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꼬방동네 허병섭 이야기

달이선생 2012. 3. 29. 14:09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 허병섭의 마지막 길은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1941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난 그는 "경상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많은 빚을 갖고 있다."고 하며 사람들이 동서로 나뉘어 감정이 상하는 모습들에 안타까움이 컸고 이를 해소하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지역을 나누며 싸우지도 않고 한데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어~" 오늘 영정 사진 속 생각에 빠진 옆모습 보다 영결식 추모안내장에 나오는 허병섭 사진을 올린다. 우리에게 기억될 사람 허병섭의 마지막 모습으로..

 

  허병섭은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을 나와 기독교 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자를 시작한 사람이다. 중년이 되어서 목사직을 내려놓고 마음은 넉넉하나 물질이 부족했던 사람들과 '월곡동 일꾼 두레'를 만들어 빈민운동의 삶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허병섭을 두고 목사님이라고 해야할지 선생님, 혹은 선배, 아저씨, 할아버지 등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애를 먹는다고.. 그래도 우리는 목사라 부른다고 김혜경(진보신당 고문)은 말한다. 허병섭은 70년대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은 한분이 아니신거 같아 공동체적 하나님, 하나님은 공동체 하나님이야"라고 조화순 목사에게 말을 했다고 하니 그의 신앙은 예수님이 12제자를 거느리고 길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과 함께했듯 그리스도를 닮으려 했고 그 삶을 따랐던 제자된 삶, 공동체적 영성을 가진 신앙인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어쨌든 허병섭은 어떻게 불리길 원했고 반겼는지는 모르지만 그 마지막 길에 허병섭을 일러 "민중의 벗"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로 "스스로 말하게 하라"를 후배들이 허병섭의 마지막 유훈으로 새긴다. (민중이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진정한 '섬김'을 실천해 온 허병섭 목사님, 과 저 낮은 곳에서 주민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변화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추모안내장) 

 

  허병섭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조화순 목사가 예전 허병섭 목사를 추억하며 말을 잇는다. 

  "허병섭 목사님은 자신이 그렇게 참담한 개인사를 사신 분인데 그 사람은 생전에 가난을 불평한 적을 한번도 못 봤다. 허병섭 목사님은 정말 가난을 사랑한 분이시다."-영결사 중에서..

 

  몸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빈민운동을 하였던 허병섭 목사는 "달동네 성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가 터를 잡고 함께했던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은 달동네라고 불리던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그 일대부터 산아래까지 하루살이로 근근히 살아가던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고 그 아래 개천변이 제정구 선생과 정일우 신부가 살던 청계천 판자촌과 중랑천 일대이다.

  이곳에서 유신이후 신앙을 매개로 한 젊은 청년들이 모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고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들어가서 함께 살며 치열하게 삶을 살았다. 허병섭, 그리고 그와 같이 걸었던 박형규, 권호경, 이해학, 이규상 목사와 제정구 손학규, 홍일점 김혜경 등 많은 사람들이 삶이 밑천이 되어 당시 빈민운동과 교육 등이 주민운동으로 발전하고 그 운동의 정신과 가치, 운동성이 이 시대를 고민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활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주민운동교육원과 주민운동 기관으로 신용협동조합, 생협, 자활, 사회적 기업 등의 활동들이 다 그 저변에는 허병섭과 걸었던 많은 이들, 선배들의 길이 있었다.

  당시 허병섭 목사는 어수룩해서 늘 처음 하는 말이 "밥 좀 있오" 였다고 김혜경은 회상한다.

  

  지금은 청계천 역시 인공조형물이 그득한 성형하천으로 복원되어 예전 그 모습들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이들 지역도 재개발 등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충신동, 창신동, 여기 미개발지 마을들은 예전처럼 가파른 언덕과 계단, 한 사람이 지나기도 어려운 좁은 골목길을 마주하고 따닥따닥 붙어있는 성냥갑을 여러겹 쌓은 듯 많은 작은 집들이 밀집되어 요즘도 보기 드문 풍경을 이룬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살았던 허병섭의 마지막 길은 그 누구 못지 않게 부자로 떠났다. 평생 가난을 사랑한 사람치곤 화려한 끝이다.

  물론 허병섭 목사의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인이 된 허병섭 목사의 마지막을 정중하고 엄숙하게 모시고 싶었던 여러 사람들의 정성이었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떠나는 허병섭 목사는 평생을 가난하게 신앙인으로 실천가로 살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부자라고..

  떠나는 길에 그 누구 못지 않은 빈소와 그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작은 몸을 누일 한평의 양지바른 땅, 그곳까지 이르르는 고급승용차.. 누가 이 사람을 가난하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민주사회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마지막 길.. 수고를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수십(장례준비)에 이르르니 허병섭은 가난하게 나서 가난하게 살다. 부자로 떠나는 구나 생각이 든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일과 사람들이 그의 넉넉한 부(富)가 아닌가..  

 

  오늘도 쓸쓸히 소리소문도 없이 삶을 마감하고 떠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평생 벗으로 함께했던 허병섭.. 그 삶을 그 자신을 알아준 많은 이들이 있기에  당신은 부자고 행복한 사람이다.

