르베 이야기..

달이선생 2012. 2. 21. 16:45

 

 

 

  2012년 2월 11일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제씨선산 묘역, 제정구 선생 묘 앞에 엎드려 흐느끼는 노인이 있었다.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1931~ )..

 

  노무라 모토유키 할아버지는 일본인이다. 야마모토와 이나모토 상의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한 일본인을 소개했었는데 이 노무라 할아버지도 아주 특별한 일본인이다. 야마나시현 시골에 베다니하우스쳐치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목회자이지만 노무라 할아버지는 목사라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일본에서 온 희망없는 노인 노무라 하르베입니다. 할배~"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누군가 목사님하면 "난 하르베입니다. 할배"라고 한다. 하르베는 그가 할아버지를 발음하는 것이다. "한국말을 잘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씀하는 모습에서 미안함과 죄송함이 깊이 묻어난다.

   이 노무라 할아버지가 처음 한국에 인연이 된 것은 다름아니라 자신의 조국 일본의 침략에 대한 깊은 반성과 사죄를 하고자 한국을 찾게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도 제일 힘들고 어렵게 사는 곳을 찾아서 반성하고 사죄하는 의미로 사역을 하자는 생각으로 1973년 서울 청계천에 들어왔다. 그 때 일생일대의 소중한 인연.. 제정구를 만났다.

 

  "제가 한국에 와서 만난 최고의 친구는 제정구 선생님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때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통하지 않고, 서로 마음을 주고 받았을 때 진정한 교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속으로 계속 매일같이 생각하면서, 정말 1억년이 지나도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계천에 왔었을 때 제정구 선생님과 함께 한국의 미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 때 만남은 2~3년 정도의 짧은 만남었지만 제 마음 속에서는 그 만남이 잊을 수 없는 만남이었습니다."-2012. 02. 11 제정구 선생 13주기 추모사에서..

라고 회상한다. 

    제정구 선생과 만나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빈민운동에 투신한 노무라 할아버지는 '빈민의 성자'로 불리우며 우리 사회 어둔 곳에서 촛불을 밝히듯 헌신을 하였다. 

 

  어린시절 노무라 할아버지는 5살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한국사람과의 처음 인연은 교토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마을의 재일 조선인 2명이 "조센징"이라고 멸시를 받는 모습을 보고 말할 수 없는 느낌과 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 통에 교회학교에서 신앙을 가지게 됐고 수의대 재학시절 한국인 유학생 김오남(전 전남대 교수)과의 인연으로 한국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바로잡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터키 신학교와 신대원에서 공부하면서 노무라 할아버지는 미국인들로부터 "쨉스"라는 모욕을 당하고 차별을 겪으면서 불현듯 한국인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1968년 한국에 들어왔다.

  1973년 가족들과 남한 전지역을 돌아보고 도시산업선교회(UIM)의 소개로 청계천 판자촌을 찾았다. 그곳에서 노무라 할아버지는 충격을 받았다. 당시 청계천 판자촌은 한국의 급격한 경제발달 상황에서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도시에서 소외된 저임금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사람들이 하루벌어 하루살이를 하며 힘들게 살았던 우리 나라 경제성장의 빛과 그림자였다. 

  이때 노무라 할아버지는 인근에 교회가 있는데 이들을 돕지 않는 것에 분노를 느꼈고 선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리며 빈민사목을 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늘 "주님 제가 어찌해야합니까?"라고 기도하며 주님의 종으로.. 제자로 신앙의 삶을 고집하였다.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 빈민을 돕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후 호주 기독교 인사들을 만나 1974년부터 94년까지 어려운 아동에서 급식을 추진하여 이를 작은자복지선교회의 주된 사역으로 이르게 되는 결실이 되었다. 또한 청계천 철거민 중 남양만 간척지(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두레마을)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뉴질랜드 종자소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2011년 노무라 할아버지는 미국 풀러신학교에 자비를 들어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서 신학생을 상대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간증하는 기회가 있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삶은 배움의 과정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떻게 되돌려야 하는지,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이 보인 빈민에 대한 헌신을 겸허하고 겸손하게 밝혔고 청계천 가난은 일본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며 일본정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사죄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후 홍난파 작곡 봉선화를 부르자 강연에 참석했던 학생들이 따라 부르며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2012년 2월 11일 제정구기념사업회에서는 제정구 선생 13주기를 맞아 노무라 할아버지를 초청하여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의 묘소를 참배하고 유홍준 이사님(전 문화재청장, 현 명지대 교수)의 안내로 경주기행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도 노무라 할아버지는 울먹이며 일본의 잘못을 사죄하였고 제정구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을 떠올리며 함께한 많은 분들에게 눈물을 안겨주었다. 일정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온 할아버지는 위안부 평화비를 찾아 소녀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사죄하고 플룻으로 봉선화를 연주하였다. 이는 제정구 선생 추모행사에서도 했던 것으로 한국에 오면 하려고 일본에서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이 아름다운 나라를 보며 우리 일본의 침략을 생각합니다. 북조선이 내려오고 전쟁.. 특별히 우리 일본을 생각할 때 죄송합니다~"2012. 02. 11 제정구 선생 13주기 추모사에서..

 

  일본정부는 지난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 그리고 진정한 사죄가 없이 막강한 경제력으로 세계일류국가를 자부한다. 더욱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고유영토인양 떠들며 분쟁을 만드는 지금 일본인으로서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노무라 할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가 된다. 

  과거 역사를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심판으로서의 생각이 아니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현재 충실함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역사 바로세우기이다. 하지만 일본의 과거사 반성이 없는 것처럼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역시 지난 역사에서 친일, 독재라는 암울한 과거가 있지만 이를 바로잡고 있지 못한 것처럼..

  한 사람의 용기있는 행동, 따뜻한 양심에 박수를 보낸다.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제정구 선생 묘소 13주기

 

 

노무라 할아버지는 제정구 선생 묘소에서 13주기 추모사를 하고 봉선화를 연주하였다.

 

 

노무라 할아버지와 제정구 선생 부인 신명자 여사

 

 

제정구기념사업회 회원 박성호, 하태욱 선생님

 

 

2012년 제정구장학회 장학생. 노무라 할아버지와 묘소에서 단체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