 

 

  허병섭 목사님을 잘 몰랐고 함께했던 지난 시절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슬픔과 고뇌를 느끼진 못했다. 다만 목사님을 찾아 이곳에서 흐느끼는 사람들을 보니 영정 제일 앞에 무표정 앉아있는 혈육골친들도 있지만 그네들과 달리 울먹이고 흐느끼며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많은 사람들.. 사람 허병섭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결코 가볍지도 순탄하지도 않았던 고난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복하셨겠지라는 막연함..

  그리고 목사님과 함께했다는 동지 조화순 목사님께서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서 예수를 위해 우는 자들에게 한 말씀을 하시며 "난 자식이 없어서 모르지만 요즘 사람들 자식들을 꽤나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들이 왜 미래에 대해 책임지려고 하지 않느냐 왜 광장에 나서서 행동하지 않느냐 생명살림의 길에 왜들 나서지 않고 방관을 하느냐"라고 호통을 치시는데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는듯 했다.

  허병섭을 몰랐지만 허병섭의 길이 어떤 길인지는 알 것 같았다. 평생 업으로 역사를 하자 마음 먹었던 나이고, 내가하는 역사나들이는 민중의 역사잖아.. 오늘 묵묵히 영결식 그 마지막 길을 지켰다.

 

 

 

 

추모시

               하월곡동의 달

                  -허병섭 목사님 영전에

 

                                                                      김창규

 

겨울날

 

산꼭대기 십자가도 추워서 벌벌 떨던

비탈길에 연탄재 굴릴 때 퍽 깨지며

푹석 먼지 나던 저녁이었습니다.

 

달이 따듯하게 막 더오르는 그런 시각에

목사님의 동월교회 처마 끝에 참새들이

재잘거리는 그런 수많은 날들이 찾아왔고

수정그드름 뚝 꺾어지던 밤이었습니다.

 

누군가 고문을 받다가 꼬꾸라지던

기절하여 넘어지던 밤이었을 겁니다.

 

목사님은 후배들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잡고 건네주던 포도주의 따뜻한 잔이 그립습니다.

벗들이 잡혀가고 수배당하고 할 때

동월교회의 십자가는 피를 흘리며

피를 흘리며 가난하여 다하지 못한 사랑을

눈물의 그릇에 담아 주시곤 하였지요.

성찬의 그릇에 아직 식지 않은 빵과

오래되지 않은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목사님은 노동자의 하나님을 말씀하셨지요.

 

벽돌을 쌓고 벽을 바르는 미장공이 되어서

노동자들과 나눠 피던 맛있는 담배와

목구멍을 시원하게 뚫어주던 돼지 껍데기 안주를

노동자 벗들에게 대접하시곤 하셨지요.

 

그런 목사님이 물 좋고 산 좋은 무주로 가셨다기에

구천동 골짜기 붉은 단풍지던 날 찾아갔더니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정신은 수유리 산언덕 아래

어느 가난한 단칸방아래 민주주의를 위해

눈을 반짝이던 그날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 어쩌다 말없이 한 많은 인생을

긴긴 세월 말없이 살다가 이렇게 훌쩍

그냥 말없이 떠나시다니요.

목사님이 걸어가신 길은 여전히 민중들이 신음하고

도탄에 바진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목사님, 아니 선배님이 먼저 가셨습니다.

지나간 날들이 이제 한줌의 흙으로

무주구천동 덕유산 그 능선에서

통일을 위해 죽어갔던 분들과 함께

영원히 편안하게 안식을 누리소서.

 

 

 

 

허병섭 목사 약력

1941년 10월 10일 경상남도 김해 출생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를 졸업

1971년 박형규, 권호경, 이해학, 이규상 목사와 제정구 선생 등과 더불어 청계천에서 빈민 선교 시작(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1976년 서울 성북구 하월곡4동 동월교회를 열어 탁아소, 공부방 등을 시작하여 효시를 이루었다.

아울러 빈민, 노동자와 함께하는 민중교회, 빈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

1990년 목사직을 내려놓고 건설일용노동자들과 '월곡동 일꾼두레'를 만들었고

후배빈민운동가들과 생산협동공동체운동을 전개하여 자활, 사회적 기억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6년 나눔과 섬김, 공생의 가치를 실현할 목적으로 무주로 귀농, 생태, 생명을 전개하는 가운데

대안학교 푸른꿈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2005년 녹색대학 온 배움터를 설립하였다.

무주의 땅과 집을 자연 생태 보존을 위해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탁하였다.

2012년 3월 27일 오후 4시 30분 3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향년 72세로 소천하였다.

이동철 저 1981 '꼬방동네 사람들' 현암사 에 주인공 공병수 목사가 허병섭 목사의 실제 모델이다.

이를 영화로 제작했던 배창호 감독은 2005년 시나리오 책으로도 출판하였다.

 

저서

1985 한국민중교육론(공저)

1992 일판. 사랑판

2001 허병섭 이정진의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

2009 스스로 말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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